소설리스트

기갑천마-148화 (148/197)

쿠우우우우우웅!

〔중령님!〕

〔세실 중령님!〕

세실의 기체가 해안가의 모래에 처박히자, 곧바로 유엘과 페고르를 비롯한 특임대의 군인들이 그녀에게 향했다.

조금 전 세로스가 위독하다는 사실이 알려진 참이었기에 그녀마저 잃을 순 없다는 절박함이었다.

〔……쿨럭.〕

그때, 통신기 너머로 스친 마른기침과 함께 콕피트가 열리고 비척거리는 움직임으로 검은 제복을 입은 그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피비린내가 스치는 해안가에 우뚝 선 그녀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특임대원들이 아닌, 그저 멍한 눈으로 전장을 살폈다.

온몸이 뻐근했다.

뇌가 흔들리고, 코피가 흘러 입술을 적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전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죽어 가고 있어.”

모두가 죽어 가고 있었다.

자비의 여왕은 스스로가 천명한 것처럼 그들에게 아주 자비로운, 고통마저 느낄 새도 없이 간결한 죽음을 내려 주고 있었다.

꽈악-!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일, 일단 치료를!”

“제발요!”

핏물이 뚝뚝 떨어지고, 곧 다가온 특임대원들이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데려가려 했으나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건 죄책감이자 원망이었다.

어찌하여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아야 하는 고뇌였고,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남자에 대한 갈망이었다.

‘신이 존재하신다면.’

신 따위 믿지 않는 그녀였지만, 지금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녀는 핏물이 흐르는 입술을 더욱 잘근 깨물며 입을 열었다.

“그가, 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그녀의 읊조림에 화답하기라도 하듯이.

〔또 여왕이라…….〕

미처 끄지 못한, 반파된 세실의 콕피트 안에서 울리는 한 무심한 남자의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를 스쳤다.

두근.

그것을 들은 모두의 심장이 뛰었다.

누군가는 안도가 담긴 미소를.

누군가는 원망이 담긴 읊조림을.

누군가는 갈구가 담긴 눈망울을.

제각기 반응은 달랐으나, 그것이 내포하는 감정은 모두 하나로 이어졌으니.

〔우습기도 하구나.〕

그 직후, 허공에서 번뜩이는 묵빛 섬광을 응시하며 모두는 떠올렸다.

-단테 대령.

그가 망르에 도착했다.

기갑천마

망르 공방전 (7)

〔죽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아아!

악에 받친 파일럿의 외침과 마수의 포효가 혼란한 전장을 가득 메울 듯이 울려 퍼졌다.

피비린내가 콧등을 스쳤다.

물결이 치고, 핏물과 바닷물에 진창이 된 해안가에서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그 모습은 짐짓 잔혹한 동시에 처절한 사투였다.

끼기기긱!

기름칠이 되지 않아 거친 소리를 내는 기체의 구동부가 적을 도륙하기 위해 끊임없이 흔들렸다.

파일럿의 마나를 머금은 거대한 미스릴 소드가 긴 궤적을 그리며 마수의 머리를 단번에 반으로 내리찍었다.

콰드드드득!

피육으로 되어 있는 육신이 터진다.

강철로 된 육중한 팔이 케이블이 끊어지며 대지로 추락하고, 거대한 육신을 가진 존재들은 서로의 삶을 빼앗고 끊기 위해 미친 듯이 격돌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용.

하지만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전투는 군인들에게 여전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마수들에게는 여왕이라는 구심점이 아직 공고하게 서 있는 반면, 인간들의 구심점이 되어 주던 이들은 모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으니까.

〔크으으윽!〕

〔처음부터 이딴 곳에 오는 게 아니었어!〕

절망이란 감정은 너무나도 손쉽게 희망을 잡아먹어 체구를 키워 갔다.

그들은 여전히 치열하게 마수들에게 맞서면서도 어두운 전황 속에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가엾고도 가엾구나.

