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는 눈을 떴다.
이제는 익숙한 묵빛 액체들이 그를 반기듯 감쌌다.
그는 꿀렁거리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점차 안정되어 가는 육신을 살폈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이윽고 시선을 살짝 들어 길게 펼쳐진 전장의 모습을 훑었다.
-크르르르르.
-쿠어어.
마수들은 새롭게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그들을 경계하듯 이빨을 세웠다.
원래대로라면 당장 달려드는 것이 정상이었으나, 그들의 본능에 자리한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이 발을 붙잡고 있는 탓이었다.
물론 단테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었기에 그는 언제든지 놈들에게 응전할 수 있도록 만전을 가한 채 시선을 돌렸다.
새삼 느끼지만 그가 있는 곳은 콕피트라기엔 뭐랄까…… 하나의 요람에 가까웠다.
-스르륵.
첨벙과 같은 물과 같은 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점액질의 액체가 손가락 사이를 스치듯 빠져나가고, 다른 파일럿들이라면 여과 없이 몸에 꽂는 케이블도 없다.
그저 존재하는 것은 그와 때때로 액체를 따라 존재를 과시하는 검은 심장뿐.
울컥!
그때 메인 코어의 역할을 대신하는 검은 심장이 순간 두근거리며 단테가 흘린 내력을 허겁지겁 먹어치웠다.
자연스럽게 벤다타의 장갑이 뒤틀리듯 흔들렸다.
단테는 보지 못했으나, 곧 번뜩이는 안광이 터지며 일대를 훑은 순간이었다.
그때 곁에서 함께 떨어진 로한이 입을 열었다.
〔슬슬 정신 차린 모양인데…….〕
그가 말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를 순 없다.
그 때문에 단테는 시선을 돌렸고, 곧 로한이 탑승하고 있는 기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붉은색을 베이스로, 관절부와 부차적인 장갑은 주황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합 왕국의 기체와 닮은 점이 꽤 있었는데, 다름이 아닌 탄탄한 하체였다.
탄탄한…… 아니, 튼튼한 하체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제국군의 기체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있다.
거기에 무장까지 읊으면 더하다.
손에는 흔히들 개틀링 건이라고 부르는 기관총이 들려 있고, 허벅지와 어깨, 콕피트의 옆 부분에는 소형 마력포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부무장으로 리볼버가, 등에는 × 자로 교차된 라이플 2정이 구비되어 있었다.
물론 탄환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기들이다.
탄환이 로한의 마나라는 걸 감안하지 않았을 때 통하는 말이었다.
이윽고 그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이번엔 리베라의 기체가 눈에 들어온다.
로한의 붉은 장갑과는 대척되는 은색 장갑이 눈에 밟힌다.
로한이 필요 이상의 무장을 둘렀다면 그녀의 무장은 실로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오히려 기체가 너무 늘씬하다는 평가까지 들었다.
물론 이유는 있었다.
그녀의 주력이 다름이 아닌 육탄전이니까.
단테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그동안 지켜보며 그녀가 몸을 때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였던가.
그때 한창 부하들의 기체를 살피던 단테의 귓가로 클리에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야, 기체 멋진데?〕
여전히 발랄한 목소리였으나, 조금은 지쳐 있다.
아무래도 시그니처를 사용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게 전투 지속 불가는 뜻하는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쿠어어어어!
그때 단테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일련의 마수들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시선을 들어 전장을 살피자 꽤 적잖은 수의 마수들이었다.
-콰아아앙!
끼기긱!
그것을 본 공화국의 병력들이 포격을 갈기고, 몇몇 나이트 프레임들이 다가와 그 앞을 가로막았으나 한참은 역부족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클리에와 달리 공화국 군과 꽤 가까운 자리로 추락해 걱정은 배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쿠웅!
붉은 장갑을 한 기체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딘다.
기체 내부의 온갖 무기들이 철그럭- 따위의 소음을 울리고, 곧 로한은 자신의 뒤에 서게 된 단테에게 말했다.
