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42화 (142/197)

솨아아아.

“……끄응!”

“쿨럭.”

회색빛으로 점철된 하늘은 때아닌 비를 내렸고, 빈민가의 사람들은 더러운 천과 바람도 막아 주지 못하는 삭은 판자를 이불 삼아 눈을 감았다.

그 빈민가를 한 소년이 걷고 있었다.

다만 특이한 점이라면, 유난히도 붉은 머리를 가졌다는 것과 한 손에는 조악한 단검을 들고 사방을 경계하고 있다는 점일까.

“…….”

당연한 일이다.

빈민가에서 소년이라고 한들 보호를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그것을 반증하듯, 때때로 몸을 뉘인 노숙자들과 아낙들, 청년들은 혹 소년에게 무언가 뜯어낼 것이 없을지 흉흉한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약자와 약자가 서로를 짓밟는 곳.

그게 바로 빈민가라는 이름의 지옥이었다.

소년은 무탈하게 골목을 지났다.

그리고 마침내 집이라는 목적지에 다다른 소년은 무언가를 결심하듯이 작게 심호흡을 하고 문 안으로 들어갔다.

끼이익.

문의 형태로 만든 판자가 듣기 싫은 경첩 소리를 내며 억지로 열리자, 동시에 작은 창고와도 같은 집 안과 바깥의 공기가 뒤섞이며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의 술 내음이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수, 숨 쉬어, 이년아!”

“…….”

눈물을 흘린 듯이 화장이 번진 얼굴로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듯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머니와 그런 순간조차 어머니의 목을 틀어쥐고 거칠게 흔드는 아버지란 쓰레기의 모습이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소년의 귀를 스쳤다.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언젠가 많은 남자를 품고 집에 돌아와 아버지란 짐승마저 품은 후 울면서 술을 마시던 어머니가 했던 말이었다.

어머니는 예뻤다.

그렇지만 소년은 느꼈다.

어머니는 점점 마모되고, 부식되며, 썩어 가고 있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내면부터 곪아 가는 어머니가 부서지는 날이었던 모양이다.

소년…….

아니 로한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닌.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며, 아버지를 피해 구석의 작은 상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

투욱-!

“……하, 이런 빌어먹을.”

그의 아버지란 이름의 짐승은 어머니를 그대로 바닥에 던지듯이 내려놓고는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이윽고 성가신 일이 생겼다는 듯이 그녀의 시체를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끼이익- 쾅!

놈은 소년과 소녀에게 도망치면 어떻게 된다는 경고조차 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감이었을 것이다.

이미 두려움이 학습된 이상, 자신을 거스를 수 없으리라는 자신감 말이다.

“아, 아으. 오, 오바아아…….”

판잣집 안에는 조명이라 부를 게 없었다.

단지 갈라진 천장의 틈에서 내리비추는 조악한 달빛이 전부였다.

그 달빛을 더듬어 자신을 찾아온 여동생을 끌어안으며 로한은 다짐했다.

어머니를 지키지 못했으나, 여동생은 반드시 지키고 말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치이익-.

로한은 또다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결국, 못 지켰습니다.”

“어째서지?”

단테의 물음에 로한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곧 담백한 한마디를 꺼냈다.

“그 새끼가 돈이 떨어지니까, 어머니를 닮아 반반한 여동생을 창녀촌에 팔았거든요.”

툭, 투둑.

단테의 손가락이 소파의 끝자락을 두드린다.

동시에 잠시 침묵하던 그는 이윽고 입을 열었으니.

“죽였나?”

“죽였죠.”

단테의 물음과 로한의 대답엔 주어가 없었으나,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대상이 누구인지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뭐, 그 뒤로는 판에 박힌 이야기입니다.”

로한은 목이 타는 듯 탁자에 놓인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늘 가지고 다니던 단검을 오물에 담갔다가 술에 취해 자고 있는 아버지의 목을 찔렀습니다. 듣기론 온갖 병균에 감염되어서 죽었다고 들었는데, 꽤 통쾌했죠.”

아비를 죽인 소년은 곧바로 그곳을 떠났다.

