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102화 (102/197)

서훈이 끝나고 이어진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파티였다.

군인들의 입맛에 맞게 조금은 경쾌한 음악이 흐르고, 서훈이 내려졌던 본성의 홀은 곧 빠르게 파티장으로 변했다.

비록 부대 안에 임시로 마련된 파티장이긴 했으나 고성을 보수하고 정리했기에, 넓지는 않아도 꽤 운치가 흘렀다.

“하하핫! 정말입니까?”

“그때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더 웃긴 건 죽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니까 제일 먼저 든 생각이…….”

검은 제복을 입은 장교들은 한 손에 술잔을 들고 오랜만에 풀어진 모습이었다.

그들로선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안락이었다.

군인이란 언제나 목숨을 담보로 하기에, 이렇게 쉬어줄 때 제대로 쉬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좋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단테도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었다.

그가 앉은 자리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바텐더가 권한 그것은 풍미가 썩 나쁘지 않았기에, 벌써 세 잔째 마시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단테의 뒤로는 그에게 술을 권한 바텐더가 영광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유리잔을 닦고 있었다.

그때였다.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시나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특유의 나긋한 목소리가 스친다.

그는 곧 시선을 돌려 말을 건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잿빛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온다.

‘시리아 폰 레벤스라트.’

그녀를 본 단테는 형식상이나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으나, 정작 그것을 만류한 것은 시리아였다.

“예의는 안 갖춰도 돼요. 그 훈장을 받은 후부터 격으로 따지면 저와 동급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반말하시면 안 돼요?”

본디 제국법이 그렇다.

특급이라는 이름이 붙는 이유가 있듯, 이제 단테의 위로는 황제와 황후, 황태자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안하무인으로 행동할 수는 없겠으나, 이제 그들을 제외한 모두는 단테에게 최소한의 예우를 갖춰야 했다.

“그렇습니까.”

단테는 그녀의 설명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이시지도 않네.”

그러자 시리아는 작게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의 곁에 앉았다.

“전하. 무엇으로 드시겠습니까?”

“아, 저는 아르팅 칵테일로 부탁드려요.”

한편 갑작스러운 황녀의 등장에 당황할 법도 할 텐데 바텐더는 아주 능숙하게 그녀에게 주문을 받았다.

그러고는 현란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손길로 술을 만드는 모습이 한두 번 해 본 일이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나 정작 시리아와 단테는 그를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임관한 이후 계속 전장에만 있으셨는데, 조금쯤은 재미있게 노시지 그래요.”

“시끄러운 걸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 보이긴 해요.”

시리아는 웃었고, 바텐더는 술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선 로열 가드가 품속의 마도구로 혹여 모를 독을 검사하는 사이 단테는 한창 파티를 즐기고 있는 이들의 면면을 훑었다.

“꺄하하핫!”

“아…… 탈영하고 싶다.”

리베라와 로한은 어느새 장병들 사이에 섞여 미친 듯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클리에는 그 근처에서 연합 왕국 측의 근육 덩어리들과 아예 오크통째로 들이붓고 있었다.

“마셔! 마시고 죽는 거다!”

“적셔어!”

평소 그들이 그토록 강조하곤 했던 연합 왕국다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조금쯤 알 거 같긴 했다.

……더럽게 시끄러운 것을 뜻하는 건가.

반면 세실을 비롯한 이들은 비교적 조용했다.

웃고 떠드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스윽.

그때 로한의 뒤로 갈색 머리의 남자가 다가서는 모습이 보였고, 그의 정체를 단번에 눈치챈 단테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으니.

“읍! 으읍!”

곧 세로스에게 납치되는 로한이 보였으나 그는 그저 실소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파티장을 훑고 있었을까.

“있잖아요, 대령님.”

바텐더가 건넨 술잔에 독이 없음을 확인받은 시리아가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으며 말했다.

“특임대 창설식은 법국에서 이뤄진다고 하던데, 들으셨나요?”

“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아침 즈음에 로한과 리베라에게 전달받은 사실이었다.

그런 그의 답에 시리아는 입가에 묻은 술을 한 방울 훑고는 덧붙였다.

“이유는요?”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다행이다, 몰라서.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머지않아 알게 되긴 하겠지만, 굳이 말해야 한다면 그녀의 입으로 전달하고 싶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소문이지만…….”

입가에 떠오른 웃음이 묘하다.

사실 황족의 입에서 나오는 ‘소문’이 일반적일 리가 없음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모를 사람이 있을까.

