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세이티나는 달뜬 숨을 내뱉으며 몸을 가볍게 떨었다.
마나의 잔향이 코를 어지럽히고, 꽉 쥔 주먹을 따라 일렁거리는 호승심은 그녀에게 적절한 흥분감을 안겨 주었다.
물론 주변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은 경악과 공포 그 자체였으니.
“거, 거짓말.”
“나이트 프레임과 맨손으로…….”
리베라의 모스트리.
보리스의 이데아.
두 기체와 단신으로 격돌한 그녀가 보인 무력은 인외의 무언가였다.
오죽하면 처음엔 호승심을 불태우던 이들이 그녀가 잠시 옮긴 시선조차 부담스러워할까.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무승부로 하면 좋겠는데에. 흐어엉.〕
〔되겠습니까.〕
그건 리베라와 보리스라고 다르지 않았다.
울상이 되어 말하는 리베라,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잔인한 현실을 직시시켜 주는 보리스의 모습은 언뜻 보기에 코미디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한편 세이티나의 시선은 두 에이스가 아니라 단테와 이슈페인이 한창 격돌 중인 곳으로 향했다.
콰과과과과광!
“커헉!”
들려오는 폭음과 신음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잠시 전황을 살피던 그녀는 이윽고 단테와 사마제천의 모습을 살피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생각 좀 하고 덤비든가.”
예전부터 느낀 거였지만, 이슈페인은 어째 악마인 자신보다 참을성이 없고 앞뒤가 없다.
뭐, 사실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고향을 잃고 고장 난 이들의 말로란 결국 그런 거일 테니까 말이다.
그녀는 고개를 한번 가볍게 휘저음으로써 뇌리를 파고든 잡념을 털어버리곤 주춤거리는 리베라와 보리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우웅…….
메인 코어가 회전하는 소리와 함께 제각기 특색을 나타내는 안광의 번뜩임이 유달리 인상적이다.
그녀는 각각 은색과 푸른빛을 띠는 두 기체를 번갈아 눈에 담다가 시원한 미소를 씨익 흘리며 말했다.
“이번에는 살려 줄게. 재미있었기도 하고…….”
그녀의 갈라진 황금 눈동자가 깜빡거린다.
“솔직히, 더 놔두면 쟤가 죽을 거 같아서.”
그리고 동시에, 그녀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곧바로 육신을 날렸다.
〔크읏!〕
본능적으로 그녀를 보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보리스가 거대한 망치가 일순간 공간을 찢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빠르게 휘둘렀으나, 당연하게도 닿을 리는 만무했다.
그리고 그 직후.
정확히 사마제천과 단테의 머리 위에서 시원하고도 가식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웃음을 지으며 세이티나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기갑천마
스쳐 간 폭풍과 던져진 화두
사마제천의 손끝에서 뻗어진 두루마기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유려한 선을 그리며 쇄도했다.
그뿐인가.
뒤를 이어 단테의 섬광까지 뻗어지자, 이슈페인은 밀려오는 위기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입술을 짓씹었다.
‘일이 왜 이렇게……!’
블랙 가드 내부에서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기회를 엿보던 그와 동료들이 바라던 원대한 대계(大計)의 중요한 한 축을 지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으로 모든 것이 어그러지고 만 것이다.
물론 이번 일로 계획이 실패하진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타격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익!”
그의 손끝이 크게 반원을 그렸다.
뻗어진 입자의 파편은 하나하나가 작은 폭탄으로 변모해 흩뿌려지더니 단테와 사마제천을 노렸다.
콰아아아아앙!
폭음이 울리고, 포탄에 튄 흙 조각이 사방으로 어지럽게 튀어 올라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러나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고작 그 정도 공격으로 서로를 어찌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곧 눈앞을 어지럽히던 안개가 걷혔을 때.
끼기긱-!
이슈페인은 귓가에 스치는 묵직한 기계음에 입술을 잘근 깨물며 서서히 머리 위로 드리우는 거대한 검은 기체, 벤데타를 응시했다.
