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브락.
잭은 수풀을 걷으며 설명을 멈췄다.
그러곤 불과 몇 시간 전에 자신이 도망쳤던 곳이자, 그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언덕을 가리키며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겁니다.”
“그러지.”
잭이 걷어준 수풀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단테를 뒤따른 로한과 헤리안, 보리스는 곧 제각기 침음성과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으니.
“이런 젠장.”
“맙소사.”
특히 헤리안은 여태까지 보여주었던 태연한 모습과 달리 흔들리는 시선으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에 들어온 마을의 모습은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물론, 특히 엄중한 교리 속에 살아가는 법국의 장교인 그에겐 더욱 충격일 테니까.
-와아아아아!
마을은 무너지지 않았다.
마수의 침략을 받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람을 타고 짙은 피 냄새가 흐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같은 마을 사람들의 피였다.
단테의 시선이 마을에 닿았다.
정확히는 같은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꼬챙이에 꿰인 사람들을 보았다.
툭, 투둑…….
마을 곳곳에 꼬챙이와 시체가 가득했다.
그리고 한쪽에선 더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르렁거리며 꼬챙이에 꿰인 인간을 잡아먹고 있는 한 마수의 등에 사제처럼 보이는 누군가가 타고 있었다.
“이젠 하다 하다 마수까지 타고 다닌다고?”
단테와 마찬가지의 광경을 보고 있던 로한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단테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의 뜻을 비쳤다.
그만큼 그도 어이가 없었다.
-결국, 인류는 도태될 것이다!
바람을 타고 저 멀리서 마수 위에 탄 사제의 열변이 그들의 귓가를 스쳤다.
동시에 헤리안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이를 악물었으나, 그의 뒤에 있던 보리스가 살며시 팔을 잡음으로써 그것을 말렸다.
그리고 그 시간에도 사제의 열변은 이어졌으니.
-인류가 발악하고 있지만 결국 바스러질 뿐, 결국 마수들의 시대가 도래한다! 우리는 그것을 대비하고 준비하며 새 시대의 주인들께 자비를 빌어야 한다!
단테는 어느새 사제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그의 말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원죄는 우리가 인류로 태어난 것이되, 마지막 원죄는 우리가 죽여 간 그분의 수많은 자식이니. 그만큼을 죽여 바쳐야 새 시대의 주민이 될 수 있으리라!
거기까지 들은 단테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7 추기경이 말한 것과 헤리안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결국 말리하 내부 마을은 미쳐 버렸고, 그것은 마수 숭배라는 말 같지도 않은 방향으로 터져 나와 버린 것이다.
단테는 잠시 마을 전체를 훑었다.
‘규모가 작지 않았군.’
이 정도면 중원에서도 꽤 규모가 있는 마을이다.
더욱이 입지도 나쁘지 않았다.
한쪽엔 산을 등지고 앞에선 강을 바라보고 있으니,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가 아닌가.
잭의 말도 허언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보았던 것과는 한참 동떨어진 구형의 것이긴 했지만, 마을 곳곳엔 나이트 프레임들을 보관하는 격납고와 구식 궤도, 구식 마력포가 널브러져 있었다.
물론 지금은 반쯤 광기에 넘어간 이들이 시체를 널어 놓는 용도로 쓰이고 있었지만 말이다.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그때 단테의 뒤로 다가온 헤리안이 역겨움과 혐오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단테에게 말했다.
“지금쯤이면 최상급 마수는 충분히 배제되었을 겁니다. 빠르게 모하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두 곳의 마을도 이참에 끝내버리시죠.”
“예? 그, 그게 무슨……! 저 사람들을 구해 주셔야죠!”
헤리안의 입에서 나온 거친 적의에 잭은 놀라서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한없이 냉정했다.
“잭, 너도 눈이 있으면 봐라. 저게 평소의 주민들 같나? 저건 그냥 미쳐 버린 배교자 무리일 뿐이야.”
“하, 하지만…….”
“너희가 택한 일이다.”
헤리안은 싸늘한 시선으로 잭을 노려보았다.
“예전부터 꺼림칙했던 다른 마을과 달리 모하트는 확실히 갱생의 여지가 있었다. 그렇기에 주기적으로 제안을 건넸지. 그런데 그 기회를 모조리 걷어찬 것은 너희다.”
“……저희가 자초한 일이라는 거군요.”
잭은 고개를 떨궜다.
분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적어도 헤리안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때.
“잭.”
걸음을 돌린 단테는 무심히 잭과 헤리안의 사이를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약초꾼이면 이 일대의 지리를 잘 알겠지.”
“예? 아, 예!”
“협곡부터 안내해라.”
“예?”
협곡부터 안내하라는 말.
그 말에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이 단테를 바라보았고, 특히 헤리안은 믿을 수가 없다는 듯이 입을 열었으나.
