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라는 단어가 내뱉어진 그 순간.
콰악!
회상은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단테는 드물게 동요가 섞인 눈으로 법왕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물었다.
“……지금, 그녀라고 했나?”
그리고 그런 단테의 반응을 본 법왕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끄덕임.
확답을 받은 단테의 표정은 실로 드물게 복잡함으로 물들고 말았다.
기갑천마
그들의 흔적 (2)
끼이익…… 탁!
방에 들어갔을 때와는 달리 홀로 법왕의 방에서 나온 단테는, 주변에서 고개를 숙이는 성기사들과 신도들의 인사조차 보지 못한 채 묵묵히 안내를 따라 거처로 향했다.
원래라면 모두 모여 있는 응접실로 안내하는 것이 옳았겠으나, 척 보기에도 적잖이 혼란스러워하는 단테를 위한 배려였다.
역대 법왕의 초상화가 그려진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온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의 앞에서 길을 안내하던 주교는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방문을 가리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럼, 편안한 시간 되시기를.”
단테는 안내해 준 이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주곤, 문을 열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너무 넓지도, 그렇다고 너무 좁지도 않은 방에 들어선 단테는 곧바로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손을 올렸다.
툭, 툭…….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탁자의 박자와 함께 단테는 조금 전 법왕과 나눴던 대화를 복기했다.
-그들이 다녀간 이후, 극단적으로 마도 공학과 나이트 프레임을 거부하던 이들 몇몇이 실종되었습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베히모스의 남하에 제동이 걸렸죠.
30년이 흐른 지금조차 마수들에게 완전히 넘어간 영토는 관측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당시 법국의 멸망을 예상한 모든 이들은 뜻밖의 이변에 의문을 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하지만 법왕 시렌치움은 어렴풋하게나마 ‘그들’의 짓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덧붙였다.
-쿨럭!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어쩌면 최초로 신도들의 손에 의해 끌려 내려온 법왕이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요.
필요와 권력 구도에 따라 폐위되고 찬탈되는 왕정과는 달리, 한번 선출된 법왕은 법국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신성불가침 영역이었다.
그런데 그런 법왕이 폐위를 입에 담았을 정도라면, 당시의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당연한 일입니다. 한 치 앞도 보기 힘든 흐린 숲을 걷는 이가 어찌 이성적일 수 있겠습니까.
법왕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정체를 모를 이들이 내민 손을 붙잡고 불투명한 미래나마 갈구하는가.
그저, 묵묵히 다가올 멸망에 고개를 숙이는가.
……어려운 문제였지만, 역설적으로 처음부터 정답은 정해져 있었다.
삶이란, 지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언제나 갈구할 수밖에 없는 지향점이었으니까.
-휘하의 모든 세력을 동원해 마도 공학 도입에 반대하는 이들을 모조리 이단으로 몰아 죽였습니다. 밤을 새워 가며 관련된 모든 것에게 세례를 내렸고, 수없이 많은 밤 동안 암살 시도를 견뎌야 했지요.
지금은 주름진 노인이 된 그는 그때 아주 절실하게 깨달았다.
반대하지 않는다고 한들, 그것이 상대의 말에 동조한다는 동의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대화를 떠올리는 지금에서야 깨달은 것이지만, 당시의 단테는 법왕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하나 법왕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태연하게 그의 말에 답했다.
-한 달. 그분이 벌어 주신 귀중한 시간 동안 법국은 체질을 개선할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한결 여유가 생긴 제국 역시 함께하여 결국 끝끝내 남하한 베히모스를 죽일 수 있었지요.
그 이후로 법왕은 단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물론 직접 마주했을 때도 목소리를 들은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법왕은 뒤늦게 덧붙였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블랙 가드에 대한 소문이 돌더군요.
블랙 가드.
그 시작부터 불분명한 단체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법왕은 추측했다.
그들이 바로, 자신을……. 아니, 법국을 도운 이들이란 것을 말이다.
그리고 당주가 여자라는 말을 들은 후, 그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툭.
단테는 탁자를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췄다.
“아직 확실한 건 없지만…….”
법왕의 말은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었다.
다만 가능성이 아주 큰 추측이라는 점이 문제일 뿐이다.
‘남궁연희, 사마제천.’
비단 당주까지 갈 이유도 없다.
둘이 정녕 블랙 가드의 중추에 있다면 모든 아귀가 얼추 맞지 않는가.
그 자신을 블랙 가드에 무리해서 들인 것.
벤데타에 담긴 속뜻, 피의 복수와 여태까지 이어지던 지원들까지 전부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의문이 풀리진 않는다.
과연 그들의 목적은 무엇이며 아직도 찾아오지 않고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는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더욱이 그들과 자신의 시간선도 마음에 걸린다.
‘30년 전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최소 5년은 더 이전으로 돌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떤 조직을 돌아가게 만드는 최소한의 기간까지 포함한 시간이 대략 35년…….
그와 그들 사이에는 그만한 간극이 자리를 잡고 있다는 뜻이다.
복잡함, 당혹스러움, 나아가 의문이 섞인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이었다.
문득 법왕이 마지막에 내뱉은 말이 떠오른 탓이다.
-모든 시대적인 흐름 앞에 선 인간은 설령 초인이라 하여도 모든 걸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아둔한 눈으로 앞을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고작일 뿐이지요. 너무 조급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쿨럭……! 단테 대령께서는 저와는 달리 시간이 많지 않으십니까.
그의 말을 전부 동의하진 않았지만, 틀리지 않은 말도 있었다.
시간은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 단테는 조금은 과감하게 움직여 볼 생각이었다.
‘블랙 가드에서 인원을 확충해준다고 했었지.’
일전에 루틀담에서 읽었던 블랙 가드의 정보지에 적혀 있던 내용이다.
이 시기에 단테를 겨냥한 인원 확충.
그것에 아무런 저의가 없다고 느끼는 건 멍청한 생각이었다.
때문에 그는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한 밖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아니기를 바랐건만.”
어딘가 씁쓸한 여운이 담긴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