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25화 (125/197)

“하아.”

북부 고르티그.

그렇게 적힌 표지판을 바라보던 보리스는 낮은 한숨을 쉰 채 머리에 쓴 군모를 더욱 눌러썼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조금 잠잠해졌다고 바로 유배에 가까운 전출이라니.

“……그러니 바꿔야지.”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비가 내린 땅은 조금 파이고 흐트러지지만, 햇살이 내리쬐면 더욱 단단하게 굳는 법이다.

“하암…… 보리스 대위님?”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플랫폼의 입구로 나섰고, 곧 보기에도 군기가 빠진 운전병이 태워 준 차를 타고 부대로 직행했다.

그렇게 고르티그 방위 군단에서 예하 사단으로, 사단에서 다시 여단으로, 여단에서 또다시 연대로 향한 보리스에게 운전병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대체 얼마나 밉보이신 겁니까?”

보리스는 그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연대에서조차 밀려난 그가 배속된 곳은 최전선의 정찰대대였다.

제401 정찰대대.

총원 672명.

과거 북부가 아직 온전한 인간의 영토였을 때 거처 중 하나였던 산성을 거점 삼아 주둔하는 그들은 보리스를 보자마자 마치 또 하나의 소모품이 왔다는 표정으로 상부에 보고했고, 곧 대대장은 얼굴조차 비추지 않은 채 휘하의 부사관을 보내고는 부대 지침과 전술 교본을 전해 주었다.

“형벌 부대는 기본적으로 가장 험지로 향합니다. 대위님이 직접 가실 필요는 없고, 이쪽은 형벌 부대가 모자라면 보충해 달라는 보급계인데, 그냥 매달 150명씩 꾸준히 신청하십시오. 어차피 다 죽거든요.”

그녀는 무언가 결여된 사람처럼 형벌 부대를 그저 정찰용 인형을 잃었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자리를 떠난 그녀를 보며 보리스는 생각했다.

군 생활이 녹록하지는 않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13일 뒤에 실현되었다.

“지금 장난치나!”

콰앙!

보리스는 눈앞에서 탁자를 내리치는 대대장을 묵묵히 응시했다.

곧 그는 달아오른 짜증과 분노에 탁자 위의 술을 한 모금 머금곤 이내 보리스를 향해 술잔을 던졌다.

터어엉!

금속으로 만들어진 술잔은 보리스의 뺨을 지나 방 안의 캐비닛에 부딪쳤다.

곧 대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다시 말해 봐!”

“……현 부대에서 자행되는 형벌 부대의 임무는 제국법이 보장하는 제국민의 최소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다고 하나 그것이 제국민의 기본 권리를 침해할 법적 근거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 휘하 형벌 부대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한 개선안과 부당했던 일을 정리한 보고서를 이미 헌병대에 제출했습니다.”

“이…… 이 미친 새끼가!”

결국, 보리스의 말에 대대장은 더 참지 못하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142명.”

보리스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순간 멈칫한 대대장의 어깨에 달린 소령 견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대대장님의 명령에 지난 한 달 동안 죽은 형벌 부대의 총원입니다. 그중 32명은 비합리적인 정찰 거리로 인해 동상이 걸려 죽었고, 그중 73명은 지난 소트른 강가 수색에서 구원을 요청했으나 대대장님의 거절로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죠. 추후 조사 결과에는 나이트 프레임 단 3기만 파견해도 전원 구원할 수 있다고 결과가 나왔는데 말입니다.”

그들은 변변찮은 총기와 퇴역해도 이상하지 않을 궤도차 4문을 가지고 무려 3시간을 버텼다고 한다.

즉,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병력이었다.

보리스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뻐금거리는 대대장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나머지 37명은 얼마 전 좌표 계산 실수로 아예 실종되었죠. 그 좌표를 검수해야 한다는 제안을 무시하신 것 역시 대대장님이셨고요.”

마지막 건은 보리스뿐만이 아닌 부사관들도 고개를 저었던 일이다.

“제국을 고난 속에서도 존속시키고 또 영광된 전쟁을 지휘하시는 황제 폐하께서 보장하시는 제국법 1조 32항, 모든 제국 신민은 비록 제국법에 저촉되는 범죄를 저지른다고 해도 기본적인 제국 신민의 권리를 침해받을 수 없다. 제국 신민의 권리에는 부당한 명령을 받지 않을 것과 개인의 생존을 국가로부터 보장받는 것이 포함되어 있죠.”

보리스는 어느새 자신이 우유부단한 모습을 버리고 조금씩 군인의 모습을 갖추어 가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순수한 분노를 담아 눈앞의 무능한 대대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이, 이건 하극상이야!”

