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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천마-143화 (143/197)

로한은 단테의 방을 나서자 미리 대기 중이던 법국의 군인들에게 다시금 포박되어 감옥으로 향했다.

구두로는 사면받았다고 한들, 행정적인 절차는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쯧.”

“……크흠.”

물론 그를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을 결코 곱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것을 알기에 로한은 별다른 말 없이 그들의 인솔을 따라 감옥 안에 다시금 들어가 차가운 돌바닥에 몸을 뉘었다.

아니, 정확히는 뉘려 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그가 감옥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경쾌한, 그리고 장난기가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에휴.”

때문에 누가 왔는지를 직감한 로한은 무심결에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으니.

……누구겠는가.

그는 벌써 지끈거리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철창 밖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은발의 여자와 그 곁에 선 갈색 머리의 남자를 보며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리베라, 그리고 보리스.”

체념하듯 내뱉어진 로한의 말에 리베라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고, 이윽고 그의 말에 화답하니.

“너, 중사로 강등됐다며?”

“……어?”

그건 일정 부분 체념한 로한의 입장에서도 꽤나 신선한 공포였다.

기갑천마

잔잔한 물결의 뒤에는

“너, 중사로 강등됐다며?”

“……어?”

리베라의 말에 그답지 않게 어벙한 답을 내뱉은 로한의 붉은 눈동자가 순간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는 대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섬뜩할 정도로 배시시 올라가는 그녀의 입꼬리였다.

그때였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보리스는 그런 로한의 미래가 훤히 보이기라도 하는 듯 안쓰럽게 응시하며 품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스윽.

그러자 곧 뜯지도 않은, 그것도 보급품으로 나오는 하급이 아닌, 꽤 고급 담배를 꺼내 철창 너머로 손을 뻗어 그에게 건네니.

로한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면서도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뭡니까?”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어떻게 리베라가 벌써 계급 강등 소식을 전해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와 함께 행동했다면…….

아니, 애초에 단테와 함께 전장에 난입한 보리스라면 현재 로한이 어떤 죄를 짓고 이곳에 갇혔는지 정도는 알고 있을 터가 아닌가.

로한은 자기객관화를 잘하는 편이었다.

어떤 핑계를 가져다 붙인다고 하여도 결국 자신은 블랙 가드와 그들을 배신한 놈이라는 걸 알 정도로 말이다.

때문에, 당연하게도 보리스가 대뜸 보이는 호의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런 로한의 가시 돋친 반응에도 보리스는 그저 이해한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하니.

“저도 낚였습니다. 원로라는 놈들이 그렇죠, 뭐. 하하핫.”

그건 일종의 동질감이었다.

보리스 역시 사마제천의 시험이란 이름의 함정을 겪었고, 그로 인해 왜인지 묘한 기분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자세한 사정까지 전해 듣진 못했지만 로한이 원로에게 포섭된 경위를 추측하건대 자신과 비슷하리란 걸 얼추 눈치챈 후였다.

조금만 더 솔직해지자면, 막말로 조금만 틀어졌어도 저 감옥 안에 갇혀 있는 건 자신이 될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뭐…….”

그런 보리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전해진 것일까.

로한은 ‘그런 거라면…….’ 따위의 표정을 지으며 순순히 그가 건넨 담배를 품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 훈훈한 광경을 잠자코 지켜보고 있을 리베라가 아니었으니.

“이야, 원사에서 중사까지 강등된 건 제국군 역사에서도 없을 텐데……. 로한 출세했네? 괜찮아. 아마 기밀 유지 기간이 끝나면 역사에 남을걸.”

“에휴…… 씨발.”

이죽거림이나 비웃음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하게 놀리는 말투로 내뱉어진 그녀의 말에 로한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금 전 보리스가 선물해 준 담배를 뜯어 입에 물었다.

하지만 감옥 안에서의 흡연을 법국의 군인들이 좌시할 리가 만무했으나.

“아, 형제님들. 괜찮습니다.”

보리스는 특유의 너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물렸다.

평상시였다면 아무리 특임대 소속의 중령이라도 다소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그들은 불쾌해하기는커녕 너무나도 순순하게 뒤로 물러섰다.

당연한 일이다.

적어도 현재 법국에서 그들의 입지는 상상하는 것 이상이었으니까.

물론 그 사이에도 리베라의 입은 쉬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건 좀 새롭다. 그지? 그러면 조직 내의 직급도 같이 강등되는 건가?”

하나같이 약을 올리는 말이다.

하지만 그녀를 오래 본 로한은 지금 그녀가 의도적으로 배신에 관한 속 내용을 읊조리지 않고 있음을 알았기에 더 화를 내지 않고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울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빡치는 건 빡치는 거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때.

“그러게 누가…….”

리베라의 은색 눈동자가 번뜩이고 붉은 입술이 다시금 열리려던 순간이었다.

“리베라.”