“대령님!”
“헤리안 솔 아르헤스.”
이어진 단테의 무심한 목소리에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고, 곧 단테는 한심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수들을 길들이는 이례가 없는 놈들이다. 인간이 엮여 있다는 소리고, 그만큼 영악하겠지. 그런데 모하트부터 날리면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마수를 길들인 사제.
광신도를 만드는 연설.
마을 하나를 집어삼킬 세력.
……손쉽게 볼 상대가 아니다.
더욱이 아직 풀리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섣부르게 움직일 때가 아니라는 말이다.
“일단 베히모스가 추락했다는 협곡부터 가 보고, 그 이후 첫 번째 마을로 향한다.”
단테는 이견 따위는 받지 않겠다는 듯 말했고, 그의 말에 헤리안 역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생각에 동의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가진 권위는 고작 법국의 소령 따위가 범접할 것이 아님을 인정한 것이다.
로한과 보리스는 애초에 단테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말이다.
상황을 정리한 단테는 잭을 바라보며 말했다.
“계속 서 있을 건가?”
그리고 그 순간.
잭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아주 작게 중얼거렸으니.
“저, 저희 마을을 위해 이렇게까지…….”
단테는 미간을 좁히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약초꾼도 정상은 아니라고 말이다.
기갑천마
베히모스의 잔재 (2)
말리하산맥은 고산 지대답게 산세가 매우 험한 편에 속했다.
그 때문에 잭은 뒤늦게 협곡과 거리가 멀고 한참을 올라가야 한다며 그들을 만류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안내나 하라는 일축이었다.
잭은 내심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리는 이유가 있었으니까.
“아니, 초입은 그나마 안전하지만, 산맥 안에는 마수들이 나타난단 말입니다!”
잭의 걱정도 기우가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말리하산맥 초입 부근은 마르크닌과 모하트 마을의 자경단이 주기적으로 정리를 하는 데에 반해, 조금만 깊게 들어가도 마수들이 우글거린다.
그런데 아무리 군인이라고 해도 단신으로 고작 다섯 명이 협곡으로 향한다?
아무리 종종 자경단과 산맥 깊숙이 들어갔던 잭이라고 해도 이건 자살이나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 전 최상급 마수도 산맥 안에서 튀어나온 거라고요…….”
그러니 어느 정도는 충격에서 빠져나온 잭이 그들을 말리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잭의 말은 아주 간단하게 일축되고 말았다.
“안내해.”
단테의 한마디.
그의 말에 잭은 어쩔 수 없이 ‘에이, 될 대로 돼라.’라는 심정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러면 여전히 모하트 마을을 무섭게 바라보는 헤리안이 당장이라도 마을을 몰살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무서운 마음은 여전했다.
하지만 지금.
잭은 어째서 그들이 그렇게도 자신만만했는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쿠어어어어!
“마, 말도 안 돼!”
거대한 포효성이 울렸음에도 잭은 땅에 뿌리라도 내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백번은 옳으리라.
그리고 그런 그의 귓가에 통신기 너머로 울리는 로한의 나지막한 푸념이 스쳤다.
〔에휴, 어째 진급을 해도 바뀌는 게 없냐.〕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쿵쿵거리며 산맥을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마수를 바라보았다.
과연 잭이 경고한 이유가 있는 듯이 중급 마수로 이루어진 무리였다.
저 정도라면 자경단에겐 악몽이고, 마르크닌의 정규군에게도 쉽지는 않은 상대일 것이다.
하지만 로한은 달랐으니.
끼기긱-거리는 기체의 꿈틀거림이 콕피트 안의 로한에게 온전히 느껴졌다.
그의 붉은 기체의 끝에는 서늘한 감촉이 흐르는 총구들이 내밀어졌다.
캬아아아아!
이윽고 마수 중 선두에 선 놈이 그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고, 로한은 서서히 예열되던 마나 하트를 꿈틀거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짖지 마. 시끄러우니까.〕
그리고 그 순간.
타다다다다다다다!
마나 하트에서 울컥하고 뿜어진 마나는 케이블을 따라 그의 붉은 기체를 내달렸고, 메인 코어를 뜨겁게 달구며 하나의 섬광과 같은 총탄으로 변환되었다.
흩뿌려지는 총탄이 향한 자리에 남는 것은 터져 가는 피와 살점뿐이고, 추락하는 것은 오직 달려들던 마수들의 사체들이었으니.
거창한 묘사조차 필요가 없다.
잭이 보기에도 저건 학살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학살 말이다.
그러나 잭이 멍한 눈으로 그들의 앞에 선 로한의 기체 레기온의 압도적인 화력을 눈에 담고 있던 그때.
“어?”
뒤에서 들려오는 보리스의 나지막한 탄식에 잭은 문득 시선을 살짝 위로 올렸다.
