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가 도착한 것은 완전히 어둠이 가라앉은 늦은 저녁 시간이었다.
물론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의전은 일정대로 진행이 되었고, 몸이 편치 않은 법왕 시렌치움을 대신하여 제1 추기경과 제7 추기경이 황태자를 맞이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국의 군인들조차 저 둘이 차기 법왕을 두고 후계 경쟁을 벌이고 있다는 걸 알아챌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 들어가시지요.”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1 추기경은 일전에 미카엘을 꾸짖었던 것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황태자를 반겼다.
실로 간사한 간신이 따로 없다.
그 꼴에 로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하여튼 정치하는 놈들이란…….”
듣기에 따라선 법국은 물론 황태자의 기분까지도 망칠 수 있는 말이었지만, 그들의 곁에는 리베라를 비롯한 이른바 특임대의 사람들이 가득했기에 딱히 말이 새어 나갈 걱정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는 힐끔 단테를 응시했다.
제일 선두에 서서 추기경과 대화를 나누는 황태자를 바라보고 있는 단테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이 중에서 황태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을까. 단테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을까.’
그와 리베라는 둘째로 치더라도, 근처에 서 있는 세실과 유엘, 페고르를 필두로 한 강습 부대의 장교들에겐 단테는 그야말로 규격 외의 무언가였다.
당연한 일이다.
상급 마수를 찢어 버리고 네임드급 마수도 도륙하는 그의 무력을 눈앞에서 본 이들이 아닌가.
아무리 제국의 황실의 권위가 대단하다고 해도, 일반적인 이들은 당장 눈앞의 폭력에 굴복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굴복이 아니라 추앙이 더 가깝겠지만 말이다.
그때였다.
“아, 이게 누구십니까.”
가까워지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로한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곧 단테의 앞까지 다다른 황태자가 선뜻 단테에게 말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순수한 잿빛에 가까웠던 시리아와는 달리 조금은 검은빛이 도는 머리를 가진 황태자는 제국의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시르투스 폰 레벤스라트.
단테는 머릿속에 언젠가 들었던 그의 이름을 곱씹으며 가볍게 경례를 올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라……. 그 호칭이 맞기는 하지만, 이젠 어째 부담스럽군요.”
황태자의 체격은 나름 건장한 편에 속하긴 했지만, 외형은 무인보단 학자에 가까웠다.
더욱이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는 다른 이들의 경계를 풀기에 충분했으나, 단테는 그의 속내를 가늠할 뿐이다.
‘불편한 기색이 더 심해졌어.’
황태자의 입과 태도는 한없이 우호적이었으나 그의 눈은 일전에 제도(帝都)에서 만났을 때보다 수십 배는 더 가라앉아 있었다.
가늠이 가긴 한다.
아마도 블랙 가드 때문이리라.
그러나 단테도, 황태자도 서로의 감정을 드러낼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기에 겉으로 보이는 대화는 한없이 평온했다.
“비록 폐하께서 직접 오시진 못했지만, 늘 단테 대령을 생각하고 있으심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 점을 잊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과찬이십니다.”
“이런, 말이 너무 길어졌군요. 그럼 안에서 뵙겠습니다, 대령.”
황태자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두 추기경과 함께 미리 준비된 의전 차량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들 역시 뒤를 따랐다.
부우웅…….
의전 차량은 그들이 지나온 길을 답습하듯 되돌아갔고, 곧 대성당을 지나 후미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도착했습니다, 대령님.”
이윽고 단테가 차에서 내리자, 연회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뜻밖의 인물이 그를 반겼다.
“아, 기다렸습니다.”
“……먼저 들어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다름이 아닌 제7 추기경 도르스 솔 케루빔이었다.
분명 그는 제1 추기경과 함께 황태자를 의전해서 연회장으로 향했을 터인데, 함께 들어가지 않고 단테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그것에 의문을 느낀 단테가 묻자 도르스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황태자 전하도 중요하지만, 대령님 역시 중요한 분이시니까요. 마다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의 말대로 단테 역시 원칙상 의전 순위가 낮지 않았다.
다만 아무래도 황태자보다는 중요도가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누가 황태자를 의전하느냐가 중요했던 것이리라.
‘사소한 일이지만, 후계 구도에 분명 영향을 끼칠 테니까.’
신교는 기본적으로 힘이 우선되었으나, 그렇다고 정치가 없지도 않았다.
