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보름쯤 지났을까.
첫날을 제외하면 그에게 별다른 말이 없던 아미키 중령이 그를 호출했다.
“아, 리렌 원사님.”
“오셨군요.”
그도 며칠 전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아미키를 수행하는 부관의 이름은 리렌이었다.
그녀는 집무실 앞으로 찾아온 보리스를 기다렸다는 듯 안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확연히 바뀐 대대장의 집무실이 펼쳐져 있었다.
늘 술과 담배 냄새로 찌들어있던 방에는 북부에서 쉽게 맡아볼 수 없는 잔잔한 식물 냄새가 흘렀고,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책장엔 그도 알고 있는 책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뿐인가.
집무실 위에는 술병이나 태우나 만 담배꽁초가 아닌, 정갈한 서류들이 각이 잡힌 채로 도장이 찍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아미키 중령은 곧 보리스를 발견하곤 의자에 가볍게 몸을 묻으며 말했다.
“아, 오셨군요. 보리스 대위.”
“예.”
“앉으시죠.”
아미키 중령의 제안에 보리스는 별다른 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쪽에 놓여 있던 차를 따라 그의 앞에 놓아주곤 말했다.
“미안합니다. 진작 부르려 했는데 워낙 전임자가 일을 개판으로 해 놔서.”
“그렇습니까.”
확실히…… 전임 대대장은 일을 개판으로 했지.
보리스는 내심 속으로 동의를 하며 앞에 놓인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마주 앉은 아미키 중령은 잔잔한 웃음을 머금고 물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뭐를 말씀하시는 건지…….”
“처우 개선 말입니다.”
“아.”
그의 물음이 형벌 부대에 대한 처우 개선이 어땠냐고 물었던 것임을 뒤늦게 깨달은 보리스는 이내 찻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최대한의 존중과 고마움을 담아 말을 꺼냈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 주실 줄은 몰랐는데…….”
비단 그뿐만 아니라 형벌 부대원들조차 달라진 대우를 체감할 정도였다.
보리스는 고개를 숙였다.
이전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이 개선된 처우가 순전히 아미키 중령의 명령 덕분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그의 감사 인사에 아미키는 가볍게 손을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부분이니까요.”
늘 생각하는 거지만, 아미키 중령은 여타 봐 왔던 다른 장교들과는 본질적인 무언가가 달랐다.
항상 존대를 입에 담지만 만만하지 않고.
분명 웃음을 달고 살고 있음에도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습니다. 혹시 답을 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 네.”
“어째서 형벌 부대를 그렇게 챙기십니까? 결국 범죄자들인데 말입니다.”
갑작스럽게 던져진 화두.
그것을 물은 아미키는 짐짓 흥미롭다는 듯 집무실 중앙에 놓인 소파에 몸을 묻고는 대답을 기다렸다.
물음의 의도가 무엇일까.
보리스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미키 중령을 바라보았고, 곧 아미키는 아차 싶은 얼굴로 덧붙였다.
“혹시 불쾌했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궁금증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내심 대답해 주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보리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미 답을 내린 문제였으니까.
“제 개인의 만족 때문입니다.”
“만족이라…….”
그의 답에 아미키는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그로선 거창한 대의나 인류관이 나오리라 생각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건 얼마 전까지 보리스가 줄곧 읊조렸던 기본적인 신념이기도 했다.
여전히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다만 인정하게 되었을 뿐이다.
보리스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도덕적이어서, 혹은 우월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는 해야 할 답답함을 맡고 있다고 생각할 뿐이죠.”
“계속하세요.”
“거창한 신념이나 대의가 아닙니다. 한때는 그것을 내세운 적도 있지만 케린 소령이 죽고 나서 한참을 생각해 본 결과 저는 단지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걸을 뿐이었습니다.”
최소한의 상식.
지성체로서의 마지막 선.
“그것이 지켜지기를 바라고, 남들이 강권하고 때때로 회유하는, 현실과의 타협이 싫은 겁니다. 결국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한때 신동 소리를 들었던 그가 어찌 주변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법을 모르겠는가.
다만 하지 않을 뿐이다.
보리스는 아미키를 직시하며 말했다.
“죽을 뻔도 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인연을 만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는 여전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아미키에게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단테 소위에게도 보답하고 싶긴 하군요. 목숨을 빚졌거든요.”
마지막 말은 적당한 환기용이었다.
동시에 진심이 담긴 말이기도 했다.
애초에 그 전선에서 단테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신념이고 나발이고 죽어서 마수의 이빨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을까.
“그렇군요.”
보리스의 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미키 중령은 지금까지 중 제일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곧 덧붙였다.
“담백한 대답이었습니다. 덕분에 제 선택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칠 거 같군요. 이만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 보리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막 집무실이 있는 건물에서 나와 막사로 향하려던 그때.
