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오두막에 빛이 일렁거리고 곧 생겨난 빛무리는 여자와 소년을 토해 냈다.
“쿨럭!”
이슈페인은 대지를 딛자마자 핏물을 토하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러나 정작 그를 데리고 탈출한 세이티나는 내심 아쉽다는 듯 입술을 훑으며 가까운 의자에 걸터앉아 기지개를 켤 뿐이었다.
“끄으응!”
아쉬움이 없진 않았다.
하지만 꽤 오랜만에 몸을 푼 그녀의 입장으론 그래도 꽤 만족스러운 감흥이었다.
그러나 핏물을 게워 낸 이슈페인은 달랐다.
“어째서 그걸!”
그는 핏발이 선 눈으로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고, 너무나 태연하게 감흥을 곱씹고 있는 세이티나의 멱살을 틀어쥐며 외쳤다.
“이제 몇 개 남지도 않은 물건이다! 그걸 고작 이따위 일에……!”
“허, 이따위 일?”
멱살을 잡은 손이 떨린다.
하지만 정작 멱살이 잡힌 세이티나는 그런 이슈페인의 말에 코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고작 그렇게 표현하기엔 반쯤 뒈져 가던 사람이 누구더라? 응?”
“그, 그건……!”
이슈페인이 할 말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 찰나의 머뭇거림을 세이티나는 놓치지 않았고 말이다.
“정신 차려. 애초에 이렇게까지 커질 일도 아니었다고. 어차피 중요한 일은 전부 잘 진행 중인데 같잖은 일로 눈이 돌아가 놓고 어디서 큰소리를 쳐?”
신랄한 비난이다.
그러나 한층 가라앉은 이슈페인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을 턱이 없기에 그저 멱살을 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도 할 말은 있었다.
“그럼 왜 보리스와 리베라를 죽이지 않았지? 제거할 수 있을 때 해야 했을 거 아니냐!”
보리스와 리베라.
둘은 그 자체로 그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으나, 단테 대령을 따르는 측근이라는 점이 주요했다.
때문에 죽일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았을 터인데, 세이티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놈들을 살려 둔 것이다.
“허.”
그러나 그때.
“뭔가 착각하는 거 같은데.”
세이티나의 표정이 급변했다.
“우리는 동급이야. 안 그래?”
평소처럼 돌아온 황금색의 눈동자가 다시금 갈라지고, 그녀는 도드라진 송곳니를 혀로 훑으며 씨익 웃었으니.
“어차피 당주 그년에게 발린 건 다 똑같다고. 그게 아니면 설마 아직도 번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미안하다.”
그제야 이슈페인은 그녀에게서 천천히 멀어졌다.
그녀의 말은 경고였다.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널 죽여 버릴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
때문에 이슈페인은 완전히 돌아온 정신을 붙잡고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몸이 정상이라면 모를까, 적잖은 상처를 입은 상태에서 맞붙는다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뭐, 알면 됐어.”
다행히 세이티나는 이슈페인을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그녀는 오두막의 한켠에 비치된 바구니를 열어 과자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때.
우웅.
한쪽에서 통신기가 작은 진동을 울렸다.
과자를 입에 밀어 넣고 우물거리는 세이티나 대신 이슈페인이 그쪽으로 걸어가 그것을 확인하니, 곧 그는 조금 안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태자 쪽에서 연락이 왔다.”
“뭐라는데?”
“긍정적이라고 하더군.”
“그렇겠지. 아비와 달리 혈기만 넘치는 놈이니까.”
혈기만 넘친다.
그것이 얼마나 상대를 낮잡아 보는 표현인지 알고 있는 이슈페인은 무심결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놈이다.
제국의 황태자 시르투스 폰 레벤스라트는 말이다.
……둘은 서로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미 둘 사이의 갈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이 자리에 남은 것은 대계를 위한 동반자일 뿐이었으니까.
때문에 이슈페인은 한쪽에 비치된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리니.
“다가올 우리의 세상을 위하여.”
그것은 실로, 비틀린 욕망이었다.
기갑천마
비루한 변명
법국의 상황은 급박했지만 동시에 이보다 더 나을 수가 없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긍정적으로 흘러갔다.
제1 추기경의 세력은 빠르게 숙청되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직위 해제라고 말하는 것이 옳으리라.
