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08화 (108/197)

연회가 열리고 며칠 후.

솔라노스 대성당에 모인 특임대의 장교들은 모두 각국의 군복을 입고 단상 위에 선 법왕을 응시했다.

“아.”

법왕을 알현한 것은 단테를 비롯한 수뇌부뿐이었기에 대성당을 채운 중간 장교들은 모두 법왕의 모습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단순히 법왕의 위엄과 자태에 감탄하는 그들과 달리 일전에 그를 보았던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똑같은 생각을 했다.

‘연기력은 인정해야겠군.’

……라고 말이다.

아니, 저 경우에는 의지력이라고 해야 할까.

그도 그럴 것이, 침상에 누워 피를 토하던 며칠 전과 달리 법왕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너무나 정정한 모습으로 단상에 올랐으니 말이다.

그는 좌중을 한번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긴말하진 않겠소. 일단 먼저 죽어 간 프란의 영령들에게 묵념하십시다.”

스윽.

태양신 솔라의 성호를 그은 법왕은 제일 먼저 고개를 숙인 후 프란 공화국에서 희생당한 모든 이들을 추모했다.

대성당의 스테인글라스를 스친 빛이 군인들을 감싸자, 신을 믿는 이도, 신을 믿지 않는 이도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적어도 이 자리에 전쟁을 모르는 이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짧은 묵념의 시간이 지나고.

법왕은 고개를 들어 눈으로 특임대의 모두를 훑고는 입을 열었다.

“대전쟁이 시작된 이래 셀 수 없이 긴 시간이 흘렀네. 그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고, 또 가늠할 수도 없는 것들을 포기해야 했지.”

비록 노인이 되었다고 하나, 슬픔마저 흘러가듯 잃지는 않았다.

법왕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덤덤히 되짚듯이 말을 이었다.

“솔트, 카샤, 데지안, 호을, 로크틴, 제미랑, 도이츠……. 그리고 프란.”

나열되는 이름은 일개 단어가 아니다.

작게는 왕조의 이름이었으며, 크게는 국가의 이름이었다.

법왕은 역사의 흐름 속에 진토 밑으로 묻힌 무너진 국가의 흔적을 어루만졌다.

“대륙의 절반을 빼앗겼고, 엘프들은 세계수를 잃었으며, 드워프는 산을, 오크들은 부락을 잃었네.”

비단 인간들뿐만이 아니다.

마수들의 대군주는 참으로 게걸스럽게도 모든 것을 포식하며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너질 수 없지.”

모든 것이 흔들린 시대다.

불과 50년 전까지 당연하다고 생각되던 왕정이 무너진 후 공화정이 세워졌다.

국가로서 존재했던 법국을 제외하면 수많은 이들이 신을 부정하고 저주했다.

이종족들을 작게는 터전을 잃었고, 크게는 종족이 멸종되었다.

한 치 앞의 미래도 보이지 않았다.

너무나 어두워, 차라리 주저앉아 다가올 죽음에 체념하는 것이 옳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법왕은 고개를 저었다.

“저 먼 과거, 마계의 대공들이 대륙을 노렸을 때도 인간은 패하지 않았네. 악룡이라 불리는 드래곤을 베었고, 또한 절대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네임드들을 죽였어.”

마지막 대목에서 특임대의 시선이 향한 곳은 앞서 서 있는 단테였다.

현시대의 전설은 그였으니까.

법왕 역시 단테를 힐끔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인류의 역사는 투쟁이고, 그것은 작게는 개인의 생존이되, 크게는 종족의 번영이지.”

거기까지 말한 법왕은 천천히 단상에서 내려와 단테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늙은 안색에 인자함과 미안함을 담아 그의 손을 붙잡고는 말했다.

“투쟁하시게. 의심하시고, 또한 승리하시게.”

그것은 특임대 전원에게 전하는 부탁임과 동시에 단테에게 당부하는 말이었다.

그것을 느꼈기 때문일까.

단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화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성하.”

“고맙구려.”

법왕은 잔잔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단테를 필두로 특임대의 모두가 법왕을 향해 경례를 올리니.

“승리를.”

“승리를!”

대륙 최초의 다국적 부대가 창설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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