할 말이 있을 리가 없었다.

대대장은 입술을 몇 번 짓씹고는 얼굴이 붉어지도록 외쳤다.

그러나 그때.

콰아아앙!

그들이 있던 대대장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검은 제복에 흰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견장을 단 일련의 군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을 본 대대장은 눈이 찢어지도록 크게 뜬 채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허, 헌병……!”

헌병들이 아무런 용건도 없이 이 추운 북부까지 왔을 리가 없기에, 조금만 머리가 있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입니다.”

보리스는 예상했다는 듯 잡힌 멱살을 무심히 풀고는 한쪽으로 비켜섰다.

헌병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대장의 앞으로 걸어가 황실의 직인이 찍힌 문장을 내밀며 말했다.

“토틀 소령,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보리스가 서류를 올린 게 며칠 전이다.

그런데 이렇게 빨리 헌병이 들이닥칠 수가 있는 것인가.

그런 의문에 답한 건 눈앞의 헌병이었다.

그는 힐끔 보리스를 바라보곤 무심하게 답했다.

“헌병대에 투서한 문서가 훌륭한 고발문이었습니다. 증거도 꽤 많이 동봉되어 형을 피하긴 어려울 겁니다.”

“보리스! 보리스으! 이 폐급 새끼가아아!”

결국 토틀이란 이름을 가진 소령은 헌병들의 손에 밖으로 빠르게 끌어나갔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보리스에게 서류를 접던 헌병이 토틀과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말했다.

“또 일을 저지르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진급을 위해서 웬만하면 참아 보려 했는데, 도무지 참을 수가 있어야지.

그런 보리스는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중령 계급을 단 헌병에게 말했다.

“이제 전 어떻게 됩니까?”

이보다 더한 좌천지는 없을 테니까, 아마 계급 강등이나 전역 처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그에게 헌병은 답했다.

“글쎄요.”

평소라면 그냥 ‘모르나 보다.’라고 생각했을 법한 말이었지만, 왜인지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알면서 숨기는 느낌이 들었기에.

그리고 헌병은 떠나며 말했다.

“운이 좋으셨습니다.”

그때 보리스는 그가 선처에 관한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확히 이틀 뒤.

그 말이 다른 것을 뜻한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우우웅…….

온통 눈으로 뒤덮인 기지의 격납고에 실로 오랜만에 수송선이 내렸다.

하지만 한창 따가워진 기지 내의 눈초리에 막사에 박혀 보급계를 정리하던 보리스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보급은 멀었을 텐데?”

그는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막사 밖을 확인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순간.

끼기기긱!

다소 낡은 수송선의 문이 열리고, 군복이 아닌 웬 스웨터를 입고 한 손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 잔을 들고 있는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가진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채, 꽤 큰 안경을 끼고 있었다.

유일하게 바지만 군복을 입은 게 아니라 정장을 입었다면 제도에서 일하는 상인이나 문관이 아닐까-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어?”

“뭐야?”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격납고 근처로 다가온 대대원들의 표정에는 의문이 가득 찼다.

그러나 그때.

남자는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자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으니.

“자, 다들 반갑습니다. 제401 정찰대대에 새로 부임한 대대장, 아미키 중령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그는 모여든 대대원들에게로 시선을 돌리다가 곧 보리스와 눈을 마주치더니.

“어! 보리스 대위, 반갑습니다!”

“예?”

당연하게도 보리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갑천마

진실로 한 발자국 (2)

“저를 아십니까?”

보리스는 그렇게 묻고도 내심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새로 부임했다는 대대장.

아미키 중령의 외형은 누가 보더라도 엘리트 군인으로 보였다.

특히 부임한 시기도 그렇지 않은가.

아마 제국도 생각이 있으면 헌병이 지나간 자리에 또 전임자와 같은 수준의 사람을 보내진 않았을 테니까.

그런 사람이 전임자가 어떻게 모가지가 날아갔는지 모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기에 의문이었다.

보리스는 개인으로 보기에 선인일지 모르나 군대라는 집단 안에서는 꽤 껄끄러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기본적으로 군대라는 조직은 폭력을 다루는 조직이며, 그로 인해 많은 문제가 ‘어쩔 수 없다.’ 내지는‘대의를 위해서’라는 포장으로 묵인되고는 하니까.

……오죽하면 엄연히 형벌 부대 중 한 중대의 지휘관인 그가 은연중에 따돌림을 당하고 있겠는가 말이다.

그렇기에 아미키 중령이 그를 무시하거나 경멸할 순 있어도 이렇게 달갑게 다가오는 건 이질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아미키 중령이라고 소개한 그는 언뜻 능글맞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그의 물음에 화답했다.