우웅!
단테의 눈 색과 똑같은, 붉디붉은 적색의 안광이 터지며 벤데타의 주먹이 대지를 향해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아앙!
“크으윽!”
단순한 주먹이 아니다.
그 자체로 중급 마수의 육신을 터트릴만한 압력이 이슈페인의 육신을 당장이라도 갈가리 찢어발길 듯 들이닥쳤다.
그러나 단테와 사마제천이 그러했듯.
이슈페인 역시 멍하니 바라만 보다가 당해 줄 생각은 전무 했기에, 그는 단테의 주먹을 피하곤 고개를 들어 눈앞을 살폈다.
그때였다.
씨익 올라간 사마제천의 입꼬리를 본 이슈페인은 본능이 울리는 경계심에 입술을 잘근 깨물었고, 곧 아니나 다를까 머리 바로 위에서 꿈틀거리는 엄청난 양의 내력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런 제…….”
그리고 그 순간.
촤아악!
두루마기 안에 새겨진 사마제천의 내력이 꿈틀거렸고, 이내 그의 묘리를 머금은 투명한 무언가가 이슈페인의 육신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크읏!”
단테의 주먹을 피하려 최선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일까.
이슈페인의 육신은 제때 반응하지 못했고, 곧 액체를 맞은 그의 나노 머신이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부분이 뒤틀리고, 일시적으로 작동을 멈춘 것이다.
당연하게 그의 움직임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그로선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노 머신이란 단순한 물 따위에 멈출 정도로 허술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사마제천은 당혹스러움에 입술을 잘끈 깨무는 그에게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희라고 뭐,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빌어먹……!”
이슈페인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리고, 단테는 그 기회를 놓칠 정도로 우둔하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앙!
미처 말을 끝마치지도 못한 이슈페인의 머리 위로 단테의 묵직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커허억!”
이슈페인은 곧바로 몸을 뺐지만, 온전치 않은 몸으로 단테의 공격을 피하기엔 역부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일반적인 나이트 프레임이라면 모른다.
하지만 그가 상대하는 단테의 나이트 프레임인 벤데타는 궤가 다른 기체가 아닌가.
“크윽!”
이슈페인은 급한 마음에 비활성화된 나노 머신들을 일시적으로 뒤로 모은 후, 그나마 멀쩡한 것들로 정면을 재구성해 단테의 공격을 힘겹게나마 막아 냈다.
쿠우우우웅!
일격, 일격에 몸이 저릿하다.
시야가 뒤틀리고, 귓가가 얼얼하다.
……죽으리라 생각하진 않는다.
다만 우려되는 건 나노 머신이 받을 피해와 그로 인한 손해뿐이었다.
‘고칠 수도 없건만……!’
길고 긴 가동 기간으로 인한 노후화.
원래의 에너지원을 공급하지 못한 것에 대한 다운그레이드.
마지막으로 자동 수복 기간 사이의 빈자리.
자칫하면 대계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는 일이기에, 당연히 그로선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끝이다.〕
너무나도 선명한, 단테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이슈페인의 귓가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때였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귀에 익은, 평소라면 그저 귀찮았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시야에 허공을 날아 특유의 경쾌한 미소를 짓는 세이티나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아…….”
이슈페인의 동공에 안도가 흐른다.
그리고 그 직후.
“흡!”
단테와 사마제천의 머리를 넘어 대지에 안착한 그녀는 당장이라도 이슈페인을 찍어 누를 듯 뻗어지던 벤데타의 주먹에 자신을 주먹을 내질렀다.
거대한 검은 주먹과 일개 인간의 주먹이 맞닿았다.
크기로만 따져도 수십 배.
무게로 따지면, 수백 배.
하지만 세이티나는 피하지 않았고, 단테 역시 그녀를 그대로 압사시키겠다는 듯이 그대로 주먹을 내질렀다.
그리고 곧 두 주먹이 맞닿은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광!