여왕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그것은 실로 기만된 연민이었고, 곧 그녀는 손을 뻗어 자신의 자비를 그들에게 흩뿌렸으니.

“끄아아아악!”

“사, 살려……!”

이번에 뻗어진 물줄기는 나이트 파일럿들이 아닌, 얕은 해안가나 모래사장 위에서 전투를 이어 나가는 보병들에게로 향했다.

바다 위를 달린 물결은 너무나도 빠르게 그들의 육신을 꿰뚫고자 뻗혀 나갔다.

세이렌이 죽은 후 투입된 보병들은 여왕의 공격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깨닫는 것이다.

죽음이란 이토록 가깝다는 사실을.

특히 이런 혼란스러운 세상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그때였다.

주르륵-.

자신이 손끝에서 뻗어 낸 죽음에 어지럽게 흔들리는 인간들을 응시하던 자비의 여왕은 여전한 무표정으로 투명한 눈물을 떨궜다.

새하얀 살결에 자국이 남는다.

동시에, 그것을 본 이들은 본능적으로 솟구치는 이질감과 불쾌함에 몸을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리 여왕이 연민과 자비를 읊조렸더라도, 손끝에서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면 어찌하여 그것을 진심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동시에 모두는 확신했다.

이 전투는 졌고, 자신들에게 남은 건 그저 여왕이 말하는 ‘자비’라는 이름의 사냥 속에서 죽어 가는 것뿐이라는 걸 말이다.

철컥-.

특임대 소속의 이름 모를 파일럿이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가져다 댔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뺨에 눈물이 흘렀으나, 그녀는 차라리 이 방법이 옳다고 믿으며 서늘한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쳤다.

미친 듯이 두렵다.

하지만 머지않아 편안해지리라.

그녀가 진심으로 그렇게 믿으며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때였다.

〔또 여왕이라…….〕

허공에 울리듯 스친 남자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타고 이 전장에 자리한 모두의 귓가를 스쳤다.

“어?”

당연하게도, 그녀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에 관자놀이에 댄 권총을 내리며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비단 군인들뿐만이 아니다.

당장이라도 군인들을 도륙할 듯이 게걸스러운 이빨을 들이밀던 마수들조차도 허공을 응시하며 몸을 떨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건 두려움이자, 동시에 호승심이었으니.

-아.

이제껏 무심한 눈으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여왕조차 나지막한 탄식을 읊조리며 허공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윽고 그녀는 푸르스름한 눈을 번뜩이며 속삭였다.

-그런가. 그러했는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까지와 다른 확신과 기대, 그리고 묘한 감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곧 허공에서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함 끝자락에서 일련의 사람들이 피비린내가 짙게 풍기는 망르 해안가 위로 추락했다.

“어?”

“위, 위험해……!”

그 모습을 처음부터든, 우연히든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탄식에 가까운 읊조림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허공에서 추락하는 그들의 등에는 흔하디흔한 케이블도 없었기에 다른 이들이 보기엔 그저 검은 군복을 펄럭거리는 일련의 자살 행진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자, 잠깐. 설마?”

“신이시여!”

스치듯 읊조려진 그의 목소리가 왜인지 귀에 익었던 이들의 눈동자가 천천히 커졌고, 곧 이어진 한마디에 그들은 전율할 수밖에 없었으니.

〔우습기도 하구나.〕

중년이라고 하기엔 너무 젊은, 그러나 그 이상의 위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의 주인은 말했다.

우습다고 말이다.

그것은 한없이 오만한 읊조림이었으나, 그의 정체를 깨달은 이들에게는 신이 내려 주는 하나의 은총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그는 현재, 대륙에서 마수들과 목숨을 걸고 싸우는 군인들에겐 하나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는 존재였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짧고 강렬한, 섬광처럼 흩뿌려지는 섬광들이 모두의 시야를 밝게 채웠다.

동시에 허공에서 일련의 기체들이 각기의 마스터키에서 파일럿의 부름을 받아 바다 위로 모습을 드러내니.