그녀의 음성과 닮은, 그러나 밝고 경쾌한 것과 달리 낮고 진중한 목소리가 감옥 안에 울린다.

“아?”

동시에 리베라의 눈에 찰나의 공포가 스쳤다.

로한은 그녀의 어깨너머로 걸어오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흥미로운 눈을 번뜩였다.

“호오.”

자세한 사정은 알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감옥의 문을 열고 걸어 들어온.

검은 군복에 은색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저 여자와 리베라가 상극임을 말이다.

그러고 보니…….

‘언니라고 했나.’

로한은 순간 보리스와 눈을 마주하고 어깨를 한번 으쓱거렸다.

곧 보리스는 살짝 몸을 틀어 로한의 시야를 한층 더 넓게 만들어 주었다.

터벅터벅.

검은 군화가 차가운 돌바닥을 디딘다.

가슴팍에는 온갖 약장들이 달려 있고, 마치 사열이라도 나온 듯 정갈하게 갖춰 입은 군복은 그녀의 성격을 짐작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그녀의 이름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에 나타난 블랙 가드의 제1 원로의 부관이 아닌가.

로한은 무심결 그녀의 이름을 읊조렸다.

“리렌 원사.”

동시에, 그녀를 발견한 리베라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나지막이 중얼거리니.

“아…… 이럴까 봐 내려온 건데.”

그녀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언니인 리렌을 피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다.

당연하게도 로한에겐 괘씸함을 더하는 부분이었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둘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렌은 감옥에 갇혀 있는 로한이나 곁에 서 있는 보리스는 바라보지도 않은 채 특유의 덤덤하고 언뜻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도 날 피하니?”

“어, 그게…….”

하지만 이어지는 광경은 두 남자에게 무시받았다는 감정과 상관없이 매우 흥미진진한 전개였다.

무뚝뚝하게 동생을 바라보는 언니 리렌.

그리고 그런 언니가 한없이 불편하다는 듯이 그녀답지 않게 눈동자를 굴리는 리베라.

둘의 모습은 흡사 포식자와 피식자를 연상토록 만들었고, 전혀 겪어 보지 못한 리베라의 약한 모습은 둘에게 새로운 볼거리였다.

동시에 작은 호기심이 차오른다.

대체 두 자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리베라가 질색하며 리렌을 피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예, 뭔가 있는 듯합니다.’

로한과 보리스는 시선을 맞췄다.

비록 입으로 내뱉진 못했으나, 마주한 둘의 표정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선의 교환이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이기에, 무엇이 저 지랄 맞은 리베라의 입을 닥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후, 제발 철 좀 들어, 리베라.”

“그, 그렇지만…….”

이윽고 두 남자의 궁금증은 옅은 한숨을 내뱉은 리렌의 읊조림에 더욱 증폭되었고, 곧 둘의 시선은 리베라의 얼굴에 꽂혔다.

비록 말로 내뱉진 않았지만 두 남자 모두 그녀가 즉답하기를 바라마지 않는 얼굴이었고, 그녀는 그것에 호응하듯 입을 열었으니.

“언니랑 있으면 또 가문이니 뭐니 해서 고리타분한 얘기만 할 거잖아…….”

그건 둘이 기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허탈한 대답이었다.

“에휴, 저년이 그렇지, 뭐.”

“동감입니다.”

로한은 그 말을 듣자마자 읊조림을 내뱉으며 곧바로 다음 담배를 물었고, 보리스 역시 이번만큼은 로한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둘은 보지 못했다.

“……그래.”

순간이지만, 리렌의 눈에 스친 연민과 리베라의 눈에 맺힌 정적을 말이다.

그렇게 잠깐이지만 그들을 감쌌던 묘한 분위기가 서서히 풀려 갈 무렵이었다.

“그러지 말고……. 응?”

무어라 말을 하려던 리렌은 곧 품 안에서 우웅, 하고 울린 통신기의 진동에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진동의 진원지는 그녀의 품속에 있던 통신기였고, 그녀는 곧바로 그것을 꺼내 받아 들었다.

“리렌 원사다. 무슨 일…… 뭐?”

그리고 그녀가 그것을 받아 든 순간.

여태까지 큰 변화가 없던 그녀의 얼굴이 차갑게 식었고, 동시에 그녀는 당혹감을 애써 삼키듯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다가 겨우 답했다.

“그래. 알겠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리베라와 보리스, 로한은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으니, 그들의 뇌리에 공통된 한 가지 사실이 스치는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설마.’

현시점에서 대규모 파병이 된 지역은 오직 한 곳뿐이지 않은가.

‘망르 해안.’

그들은 리렌과 시선을 마주했고, 곧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를 박차고 감옥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놓친 사실이 있었으니.

“하, 빌어먹을…….”

로한이 아직 자유의 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털썩.

때문에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곧 감옥의 벽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주저앉고는 중얼거리니.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그건 꽤 오랜만에 내뱉는 담백한 진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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