빈민가에 법이 엄중히 적용되어서가 아니다.

다만 아비라는 쓰레기가 여동생을 판 상인이 다른 지역으로 움직였다는 말을 들어서였다.

“2년쯤 제국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못 찾았고,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살다가 군대로 강제로 끌려갔죠.”

기억하기로는 그 당시 대규모 작전의 실패로 군인의 수가 압도적으로 줄었던 때로 기억한다.

오죽하면 뒷골목에서 기생하는 쓰레기들을 잡아다가 군인으로 세우겠는가.

자조적인 말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시궁창의 쥐였음을 인정했다.

“뭐, 그렇게 군인이 되고 나이트 프레임 적성을 인정받아 부사관이 되었죠. 전투는 거지 같아도 금전적으로 좀 안정이 되니까 그때부터 여동생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때 블랙 가드가 제게 접촉했고요.”

그들은 여동생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찾는 걸 도와주겠다는 정도의 제스처는 취했다.

당연히 로한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씁쓸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결국 못 찾았죠. 그때 이슈페인이 제게 접근하더군요.”

지박식귀(地縛食鬼)를 죽이고 있을 당시였을 거다.

-당신의 여동생이 있는 곳을 압니다.

갑작스럽게 콕피트 안으로 난입한 놈은 로한에게 실로 은밀한 제안을 건넸고, 그는 그걸 미처 거절하지 못했다.

그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시선은 천장에 달린 조명으로 향하고, 미처 내뱉지 않은 흡연의 잔향이 입가에서 흘러 천장으로 올라갔다.

“압니다. 죽었겠죠. 그런데 미련을 어떻게 버리겠습니까? 큭큭!”

지켜 주고자 했으나 지켜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평생 그를 옭아매는 구속구였다.

그러나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알았다.

그런 시대에 팔려 갔다면, 지금쯤 살아 있다고 해도 그건 이미 여동생이 아니라 그저 여동생의 육신을 뒤집어쓴 망가진 인형일 것이라는 걸 말이다.

“자, 비루한 변명은 끝입니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로한은 그렇게 외치며, 때마침 마지막 남은 담배를 입에 꼬나물며 불을 붙였다.

필터를 이빨로 짓누른다.

동시에 좁은 끝으로 밀려오는 연기를 단번에 삼키며 로한은 자신을 바라보는 단테를 향해 실로 덤덤하게 읊조렸다.

“마음대로 하십쇼.”

그리고 그 순간.

씨익-.

단테의 입꼬리 역시 호선을 그렸다.

기갑천마

이 세계의 진실 (1)

단테와 로한.

두 남자를 둘러싼 정적은 꽤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

로한은 사실상 죽음을 기다리는 듯이 초연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태웠고, 단테는 그런 그를 응시하며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침내, 단테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로한은 그저 순응한다는 태도로 눈을 감았다.

혹자는 과민한 반응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블랙 가드란 본디 그런 조직이 아닌가.

아무리 거창한 말과 대의로 포장한다고 한들 기저에 깔린 것은 죽음이라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블랙 가드의 조직원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과연 그들의 죽음이 전부 블랙 가드의 적대 세력들 때문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로한은 이윽고 피식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한심할 정도로 순진한 생각이다.

본디 조직이라는 것이 그렇다.

조직이 생기고, 그것이 굴러가면서 크고 작은 내부 정리는 동반되기 마련인 것이지 않은가.

이유가 적법하든, 부당하든지를 떠나서.

그리고 로한은 그 대상에서 자신이 제외되리라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혹자는 물을 것이다.

어째서 삶을, 생을 갈구하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왜일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얄궂은 삶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머니의 사랑은 제대로 받아 보지도 못한 채, 시궁창 같은 곳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아버지라는 이름의 짐승을 스스로 죽였으며, 한평생 즐겨도 모자란 인생을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여동생 하나 찾겠다고 거의 10년을 군대에서 썩었으니까 말이다.

뭐, 사실 군대 입대 자체는 강제였지만.

로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생각했다.

“자연사가 아니라도,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은데.”