굉음과 함께 폭사한 기와 정체불명의 힘을 담은 폭풍이 그들의 전투를 멍하니 지켜보던 이들의 살갗을 스쳤다.
“크윽!”
“이, 이건 대체……!”
과거 초인들의 전투가 이럴까.
그렇다면, 눈앞의 저들은 초인인 걸까.
그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했고, 단테와 세이티나 역시 서로를 결말로 이끌지 못했다.
스스스…….
둘의 격돌로 생긴 잔류가 서서히 걷히고, 단테는 저릿한 손목을 돌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세이티나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얼굴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
단테를 도발하기 위한 건지, 아니면 그저 진지한 감상을 읊조리는 건지 모를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스쳤다.
“으음…… 당주와 맞먹는 전투력이라고 들었는데. 지금도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나 봐?”
세이티나는 그렇게 말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동시에 단테는 그녀가 말하는 당주의 정체를 가늠하곤 피식 웃었다.
“맞먹는다라…….”
글쎄…… 그랬던가.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기억하는 그녀는 당대 정도 무림에서 가장 기대를 받던 인재였고, 그 역시 주어진 시간에 비해서 기재라고 들었던 자였으니.
만약 시간이 더 많았고, 마수들의 침략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구태여 고민할 문제도 아니다.
‘적으로 만났겠지.’
진정한 의미의 천마와 무림맹주가 되어서 말이다.
그는 잡생각을 멈췄다.
그러고는 어느새 완전히 걷힌 시야 너머로 자신을 올려보는 그녀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흔히 용, 혹은 뱀의 눈이 그러하듯.
갈라진 그녀의 황금색 동공이 날카롭게 번뜩이고, 로한과 달리 밝은 색의 짧게 자른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도드라진 송곳니.
그녀의 모습을 훑은 단테는 이슈페인이 그러했듯,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힘 역시 일반적인 내력이나 마나와는 궤가 다르다는 걸 느끼곤 말했다.
〔질척거리는 힘이군.〕
주먹을 마주한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언뜻 사파가 축적한 특유의 음침하고 질척거리는 내력과 닮아있었으나, 그보다 훨씬 정순한 힘이었다.
“뭐, 당연한 거야. 나는 악마니까. 아, 정확히 말하면 악마의 먼 후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단테의 말에 세이티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한 후 문득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숨을 고른 이슈페인이 살기가 번뜩이는 눈으로 단테와 사마제천을 지그시 응시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세이티나.”
“안 돼.”
세이티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으며 이슈페인의 말을 일축했다.
그러자 이슈페인은 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을 보이며 그녀에게 외쳤다.
“지금 죽여야 한단 말이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네. 넌 좀 닥쳐 봐.”
그녀는 웃으며 그의 말을 일축했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분명 입꼬리는 하늘을 향해 있는데, 그 안에 담긴 목소리는 한없이 서늘한 경고가 담긴 건 말이다.
“…….”
그녀가 진심임을 깨달은 것일까.
이슈페인은 곧바로 입을 닫았고, 세이티나는 콕피트 너머의 단테를 응시하며 특유의 쾌활한 웃음을 짓고 말했다.
“있잖아. 혹시 보내 줄 생각 있어?”
대답을 기다린다.
하지만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단테는 내력을 끌어 올리며 즉답했다.
〔개소리를.〕
두근-.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주인의 의지를 따라 눈앞의 적을 격살할 준비를 끝마쳤다.
그러나 그때.
“에휴.”
세이티나는 당연히 단테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고, 곧 뒤에 선 이슈페인의 멱살을 잡고는 여전히 단테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짜 쓰기 아까웠는데.”
“너, 너 설마……!”
그런 그녀의 말에서 무언가 짐작 가는 것이 있던 것일까.
이슈페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막으려 손을 뻗었고, 사마제천은 애초에 텄다는 듯 아예 공격을 포기하며 고개를 젓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건 뭐, 이거대로 이득인가.”
그리고 그 직후.