애초에 사람이 모이는 곳에는 언제나 파벌과 정치가 함께하기 마련이니,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리라.
즉, 추기경의 말대로라면 그는 단테를 위해 황태자와 마주할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뜻이다.
“그럼 들어가시지요.”
도르스는 선뜻 웃음을 지으며 연회장으로 단테를 안내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단테는 생각했다.
그저 선인(善人)인가, 아니면 선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악인(惡人)인가.
지금으로선 가늠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단테는 그저 생각할 따름이었다.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
……라고 말이다.
그리고 곧 끼이익- 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열렸고, 도르스는 실로 정갈하게 꾸며져 있는 연회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시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요. 솔라 신의 광명이 드리우는 대지. 솔라 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기갑천마
어설픈 함정 (1)
어떤 건물이든 백색과 황금색으로 꾸미는 것이 관례인 듯, 연회장의 모습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드넓은 홀과 돔 형태의 천장에 달린 반짝이는 샹들리에, 로비 중앙에 있는 거대한 솔라 신의 동상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다만 지금까지 보았던 연회나 파티장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Altora Petamus…….
일단 흐르는 음악이 찬송가다.
그뿐만이 아니라 분위기 자체도 파티의 느낌이 강한 다른 국가와 달리 정적이었다.
그런 단테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곁에 선 제7 추기경 도르스는 멋쩍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법국은 유흥을 그리 좋아하지 않기에.”
“그렇군요.”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애초에 이 자리부터가 특임대라는 전례가 없는 조직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목적이 가깝기도 했으니까.
비단 그만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아닌지 연회장에 자리한 타국의 사람들 역시 크게 불만이 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가장한 정치를 하고 있었다.
단테는 빠르게 연회장 내부를 훑었다.
비단 제국의 황태자뿐만이 아니라 연합 왕국의 사람들은 물론, 실질적으로 무너진 프란 공화국의 사람들 역시 연회장에 함께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단테와 눈이 마주친 한 노인이 성큼 다가오기 시작했다.
딱히 기억에 남지는 않은 얼굴이었기에 누군지를 가늠하려던 그때, 단테의 뒤에 서 있던 리베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로렁 대장?”
로렁. 로렁이라…….
잠시 그 이름을 곱씹던 단테는 머잖아 저 노인의 정체를 기억할 수 있었다.
‘프란 공화국의 전쟁부 장관이라고 했던가.’
다시 생각해 보면 이름부터 실로 노골적이다.
전쟁부 장관이라니, 물론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로렁 대장은 어느새 단테의 앞까지 성큼 다가와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대령.”
“그렇습니까.”
체감상 그리 오래전에 만난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은 그렇게 받아 주었다.
동시에 빠르게 그의 얼굴을 훑은 단테의 감상은 실로 간단했으니, 바로 지쳐 보인다는 것이었다.
그런 단테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로렁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여러모로 불려 가는 곳이 많아서 말입니다.”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프란 공화국의 수뇌부가 사실상 증발한 상황에서 유의미한 협상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그뿐인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차라리 속죄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속죄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노인의 얼굴에는 짙은 회한과 동시에 후회만이 가득하다.
그 때문에 단테는 말을 아꼈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음을 알기에.
그러나 그때.
묵묵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도르스는 부드럽게 웃음을 지으며 로렁 대장에게 말했다.
“삶은 수없이 꼬이고는 합니다. 혹 성인이라 불리는 이라도 뒤를 돌아보면 수많은 회한과 후회, 미련이 발목을 붙잡기 마련이지요. 다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 아니겠습니까.”
“좋은 말씀입니다.”
소탈하지만 동시에 위로가 담긴 말이 로렁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게 한 것일까.
그는 곧 도리스 추기경과 함께 대화를 나누려는 듯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던 리베라는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오글거려.”
피식.
그 말을 들은 단테는 자신도 모르게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도 내심, 동의하는 바였으니까.
“하하하!”
“그게 사실입니까?”
연회는 순조롭게 흘러갔다.
단테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는 정보를 미리 듣고 온 것인지, 로렁 이후로 각국의 인사들은 가벼운 인사를 건넨 후 빠르게 사라져 주었고, 그 덕분에 단테는 일전과 마찬가지로 홀로 자리에 앉아 술을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슬슬 연회장의 분위기도 한창 무르익을 즈음, 그의 곁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황태자가 다가와 앉았다.
“아, 술은 되었네.”
