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93화 (93/197)

그 시각.

성벽 위에서 홀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소년이자 블랙 가드의 제4 원로 이슈페인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미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

그리고 그와 통신하는 여자 역시, 그저 올 게 왔다는 듯 화답했다.

〔이제야 좀 제대로 구경하겠네.〕

“그러게.”

이슈페인은 손에 쥔 볼펜을 가볍게 딸각거리곤, 이내 수첩을 다시 꺼내 의미를 모를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동시에, 여왕은 선언한다.

-도태된 종족이여. 절멸하라.

〔당장 피해-!〕

세실의 찢어지는 외침과 함께, 스스로 여왕이라 밝힌 재앙의 손끝이 흔들렸다.

그러나 그때.

-크르르르르르!

콰드드득!

여왕의 치마가 되어 버린 살덩이를 꿰뚫고 검은 짐승의 모습을 한 무언가가 프란틴 시내를 향해 튕겨져 바닥을 굴렀다.

그리고 그것은 이윽고 세실의 발치에서 몸을 떨었고, 곧 그녀는 멍한 눈으로 그 기체의 주인을 읊조렸으니.

〔……단테?〕

그건 다름 아닌 벤데타였다.

단테의 이름을 부르며 그에게 다가가려던 세실은 이윽고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누가 봐도 벤데타의 상태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크르르르.

다름이 아닌 기체가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동시에 붉게 물든 안광은 마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뿐인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고, 뜯어진 장갑과 곳곳에 묻은 마수들의 살점은 섬뜩함을 자아내는 데에 반해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 괴리감에 세실이 멈칫한 그때.

〔뭐, 뭐야?〕

세실과 거의 비슷하게 단테를 발견하고 달려온 클리에가 무심결 중얼거렸다.

동시에 벤데타는 잠시 주변을 바라보다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몸을 떨었다.

……일이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그것을 느낀 모두가 주춤주춤 벤데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비틀거리던 벤데타가 서서히 두 대지를 딛고 일어섰을 때.

콰득!

벤데타는 짐승이 이빨을 갈 듯, 검은색으로 갈라진 자신의 입술을 깨물고 곧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세실이 손을 뻗은 그 순간.

콰과과과과광!

벤데타의 육신이 허공을 향해 도약하고, 동시에 그의 발치에 걸린 건물들이 사방으로 갈려 나가며 부서졌다.

그 과정에서 마수는 물론 인간들 역시 죽어 나갔으나, 누구도 그것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저, 저건 대체……!〕

클리에의 어벙한 목소리가 오픈된 회선을 울렷다.

그러나 아무도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그들도 저런 모습 따위 본 적도 없으니.

문득, 짐승처럼 달려 나가는 벤데타의 모습을 본 세실은 멍한 눈으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곧 그녀는 이 전장에 자리한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왕은 그저 벤데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마수들도 벤데타의 움직임을 막지 않았다.

그저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지배자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때때로 터져 나갈 뿐.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아…….’

비일상이 일상이 된 시대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일상은 일상을 위협하곤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비일상에 전율하고 있었다.

콰드득!

마침내 벤데타가 여왕의 앞에 다다라 대지를 도약했다.

핏물로 점철된 대지를 짓밟듯이 뛰어오른 육신은 이내 여왕의 눈앞까지 다다르니.

……세실은 눈을 감았다.

벤데타는 쩍 벌린 입술 사이로 포효하며 여왕을 향해 날카로운 손톱을 뻗었다.

동시에, 여왕은 나지막이 읊조리니.

-가엾은 패배자여.

여왕의 치마는 순식간에 촉수가 되어 벤데타의 몸을 휘감고, 이윽고 압축했다.

콰득!

섬뜩한 울림이 퍼지고, 곧 벤데타를 감싼 거대한 고깃덩어리에서 핏물이 흘러내린다.

〔아아아아…….〕

〔끄, 끝인가.〕

당연하게도, 절망은 더욱 몸집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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