끼기긱-!
벤데타의 관절부가 묵직한 울림을 터트리며 세이티나와 이슈페인을 단번에 찍어 누르려던 그때였다.
스윽.
세이티나는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름이 아닌, 지금까지 본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무언가였다.
검은 금속 사각 틀 안에 마석과는 다른 무언가가 박혀 있고, 일전에 훈련소에서 보았던 계기판과 같지만 보다 발전된 형태인 듯한 액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파아아앙!
단테의 묵빛 내력이 가득 머금어진 주먹이 그대로 둘에게 꽂히려던 그때.
“자, 잠깐 멈춰……!”
“그럼.”
세이티나는 곁에서 그 물건을 빼앗으려 손을 뻗는 이슈페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이며 버튼을 눌렀다.
그러고는 거의 지척까지 뻗어진 단테의 내력을 눈에 담으며 황금색 안광을 번뜩임과 동시에 입을 열었으니.
“다음에 보자고. 천마 나으리.”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정확히 그녀와 이슈페인이 있던 그 자리에 벤데타의 묵직한 주먹이 내리꽂혔다.
그러나 단테는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왜나면…….
‘느낌이 없다?’
나이트 프레임은 기본적으로 외부의 감각을 파일럿에게 어느 정도는 사실적으로 전달한다.
그러나 대지에 닿은 단테의 주먹에 걸리는 건 그저 갈라진 돌바닥의 파편과 그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흙들이 지상을 바라보며 튄 잔해뿐.
예상했던 반발력도.
그로 인해 되돌아오는 충격도 전무했다.
때문에 단테가 미간을 좁히며 사라진 놈들을 찾으려던 그때.
“소용없습니다.”
어느새 두루마기 종이와 철필을 갈무리하고 맨손이 된 사마제천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에게 말했다.
“이해하시기 어렵겠지만, 저건 마도공학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로스트 테크놀로지……. 그냥 뭐, 엄청난 기술이라서 말입니다.”
당연히 단테가 단번에 사마제천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되묻지 않았다.
단지 육신을 뒤덮은 벤데타를 역소환하고 허공에서 군복을 펄럭이며 대지로 추락할 따름이었다.
터벅.
군홧발에 흙먼지가 작게 일렁였다.
동시에, 그는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마제천을 응시하고 입을 열었으니.
“설명할 게 많을 거다.”
“아하하하…….”
그런 단테의 읊조림에, 사마제천은 그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갑천마
비틀린 욕망
이슈페인과 세이티나가 사라진 제7 구획에는 때아닌 정적이 흘렀다.
그것은 많은 감정을 내포한다.
경외심과 두려움.
의문과 의심.
혼란스러움까지…….
그러나 그 정적은 오래가지 못했으니.
기체를 역소환하고, 엄청나게 지친 얼굴을 한 보리스와 리베라가 그들을 향해 걸어왔기 때문이었다.
“죽는 줄 알았어…….”
“동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없다뿐이지, 둘의 내면은 현재 서 있는 게 기적일 정도로 엉망이리라.
“이, 일단 앉으십시오!”
“누가 가서 성수 들고 와!”
때문에 법국의 치유 주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에게 달려가 몸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테도 그들을 바라보았다.
“헤…….”
단테의 적안과 리베라의 은안이 허공에서 맞닿고, 리베라는 언뜻 푼수처럼 보이는 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잠시.
“그나저나.”
단테의 앞에서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아미키, 아니 사마제천은 고개를 돌려 미카엘의 곁에 묵묵히 서 있는 로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처리할 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입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눈은 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말없이 서 있던 로한의 뒤통수에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철컥-.
슬라이더를 당기는 소리가 귀를 스친다.
“명령을.”
그리고 직후 내뱉어진 낮은 음성에 로한의 곁에 서 있던 미카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왜인지 익숙한 이목구비를 가진, 그러나 분명히 처음 보는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백 은발의 여자였다.