적어도 마수들에게 갈가리 찢기거나 한 끼 식사 거리가 되는 건 피한 거니까 말이다.

그는 생각을 멈추고, 어느새 자신의 바로 앞까지 다다른 단테를 올려보며 말했다.

“안 아프게 부탁드립니다. 그래도 정이 있는데.”

입가에 걸린 씁쓸한 미소를 보았다.

그럼에도 단테는 그저 고개를 끄덕인 채로 그의 목을 틀어쥐었으니, 로한 역시 반쯤 탄 담배의 끝자락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 순간.

끼이익-.

방문이 열리는 경첩 음과 함께, 이젠 둘에게도 꽤 익숙해진 아미키, 사마제천의 목소리가 스쳤다.

“어라?”

막 방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눈앞에 펼쳐진, 로한의 목을 틀어쥔 단테의 모습에 다소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들어오는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네요?”

그렇게 말한 그는 말과는 다르게 전혀 거리낌 없이 방 안으로 들어왔고, 곧 목을 틀어쥔 채로 가만히 서 있는 단테에게 말했다.

“그…… 죽이는 건 조금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당연히 단테는 미간을 좁혔으나 사마제천은 일단 들어 보라는 듯이 말을 이었다.

“그거 아십니까? 전용기 하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인력과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거 말입니다.”

사실이 그러했다.

구태여 기준을 깔자면, 어지간한 소도시 하나의 반년 치 세금이랄까.

“그런데 말입니다. 파일럿이 죽으면 동기화 때문에 재활용도 못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폐기해야 한다고요.”

즉, 그가 말하려는 건 하나.

“솔직히 비용 손실이 엄청납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였다.

그의 말에 단테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으면서도 화답했으니.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그건 말을 돌리지 말라는 경고였다.

당연히 사마제천은 그의 뜻을 알아들었는지, 곧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뭐, 그런 거 있지 않습니까. 죄를 지은 군인을 몇 계급 강등시켜서 최전방으로 보내는 그런 좌천 말입니다. 비슷한 느낌으로 처리하시고 목숨은 좀 살려 주시죠.”

그렇게 말한 사마제천은 이윽고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거기에 원인이 여동생이라지 않습니까? 가족은 인정해 주셔야죠.”

“허.”

단테는 실소를 참지 않았다.

놈은 분명 우연히 중간에 들어왔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지극히 의도된 등장이었을 것이다.

“마음대로 해라.”

단테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사마제천은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꽤 정이 들었던 듯싶다고 말이다.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테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로한의 등 뒤로 향했고, 자연스럽게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뭐 하십니까. 살려 줄 때 나가십쇼. 참고로 계급은 다시 중사입니다. 뭐, 불만은 없죠?”

“예, 뭐…….”

로한은 떨떠름한 얼굴로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막상 문 앞에 선 그는 다시금 소파에 앉은 단테의 눈치를 살폈고, 이내 작게 묵례한 그는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로한이 떠난 후.

“끙차.”

로한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대로 걸터앉은 사마제천은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이윽고 곧 그의 손에 딸려 나온 것은 꽤 익숙한 푸른빛을 띠는 마나초, 푸른 숨결이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연초 케이스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는 푸른 숨결 하나를 입에 물었다.

그러곤 불을 붙이기 위해 라이터를 켜며 묵묵히 소파에 앉아 있는 단테를 바라보며 말했으니.

“태워 보시겠습니까? 맛이 썩 좋습니다.”

그런 그의 제안에 단테는 개소리는 거기까지 하고 본론이나 꺼내라는 듯 턱을 까닥거렸다.

……스읍, 후.

그러자 사마제천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푸른 숨결을 한번 깊게 들이마셨고, 옅은 마나의 잔향들은 아지랑이처럼 흩어지며 흔적을 남긴다.

찰나의 침묵이 그들을 스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마제천은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이슈페인…… 아니, 천시율이 웬만큼 말을 했을 테니까 어느 정도는 눈치를 채셨다고 보는 게 맞겠죠.”

마치 시가와도 같은 푸른 숨결의 끝자락이 밝게 깜박거리다가 이윽고 멎는다.

