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76화 (76/197)

“아, 나오셨군요!”

대충 군복을 갖춰 입은 채 본성 밖으로 향하자, 꽤 고급스러운 차를 주차한 채로 푸른 숨결을 태우고 있는 아스렌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단테와 일행들을 발견하자마자 반갑다는 듯이 손을 들어 흔들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나저나 얘기는 들었습니다. 다친 곳은 없으신지요.”

“소식이 빠른데.”

단테가 말했고, 아스렌은 옅은 미소를 띠며 화답했다.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정보니까요. 일종의 직업…… 아니, 종족적인 트라우마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의 말에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다지 궁금하진 않은 말이었기에.

한편 아스렌은 곁에 있는 로한과 리베라에게도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곤 차의 문손잡이를 쥐었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시죠.”

다름이 아닌 제국군의 주둔지다.

물론 단테에게 헛소리를 내뱉을 이는 더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마피아와 군인이 함께 있는 모습이 그리 보기 좋은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그러지.”

단테는 아스렌이 직접 열어준 문을 지나 뒷좌석에 앉았고, 리베라는 그의 옆에 앉았다.

이윽고 문이 닫히자 로한은 자연스럽게 담배를 꼬나물고는 조수석으로 향했다.

‘어째 내가 부하가 된 느낌인데.’

거기까지 생각한 로한은 문득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깨달았다.

……나 부하 맞지. 이제.

그러거나 말거나, 아스렌은 모두가 차에 타자 곧바로 시동을 걸고 운전대를 잡았다.

마도 공학으로 만들어진 엔진이 움직이며 바퀴를 굴렸다.

덜컹.

숲에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비탈길을 내려갔음에도, 과연 고급 차답게 평소 그들이 타던 군용차와는 비견이 되지 않을 정도로 푹신했다.

때문에 단테는 꽤 안정적인 승차감에 내심 만족하면서도 생각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법국이라…….’

살짝 시선을 올려 차의 천장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셀리가 죽음 직전에 말한 법국에 대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전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틀간 머릿속에 있는 법국에 대한 기억을 훑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원래 고아에 낙후된 왕국 출신의 ‘진짜 단테’가 알고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때문에 단테는 무심결 창가에 손을 얹어 부질없이 손가락을 툭툭 두드리다가 이내 곁에 앉은 리베라의 이름을 읊조렸다.

“리베라.”

“스읍…… 네?”

그 잠깐 사이에 졸았는지, 은발 몇 가닥이 입에 딸려 들어가 있다.

하나 단테는 전혀 개의치 않고 물었다.

“법국에 대해 설명할 수 있나?”

“법국요?”

이젠 익숙해진 단테에 대한 존대를 입에 담으며, 그의 물음을 곱씹었다.

“법국이라…….”

인상을 찡그렸다.

알고 있는 건 그래도 꽤 있었으나 졸고 일어난 탓인지 생각이 꼬인 것이다.

그때 운전대를 쥐고 있던 아스렌이 입을 열었다.

“뭐가 궁금하십니까, 소령님?”

시선을 돌리자, 백미러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스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아스렌은 변명이라도 하듯 덧붙였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엘프에겐 정보가 중요하니, 정보는 웬만큼 꿰고 있습니다.”

그런 아스렌의 자신감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단테는 이내 그에게 물었다.

“법국이 어떤 국가인지 궁금한데.”

“흐음, 모호한 질문이군요.”

그는 부드럽게 커브를 꺾으며 잔잔한 웃음을 지었다.

“간단하게만 설명해 드리죠. 길어지면 지루하니까요. 미친 국가입니다. 여러모로 말이에요.”

법국이라 하면 보통 어떤 국가가 연상이 될까.

잘 모르는 이들은 그저 막연하게 법국이 사랑과 자비가 넘치는 천국이라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개소리입니다.”

슬슬 비탈길이 끝나 갔다.

아스렌은 길이 살짝 비틀리는 부분에서 속도를 줄이며 덧붙였다.

“법국에는 귀족이 없습니다. 다만 신도의 계급이 존재하죠.”