그리고 곧 잭의 시야에 화망을 뚫고 몸을 위로 던지는 한 마수가 들어왔으니.
키에에에엑!
놈의 움직임은 일개 민간인인 잭이 뒤쫓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빨랐기에, 그가 보기엔 당장이라도 레기온은 공격을 받아 무너질 거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 진짜.〕
콰아악!
레기온의 투박한 손길이 입질하는 마수의 목을 틀어쥐었고, 잭이 미처 환희하기도 전에 총구를 입에 틀어박더니 방아쇠를 당겼다.
문제는 그 총이 연발이라는 점이고, 이윽고 불을 뿜은 총탄이 마수가 비명을 내지를 새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놈의 머리를 터트렸다.
콰드드드득!
총알로 뇌가 헤집어지다 못해 다져진다.
사방으로 튄 핏물이 레기온의 붉은 장갑 위로 떨어지고, 그런 압도적인 모습에 잭은 물론이고 헤리안마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제, 제국의 에이스가 대단하다는 말은 들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헤리안이라고 무작정 산맥 안까지 온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로한이 에이스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단테 대령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이 얼마 정도인지도 알고 있었다.
제국의 에이스가 얼마나 강한지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조금쯤은 허황되었으리라 생각한 게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원래 소문이라는 것이 말이 오가다 보면 조금씩 과장되고 와전되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단테 대령은 나서지도 않았는데 저 정도라니.’
실제로 본 소문의 진상은 그의 기대를 다른 의미로 배신했고, 그건 헤리안에게 꽤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끄응차.”
철퍽.
어느새 달려들던 수십 마리의 마수를 단신으로 그야말로 갈아버린 로한이 기체를 역소환하며 대지를 디뎠다.
핏물이 군화에 튀었고 그는 지치기는커녕 스트레스를 풀었다는 듯 드물게 밝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에 단테는 말했다.
“잘 싸우던데.”
“예, 뭐…….”
단테의 말에 로한은 ‘웬일로 칭찬을 다 해 준대’라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단테는 피식 웃으며 그를 지나치듯 걸으며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로한.”
“……아.”
그리고 그 말에 로한은 깨달았다.
헤리안, 보리스, 잭.
누구도 당장 기체가 없다.
그러니, 마수들이 나타날 때 싸울 수 있는 건 단테와 자신뿐.
그런데 조금 전 단테의 말은 그 싸우는 역할을 아예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고로, 짬 처리다.
로한은 가뜩이나 실선인 눈을 호선으로 말아 올리며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어 담배를 꺼냈다.
벌써 반쯤 태운 구겨진 담뱃갑이 손에 쥐어지고, 그는 담배를 입에 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리베라가 보고 싶은 건 처음인데 말이야.”
치익, 습.
담배에 불을 붙이자 흰색의 끝자락이 붉게 달아오르며 회색빛 연기가 타올랐다.
그렇게 한 모금을 삼킨 로한은 보리스를 힐끔 바라보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 중령님은 기체 없습니까?”
보는 눈이 있어 존대를 건네지만, 실상은 블랙 가드 후배를 갈구는 것이었다.
“하핫, 그러게 말입니다.”
하지만 보지 못했던 사이에 보리스는 도대체 뭘 처먹었는지, 예전의 유약했던 그라면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을 터인데 되레 웃으며 받아치는 게 아닌가.
그런 모습에 로한은 고개를 저었다.
이 자리에 정상은 자신밖에 없다는 걸 새삼 깨달은 탓이었다.
그때였다.
“대, 대단하십니다!”
잭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다가왔다.
아무리 종종 모하트 마을 자경단의 길잡이를 했던 그라고 해도 나이트 프레임 기술이 압도적인 제국의 기체, 특히 에이스 기체는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덕분에 로한은 내심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령님이나 되시는 분이 너무 과감하다 싶었는데 믿는 구석이 있으셨군요!”
“어…….”
하지만 이어지는 잭의 말에 로한은 잠시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핏물로 점철된 사체를 어떤 동요도 없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는 단테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인간이 날 믿는다고? 그럴 리가.”
“네?”
“아니다. 안내나 해.”
“아, 넵!”
잭은 그렇게 말하곤 조금은 상기된 얼굴로 단테의 뒤를 쫓았다.
마을이 박살 났는데도 애써 밝은 척하는 모습이 새삼 걸렸지만, 그보다 조금 전 잭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그는 웃었다.
“차라리…… 자기 자신을 믿는 게 맞을 텐데.”
타악.
로한은 그렇게 중얼거리곤 거의 다 탄 담배를 핏물 위로 던지며 어느새 조금은 멀어진 일행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자리엔, 조금 전까지 포효를 일으키던 마수들의 사체만이 싸늘하게 식어 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