그리고 그는 어디부터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지에 대해 고민을 하는 듯하다가 이윽고 서두를 열었다.

“멸망한 건 저희의 세상뿐만이 아닙니다.”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세상으로 넘어온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지요.”

하지만 이어질 사마제천의 말은 이 세상과 대군주를 둘러싼 지독한 악연의 끈이 생각보다 더 길고 튼튼하다는 걸 확신시켜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확인된 수는 최소 10개, 저희가 추측하는 수치는 대략적으로 20개.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이미 10개의 세상이 대군주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사마제천은 묵묵히 이야기를 듣는 단테의 모습을 바라보며 푸른 숨결을 태웠다.

“어떤 세상은 과학이라는 것을 사용합니다. 그들은 철저히 계산된 공식과 알고리즘으로 마법과도 비견될 정도의 결과를 도출하죠.”

그들은 대군주를 재앙급 재해라고 명명했고, 총 13년을 버텼다.

“어떤 세상은 주술과 정령을 다뤘습니다. 그들은 마나와 기와는 다른, 보다 원시적이고 거친 힘을 다뤘죠.”

그들은 대군주를 악신(惡神)이라 명명했고, 채 3년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천사, 악마, 기계, 인간, 반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존재가 나열된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0년까지.”

그리고 사마제천은 묵묵히 자신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단테에게 잔인하고도 씁쓸한 진실을 전했다.

“모두가 버틴 시간은 다르지만, 결국 결말은 똑같습니다. 대군주에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과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세상을 잃었지요.”

“그러면 블랙 가드는…….”

“예.”

단테의 읊조림에 사마제천은 부정 따위 하지 않고 그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이 땅에서 눈을 뜬 자들. 망자이되 망자가 아니고자 하는 이들이 복수를 위해 만든 조직입니다.”

그것이 진실이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그는 조금은 미간을 좁힌 채 실소를 흘리는 단테를 바라보며 어느새 거의 다 태운 푸른 숨결을 재떨이에 비비곤 덧붙였다.

“뭐, 예상하셨듯이 당주는 그분입니다.”

“남궁연희.”

“얄궂은 일이죠.”

그의 말에 단테는 무심결 손을 뻗어 푸른 숨결을 입에 물었고, 그런 단테의 행동에 사마제천은 이해한다는 듯 묵묵히 불을 붙였다.

스읍, 후-.

단테의 입가에서 흐른 마나의 잔향이 코를 간지럽히고, 그는 난생처음 느끼는 기이한 감각에 실소를 흘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나름 강자들이 모여 있다고 자부한 무림도 채 5년을 넘기지 못했는데, 이 세상이 어떻게 50년이나 버틸 수 있었는지 말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사마제천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저희가 가능하게 만들었거든요.”

마도 공학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블랙 가드에 모인 전혀 다른 세상의 기술을 하나로 모았고, 그것의 일부를 대륙에 ‘마도 공학’이라는 이름으로 풀어 주었을 뿐이다.

“대표적으로 보면 식량난이나 물자 보급난이 없는 것을 떠올릴 수 있겠군요. 간단합니다. 저희가 공급하고 있습니다.”

주술과 비료를 이용하여 지력(地力)을 끌어 올리고, 정령과 각종 과학적인 지식으로 풍작을 이루어 낸다.

그리고 연작을 하여 그것을 반복한다.

물론 더 복잡한 과정과 방법이 있긴 했지만 구태여 설명을 하면 그런 것이다.

“그러면.”

그때였다.

여태까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단테는 이윽고 입에서 푸른 숨결을 떼어내고 사마제천을 응시했고, 곧 말씀하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에게 물으니.

“이슈페인이 내게 했던 말은 뭐지?”

그의 말을 들은 사마제천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고, 곧 단테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말하니.

“그게 말입니다. 말하자면 조금 복잡하긴 한데…….”

어디부터 말해야 할까.

그는 뇌리에 가득 찬 정보를 헤집으며 곧 적절한 단어를 도출했고, 이내 대답을 기다리는 단테에게 말하니.