콰아아아아아아앙!

파아아아아앙!

4기의 기체가 발을 디딘 충격으로 해안가로 큰 파도가 솟구쳤고, 흰색과 짙은 남색으로 뒤엉킨 바다는 일순간 어지럽게 흔들렸다.

물안개가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 안개 너머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으니, 곧 그의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이 없는 기체, 벤데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아…….〕

기체를 소환한 것에서 오는 만족감인지, 아니면 그저 다가올 전투에 대한 기대인지 모를 나지막한 숨소리가 모두에게 닿는다.

그뿐인가.

〔하, 살 거 같다.〕

마치 달빛을 담은 듯한 은색 장갑.

사지의 끝이 칼날처럼 날카로운, 유려한 선을 그리는 은색 빛의 기체가 날카로운 다리를 번뜩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에선 로한의 기체 레기온과 보리스의 기체 이데아 역시, 별다른 말없이 각각 포대와 망치를 손에 쥐었다.

그때였다.

〔로한 원…… 아니, 이제 중사지? 미안!〕

〔하아…… 제기랄.〕

그새를 못 참고 읊조린 리베라의 목소리에 로한은 순간 프래깅(Fragging)을 할까 고민했으나…….

〔리베라, 집중해라.〕

〔엇, 넵!〕

그때 적절히 끼어든 단테의 말에 리베라가 곧바로 수긍했기에, 로한 역시 짜증을 참으며 담배를 입에 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과 달리 전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정적인 동시에 혼란스러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단테 대령이 왔다.

비단 에이스 네 명의 합류도 불리하던 전황에 분명히 좋은 신호임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그중 한 명이 단테 대령이라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약속이었다.

이 전투는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그가 자신들에게 승리를 가져다줄 거라는 것까지.

그때였다.

달려진 공기를 느낀 것인가.

아니면, 단테나 군인들이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를 본 것인가.

여왕은 이전과 달리 확연히 감정이 드러나는 눈으로 단테의 기체 벤데타를 응시했다.

그러나 단테는 느꼈다.

여왕이 보고 있는 것은 벤데타가 아닌, 그 콕피트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이라는 걸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왕의 창백한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유모의 품에서 광명을 바라볼 때를 기다렸다고 한들, 모든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여왕의 푸르스름한 동공에 그가 맺힌다.

그녀는 생기 따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그가 지나온 궤적을 천천히 훑었다.

-지배할 수 없던 자매여.

인간들을 지배하고자 했던 자매는 무너진 왕국과 함께 스러졌다.

-기만할 수 없던 자매여.

인간들을 기만하고자 했던 자매 역시 스스로의 삶을 속이며 무너져 내렸다.

그것은 운명일까.

아니면, 그저 우연일까.

-내게는 어떤 자비를 내려 주겠느냐.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읊조렸다.

물결치는 파도 속에서, 홀로 고고하게 서 있는 여왕은 묵빛 액체로 격리된 공간 너머 자신을 바라보는 단테를 응시했다.

둘의 시선이 맞닿는다.

동시에, 여왕은 이제까지 보인 적이 없는 행동을 취하기 시작했으니.

사락-.

놈의 손끝이 자신의 드레스 끝자락을 쥐었고, 이내 푸른 긴 생머리를 한쪽으로 정리하곤 천천히 고개를 숙이니.

-만나서 반갑다.

그것은 흡사, 귀족가의 영애가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과 같았다.

-나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니.

괴물은 인간을 흉내 내고 있었다.

-자비로서 들풀의 목을 꺾는 자.

너무도 우스운 일이었으나 그 누구도 감히 웃을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너무도 진중한 그녀의 모습과 별개로, 단테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모습은 괴물이 아닌 것처럼 보였으니까 말이다.

-자비의 여왕이니라.

그녀의 목소리가 콕피트를 넘어 단테의 귓가를 스쳤다.

꽈악.

무심결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그의 기분을 읽은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그에게 속삭였으니.

