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
단테는 순간적으로 손끝을 움직였다.
흐려지던 감각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다시금 눈을 떴을 땐 사방이 어두웠다.
입을 벌렸다.
그러나 벌어지지 않는 입술은 답답함을 더할 뿐이다.
‘어떻게…….’
마지막 기억의 편린을 되짚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그렇게 묵묵히 조금 전을 회상한 단테는 머지않아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속았나.’
방심했다거나 오만했다거나 따위의 일은 없었다.
그저 사방이 놈이었기에 깨닫지 못했을 뿐.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속았다는 것도 기가 찰 뿐이다.
그렇다면 여기는 어딜까.
단테는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어두웠기에 내력을 끌어 올려 시야를 밝혔으나, 그럼에도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마치 무저갱에 빠진 느낌이 이럴까.
그런 생각을 하던 단테는 문득 이질감에 미간을 좁혔다.
잠시 죽었나, 하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이미 한번 죽음을 겪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할 정도의 의식조차 없었지 않은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말을 할 수 없었으며, 시야는 어두웠다.
그때였다.
-그게 정말인가요?
귀에 익은 목소리가 뇌리를 스쳤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경직된 몸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에도 여전히 목소리는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내뱉어진 여자의 목소리.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화답하는, 어딘가 장난기가 맴도는 남자의 목소리.
귀에 익다.
아니, 분명히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그리고 머지않아, 단테는 자신의 뒤에서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남궁연희.
사마제천.
이제는 그리운 과거의 인연들이었기에, 단테는 무심결 실소했다.
기갑천마
진실에 다다르소서
-믿기 힘든 건 사실이지만, 믿을 수밖에 없군요.
여전히 몸은 움직여지지 않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대화는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테는 생각보다 동요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둘의 대화는 성립할 수가 없으니까.
‘만나 보지도 못했건만.’
마교가 건재할 당시, 남궁연희는 그저 수많은 정파의 후기지수 중 하나일 뿐이었다. 기껏해야 가지고 있는 별호도 남궁제일미라는 것이 전부였다고 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반면, 사마제천은 그 당시 이미 사마가(家)의 소가주였고, 거귀의 침략 초반에는 죽은 사마 가주를 대신하여 가주가 되었다.
‘그리고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죽었지. 못난 놈.’
최후의 최후에서조차 실없는 농을 입에 담았던 놈이다.
그렇기에 놈이 죽은 후, 서서히 무너지는 중원을 바라보며 그토록 빠르게 마모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테는 이윽고 조소를 품었다.
쓸데없이 생각이 길어졌다.
요약하자면 결국 조금의 접점도 없던 그들이었기에 뒤에서 들려오는 대화는 거짓된 것이다.
‘그렇다는 건…….’
심마(心魔)거나, 번뇌(煩惱)거나.
그의 삶에 가장 깊은 족적을 남긴 이들이다.
오랜 친우와 최후에 다다른 전우였으니까.
한편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대화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당신의 그 가설이 정말이라고 해도 솔직하게 당신을 신뢰하기 어려운 건 사실이죠. 하지만 믿어 보겠어요.
남궁연희 특유의, 조금은 냉기를 머금은 목소리가 스쳤다.
그녀는 마치 어려운 결정을 한다는 듯 말했다.
-그 결정은 그분을 염두에 두신 결정입니까? 하여튼, 살다 보면 별의별 모습을 다 본다지만…….
순간 사마제천의 입꼬리가 얄밉게 올라간 것처럼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시끄러워요. 그럼 이제 계획을 읊어 보세요. 제 마음이 변하기 전에.
-간단합니다. 그들에게…….
그때였다.
갑작스럽게 낀 노이즈 같은 괴이한 소리가 단테의 귓가를 스쳤고, 곧 그는 척추를 따라 흐르는 묘한 괴리감에 미간을 좁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들려오지 않았다.
다만, 잔향처럼 남은 찝찝함만이 그를 괴롭힐 뿐이다.
‘심마나 번뇌라 생각했건만.’
두 개의 경우, 경지를 넘을 때 찾아오기도 하지만 주화입마에 다다랐을 때도 종종 오곤 한다.
애초에 불시에 찾아와 마음을 흩트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들이 아닌가.
때문에 내심 함정에 빠져 주화입마에 빠진 것인가 생각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일전에 심마를 겪었기에 더더욱 잘 알 수 있다.
그것들은 기본적으로 원초적인 감정을 충동하고 나아가 과거의 어둠을 억지로 열어 들추는 것이다.
하나 조금 전 대화는 그저 아무것도 없었다.
어떤 동요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고, 그저 단순히 들려올 뿐이다.
마치 사실이라도 전달하는 것처럼 말이다.
‘차라리 볼 수 있었다면…….’
눈으로 보았다면 무언가 알아챌 수도 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은 고개를 돌리지 못하기에 그들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또 자신을 인지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답답함에 몸을 떠는 것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답답함에 미간을 좁혔다.
바깥도 바깥이지만, 슬슬 이 상황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그러나 그때.
스스스.
갑작스럽게 어둠이 걷히고, 세상이 흐려지듯 갈라지며 무언가가 단테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마치 낡은 종이에 영상을 투영하듯, 어스름이 비치는 그것을 바라본다.
-크르르르.
검은 공간도, 움직일 수 없는 몸도 그대로다.
그러나 눈앞에 투영된 무언가는 분명 익숙한 시야다.