“예전에 일이 한번 있었습니다.”

한창 공격적으로 조직을 확장 중이었을 때였다.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단장 중 일부가 그들에게 반기를 들었고, 전염병처럼 퍼져 나간 그 기류는 단장들 대다수가 원로들에게 불복하게 만들었다.

“투표를 했고…… 결과는 몰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당시 저와 이슈페인이 자원했죠.”

그들이 구태여 몰살이라는 선택지를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런 내부 분열로 잃은 세계는 분명히 존재했으니까 말이다.

그는 덤덤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억하기론 5,403명이었습니다.”

단 며칠 만에 그들이 죽인 생명의 숫자였다.

그날 이후로, 여러모로 블랙 가드의 내부에 흐르는 기류는 달라졌다.

블랙 가드는 더욱 음지로 숨었다.

동시에 황제에게 진실을 알리고 그의 비호를 얻어 내기도 했다.

다만 그때부터였을 거다.

“어느 순간, 미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원로들이 생겼습니다.”

본디 블랙 가드의 창설 목표는 하나였다.

대군주와 마수들의 절멸, 그리고 대륙의 안정.

그러나 긴 시간이 흐르자, 원로들의 마음에는 한 가지 욕심이 차오르기 시작했으니.

“놈들은 이 세계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 합니다.”

그건, 일전에 이슈페인이 말한 것과 같은 목표였다.

기갑천마

이 세계의 진실 (2)

“놈들은 이 세계를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고자 합니다.”

나름 충격적인 사마제천의 한마디에 단테의 방 안에는 꽤긴 긴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단테는 충격받지 않았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그가 지금껏 겪었던 블랙 가드란 조직만 보아도 그렇다.

조금 전에는 단순히 그런 일이 있었다는 정도로 넘어갔지만, 그들이 황제와 ‘모종의 계약’을 했다는 대목만 보아도 블랙 가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뿐인가.

사마제천의 말이 전부 사실에 가깝다는 가정을 한다면, 사실상 대륙과 마수와의 전쟁을 견인하고 있는 건 블랙 가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이다.

단테는 입에 문 푸른 숨결을 한 모금 짙게 삼키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스읍, 후-.

청아한 마나의 잔향이 코끝을 스친다.

‘블랙 가드의 원로.’

당장 떠오르는 이는 눈앞에서 기억과 전혀 다른, 그러나 역시 기생오라비 같은 얼굴로 앉아 있는 사마제천.

그리고 기이한 육신을 가졌던 이슈페인이란 놈과 마찬가지로 기이한 힘을 다루던 세이티나라는 여자 정도일까.

……확실히 오만할 자격은 있는 실력이다.

단테는 무심결 끓어오른 호승심에 주먹을 한번 쥐었다 펴며 생각했다.

동시에 코웃음이 흘렀다.

“정이 들어서 못 막은 건가, 아니면 너희들이 많이도 유해진 건가.”

맹주 자리도 그토록 힘들어했던 주제에 그만한 조직의 당주 자리에 앉아 있다는 남궁연희는 차라리 이해할 수 있다.

옹호 따위가 아니다.

그저 정파라 스스로를 칭하던 이들의 기저에 깔린 심리를 알고 있기에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마제천은 다르다.

그가 원로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은 곧 블랙 가드의 내부적인 일에서 꽤 영향력이 있다는 말이었을 텐데.

“아하하…….”

단테는 뼈가 담긴 말에 어색하게 볼을 긁적거리는 사마제천을 지그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게…… 솔직히 저희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워낙 놈들이 조심스러웠기도 하고, 또 엄청나게 바빴거든요. 눈치를 챈 건 약 1년 반 전쯤이네요.”

“1년 반이라…….”

그제야 한 가지 의문이 풀렸다.

단테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라면.

“그래서 그토록 급하게 날 찾아왔었나.”

“예, 뭐…….”

역시, 그답게 눈치가 빠르다.

사마제천은 그런 생각을 하며 그때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

내부적인 혼란에 곧바로 단테를 찾아가 정체를 밝히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문제는 있었다.