“세습은 아니지만 명문 행정가 가문인 쥬가스빌가(家)의 차남으로 어릴 때부터 독실한 신자였고, 똑똑했으며, 또한 번듯한 성품으로 가문 내에서도 기대를 받고 있었고…….”

후릅.

그는 손에 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장남과도 우애가 돈독. 그렇기에 가문의 자랑이었으나 성인이 되기 1년 전 돌연 제국군에 입대를 자원하게 되고 나이트 프레임 파일럿이 되기를 원했으나 적성이 부족해 행정계 장교로 입대. 그러나 얼마 후 형벌 부대 지휘관을 자처하며 케린 소령 예하 부대로 차출.”

보리스는 묵묵히 아마키 중령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놀라움과 동시에 작은 불쾌감이 떠올랐다.

저 정도로 상세하게 알고 있다는 건 뒷조사를 했다는 말일 테니까.

그러나 아미키는 멈추지 않았다.

“형벌 부대를 이끌고 작전을 수행한 끝에 중위로 진급. 그러나 네임드, 나이트메어의 습격으로 인한 부대 해체 과정에서 케린 소령의 독단으로 이뤄진 형벌 부대를 겨냥한 고의적 아군 살해 혐의를 진술. 그로 인해 이곳 제401 정찰대대로 전출되신 의인 아니십니까?”

그의 길고 긴 설명에 당황한 것은 보리스뿐만이 아니라, 격납고 근처에서 그의 말을 들은 인원 전부였다.

보리스에 대해 귀띔해 주려던 이들은 물론 묵묵히 상황을 관망하던 이들 모두가 동시에 생각했다.

……저건 갈구는 걸까, 아니면 칭찬하는 걸까?

그리고 그건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복잡한 눈으로 아미키 중령을 응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미키 중령은 당황한 듯 눈동자를 굴리는 보리스의 어깨에 가볍게 손을 올리곤 말했다.

“괜찮습니다. 원래 처음으로 인정을 받으면 당황스러울 수 있어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피식 웃었다.

제국에선 보기 쉽지 않은 흑발과 흑안이 유독 눈에 밟혔다.

왜인지 흑발을 하고 있던 소위가 떠오르긴 했지만, 그는 그저 기분 탓이겠거니 생각하며 경례를 올렸다.

“예, 알겠습니다.”

순진하게 그가 정말로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면 반대겠지.

그렇다고 해도 일단은 책잡히지 않는 게 우선이리라.

그런 단테의 경례에 아미키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무언가를 더 말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중령님.”

두 남자의 대화 사이로 미성이 흘렀다.

시선을 조금 돌리자, 조금도 흠잡을 틈이 없는 정갈한 군복을 입은 여군 한 명이 손에 파일을 든 채 아미키의 뒤로 다가섰다.

반쯤은 본능적으로 어깨로 시선을 향한다.

‘원사…….’

흑발의 아미키와 대조되는 백은발의 머리를 단발로 자른 그녀는 차가워 보이는 인상에 걸맞게 딱딱한 어투로 말했다.

“듣는 귀가 많습니다.”

“아, 그렇긴 하죠.”

아미키는 그런 그녀에게 가볍게 웃어 주더니 손에 쥐고 있던, 조금은 식은 커피가 담긴 컵을 한 번 기울였다.

그리곤 곧 가볍게 보리스의 어깨에 올라가 있던 손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앞으로 잘해 봅시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좀 있으니까요. 그럼.”

아미키는 보리스가 화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는 곧바로 몸을 돌려 전임 대대장이 머물던 곳으로 걸어갔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부관 역시 보리스에게 작은 묵례를 올렸고,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한 여파에 모두의 표정은 얼떨떨하기 그지없었다.

“……종잡을 수가 없네.”

“아미키? 그런 이름을 가진 중령도 있었나?”

“알 게 뭐야. 최근에 진급하기라도 했나 보지.”

그것도 잠시.

그들은 곧 새로 부임한 대대장을 가십거리 삼아 대화를 나누기 바빴다.

하지만 보리스는 달랐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의 어깨를 두드리며 의미심장한 첫인사를 건넨 아미키 중령과 그의 부관을 떠올렸다.

각각 목과 반지에 심상찮은 보석을 걸고 있었고, 그는 그것이 전용기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말인즉…….

‘에이스가 2명이나?’

이곳에 에이스가 무려 2명이나 배속되었다는 말이다.

보리스는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지역은 북부 중에서 중요도가 떨어지는 곳이다.

물론,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말은 아니었으나 중요 자원 중 하나인 에이스 파일럿을 2명씩이나 보낼 이유는 전무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