‘찢고, 뜯고, 죽이자.’

그건 짐짓 섬뜩한 읊조림이었으나 단테에겐 너무나도 당연한 미래를 나열한 것에 불과했다.

때문에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가당찮구나. 버러지 주제에.〕

단전 속에서 고요한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던 그의 내력이 일순간 꿈틀거리며 흔들렸다.

울컥하며 내뱉어진 내력은 혈도를 따라 종횡하다가 이윽고 묵빛 액체로 스며들었다.

기대했던 짙은 내력이다.

두근-.

그것을 게걸스럽게 삼킨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고, 머지않아 단테는 서서히 몸을 꿈틀거리는 벤데타에게 속삭이니.

〔일단, 입부터 찢어 버리자꾸나.〕

그의 속삭임에 벤데타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정적만이 가득찬 전장에서 단테의 벤데타는 앞으로 쇄도했다.

파아앙!

공간이 찢어지면 이러할까.

허공으로 튄 물결은 압도적인 내력의 향연에 순식간에 녹아 수증기로 변했으며, 그 잔상이 길게 늘어져 거대한 기체의 등 뒤를 좇았다.

스릉-!

벤데타의 손아귀에 쥐어진 흑색의 검이 번뜩이며 길게 원을 그린다.

그리고 곧 그어진 일격의 끝자락에 한마디가 덧붙여지니.

백월신공(白月神功).

묵월참(墨月斬).

이윽고 늘어져 있던 검이 궤적을 따라 길게 반월을 퍼트렸다.

미약한 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길 듯 뻗어진 공격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폭력이었기에 그 누구도 여왕이 저 공격을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자비롭지 못하도다.

여왕은 그렇게 읊조리며 손을 펼쳤다.

작은, 그러나 그 손끝에서 일렁거리는 거대한 기류는 마치 실처럼 물결을 조종했다.

먼 신화의 시대.

존재했다는 바다의 신이 현세에 강림한다면 이러한 기분일까.

그녀의 손끝에서 흔들리는 파도는 흰 안개와 함께 솟구치며 쇄도하는 칼날을 막았다.

물이 베이지 않는다는 건 상식이다.

하지만 때때로, 혼란의 시기에 상식은 몇 번이고 부정당하고는 한다.

콰드드드드드득!

물결이 베였다.

아니, 단순히 베인 것이 아닌 그야말로 산산이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리고 동시에.

갈라진 공간 너머로 서로를 응시한 단테와 여왕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

부서진 파도는 단테의 검격을 흩트렸고, 서로의 공격이 사라진 찰나의 순간.

파앗!

콰아아앙!

여왕과 단테.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격돌했다.

기갑천마

망르 공방전 (8)

-끼에에에에!

크라켄의 날카로운 포효와 함께 수면 아래 흙을 꿰뚫으며 뻗힌 촉수가 리베라의 기체 모스트리를 단번에 찢어 버릴 듯한 위압감을 풍기며 쇄도했다.

그러나 그녀를 아는 이들은 생각했다.

절대로 저 검디검은 촉수가 모스트리에게 닿을 리는 없으리라고 말이다.

〔끼야아앗!〕

아니나 다를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도깨비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규격 외의 귀신과도 같은 움직임을 가진 은색의 기체는 특유의 유려한 선을 그리며 너무나도 손쉽게 촉수를 피했다.

일반적인 양산형 기체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을 그려 내며.

동시에 모스트리의 날카로운 다리가 크라켄의 검은 살결을 디딘 후 솟구친 그녀는 허공에서 빠르게 추락하며 일갈했다.

〔보리스!〕

〔흐읍!〕

그녀의 외침에 보리스는 특유의 거대한 망치를 들어 크라켄의 사각지대로 빠르게 내달렸다.

쿠우웅!

육중한 기체의 발이 거센 물결을 헤치며 수면 아래를 디뎠고, 머지않아 그의 기체 이데아의 손에 쥐어진 육중한 망치가 공간을 찢을 듯한 압도적인 파괴력과 함께 그대로 내리찍혔다.