“나름 저희가 규칙이 있습니다, 십계명이라고.”

“십계명?”

“예.”

일전에 로브를 쓰고 제1 추기경의 뒤에 숨어 있었던 이슈페인에게도 언급했던 말이었다.

십계명.

그는 그 말을 읊조리며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수첩을 꺼냈고, 곧 그곳에 꽤 유려한 필체로 천천히 글자들을 적어 가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손에 쥔 만년필의 끝으로 밀려 나온 검은 잉크가 긴 선을 그리고, 곧 10개의 사항을 모두 적은 그는 수첩을 단테가 볼 수 있도록 뒤집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이니.

“가뜩이나 잃을 것 다 잃었던 놈들인데 통제가 쉬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대화가 통하는 놈들끼리 만든 불문율입니다.”

단테의 시선은 조용히 수첩을 훑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는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십계명』

1. 블랙 가드는 대군주와 마수(통칭 군단)의 절멸을 위해 창설된 조직임을 명시한다.

2. 우리는 망자이며, 이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우리가 겪었던 비극이 또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강구한다.

3. 모든 망자는 ‘관리 대상’으로 명명한다.

4. 관리 대상으로 판정된 자가 대륙과 조직에 악영향을 주리라고 판단되는 상황이면 원로원과 당주의 합의하에 즉각 주살한다.

5. 적합한 관리 대상으로 판단되었을 시 그를 감시 및 보호하고, 상부의 명령과 판단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포섭한다.

6. 모든 관리 대상은 서로를 적대하는 행위를 금하며, 이 사항을 어긴 자는 원로원과 당주의 합의가 일치했을 때 즉각 주살한다.

7. 모든 구성원은 외부에 기밀이 새어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은폐한다.

8. 블랙 가드는 레벤스라트 제국의 황실과 상호 보완되는 맹약을 맺었으므로 그들을 적대하는 행위를 금한다.

9. 블랙 가드의 존재 의의는 대군주와 마수(통칭 군단)를 절멸시키는 데에 있으며, 그 외의 모든 이익 행위는 금한다.

10. 블랙 가드의 모든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될 시 원로원과 당주의 합의하에 즉각 해산한다.

내용은 길었지만, 대충 요약해 보자면 블랙 가드의 창설 의의와 행동에 대한 기본 골자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때 단테의 눈에 걸린 건 6번 조항이었다.

그는 무심결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서로 적대 행위를 금하고, 사항을 어긴 이는 원로원과 당주의 합의해서 즉각 주살한다라……. 지금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데.”

“아픈 데를 자꾸 찌르십니다.”

“그래서, 상황은 어떻지?”

단테의 물음은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구태여 언급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장 눈에 보이는 십계명의 문제점만 해도 거의 대부분이다.

사실상 내분, 그것도 원로원이 갈라진 이상 블랙 가드라는 조직 역시 반으로 나누어진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단테의 물음에 사마제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화답했다.

“뭐, 예상하셨겠지만 조직은 반으로 나뉘었고 여러모로 개판입니다. 그래도 생각보다 놈들에게 붙은 원로랑 세력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때였다.

치이익.

흐름을 끊는 서늘한 소리가 방안을 울리고 단테는 여전히 무표정한, 그러나 그 깊은 내면에 분명한 열기를 담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말했다.

“말 돌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하하.”

사마제천은 본능적으로 내력을 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50년이란 세월을 건넜다.

그러나 아직 육신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주군 된 자가 어떤 이였는지를 말이다.

때문에 그는 마찬가지로 탁자 위에 놓인 재떨이에 푸른 숨결을 비벼 끄고는 졌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대략 3분의 1 정도가 놈들에게 붙었습니다. 지난 시간 동안은 내부적으로 솎아 내느라 좀 바빴고요. 참고로 그건 당주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주님이라…….”

단테는 그의 입에서 흐른 ‘당주님’이라는 말에 잠시 의자의 끝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하긴, 네게 기다림이 길긴 했겠지.”

사마제천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기묘한 위화감.

어쩌면 처음부터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고 하는 게 맞으리라.

사실 당연한 일이니까.