위이이이잉!
갑작스럽게 귀를 찢을 듯한 경보가 울리고, 당황한 모두의 시선이 망루로 향한 순간.
〔마수들이다아!〕
전 기지에 정찰병의 당황 가득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기갑천마
진실로 한 발자국 (3)
“비켜!”
보리스는 다급한 걸음으로 그들이 기지로 삼고 있는 고성의 성벽을 타고 올라가 저 너머를 바라보았다.
“이, 이게 무슨.”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한눈에 담은 그는 곧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엔 하얗디하얀 눈안개로 뒤덮여 있던 평원이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캬아아아아아!
-끼에에에에!
평원에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혔다.
새하얗던 눈 위에는 온갖 색깔의 추악한 점액이 흘러 더럽혀지고, 머잖아 진창이 된 대지 위를 짐승이라 부르기에도 벅찬 괴물들이 짓밟고 내달린다.
그러나 군인들을 절망하게 한 것은 단순히 놈들의 급작스러운 습격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놈들의 숫자.
“수백, 아니 어쩌면…….”
보리스의 곁에 선 이름 모를 부사관이 침음과 함께 내뱉은 읊조림이었다.
차마 끝까지 말하지 않고 삼켰지만, 그의 말을 들은 이들 중 뒤에 이어질 단어를 유추하지 못한 이는 없었다.
‘놈들의 수는 1천을 넘을지도 모른다.’
이 전장에 서 있는 이들이 공유하는 공포였고, 나아가 눈앞에서 시시각각 밀려오는 두렵고도 잔인한 현실이었다.
보리스는 눈동자를 굴려 장병들의 얼굴을 훑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의 얼굴에 자리한 것은 짙은 절망감과 더불어 패배감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부대명 제401 정찰대대.
총원은 최근 충원된 형벌 부대원들을 합쳐도 채 700명을 넘기지 못한다.
안개 너머로 달려오는 마수들의 모두 하급이라고 해도 쉽사리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소수의 병력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절망이라는 이름의 병폐는 너무나도 빠르게 장병들을 따라 전파되었다.
“주, 죽을 거야.”
“아아…… 어머니.”
용기, 아니 차라리 만용이라는 이름의 객기라도 부리기엔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었다.
그 때문에 일부는 벌써 무릎을 꿇고 다가올 죽음에 체념하며 몸을 떨었다.
오죽하면 그토록 없는 사람 취급을 했었던 보리스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시선이 쏠릴까.
“……제기랄.”
하지만 그라고 답이 있을 리가 없다.
그저 다른 군인들보다 조금이나마 더 침착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가 가진 유일한 이점일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치지직-거리는 잡음이 두려움의 주파수를 잡아먹듯이 그들의 귓가를 스쳤고, 머잖아 부대 곳곳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아- 들리십니까?〕
그 목소리는 나긋했고, 또한 여유롭기가 그지없었기에 모두의 시선이 목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돌아갔다.
그것은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곧 언제 집무실에서 나왔는지 모를 아미키 중령을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중령의 모습은 뭐랄까…… 너무나도 평온했다.
마치 마수들이 밀려오는 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당연히 몇몇 부사관들은 아직 그가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하곤 그에게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선택지를 드리겠습니다. 후릅.〕
그는 그렇게 말하곤 손에 쥔 철제 커피 잔을 입가에 댔다.
갈색……. 아니 검정에 가까운 물이 그의 입술을 적시고, 그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부대원들을 잠시 훑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제 명령을 듣고 살든지, 아니면 명령 불복종으로 군법도 어기고 마수들의 한 끼 간식이 되어 죽든지.〕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죽음에 자신도 포함되리라는 것이 당연함에도 그는 따스한 커피를 입에 머금으며 노곤한 미소를 짓는다.
그 괴리감에 일부 부사관들과 장교들은 혹시나 그가 미친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오직 보리스만은 아미키와 뒤따른 리렌 원사의 정체를 떠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둘은 에이스일 확률이 있다.
사실, 그는 반쯤은 확신하고 있었다.
만약 아니라고 해도 아미키 중령의 말은 실로 타당한 것이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발악이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차피…….
〔여기서 제일 가까운 연대까지 살아갈 수 있을 리도 없으니, 웬만하면 들어주시죠.〕
그의 말대로 정찰대대라는 특성 때문에 그들은 최전방의 외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즉, 도망친다고 해도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아미키 중령은 너무나 손쉽게 그런 잔인한 진실을 담백하게 읊조렸고, 역설적으로 대대 안에 있는 이들은 묵묵히 총을 쥐고 그를 응시했다.
보리스는 생각했다.
아마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리라.