물론 피로 피를 씻는 일 따위를 일으킬 수는 없었으니, 제7 추기경은 근본적으로 제1 추기경을 따른 죄밖에 없는 이들에게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다.
동시에 그는 알음알음 제1 추기경이 어떤 음모를 꾸몄는지 흘렸고, 적어도 솔라 신을 향한 신앙만큼은 진짜였던 많은 이들이 돌아서게 되었다.
“허, 허허허.”
그러나 제1 추기경과 그 측근들의 죽음은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으니.
이미 그들은 직위와 모든 예우를 박탈당한 채, 법국 내에서 가장 경계가 삼엄한 대성당의 지하 감옥에서 몸을 움츠리며 다가올 암울한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하늘은 다시금 태양을 감출 준비를 하고 있었고, 분주하게 움직이던 이들 역시 슬슬 내일을 준비할 시간.
“법왕 계승 과정이 늘 공정하고 아름다웠던 건 아닙니다. 때때로 알력이 들어오기도 했고, 세속에 찌들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추악한 일면을 보이기도 했지요.”
단테가 머무는 방으로 들어온 미카엘은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그에게 말했다.
“그러나 제1 추기경은 선을 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시선을 돌려 한창 나이트 프레임, 유게네스들이 투입되어 정리 중인 현장을 응시했다.
“솔직히 저는 모르겠습니다.”
계속 묵묵히 자신을 응시하는 단테에게, 그는 마치 푸념하듯이, 혹은 그저 변명하듯이 말했다.
“블랙 가드의 내부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또 그런 이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 그들이 머무는 제국이 그 주체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비단 미카엘뿐만이 아니라, 엄청나게 많은 이들의 머리가 복잡하고 혼란스럽기 그지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단 1시간도 되지 않아 본 광경은 그 자체로 이제껏 본 적도 없고 상상도 하지 못할 일투성이였으니 말이다.
“다만 바라건대.”
미카엘은 천천히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그리고 곧 구속구에 몸이 묶인 채로 걸어오는 로한의 모습과 함께 그는 말했다.
“당신이 저희의 적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적의나 호승심 따위가 아니다.
그저 진정으로 그러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심정이었다.
내심 인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단테가 자신들을 적대하는 순간 감당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럼.”
미카엘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비켰고, 묵묵히 법국의 군인들에게 끌려 온 로한은 소파에 앉아 있는 단테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흘렸다.
구태여 말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로한은 말없이 단테의 앞으로 걸어가 앉았고, 단테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다가온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유는?”
주어나 변명은 상정하지 않는다.
그저, 담백하고 무미건조하게 묻는다.
로한 역시 그것을 알았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지난 시간 동안 함께하며 그의 성격을 알게 된 것에 가깝다는 것이리라.
……애초에 변명할 생각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담배 좀 피워도 되겠습니까?”
지독하게도 담배가 태우고 싶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로한은 피식 웃으며 단테에게 물었고, 단테는 잠시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를 만나는 것을 배려한 것일까.
그게 아니면 설마 단테에게서 도망칠 수는 없으리라고 확신한 것일까.
법국이 새로 채운 구속구는 꽤 운신의 폭이 자유로웠고, 덕분에 로한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 수 있었다.
치익, 습…….
흰색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회색 연기가 폐부를 향해 깊게 밀려들어 오고, 로한은 몇 시간 만에 조금이나마 편안함을 느끼며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을까.
로한은 반쯤 태운 담뱃재를 탁자에 놓인 재떨이에 가볍게 털고는 입을 열었다.
“제 어머니는 한때 귀족이었으나 전쟁으로 영지가 몰락하여 창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생각해 보자.
귀족이라고 한들, 결국 영토를 다스리는 존재로서의 쓰임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영토도 없고, 전쟁에 참여할 일신의 능력마저 없는 이들은 어떻게 될까?
정답은 하나다.
“비루한 몸뚱어리밖에 남지 않게 되지요.”
덤으로 얹어 주자면 절망감과 무력감.
혹은 잃어버린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잊지 못한 오만함 정도일까.
물론 얻는 것도 있다.
과거의 인연, 아니 인연이라 믿었던 자들이 보내오는 무수한 악의와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의 호위 기사였지요.”
그리고 그건, 여태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그의 과거의 이야기였다.
로한은 어느새 다 탄 담배를 버리고 새로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이야 좀 살 만하다지만, 20년쯤 전에는 개판도 이런 개판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