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진실은 블랙 가드에 입단하고 여러 가지 일을 처리하며 지옥과 같은 훈련을 겪은 것이었지만 말입니다. 덕분에 실력은 떨어지지만 전용기도 얻게 되었고요.”
블랙 가드에 입단하게 된 경위를 나열한 보리스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마쳤다.
그리고 꽤 길었던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단테는 이윽고 그에게 물었다.
“사마제천인가…….”
아미키 중령이라는 사내.
그가 기억하는 사마제천과 닮았다.
아니, 사실은 확신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보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
“그렇겠지.”
단테도 보리스가 아는 게 생각보다 깊지 않다는 것쯤은 이미 느낀 후였다.
다만, 걸리는 건 여러 가지였다.
“그 아미키 중령이 제1 원로겠군.”
“예. 그렇습니다.”
툭, 투둑.
단테는 의자의 팔걸이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며 미간을 좁혔다.
생각보다 훨씬 깊게 관여가 되어있는 건가.
흐릿한 묵이 점점 짙어지듯 단테의 고뇌와 의문 역시 점점 살을 붙여갔다.
그때였다.
“다만, 혹시라도 단테 대령이 정체를 알게 되면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보리스는 어느새 비운 찻잔을 탁자 위로 내려놓은 채, 자신과 시선을 맞춘 단테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는 더 오래 기다렸으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뭐?”
그의 말에 단테는 실소를 터트렸다.
드물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오기는커녕 점점 호선을 그렸고, 곧 그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하, 하하하하하!”
여태까지 했었던 고뇌와 갈등, 의문이 해소되진 않았으나 그 자체로 유쾌한 동시에 시건방진 말이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가.
또, 무슨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어떤 진실에 닿아있는가.
단테는 쉽사리 답을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드디어, 닿았다.’
그렇기에 단테는 어디선가 듣고 있을지 모를 그들에게 기꺼이 화답을 건넸다.
“한 달. 딱 한 달을 기다려 주겠다.”
자신이 기억하는 그들이든, 아니면 긴 시간을 기다려 마모된 그들이든 인내하는 시간은 앞으로 한 달이다.
단테는 그렇게 말하곤 웃었다.
마침내, 흐려지던 과거와의 연결점이 그에게 와닿는 순간이었다.
기갑천마
격동하는 정세 (1)
휘이잉…….
제국 북부의 어느 잊힌 설산.
드높은 설산에 자리한 쓰러져 갈 듯 오래된 외관에도 고고히 서 있는 고성(古城)의 모습은 음울하면서도 기묘한 느낌을 주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누가 가늠이나 할 수 있을까.
마수의 침공으로 잃어버린 동토(凍土)의 구석진 곳에 이런 고성이 남아 있으리라는 걸, 또 그곳에 사람이 머물고 있다는 걸 말이다.
타닥, 타다닥.
한쪽 벽에 자리한 벽난로에서 튄 불씨가 나무로 만들어진 장판에 튀어 작은 흉터들을 남기고, 타들어 가는 장작의 불씨와 뒤엉킨 재의 잔향이 서재에 흘렀다.
까맣게 탄 작은 점들은 마룻바닥을 검게 그을리기에 충분했고, 그 위에 내려앉은 것은 또 다른 적막함이었다.
고즈넉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 다소 음울하다고 해야 할까.
두 가지의 표현 그 어딘가를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풍기는 서재 안에는 두 명의 남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
“…….”
보통 이런 분위기라면, 흔히들 묘한 밀회를 떠올리겠으나 정작 둘은 서로에게 어떠한 관심도 없었다.
단지 그들의 시선은 한쪽 구석에 놓인 백색 빛의 원통을 향해 있을 따름이다.
〔한 달. 딱 한 달을 기다려 주겠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두 남녀의 사이로 아직은 낯선, 그러나 절대 잊지는 못할 어투의 목소리가 스쳤다.
그리고 그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하, 하하하핫!”
무엇이 그리도 웃긴지 반사적으로 폭소를 터트린 그는 한참을 웃다가 이윽고 복부를 부여잡은 채 신음을 흘렸다.
“큭!”
“그러다가 덧나.”
그러자 척 보기에도 무덤덤하고 차갑다고 느껴지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남자는 답 없이 셔츠 단추를 풀었고, 곧 배에 묶은 붕대 사이로 피가 흐르는 모습을 확인하곤 쓰게 웃었다.
“이미 덧났습니다. 제기랄.”
그러나 그뿐.
딱히 심각한 일은 아니라는 듯 그는 소파 앞에 놓아져 있는 흰 붕대를 쥐고 배에 감기 시작했다.
그리고 붕대를 다시 감아 지혈을 완료한 그는 다시금 탁자에 붕대를 내려놓고는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저렇게 똑같으실까. 아,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이제 눈을 뜨신 지 1년이 막 지나셨다고 했죠?”
“그랬지.”
“그나저나 참 너무하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긴 시간을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때였다.
“……맞아.”
소파에 몸을 묻고 있던 남자와 달리, 서고의 책상에 앉아 묵묵히 서류를 검토하던 여자의 손이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여전히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기적이고, 멍청하며, 고집도 센 데다가, 언제나 강한 척이란 강한 척은 다 하고, 쓸데없이 무모하지.”
남자는 순간 그녀의 안광이 번뜩인 걸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는 그녀가 내뱉은 말 안에 담겨 있는 복잡한 감정을 모두 알기에, 도무지 한마디를 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왜 나타났다는 첩보에 그리도 급히 접촉하셨습니까? 좀 구르고 이리저리 고생도 좀 하게 놔두시지.”
“……그걸 지금 질문이라고.”
“하핫.”
다만 그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진 않았다.
아닌 게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상처가 덧나는 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녀의 시선에 태연하게 셔츠의 단추를 잠그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그녀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이만 일하러 가 보겠습니다. 누구 말씀인데 한 달 안에 끝내야죠. 만약 그러지 못하면 나중에 무슨 소리를 들을지…….”
그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이 몸을 떨었고, 그것만큼은 인정한다는 듯 여자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벽난로의 작은 불빛이 유일했던 서고에 때마침 달빛이 드리워 두 남녀의 얼굴을 드러내니.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다소 유약한 인상을 가진 남자…… 아미키 중령은 그렇게 말하곤 곧바로 서고를 나섰다.
“……후.”
그런 그의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여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창 일을 하던 와중에 나눈 대화 때문인지, 아니면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상황 때문인지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때마침 달빛이 그대로 내리쬐는 창가로 향했다.
저벅저벅…….
나무로 된 장판을 딛는 그녀의 모습은 흔히 제국군이 입는 군복이었다.
다만, 한 가지 특이점이 있다면 검은 군복에는 어떤 계급도 없다는 걸까.
그녀는 창가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유리 너머로 비추는 순백의 설산들을 눈에 담았다.
“하아.”
창문의 옅은 틈새로 밀려들어 오는 서늘한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그 한기에 약하게 미간을 좁힌 그녀는 곧 유리에 어스름하게 반사되는 자신의 얼굴을 응시했다.
남색의 머리, 남색의 눈동자.
그러나 동양적이었던 전생의 그것과는 다른 서구적인 외형은 ‘그’의 등장으로 스쳐 간 과거의 파편을 흐트러트렸다.
스윽.
그녀의 흰 손이 창가에 닿았고, 그녀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을 온전히 느끼며 이윽고 눈을 감았다.
“한 달.”
벌어진 붉은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단지…….
그 한마디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