‘무언가 방법이 있겠지?’
저렇게도 여유롭다면 무슨 방법이라도 있을 것이다.
한없이 무책임한 바람이었으나, 이 순간만큼은 보리스도 그에게 무언가 해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어느새 커피 잔을 다 비워 낸 아미키 중령은 잠시 대대 안을 살피곤 통신기를 다시금 입 앞에 가져댔다.
〔지모튼 대위.〕
“예!”
〔전방에 화력 집중.〕
그의 명령을 받은 포병 중대의 지모튼 대위가 황급히 포대를 조정시켰고, 뒤이어 아미키는 차례대로 각각의 중대와 소대를 호명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리스 대위.〕
“예!”
일단은 큰 목소리로 화답한 보리스는 긴장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형벌 중대의 총원은 현재 147명.
그들에게 또 다시 부당한 자살 명령이 내려질까, 그는 그것이 두려웠다.
아무리 처우를 개선했다고 하나 이런 갑작스러운 이변에는 어쩔 수 없다는 말이 명분이 될 테니까.
그리고 이내 내뱉어진 말은.
〔형벌 중대는 측면을 맡습니다. 상대적으로 화력이 부족할 테니 나이트 프레임 2기를 붙여 드리죠.〕
“……예!”
중령의 배치에 놀란 건 보리스뿐만이 아니었다.
대대의 나이트 프레임은 총 10기.
중요 전략 병기인 그것을 2기나 측면에 배치한다는 건 측면을 버릴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보리스를 끝으로 대대의 전열이 정비되자, 아미키는 어느새 안개를 뚫고 눈에 보일 정도로 다가온 마수들을 지그시 응시했다.
〔뭐 하십니까?〕
비스듬하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그는 어느새 사기를 끌어 올린 대대를 응시하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살고 싶으면 쏘세요.〕
낡은 통신기에서 울린 웃음기가 섞인 작은 속삭임일 뿐이었지만, 그 순간 격납고의 문이 열렸다.
쿠웅!
쿠우웅!
옅은 서리가 낀 장갑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수증기가 솟구치고, 붉게 변한 안광을 흩뿌리며 나이트 프레임들은 일제히 마수들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수들이 그러했듯, 육중한 발자국이 남은 대지에는 검은 흙이 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보리스는 문득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착각인가?’
순간 자신을 향해 묘한 시선이 닿은 것 같은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전투가 시작된 상황에 계속 한눈을 팔 수도 없기에, 그는 찝찝함을 애써 무시한 채로 허리께에서 권총을 뽑아 정면을 겨냥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머리 위로 수많은 섬광이 흩뿌려지며 검은 하늘을 어지럽게 번뜩였다.
“발포오-!”
찢어질 듯한 외침이 귀를 스쳤다.
콰아아앙!
콰과과과과광!
번개와도 같은 포성이 울리고, 이윽고 쇄도한 마력포의 섬광은 그야말로 하늘의 천벌이 되어 마수들의 육신을 두드렸다.
핏물이 튀고, 살점이 추락했다.
-끄르륵!
-끼, 끼이이이!
더러운 진창에 거대한 육신이 쓰러지고, 천둥과도 같은 포성이 쓰러진 육신을 두드리며 난잡하게 헤집었다.
보리스는 그 모습을 눈에 담았다.
갈색의 눈동자는 더는 유약하게 떨리지 않았고, 단단해진 동공은 묵묵히 나아갈 방향을 직시하듯 침착했다.
“미천한, 한때 당신을 의심했던 가녀린 양이 바라옵건대.”
찰칵- 소리와 함께 방아쇠의 서늘한 감각이 손끝을 지나 뇌리에 닿는다.
“내일도 여명을 마주하길 소망하오니.”
그는 마탄이 장전된 총구를 전방에 겨눴고.
“부디, 황혼 뒤 어둠 속에서 당신의 종을 보호하소서.”
근처에 있을 형벌 부대원들에게만 간신히 들릴 정도로 낮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마지막 기도를 읊조렸다.
그리고 그 기도를 끝으로 당겨진 방아쇠.
타아앙!
순간적으로 흩뿌려진 마나의 잔향이 공기를 어지럽히고, 이윽고 나이트 프레임을 지나 성벽을 향해 밀려오던 하급 마수의 미간을 꿰뚫으니.
-끼, 끼에에에에!
놈은 몸을 비틀며 고통에 몸부림쳤고, 보리스는 침을 삼킨 채 총을 쥐고 있는 형벌 부대원들을 향해 외쳤다.
“갈겨어!”
그리고 그의 외침을 기점으로.
“으아아아아아!”
“죽어어! 죽어어어어!”
그야말로 포성과 괴성, 죽음과 핏물이 낭자한 전투의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