콰아아아앙!

-키, 키이이이이!

바닷물과 함께 놈의 다리를 강타한 충격에 크라켄은 몸을 부르르 떨며 보리스로 목표를 바꿨다.

그러나 그때.

씨익 올라간 입꼬리를 혀로 훑은 리베라는, 추락하는 시야 속 한눈을 판 우둔한 문어를 응시하며 속삭이듯 말했으니.

〔빈틈 발견, 멍청한 놈.〕

그녀의 붉은 혀가 입술을 훑었다.

동시에, 모스트리의 손과 발에 달린 서늘한 은색 칼날이 번뜩거린다.

시그니처(Signature).

도깨비검무(鬼劍舞).

이윽고, 여타 다른 시그니처들과는 궤가 다른 검격이 서서히 놈의 육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스스스스-!

핏물이 튀었다.

살점이 잘리고, 놈은 다가오는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러나 어떤 소음조차 없다.

마치 유령과도 같은 움직임 속에서 놈은 혼란스러울 따름인 것이다.

부르르.

크라켄은 몸을 떨었다.

놈은 조금 전까지 자신의 검은 촉수에 죽어 나갔던 미천한 놈들에게 이토록 몰리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그저 분노와 고통으로 찬 외침을 터트릴 뿐이었다.

물론 그 대가는.

〔시끄러워!〕

콰아아아앙!

보리스의 거대한 망치였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시각.

〔그나저나 중사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묻지 마십쇼. 다치니까.〕

조금 전과 달리 한결 밝아진 클리에가 묻자 로한은 한숨과 자조가 뒤섞인 읊조림을 내뱉으며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콕피트 바닥으로 던졌다.

투둑.

이빨 자국이 남은 필터가 바닥을 구른다.

그는 퉤, 하고 마른 입술에서 침을 내뱉고, 숨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다.

중사가 된 것에 딱히 불만이 있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목숨을 부지하게 해 준 제1 원로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 옳으리라.

다만…….

‘설명해야 하는 게 불편할 뿐이지.’

원사에서 중사로 강등된 것이 어디 쉽게 볼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둘이 사소한 잡담을 늘어놓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보리스가 건넨 고급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곤 잠들어 있던 마나 하트를 일깨웠다.

마나 하트가 꿈틀거렸다.

동시에 그와 함께 선 클리에의 기체, 갱플랭크의 주포가 여왕의 등장과 함께 배는 많아진 마수들의 겨냥하며 말하니.

〔시그니처는 좀 힘들어. 알지?〕

클리에는 쓴웃음을 지은 채 특유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에 흐른 핏물을 손등으로 대충 슥 닦아 내며 말한다.

이미 두 번의 시그니처를 사용한 그녀다.

그 때문에 이번에도 또 다시 시그니처를 사용하게 된다면 다음에 실려 가는 건 그녀가 될 판이었다.

치익, 습-.

〔압니다.〕

로한은 담배의 끝자락에 불을 붙이곤 그렇게 화답했다.

물론 로한은 조금 전에 망르 해안가에 다다랐기에 전황을 모두 파악하진 못했으나, 그래도 숱한 전투 경험으로 대충 흐름은 눈치챌 수 있던 것이다.

타닥.

흰 담배의 끝자락이 붉게 물든다.

그리 넓지 않은 콕피트 안에 회색빛 연기가 자욱하게 들어차고, 로한은 폐부를 가득 채우는 묵직한 담배 내음에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굳이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짐짓 오만한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클리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의 말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어차피 이 전장에서 군인들과 마수들은 이제 배경밖에 되지 않는다.

개개인이 생을 걸고 싸운다고 한들, 그것이 전장에 유의미한 영향을 줄 수는 없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전투의 승패는 저 남자의 손에 달려 있으니까.’

그들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클리에의 금색 동공과 로한의 붉은 동공에 여왕과 단테의 격돌이 한눈에 담겼다.