검은 제복과 대비되는 은발을 단발로 자르고,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아름다운 얼굴과 대비되는 차가운 분위기는 꽤 느낌이 있었으나 정작 그녀를 본 미카엘에겐 충격일 뿐이었다.
‘대체 언제?’
뒤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건 중대한 문제이자, 또한 지금껏 그가 가지고 있던 상식 전체를 흔드는 일이기도 했다.
‘저들이 만약 제7 추기경 각하를 노린다면.’
과연 그를 비롯한 주변 기사들이 호위에 성공할 수 있을까.
비참하게도, 장담할 수 없었다.
동시에 실감하게 되었다.
제국이 여태까지 감추고 있던 힘이 어떤 것인지, 말로만 들었던 블랙 가드가 어떤 존재들인지 말이다.
그러나 그의 경악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흘렀고, 사마제천은 곧바로 명령을 내리는 대신 단테에게 시선을 돌려 무언의 허락을 구했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겠으나, 적어도 둘에게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
그도 바보가 아니다.
자세하고 세부적인 일까지 모두 확인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현 시점에서 로한이 자신의 뒤통수를 쳤다는 것 정도는 직감할 수 있었다.
때문에 고민은 구태여 필요하지 않으리라.
끄덕.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것을 확인한 사마제천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로한의 뒤통수에 권총을 겨누고 있는 은발의 군인, 리렌 원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명령이 떨어졌고, 고민은 필요를 잃었다.
“어?”
그 모습에 치유를 받느라 뒤늦게 상황을 인지한 리베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고.
“…….”
보리스는 마치 일이 이렇게 돼서 유감이라는 듯, 그저 씁쓸한 얼굴로 로한의 마지막을 두 눈에 담을 따름이었다.
“자, 잠시만!”
누가 봐도 죽이려는 분위기에 곁에 서 있던 미카엘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즉결 심판을 한다는 건 그의 입장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리렌 원사는 멈추지 않았고,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때.
“잠깐.”
무미건조하게 울린 단테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반쯤 당겨진 방아쇠가 멈칫했고, 곧 모두의 시선이 진원지인 단테에게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기다리던 로한 역시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보았다.
서로 다른 적색의 눈동자가 마주한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의 편린은 너무나도 달랐다.
“…….”
교차하는 감상 속 침묵은 흐른다.
그리고 머지않아 단테의 입이 열렸다.
“일단 저쪽부터 잡아야 하지 않겠나.”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로한이 아닌, 조금 전까지 이슈페인이 서 있던 방향으로 돌아갔다.
“히, 히익!”
그러자 곧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닌, 반쯤 엎드린 상태로 도망치고 있던 제1 추기경의 사색이 된 얼굴이었다.
처진 턱살이 떨린다.
얼굴은 그새 10년은 더 늙은 듯이 엉망이었고, 흙과 온갖 먼지로 더럽혀진 추기경 의복은 그 자체로 우스꽝스러움을 더했다.
“그, 그러니까…… 어, 크흠!”
그는 자신에게 몰린 시선에 몸을 떨었고, 무언가 너스레를 떨기라도 하려는 듯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때.
“……악마와 손을 잡으셨구려.”
사마제천에 의해 목숨을 구하고, 치유 주교들의 도움으로 거동이 가능해진 제7 추기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윽고 그는 다름이 아닌, 단테에게 고개를 돌려 최대한의 경의를 담아 말하니.
“제1 추기경은 법국의 소관대로 처리해도 되겠습니까, 단테 대령님?”
사실상 현 시점에서 차기 법왕으로 내정된 제7 추기경이 일개 대령에게 보일 태도로는 과분하다고 할 수 있었으나, 그 누구도 그 점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다.
“마음대로.”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단테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화답했고, 제7 추기경인 도르스 솔 케루빔은 애써 당혹감을 삼킨 미카엘과 그를 따르는 수호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지난 법국의 선인들이 만들어 온 유구한 계승 문화를 참담히 짓밟은 것도 모자라 솔라 신을 따르는 교인으로서 마지막 양심까지 팔아넘긴 자다. 체포하라!”