그는 뒤에 서 있던 바텐더에게 그렇게 말하곤 손에 살짝 남은 와인을 한 바퀴 가볍게 돌리며 입을 열었다.
“어찌, 연회는 잘 즐기고 계십니까?”
“예.”
“예전부터 느낀 거지만, 참으로 과묵하십니다. 하하…….”
황태자와 단테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연회장을 응시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만, 그 분위기 자체는 그리 밝지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정적을 깬 것은 황태자였다.
“잠시 테라스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울려 주시겠습니까?”
경계를 풀려는 듯, 아니면 얼굴에 쓴 가면이 너무 익숙해진 것인지 모를 미소를 띠며 황태자가 말했다.
그 말에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슬슬 궁금해지던 참이었다.
‘황태자. 그리고 황제…….’
꽤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어렴풋이 기억하기에 그와 블랙 가드에 호의적이었던 황제와 달리 황태자는 적의를 품고 있었다.
당시의 블랙 가드에서 조사한 내용을 떠올렸다.
「레벤스라트 제국의 제1 황자이자 황태자이며, 명군이라 칭송받는 현 황제에게 알게 모르게 불만을 느끼고 있는 이.」
그 때문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한 것도 사실이었고 말이다.
그렇게 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로 향하자 알게 모르게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둘 다 그것을 신경 쓸 성격은 아니었기에 걸음에는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었다.
연회장의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른 후 복도를 지나 테라스에 다다랐다.
원래라면 남녀의 밀회 장소로 주로 이용되는 곳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둘 사이에 흐르는 기류는 연애 감정 따위가 아니라 정적이지만 치열한 신경전이었다.
끼이익…….
테라스의 문을 열자 곧 조금은 서늘한 밤공기가 둘의 뺨을 스쳤다.
동시에 먼저 입을 연 인물은 황태자였다.
“단테 드 헤로이스. 블랙 가드의 제10 단장이자 전례가 없는 4세대 나이트 프레임 벤데타의 주인.”
사람들의 앞에서 늘 나긋했던 것과 달리, 황태자의 목소리는 실로 싸늘함과 동시에 적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느새 손에 쥔 유리잔을 테라스 밖의 탁자 위에 내려놓고 서늘한 시선으로 단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특급 황실금성훈장까지 받았으니 거리낄 것이 없겠습니다.”
황태자는 그렇게 말하곤 신경질적으로 품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곧 금색으로 각인이 된 담배 케이스가 딸려 나오자, 그는 입에 궐련을 문 후 불을 붙였다.
치익, 습-.
자욱한 연기가 둘 사이에 자리했다.
이윽고 반쯤 담배를 태우던 황태자 시르투스는 황족 특유의 잿빛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어느새 존대라는 일말의 가면까지 벗어 던진 그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단테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며 말했다.
“블랙 가드가 바라는 게 대체 뭐지? 아니, 애초에 대체 무슨 짓거리를 했기에 폐하께서 이따위 말 같지도 않은 조직을 찬성하신 거냔 말이야!”
콰직!
그는 결국에 분을 참지 못하고 태우던 담배를 테라스의 바닥에 던지고 밟아 버렸다.
그런 황태자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단테는 이윽고 실소했다.
‘세실의 추측이 맞았군.’
황태자의 반응으로 100%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특임대의 건으로 블랙 가드가 개입한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런 단테의 실소를 오해한 것인지.
순간 황태자는 눈썹을 찡그리며 그를 노려보았으나, 이윽고 감정을 조절한 건지 옅게 숨을 내쉬곤 말했다.
“내 이 자리에서 경고하지.”
으드득.
그는 이빨을 짓씹으며 마치 늑대가 그르렁거리듯 얼굴을 찡그리며 아주 작게 속삭였다.
“블랙 가드는 결국 황실의 개다. 물으라면 물고, 짖으라면 짖어야 하는 개새끼에 불과하단 걸 뇌리에 각인해라. 지금이야 유약한 폐하를 등에 업고 세상을 다 가진 듯이 행동하고 있지만, 결국 다음 권좌에 오를 이가 누구인지 생각하란 말이다.”
명백한 협박이다.
하지만 그것을 듣는 단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어린아이가 손에 쥔 장난감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칭얼거리는 걸 듣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대충 넘긴 후 돌아갈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생각할 것이 많은데 황태자를 건드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그럴 생각이었다.