〔거, 아직 기체 이름 말 안 했죠?〕
〔그래.〕
단테의 짧은 답에 로한은 마나 하트를 움직였다.
곧 특유의 붉은 마나가 일렁거리고, 그는 밀려오는 놈들을 향해 기관총의 총구를 겨눴다.
위이이이잉!
기관총의 총열이 돌기 시작한다.
총구가 마나를 머금은 채 서서히 달아오르고, 곧 쩍 벌린 마수들의 아가리를 조준하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다다다다다당!
쏘아지는 탄환을 무시하고 달려들었던 놈들은 순식간에 벌집이 된다.
처참한 핏물이 바닥을 적시고, 죽어가는 육신은 하나가 쓰러질 때마다 진동을 울렸다.
〔제 기체 이름은 레기오(legio).〕
그 모습에 로한은 웃었다.
손맛이 썩 나쁘지 않음과 동시에 수도에서 처음 기체를 받았을 때 들었던 말을 무심결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해석하자면…… 군단.〕
클리에가 널빤지를 타고 이어지는 하나의 함대라면, 로한은 홀로 벼랑 끝에 선 군단이다.
타다다다다당!
달아오른 총열은 진즉에 붉게 물들어야 했으나, 특수 제작된 탓에 족히 수천 발을 쏴 갈겼음에도 어떠한 손상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마수가 찰나의 순간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을까.
이미 처음 달려들었던 마수들은 바닥에 쓰러진 지 오래다.
그리고 그 순간.
-우어어어!
클리에와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단테 일행을 두고 갈등하던 최상급 마수가 비명에 가까운 포효를 내지르며 멀쩡한 오른팔로 왼쪽 어깨를 쥐었다.
그리고 곧 콰드득 소리를 내며 뜯어 버렸다.
핏물이 옆구리를 가득 적셨다.
그리고, 곧 놈은 뜯어 낸 팔을 허공으로 던졌다.
팔이 빙빙 돌며 떨어진 곳은 다름이 아닌 천사들이 부유하고 있던 곳이었다.
〔……!〕
통신기 너머로 다급한 분위기가 스쳤다.
빠르게 날개를 펄럭이며 회피 기동을 취했으나, 완전히 피할 순 없었는지 한 기체는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클리에가 외친다.
〔갈겨어어!〕
콰아아아아앙!
콰아아아앙!
다시금 쏘아진 포격이 놈을 겨냥했다.
그러나 그 순간 최상급 마수가 다시금 포효하자 배는 많은 마수들이 그 포격을 몸으로 막아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클리에까지 고립되자 최상급 마수의 시선은 단테 일행에게 향했다.
그 모습에 단테는 무심결 웃었다.
마치 우선순위를 정한 것과 같지 않은가.
하이에나의 얼굴에 원숭이의 몸을 가진, 족히 하나의 산과 맞먹는 크기를 가진 역겨운 짐승을 바라보며 단테는 벤데타의 주먹을 쥐었다 폈다.
콰드득.
그의 주먹이 꿈틀거렸다.
벤데타가 말하는 듯했다.
얼른 저 버러지 같은 짐승을 죽여 버리자고 말이다.
단테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보채지 마라, 벤데타. 네 생각과 다르지 않다.”
단테는 그렇게 읊조리며, 여전히 화망을 형성하며 접근하는 마수들을 그야말로 갈아 버리고 있는 로한을 힐끔 바라보곤 곁에 서 있던 리베라에게 말했다.
〔리베라.〕
〔넵, 단장! 명령을!〕
그녀다운, 쓸데없이 밟은 화답이었다.
이젠 익숙한 지랄이었기에 단테는 무심하게 말했다.
〔곧 강습하는 부대와 함께 전선을 유지해라. 빠르게 놈을 죽이고 복귀한다.〕
단테의 말이 떨어지게 무섭게, 곧 로한의 화망으로 확보된 지역으로 쿠웅- 소리와 함께 세실을 비롯한 제국군 강습병들이 자리했다.