잠시 인상을 찡그리며 그것을 바라보던 단테는 머지않아 그것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의, 정확히는 벤데타의 시야다.
콕피트 안에서 늘 보아 왔던 광경이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익숙한 느낌과 달리 모든 장면은 그의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크아아아아아!
괴성을 내지른 벤데타가 날카롭게 도드라진 손톱으로 자신을 둘러싸는 살덩이들을 미친 듯이 찢고, 베어 나가며 치솟았다.
때때로 벌린 이빨로 뜯어냈고, 사방에서 뻗어지는 촉수와 힘줄이 몸을 휘감을 때조차 개의치 않고 앞으로 향했다.
핏물이 튀고 때때로 기체의 장갑과 케이블이 뜯겨 나감에도 벤데타는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은 마치 짐승과 같았기에 단테는 묵묵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혼란스러움을 갈무리하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살덩이들의 공격이 느려졌다.
아니…… 벤데타를 감싸고 있던 살덩이들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 벤데타는 저 멀리 도드라진 틈을 향해 몸을 던졌고, 곧 살덩이의 바깥으로 나올 수 있었다.
콰드드드득!
사방으로 썩어 버린 살점들이 비산하고 벤데타는 속도를 주체하지 못한 채 허공을 날아 도시의 구획을 굴렀다.
동시에 굉음이 울리고, 곧 무너진 건물들을 브레이크 삼아 멈춰 설 수 있었다.
-크르, 크르르르.
누구도 듣지 못할, 낮은 신음을 흘렸다.
벤데타는 마치 정신이라도 차리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후,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앞에서 보이는 건 거대한 살덩이이자 변종이었던…….
그리고 스스로 지배의 여왕이라 밝힌 버러지였다.
구를 그리던 살덩이는 갈라지며 뒤집혀 마치 우산과 같은 모습의 치마가 되었고, 상체는 흔히 말하는 귀부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거대한 육신에 옷 따위는 입지 않고, 찢어진 눈이 백색으로 물들었다는 점일까.
-크르르르르!
단테의 심장이 두근거리듯,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동시에 화면 너머로 벤데타의 감정이 단테에게 닿았다.
‘역겨움.’
벤데타는 역겨워하고 있었다.
한낱 괴물이 인간을 내려다보는 것을, 저리도 오만하게 서 있는 것을, 그리고 한낱 괴물에 불과한 것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이 역겨워 분노했다.
〔……단테?〕
세실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스쳤다.
동시에 벤데타는 마치 끊어진 실을 애써 달아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몸을 일으켜 놈에게 달려들었다.
콰과과광!
꽤나 요란하게도 달려갔다.
때때로 앞을 가로막는 마수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벤데타는 여왕의 일격에 살점으로 만들어진 감옥 안에서 쓰러졌다.
‘…….’
거기까지 본 단테의 심정은…… 뭐랄까, 답답함이었다.
동시에 슬슬 자신을 이 공간 안에 가둬둔 이가 누군지를 깨달았다.
여전히 입은 벌려지지 않았고, 서서히 시야조차 다시 어두워졌으나 단테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은 그림자를 바라볼 뿐이다.
-…….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단테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아니, 애초에 검은색인 그림자를 검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
그것에 대한 답은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정적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이나 단테를 지그시 바라만 보고 있던 그림자는 이윽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뭡니까.
마치 시험을 보듯, 혹은 저의를 캐묻듯.
내뱉어지는 말에 단테는 생각했다.
‘원하는 것이라.’
글쎄, 그런 게 존재하긴 했을까?
그 한마디 화두에 단테는 과거를 회상했다.
아니, 낡은 때가 묻은 책을 가볍게 넘기듯 훑었다.
어릴 땐 이름조차 받지 못한 채 살아남기에 급급했고, 결국 살아남아 천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을 때 신교의 천마가 되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요괴를 마주했다.
그때부턴 생존을 위한 사투였고, 어느 순간부터 분노에 몸을 맡긴 발악이 되었으며, 죽음 이후에는 그저 관성으로 내딛는 걸음이었다.
그때, 그림자가 덧붙이듯 물었다.
-이젠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단테는 눈을 감았다.
놈의 말대로, 이 세계에서 다시 눈을 뜬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임을 깨달은 후부터 스스로 천마임을 직시했다.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말이다.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
목적을 정하고 그것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괴리와 모순에 직면했다.
그렇기에 단테는 답했다.
‘지향점이 어디인지는 나도 모른다.’
이제 와 풀기엔 너무나 깊고 엉망으로 꼬여 버린 삶이며, 방향이며, 그였다.
그렇기에 단테는 그저 한 가지 표지판을 보며 걸을 뿐이었다.
‘풀어라.’
그의 붉은 눈동자에 검은 그림자가 맺힌다.
그리고 그림자…… 아니, 벤데타에게 말했다.
‘저 버러지를 죽여야 하지 않겠느냐.’
스스로 왕을 자처하고, 비루한 살덩이로 기워진 몸을 자랑하며 저리도 오만하게 시선을 내리까는 눈동자가 번잡하다.
-나의 주인 된 자여.
그림자는 웃었다.
동시에 놈은 한쪽 무릎을 서서히 꿇었고, 이윽고 서서히 흐려지는 단테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니.
-진실에 다다르소서.
그 말을 끝으로, 단테의 정신은 깊고 깊은 심연 아래에서 서서히 끌어 올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