“네놈들이 그렇게 부르짖는 당주라는 년도 마찬가지다. 내가 황제가 되면 일단 그년부터 죽여 주마. 아니, 차라리 첩으로 삼는 것도 좋겠지. 건방졌던 과거를 후회하도록…… 커헉?”
“황태자, 아니.”
놈이 건드려선 안 되는 걸 건드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시르투스, 다시 지껄여 봐라.”
단테의 손아귀에 황태자의 목덜미가 잡혔다.
동시에 그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부러트릴 듯 힘을 주며 아주 덤덤한 어조로 속삭였다.
“죽고 싶었으면 말하지 그랬나. 구태여 길게 말할 필요 없이.”
“커헉……!”
그러나 그때였다.
철컥-!
단테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장전음에 비릿한 조소를 흘렸다.
“꼴에 믿는 구석은 있었군.”
굳이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다.
등 뒤와 복도에 느껴지는 기척만 열 명이 넘었으니까.
하긴, 황위 계승권에서 먼 제4 황녀조차 로열 가드가 매일 대동하거늘, 하물며 황태자라면 어떻겠는가.
그러나 딱 그뿐이었다.
“그래서, 믿는 건 이게 전부였나?”
“……뭐?”
황태자는 단테가 당황했으리라 생각했지만, 정작 그를 바라보는 단테의 시선은 한없이 평온함과 동시에 싸늘했다.
그것에 뒤늦게 위화감을 느낀 황태자가 다급히 로열 가드에게 눈짓한 그 순간.
“하찮다.”
쿠웅!
그의 발이 일순간 대지를 찍어 누르자, 곧 작은 신음과 함께 그를 겨누고 있던 로열 가드가 입가에 핏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다.
복도에 서 있던 이도, 테라스의 바로 위층에서 단테를 겨누고 있던 이들 역시 내상을 입고 쓰러지거나 피를 토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황태자 또한 그것을 벗어나진 못했으니.
“어, 어째서……?”
처음으로 그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단테는 피식 웃으며 황태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유언으로는 덧없군.”
“자, 잠깐……!”
황태자의 목을 쥔 손에 천천히 힘이 들어갔다.
그것에 단테가 진심임을 깨달은 황태자가 다급히 외쳤으나, 이미 스위치가 켜진 단테를 말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렇기에 황태자가 그야말로 경련을 일으키려던 그때.
턱.
낯선 기척이 황태자를 잡고 있던 단테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누구인지 가늠한 듯한 단테를 바라보며 실로 어색하게 웃으니.
“더 하시면 반역입니다. 단테 대령님.”
“……살아 있었나? 오래 살진 못할 줄 알았는데.”
“여러 일이 있었습니다.”
“쯧.”
단테는 혀를 차곤 황태자의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오랜만이군.”
그러자 허억- 하는 소리와 함께 황태자는 사색이 되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을 가렸으나, 정작 단테는 그런 시르투스를 내려다보지조차 않은 채 자신을 말린 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보리스 중위…… 아니, 이젠 중령이라고 불러야겠군.”
단테의 말에 보리스 중위, 아니 중령은 실로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경례를 올렸다.
“충성, 대령님을 뵙습니다.”
기갑천마
어설픈 함정 (2)
“충성. 대령님을 뵙습니다.”
경계를 올리는 모습은 꽤 자연스러웠다.
당시에는 그리 크지 않은 키와 체구, 거기에 살짝 실금이 간 안경을 쓴 그는 군복이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안경 너머로 도드라진 다크서클이 가뜩이나 유약한 인상을 돋보이게 했다.
그것이 단테가 기억하는 보리스 중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보리스는 사뭇 달랐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많이 변했군.”
“그렇긴 합니다.”
키는 그대로였지만 체구가 한결 좋아졌다.
안경 역시 너무 투박하진 않은 것으로 바꿨고, 유약했던 인상은 사라진 채 자신감과 신념으로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이젠 군복이 꽤 어울렸다.
스쳐 간 인연이라 생각했거늘, 이렇게 다시 만나니 내심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그때.
“보, 보리스 중령이라 했나? 당장 체포해라, 황태자를 시해하려 한 대역 죄인이다!”
한참 회포를 나누던 두 남자는 바닥에 주저앉아 붉게 물든 목덜미를 틀어쥔 시르투스의 말에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움직이려던 단테보다 먼저 보리스가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말하니.
“당주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뭐?”
순간 황태자뿐만이 아닌 단테 역시 보리스를 응시했다.