“법국 외곽. 현재는 멸망한 데지안 왕국과 국경을 맞닿은 곳에 이변이 일어났다는 말이 있더라고요.”

이변.

그 단어가 그의 흥미를 끌었다.

시선을 돌리자, 시리아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뭐, 아직 자세히 밝혀진 것도 없는 뜬소문이지만……. 이번 특임대 창설을 법국에서 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다는 심증이 있으니까요. 대충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구태여 답은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모를 수가 있겠는가.

‘법국에서 이변이라…….’

요즈음 유달리 많이 듣는 이름이다.

그는 생각을 정리하며 손에 쥔 위스키의 잔을 한 바퀴 가볍게 돌렸다.

차랑.

그리고 막 입가로 가져다 대려던 그때.

시리아는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손바닥을 주먹으로 가볍게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맞아요. 그리고 법국에는 제가 아니라 황태자께서 가실 거랍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황태자라면…….”

“예, 일전에도 보셨죠?”

특임대 창설은 국가적으로도 의미가 가볍지 않기에 내려진 결정이다.

그런 자리에 ‘고작’ 제4 황녀가 간다는 것은 자칫 황태자의 정통성을 흔들 수도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시리아는 마치 과거 전했던 경고를 회상하라는 듯, 구태여 알려 줄 이유가 없는 정보까지 덧붙여 주며 남은 칵테일을 부드러운 손짓으로 탁자 위로 밀어 놓았다.

“아까 생각해 보니, 폐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게 없었네요.”

동시에 그녀는 단테의 금색 훈장을 가볍게 툭- 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그대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씨익.

그녀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린다.

동시에,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

잠시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 단테는 곧 황녀가 마신 칵테일 잔을 치운 채 자신을 바라보는 바텐더에게 말했다.

“한 잔만 더 부탁하지.”

“기꺼이.”

그렇게 파티는 흘러갔다.

그리고 다음 날.

단테에게 예고한 대로 시리아는 곧바로 떠나갔다.

그 짧은 사이 세로스에게 시달린 로한은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방으로 기어 들어가려 했으나, 이어진 세르겐의 말에 똥 씹은 표정을 하며 격납고로 올 수밖에 없었으니.

“법국으로 향한다.”

단테는 비행함에 오르며 생각했다.

이변이 무엇일지, 그것이 또 어떤 일들을 몰고 올지 말이다.

‘모를 일이지.’

결국, 마주하기 전까지 말이다.

〔함교에서 전파한다.〕

그리고 단테를 비롯한 모든 이들이 비행함에 오르자 곧바로 함선의 문이 닫히고, 곧 함선이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종착지는 법국의 수도.〕

세르겐은 함교의 함장 자리에 앉아 읊조린다.

〔솔라티움이다.〕

기갑천마

법국으로

항해는 순조로웠다.

지난번 프란 공화국 수도에서 벌어졌던 악몽 때문인지 전 대륙적으로 방공망이 강화되었다.

그 덕분에 그들은 근 이틀에 걸친 외곽 비행에도 단 한 번의 교전도 없이 법국의 국경을 넘을 수 있던 것이다.

“흐아아암……!”

그런 무탈한 비행이 주는 안락함은 꽤 달가웠기에, 단테의 객실 안에 늘어진 리베라는 노곤한 하품을 내뱉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냈다.

그녀는 마치 고양이라도 되는 양 몸을 쭉- 늘어트리며 소파에 누워 뒹굴었고, 그런 그녀의 곁에는 단테와 로한이 때늦은 식사를 하고 있었다.

“진급이 좋긴 좋다. 그치?”

그런 둘을 보며 내뱉은 리베라의 말에 로한은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으니, 당장 그들이 있는 객실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단테의 계급은 대령이고 로한의 계급은 원사, 리베라의 계급은 소령이 되었다.

거기에 특급 황실금성훈장까지 받은 단테가 있기에 당연히 객실은 최상급으로 배정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쪽 벽면이 방어 마법이 걸린 통짜 유리로 되어 있고, 족히 30평은 넘을 그런 객실을 말이다.

그때였다.

〔아아-.〕

짧은 지직거림과 함께 머잖아 함내에 부함장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솔라티움 외곽에 진입한다. 함내의 승무원들은 즉각…….〕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음을 알려 주는 알림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자 그들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제각기 하던 일들을 이어 나갔다.

“끄으응!”

리베라는 여전히 소파 위에서 고양이처럼 햇살을 만끽했고, 로한은 식사를 끝낸 식탁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때.