곧 통신이 연결되고, 실로 FM적인 자세를 고수하는 세실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세실 소령 외 강습 소대 55명, 모두 준비됐습니다.〕
단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베라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콕피트 내부에서 피식 웃은 리베라는 잠시 통신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단장, 제 기체 이름도 뭔지 알아요?〕
그것은 꽤나 뜬금없는 화두였으나, 리베라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단테의 곁에 있던 그녀의 기체는 마치 신기루처럼 흩어지니.
〔모스트리(mostri).〕
곧 그녀는 로한의 화망이 닿지 않는, 그러나 단테의 시야를 가로막는 놈들의 허공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단테가 그녀를 바라본 그 순간 그녀 특유의 은빛 마나가 기체의 날카로운 다리에서 일렁거리고.
〔룬어로 도깨비래요.〕
그녀는 속삭이듯 말한 후, 그대로 내리찍으니.
콰과과과과과과광!
곧, 마수들의 육편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기갑천마
풍전등화風前燈火
블랙 가드의 조직 구조는 꽤 간결했다.
물론 그 실상을 깊게 파고들면 또 어떨지 모르지만 적어도 조직원들이 아는 구성도는 다음과 같다.
당주, 원로원, 단장, 조장, 조원.
행정이나 보급, 혹은 조직 내부의 사무를 처리하는 인원이나 하운드와 같은 별개의 직급은 포함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자의, 혹은 타의로 블랙 가드에 협력하는 준구성원들이 있었으나 그것도 일단은 제쳐 두자.
흔히들 조장이라고 말하면, 아무래도 어감이 약한 탓인지 그리 높게 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블랙 가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장급이라도 최대한 전투를 피하리라. 이유는 간단하다.
블랙 가드에서 ‘처리’되거나 임무 중 죽지 않고 조장이 되었다는 뜻은 여러모로 괴물이라는 뜻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로한과 리베라는 아주 착실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타다다다다당!
특수 제작된 총열도 수만 발에 가깝게 총탄을 쏘아 대자 슬슬 맛이 가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로한은 쯧- 하고 혀를 차곤 등에 × 자로 교차 된 라이플을 쥐고 잠시 숨을 고르는 마수들을 향해 재차 방아쇠를 당겼다.
죽음이 흩뿌려진다.
그러나 워낙 놈들이 거대하기 때문인지, 쓰러진 놈들은 이제 막 세 자리를 넘어가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동시에 스스스- 따위의 안개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나타난 은빛의 기체가 반쯤 허리가 휜 자세로 추락했다.
당연히 마수들은 입을 쩍 벌리고 발톱을 뻗음으로 기체를 찢어발기려 했으나.
그 순간, 그녀의 양팔의 아래에서 일순간 뻗어진 칼날이 서늘한 살기를 머금은 채로 그대로 놈들을 향해 흩뿌려졌다.
서걱, 툭!
콰지익!
목과 손목, 입과 턱이 갈라지고 터지는 소리가 울린다.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마수들의 육신이 허물어지고, 곧 리베라의 기체가 작은 언덕 크기로 쌓인 시체 위에 발을 디뎠다.
여타 기체들과 달리, 유려한 곡선이 도드라지는 리베라의 기체는 실로 기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그 모습에 무심결 공화국 병사들이 멍한 눈으로 서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그 순간 리베라가 말했다.
〔지금이에요, 단장.〕
그리고 그녀의 말이 내뱉어진 직후.
파앙!
일순간 공간이 찢어지며 검은색 기체가 허공을 높이 도약해 살기를 뿜어내는 최상급 마수의 바로 앞에 순식간에 다다랐다.
-우, 우어어어?
어느새 해가 떴고, 검은 기체를 가려주는 어둠의 장막은 걷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전장에서 그 누구도 검은 기체-벤데타의 움직임을 완전히 쫓은 이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수들조차도 말이다.
당연하게도 바로 직면한 최상급 마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육신으로 수백, 아니 수천, 어쩌면 수만을 갈아 마셨을 괴물이다.
태생적으로나 후천적으로나, 인간을 바라볼 때 오만한 시선을 견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우어어!