동시에 보리스는 단테에게도 들릴 정도로 편안한 목소리로 말하니.
“진실은 생각보다 잔인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으심이 좋을 듯합니다.”
보리스는 황태자가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품속에서 사각형 모양을 한 마도구를 꺼냈다.
그러고는 그가 보는 앞에서 직접 바닥에 던지곤 군화로 짓밟았다.
콰드득!
마석에 마도 공학 회로를 새긴 마도구였기에 마나를 조금 실은 군홧발에도 아주 손쉽게 박살이 났다.
“……하하.”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태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지. 이번엔 한 방 먹었다. 당주에게 전해라. 이걸로 개수작은 안 통한다는 걸 알았다고.”
황태자 시르투스는 어느새 벗어 뒀던 가식이란 이름의 가면을 다시 쓴 채로 웃으며 말했고,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한다.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럼.”
보리스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단테를 바라보며 말했다.
“묻고 싶으신 말씀이 많을 텐데, 일단 자리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끄덕.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리스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를 표했다.
……아무래도 들을 말이 많을 거 같으니까.
둘은 널브러진 황태자의 로열 가드들은 개의치 않고 테라스를 나섰고, 동시에 서늘한 바람이 스쳤다.
“끄으윽.”
“쿨럭!”
그렇게 둘이 떠난 후.
테라스에 홀로 남은 황태자 시르투스는 언제 단테에게 감정을 보였냐는 듯 무표정으로 돌아와 단테가 서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물론 겉으로 무표정을 지었다고 해서 쓰라린 목과 마음까지 정적이진 않았다.
‘과연 쉽진 않군.’
갈라진 바닥을 바라보던 그는 이윽고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고작 발을 찍어 누른 순간, 일순간 흩어진 강력한 마력이 일대를 집어삼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사실 거기까지는 이미 계획된 것이었다.
문제는…….
그는 붉게 물든 목덜미를 가볍게 쓸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설마, 진짜 죽이려 할 줄은 몰랐는데.”
아무리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블랙 가드라고 해도 최소한의 도리 정도는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테는 진정으로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순간엔 아무리 그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시에 자신의 신념에 확신을 더한다.
시르투스는 잿빛의 눈을 번뜩이며 생각했다.
‘역시, 블랙 가드는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제국을 위해서라도, 후대의 황실을 위해서라도.’
이미 블랙 가드의 힘은 너무 커졌다.
지금이야 황실의 권위에 굴복하는 모양새를 띄지만, 조금 전 단테의 행동만 봐도 놈들이 걸어갈 길은 정해져 있지 않은가.
결국 힘을 가진 짐승은 권력을 게걸스럽게 탐하기 마련인 것이다.
……다만 이런 방법은 앞으로 지양해야 할 듯싶었다.
‘애초에 급하게 생각한 함정이긴 했지만.’
조금 전 보리스가 부순 녹음기를 응시했다.
그래도 아예 성과가 없진 않았는데 말이다.
아쉬움에 입술을 훑었으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기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었다.
그러고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기립해 있는 로열 가드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다.
“쓸모없는 놈들.”
“…….”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의 양심이 있다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르투스는 그 이상의 비난은 하지 않은 채, 창가로 향했다.
“쯧.”
목덜미에 난 자국은 쉽게 가라앉지는 않을 듯싶었다.
그는 짧게 혀를 차곤 말했다.
“비밀리에 법국의 치유 주교를 불러라. 오늘은 쉬어야 할 듯싶구나.”
단테와 테라스로 향한 것을 이미 많은 이들이 보았다.
그런데 황태자가 목덜미에 졸라진 자국이 있다는 걸 알면, 비단 단테뿐만이 아니라 제국은 물론 황실의 권위도 추락할 건 자명한 사실이기에 쉬는 것이 옳았다.
그렇게 테라스를 나선 시르투스는 복도를 지나 귀빈들이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그를 뒤따라 로열 가드들 역시 사라지고, 바로 그 순간.
우웅-.
공간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지고, 곧 나타난 이슈페인은 바닥에 흐트러진 녹음기를 힐끔 내려다보다가 품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동시에 그는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하여튼 무능하고 우둔한 주제에 쓸데없는 짓거리는…….”
그는 시르투스가 떠나간 방향을 노려보며 아주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곤 녹음기의 잔해를 주섬주섬 줍고는 덧붙이니.
“뭐, 그래도 한 가지는 알았으니까 이득인 건가?”
실로, 의미심장한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