“응?”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창가로 여과 없이 밀려들어 오던 햇빛이 흐려지고, 곧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것에 이상함을 느낀 리베라가 의문 섞인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자 곧 그녀는 눈동자를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으니.

“저건…….”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거대한 백색의 갑옷으로 무장한 천사들이 드높이 떠오른 해를 등진 채 비행함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하늘에서 계시를 내리기 위해 내려오는 듯한 그 신성하고도 장엄한 광경에 리베라는 자신도 모르게 신을 찾지……는 않았다.

사실 그녀는 물론 단테와 로한 역시 저것들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게네스?”

유게네스(Eugenes).

제국의 제식 기체들과 마찬가지로 3세대 기체이며, 사실상 법국의 유일한 단일 나이트 프레임이라고 보아도 될 기체다.

흰색 갑주를 입은 채 등 뒤로 돋아난 날개를 펄럭거리는 모습은 신도들이 보기에 한없이 신앙심을 돋우는 한편, 그 외의 사람들에겐 어딘가 묘한 거부감을 일으키곤 했다.

‘오죽하면 별명이 비둘기겠어.’

리베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새 자신의 건너편 소파에 걸터앉은 채 차를 따르는 단테에게 말했다.

“마중이겠죠, 단장님?”

“그렇겠지.”

“흐아암.”

그녀의 말에 답한 것은 단테가 아닌 로한이었고, 리베라는 하품으로 화답해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테는 묵묵히 차를 마시며 식후의 미약한 더부룩함을 넘길 뿐이었다.

그때, 조금 전 울렸던 함내 방송이 다시금 울려 퍼졌다.

〔함교에서 전파한다. 현재 법국의 나이트 프레임 대대 소속 파일럿들이 비행함 외곽을 인도 중이다. 착오가 없게 주의하도록.〕

조용하고 빠르게 접근한 법국의 나이트 프레임들은 그들을 인도하여 솔라티움의 외곽 격납고로 향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고도가 낮아지는 것을 본 단테는 반쯤 비운 찻잔을 손에 쥐고 소파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저벅.

가벼운 발걸음은 머지않아 창가의 앞에서 멈췄고, 곧 저 멀리 보이는 법국의 수도, 솔라티움을 살핀 단테는 이윽고 실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왜 클리에가 그토록 투덜거렸는지 알 것도 같군.’

언젠가의 전장에서 클리에는 법국의 놈들은 흰색을 너무 좋아한다며 툴툴거렸다.

그때는 단순히 넘긴 말이었으나, 이제야 그녀의 불만이 뭐였는지 대충은 알 수 있었다.

‘흰색, 금색.’

법국의 모든 건축물의 색깔을 읊어 보라면 저 두 가지가 전부다.

그마저도 흰색의 베이스에 간간이 금색이 조금 섞일 뿐이었기에, 비행함의 위에서 내려다본 법국의 전경은 그야말로 반짝이는 도시였다.

……보기만 해도, 눈이 아플 정도로.

문득 아스렌이 지나가듯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공화국이 자유로 망했다면, 법국은 아마 통제로 망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클리에의 말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건만, 이제야 그 진의를 깨달은 것이다.

법국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든 건축에 흰색을 끼얹지는 않았을 테니 대략적인 성향을 가늠할 수 있었다.

‘산중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중들도 저러진 않았거늘.’

만약 소림사가 국가를 세운다면 저런 모습으로 변할까.

단테는 무심결에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서서히 고도를 낮추다가 이윽고 완전히 착륙하기 직전인 밖을 바라보았다.

슬슬, 휴식은 끝인 듯싶었다.

“로한.”

“야, 일어나.”

“으으…… 한창 좋았는데.”

단테는 탁- 하고 마시던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고, 곧 소파 위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어깨에 걸치며 객실의 문으로 향했다.

그러자 소파에 누워서 빌빌거리던 리베라 역시 하품을 하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군복을 갖춰 입고 그 뒤를 따랐다.

당연하게도 로한도 함께였다.

끼릭.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자 곧 익숙한 얼굴들이 복도에 서 있었다.

“대령님, 이제 나오셨네?”

구릿빛 피부를 가진 클리에는 그렇게 말하며 군모를 눌러썼다.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미카엘은 물론 세실과 유엘, 페고르 역시 이미 그를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쿠웅- 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은 비행함이 격납고에 무사히 안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령님.”

세실은 그렇게 말하며 살짝 옆으로 비켜섰고, 단테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말했다.

“가지.”

동시에, 그들은 망설임 없이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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