그런 괴물이 당혹감에 차오른 목소리로 벤데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놈의 앞에 선 벤데타, 그 안에서 놈을 바라보는 단테의 기분은 실로 정적이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로선 너무나 당연한, 마치 식사를 하듯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다.
놈들에게 인간은 개미였을지 모르나, 단테에게 놈들은 그저 잡아 죽여야 할 짐승에 불과했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위치가 역전되었다.
스륵.
벤데타의 관절이 단테의 의지를 따라 부드럽게 뻗혔다.
이윽고 그의 기감에 아직 남아 있는 오른팔을 휘두르는 놈의 발악이 느껴졌으나 전혀 개의치 않았다.
-쩌어어억!
놈의 입이 벌어진다.
시간이 느려지고, 단테는 거대한 벤데타를 단번에 집어 삼킬 듯한 역겨운 입안을 바라보며 내력을 끌어 올렸다.
울컥, 어쩌면 꿀렁-거리는 내력이 빠르게 혈도를 타고 흐르고, 이윽고 묵빛 액체를 지나 검은 심장을 미친 듯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검은 기사의 모습을 한, 단테를 유일한 주인으로 인정한 벤데타가 그를 포근하게 감싸 안은 묵빛 액체를 꿀렁거리며 속삭였다.
……한입 거리도 되지 않는 버러지 따위, 단번에 찢어발기자고.
실로 포악스럽기 그지없는 주문이었으나, 오히려 단테의 입꼬리는 올라갔다.
이 건방진 기체는 종종 주인의 마음을 너무나 잘 대변하는 것이다.
-우어어어어어어!
마침내, 놈의 오른팔이 벤데타의 측면에 근접하고 벤데타의 상체 부근이 놈의 입 언저리에 살짝 들어간 그때.
최상급 마수는 다시금 자신감을 되찾은 것인지 우월감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스쳐 가듯 느려진 단테의 시간이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오고, 어느새 탐욕스럽게 단테의 내력을 집어삼킨 벤데타가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시사했다.
‘오랜만에 써보는군.’
백월신교의 교주에겐 2대 교주가 창시한 천마신공과 더불어 백월신공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미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천마신공에 비해 백월신공이 가진 힘 역시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백월신공(白月神功).
만월파멸격(滿月破滅擊).
쩌억- 벌어진 놈의 입안이 일순간 번뜩인 벤데타의 주먹에 자리한 섬광에 티끌 하나까지 드러났다.
추악스럽게 자리한 이빨과 사이에 낀 인간의 사지.
침과 뒤섞인 핏물과 더러운 살육의 흔적들이 푸른 하늘 모습을 드러낸 만월에 의해 낱낱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놈의 몸이 멈췄다.
최상급 마수라고 불리는 짐승이 본능적으로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인지, 그대로 자리에 멈춰 두려움과 공포가 담긴 시야로 콕피트 너머에 서 있는 단테를 응시했다.
흔들리는 동공으로 말하는 듯하다.
제발…… 살려 달라고.
그러나 단테는 놈의 눈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놈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자연의 순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약자는 결국 강자에 의해 짓밟히기 마련이니.
이윽고 단테의 의지와 내력을 머금은 벤데타의 주먹에 자리한 만월이 사그라들었다.
지상에서 멍한 눈으로 단테의 뒤를 쫓던 이들은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가늠하지 못한 채 그저 1초가 1시간처럼 흐르는 감각을 온전히 느끼며 멍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채 10초나 흘렀을까.
〔하아-.〕
마치 개운하다는 듯한 단테의 목소리가 정적이 자리한 전장에 울리고.
쿠구구구궁…….
일순간 공간이 진동함과 동시에 머지않아 멎었던 섬광이 다시금 빠르게 점멸한다.
그리고 다시 5초가 흘렀을 때.
파앙!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울린 직후, 거대한 산과 맞먹는 크기를 가진 최상급 마수의 육신이 쩌저적- 갈라지며 곧 때늦은 폭음이 찢어질 듯 전장을 집어삼킨다.
콰과과과과과과광!