단테가 기억하는 그는 죽은 지 불과 채 2년이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사마제천은 어떨까.

그는 지나간, 그러나 새로이 얻은 삶을 단테가 아닌 남궁연희를 따랐지 않은가.

단테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어색한, 그러나 이전과 달리 씁쓸함 역시 더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답한 사마제천은 동그란 안경을 살짝 올려 콧대 위로 놓고는 읊조렸다.

그 말은 곧, 단테를 이전과 같이 따를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사마제천은 은연중에 마주할 단테의 분노를 대비하며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어찌해야 할까.

“그러니까, 그냥 망르로 가시지 그랬습니까.”

그러면 이렇게 불편한 자리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구태여 말하진 않았지만, 그가 짧은 관찰 끝에 단테가 천휘임을 확신하고도 찾아가지 못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다른 주군을 모시고 있다는 것.

처음부터 그를 기다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처음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하며, 때때로 적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50년은 좀 길었습니다, 많이.”

그렇기에 단테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와 남궁연희는 암묵적으로 고민을 하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가 의식할지 모르겠지만 단테…… 아니, 천휘라는 사람은 그 자체로 둘에게 적잖은 자취를 남겼으니 말이다.

다만 단테의 기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로서는 어이가 없을 것이다.

고작 2년 만에 가장 아끼던 부하이자 친우가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그것도 나름 적대 세력인 무림 맹주씩이나 했던 여자를 따르고 있으니까 말이다.

“…….”

“……아, 참고로 긴밀한 관계는 절대 아닙니다. 이성적으론 정말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단테는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고, 때문에 그는 분위기를 풀어보려는 듯이 한마디를 던졌다.

물론 고작 그런 일로 분위기가 풀릴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때.

“그게 전부겠지?”

“큭!”

단테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사마제천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력을 끌어 올리며 다가올 단테의 공격을 대비했다.

살짝 보랏빛과 묵빛을 띄는 내력이 그의 육신을 따라 흐르며 호신강기를 일으키고, 나아가 천마군림보를 대비하여 심과 기와 체의 조화를 일시적으로 동결시킨다.

그러나 그런 대비가 무색하게도.

“맹주.”

단테는 되레 탁자 위에 놓인 푸른 숨결을 하나 더 물고 불이나 붙이라는 듯 까닥거리고는 그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

그러자 사마제천은 다소 어벙한 얼굴로 되물을 수밖에 없었고, 단테는 뭐 하고 있느냐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래서 맹…… 아니, 당주는 어디에 있냐는 말이다.”

“그, 괜찮으신 겁니까?”

그가 그렇게 묻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비록 교주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군주의 침공에 무림이 무너졌다고 한들 단테는 천마다.

천마가 누군가.

천마신교와 일월신교를 계승한 백월신교의 절대자이자,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능히 패도를 걸었을 이다.

사마 가문은 그런 그를 곁에서 보좌하는,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존재였고 말이다.

즉, 이건 자존심의 문제였다.

그런데도 단테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로선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쯧.”

그때, 단테가 혀를 차자 사마제천은 홀린 듯이 그의 입가에 물린 푸른 숨결의 끝자락에 불을 붙였다.

타다닥…….

특유의 푸른 불꽃을 일렁이며 타들어 간 푸른 숨결은 옅고 청아한 마나의 잔향을 일으키며 천천히 천장으로 올라갔고, 단테는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괘씸하지만 어쩌겠느냐, 이미 벌어진 일인 것을.”

한 번의 죽음을 겪고, 이 세계에서 지나온 발자취가 없었다면 단테는 그가 생각한 대로 격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금의 상황은 어떤가.

뭐라 말하기도 벅찰 정도로 꼬였고, 또한 어지럽게 뒤틀렸다.

때문에 그는 말했다.

“일단 당주를, 아니…….”

그의 적색 동공에 기억과 다른 사마제천의 얼굴이 맺히고, 이윽고 그 너머에 있을 남궁연희를 바라보았으니.

“남궁연희를 보아야겠다.”

당연히 사마제천이 할 수 있는 건.

“그러시지요.”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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