콰아아아아앙!

콰과과과광!

일격에 바닷물이 수십m씩 치솟고, 그로 인한 파장에 근처에 있던 마수들과 군인들이 어지럽게 휩쓸렸다.

그야말로 인외(人外)의 격돌.

둘은 공격은 일격이 서로의 목숨을 끊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고, 그 자체로 그들은 서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전투를 구경하는 것도 잠시.

질겅.

로한은 벌써 반쯤 태운 담배의 필터를 이빨로 잘근 씹고는 어느새 지척까지 내달려 온, 비린내를 풍기는 아가리를 감히 벌리는 마수를 향해 라이플을 들었다.

동시에 곁에 서 있던 클리에 역시 일반적인 기체보다 단단한 하체를 수면 아래 모래에 깊숙하게 박아 넣고는 거의 동시에 마나를 끌어 올리니.

투다다다다다다!

콰아아아앙!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나로 이루어진 총탄과 포탄을 사방으로 쏟아 냈다.

-크, 크그그그그!

-끼이이! 께에에에에!

총구 끝에서 발사된 섬광이 아직도 물기가 번들거리는 마수의 육신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다.

“2포반, 전진 배치!”

“으아아아!”

모래사장에서 해안가 지척까지 전선을 밀어낸 그들은 곧바로 움직일 수 있는 포대를 전진 배치하여 화력을 쏟아부었고, 어느새 합류한 보병들이 궤도차나 보트에 올라 바다 위에서도 마수들을 향해 미친 듯이 총탄을 쏟아붓고 있었다.

‘이대로만 가면, 이긴다.’

단테의 등장으로 밀리고 있던 전황의 승기는 충분히 잡아 왔다.

다만 로한은 곧 아쉬움에 입술을 훑을 수밖에 없었으니.

‘그들이 왔다면, 조금 더 수월했을 텐데.’

그가 말하는 그들이 달리 있겠는가.

바로 제1 원로이자, 아미키라는 이름을 쓰는 사마제천과 그의 부관으로 보이는 리렌 원사를 지칭하는 말이었다.

그는 알았다.

둘이 적어도 자신을 비롯한 일반적인 에이스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그들이 이 전선에 합류하면 여왕은 어쩌면 벌써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리라.

그러나 함께 가자는 말에 아미키 사마제천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제가 할 일이 있어서요. 급한 일입니다. 부디 양해를.

로한은 슬슬 손에 쥔 152mm 라이플의 총구가 녹아내리려는 것을 느끼며 바닥으로 던지고는, 곧 어깨에 이고 있던 거대한 주포를 들어 놈들에게 쏟아부었다.

콰아아아아앙!

쿠구구구궁!

열기에 수증기로 변한 안개가 시야를 어지럽게 가리고, 그 광경 속에서도 로한은 태연하게 놈들을 도륙했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생각의 흐름이 후방에 있을 한 천막을 떠올리도록 만들었다.

‘……괜찮겠지?’

이번에 떠올린 이는 사마제천이나 리렌이 아닌 세로스였다.

비록 사이가 그렇게 좋다고 하진 못할 관계이긴 했으나 나름 가깝게 지냈던 이가 위독하다고 하니 마음이 편할 리는 없던 것이다.

때문에 그가 무심결 그쪽으로 생각이 기울던 그때였다.

〔로한!〕

콰아아아아아앙!

갑작스럽게 통신기 너머로 찢어지는 듯한 고함이 울렸고, 그는 콕피트 너머 바로 앞에서 터지는 포격에 마수의 핏물이 터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그리곤 때마침 클리에가 외치니.

〔미쳤어? 집중해!〕

퉤.

로한은 곧바로 입에 문 담배를 바닥에 대충 뱉어 내곤 콕피트 안, 조종석에 더욱 몸을 묻으며 화답했다.

〔……그래야겠습니다. 뒈지기 싫으면.〕

순간, 그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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