섬광이 최상급 마수의 입을 지나 뒤통수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었다는 표현은 다소 어폐가 있다.
아예 머리가 소멸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으리라.
〔……시그니처?〕
이미 마수들도 압도적인 공포에 딱딱하게 굳어 버린 상황이었기에, 클리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포대를 내린 채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조금 전의 그것을 설명할 단어는 그녀가 알기엔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콕피트 안에서 홀로 고개를 저었다.
최상급 마수를 단번에 보내 버리는 시그니처 따위는 들어 본 적도 없다.
애초에 그런 게 일반적으로 가능했다면 인류는 진즉에 대군주의 육신을 찢어발겼으리라.
그때 그녀의 시야에 마찬가지로 멍하니 서서 단테를 바라보는 천사…… 아니, 법국의 기체들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선두에 선 미카엘은 오픈 회선이 연결되었는지도 모른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으니.
〔신이시여.〕
클리에는 안도했다.
저 종교에 심취한 샌님이 신을 찾을 정도라면 자신이 놀란 것도 당연하다고 말이다.
한편 막 마수들과의 전투에 돌입해 짧은 시간 동안 다섯 마리의 중급 마수를 죽인 세실은 살짝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어깨에 달린 소령 계급을 바라보았다.
……같은 소령 계급이지만, 거리감이 너무나 멀다.
사실 그녀도 이미 깨달은 지 오래였다.
아무래도 단테에게 존댓말을 해야 할 순간이 꽤…… 아니, 빨리 다가올 거 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
쿠우우웅!
머리를 잃은 최상급 마수의 육신은 그대로 대지로 추락했다.
그리고 그에 맞춰 단테 역시 시체와 핏물로 가득한 땅에 발을 디뎠다.
거의 동시에 닿았기에 묵직한 소리가 2번 울리진 않았다.
-캬, 캬아아아아!
-쿠어어어어!
그리고 직후, 두려움에 떠는 마수들이 움츠러진 몸을 떨며 포효를 내뱉었다.
그러나 정작 단테는 꽤 많이 비어 버린 단전을 느끼며 생각했다.
‘고작 1년 좀 넘게 경지를 잃었었다고 조절도 안 되는 건가……? 쯧!’
조금 전 보였던 섬광은 단테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머리를 날려 버리려던 건 맞지만 이렇게 요란하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하나 어쩐 일인지 생각 외로 더욱 강한 내력이 쏘아진 것이다.
때문에, 조금이지만 손목이 저릿했다.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어쩌면 이번 생에는 현경을 넘어서 생사경에 닿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만 된다면 거귀를 잡아 죽이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전생의 그는 현경에 다다르기 직전에 마수들의 침공을 받아야 했다.
자질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시간이 모자랐을 뿐이다.
‘덕분에 역대 천마 중 제일 경지가 낮다는 오명을 얻긴 했다만.’
아쉬울지언정 부끄럽게 생각하진 않는다.
지나간 일에 아쉬워하고 일일이 뒤돌아보기엔 앞으로 걷는 길이 너무나 멀고 험했으니까.
그때였다.
〔단장님?〕
마치 안개라도 된 듯, 기척을 죽이고 단테의 앞으로 다다른 리베라의 은빛 기체가 장난스럽게 콕피트 앞에서 손을 휘휘-저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근처에서 주춤거리는 마수들을 힐끔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많이 남았어요!〕
발랄함과 동시에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으나, 아마 마수들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면 단두대로 끌려가는 죄수의 심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
물론 단테에겐 꽤나 좋은 지적이었다.
나름의 감흥을 갈무리하느라 하마터면 제일 중요한 일을 까먹을 뻔했으니.
마침 시선이 닿는 곳에 로한의 기체, 레기오가 양손에 라이플을 쥐고 어깨를 으쓱거렸다.
구태여 말을 하진 않았지만 가늠이 가는 태도다.
명령만 내리면 된다는 뜻이리라.
그렇기에 단테는 곧 오픈된 회선으로 나지막이 읊조렸으니.
〔죽여.〕
곧 학살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