이미 그가 정체불명의, 블랙 가드 내부의 배신자들로 추정되는 이들과 손을 잡은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제, 제7 추기경이 모함을 씌우지 않느냐! 당장 놈들을 막아라!”
때문에 제1 추기경은 변변찮은 반박이나 자기 변호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저 자신을 따르던 주교들과 수호 기사들을 바라보며 발악할 뿐이었다.
“큭!”
“이익!”
그 모습은 너무나도 추했고, 모든 사실이 밝혀진 이상 어떤 방법도 없었으나 제1 추기경의 곁에 서 있던 그의 수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배를 탄 이상,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수호 기사 중의 제 일(一)인 도미니온스의 성을 받은 이가 검에 손을 올리려던 그때였다.
“이야, 참 깡이 좋아요.”
사마제천은 그들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고, 곧 모두가 멈칫한 그 순간 사마제천은 진심으로 놀랍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조금 전 그런 광경을 보고도 전의를 불태우다니 말입니다.”
“……아.”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이 사색이 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잠깐의 두려움으로 어둡게 변했던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뭐, 뭣들 하는 거야!”
뒤에서 아무리 제1 추기경이 일갈한다고 한들, 이미 대세는 넘어간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두려움이란 본디, 같은 두려움을 먹고 자라는 것이니까 말이다.
챙그랑!
터엉!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에 쥐고 있던 검과 총기를 바닥에 떨궜고, 미카엘은 곧바로 기사들을 이끌고 그들을 포박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제1 추기경에게 다가간 미카엘은 그를 내려다보며 경멸과 적의가 담긴 목소리로 말하니.
“현시점 부로, 당신을 추기경이 아닌 배교자로 대하겠다. 할 말이 있으면 이단 재판에서 하도록.”
“허, 허허허.”
……그 말을 들은 제1 추기경은 많은 의미가 담긴 헛웃음을 끝으로 그대로 개처럼 끌려가고 말았다.
그리고 직후.
“리렌.”
“예.”
사마제천은 단테의 뜻을 알았다는 듯, 리렌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리렌은 총구를 거두고 그 대신 묵묵히 서 있는 로한의 양손을 뒤로 잡아 빼고는 품안에서 구속구를 꺼내 그의 손목에 채웠다.
철컥-.
묵직한 울림이 스친다.
동시에 그녀는 실로 서늘한 목소리로 로한에게 읊조리니.
“운이 좋군요.”
“예…… 그러게 말입니다.”
적의로 점철된 그녀의 말에 로한은 그저 쓴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
터벅.
어느새 응급 치료를 끝낸 리베라가 떨리는 눈동자로 로한과 리렌을 향해 걸어왔고, 로한은 척 보기에도 울상인 그녀의 얼굴을 보며 괜스레 미안함을 느꼈다.
가끔 ‘미친 건 아닌가?’라고 생각될 정도로 밝았던 그녀였는데, 자신의 배신이 그렇게 충격적이었나 싶은 탓이었다.
“리베라, 이 일은…….”
때문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어 그녀에게 사과를 건네려 했다.
하지만 그가 막 입을 열려던 그 순간.
리베라는 절망이 담긴 목소리로 로한이 아닌 그 뒤에 서 있는 리렌을 응시하며 말했다.
“어, 언니?”
“뭐?”
당연히 로한은 물론, 주변에서 지켜보던 이들 역시 되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었다.
그러나 정작 리렌은…….
“그래, 리베라.”
너무나 태연하게 그녀의 말에 화답했고, 벌벌 떠는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하니.
“여전히 미친 짓하고 다니는 건 똑같구나.”
“그, 그게 아니라…….”
평소였다면 곧바로 상대방의 속을 긁어 놓았을 리베라가 벌벌 떠는 모습을 본 단테는 무심결 웃음을 흘리며 생각했다.
마치 피식자가 포식자를 만난 느낌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