모든 시민이 솔라 신을 섬기는 신도다.

나라의 관리는 전부 사제들이고, 군인들조차 과거 성기사에 빗대어 성군이라고 자칭한다.

“공화국이 자유로 망했다면, 법국은 아마 통제로 망할 거라고 장담합니다.”

법국은 모든 것이 신앙으로 귀결된다.

오죽하면 마수가 없을 때조차 시대의 흐름으로 여겨졌던 마도 공학을 제일 늦게 받아들였을까.

어느새 산의 비탈길이 끝나며 듬성듬성 민가를 지나기 시작했다.

그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오죽하면 마도 공학이라는 기술을 받아들일 때 기술 자체에 세례를 내렸겠습니까.”

꽤나 유명한 일화였다.

마수들의 위협으로 국가의 흥망이 결정되자, 뒤늦게 마도 공학을 미친 듯이 발전시키면서도 모든 기기에 세례를 내렸다는 이야기가.

“허.”

그 말에 단테는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그러자 아스렌은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운전대를 돌렸다.

“여하튼…… 법국은 뭐랄까요, 단순히 한마디로 치부하기는 힘든 곳입니다. 애초에 제국, 연합 왕국과 더불어 대륙의 3강이라 불리는 것이 예사 칭호는 아니죠.”

“3강이라…….”

기억이 났다.

수많은 군소 국가들이 마수들에게 무너지고 찢기면서도 아득바득 버텨서 결국 국가를 지켜 낸, 현시대에서 명실상부한 대륙의 주인들을 나타내는 말이라고 했던가.

레벤스라트 제국.

솔라 법국.

카리튼 연합 왕국.

한편 조수석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경청하며 담배를 태우던 로한이 나지막이 덧붙였다.

“듣기로는 법국 놈들의 나이트 프레임은 하늘을 난다던데. 역사 천사에 미친놈들은 좀 다른가.”

그때.

끼이익- 소리와 함께 차가 멈췄다.

그들이 시선을 살짝 돌리자 곧 꽤 고풍스러운 건물의 주차장에 차가 멈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곳입니다. 예약을 해 뒀으니 들어가면 지배인이 안내해 드릴 겁니다.”

그렇게 말한 아스렌은 곧바로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 주었고, 그들이 차에서 내리자 다시 차에 탄 후에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

“전 주차를 하고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그럼.”

“누가 봐도 자연스럽게 빠지는 모양인데.”

“그러게.”

당연하게도 로한과 리베라의 말이 아스렌에게 닿지 않을 리가 없다.

그는 그저 웃음을 지은 채 차를 돌렸다.

곧 후문이 열리며 척 보기에도 정갈한 복장을 한 노신사가 걸어 나와 고개를 숙였다.

“단테 소령님 외 두 분. 맞으십니까.”

“그래.”

단테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배인은 곧바로 살짝 비켜서며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상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윽고, 단테의 시선이 제일 최상층으로 향한다.

그러자 공화국 사정과는 맞지 않는 5층짜리 건물의 제일 최상층에서 실로 낯선 기운이 느껴지니.

“대모인가.”

무심결 중얼거리자, 순간적으로 바람이 스치듯 단테의 뺨을 지나가며 속삭였다.

동시에 나지막이 목소리가 울리니.

-대모라…….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그리도 말했거늘.

실로 어딘가 불편한 듯한 미성이었다.

이윽고, 단테는 앞으로 걸었다.

뒤이어 로한과 리베라가 ‘에라, 모르겠다!’라는 얼굴로 뒤따랐다.

그들이 완전히 후문 안으로 들어서자 노신사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성큼 앞서며 말했다.

“안내하겠습니다.”

공화국의 사정과는 맞지 않는 최고급 원목으로 만들어진 계단을 올라, 이윽고 최상층에 다다랐다.

그러자 노신사는 자신의 역할은 끝이라는 듯 고개를 숙이곤 곧바로 물러섰다.

단테는 앞을 보았다.

복도가 길게 이어졌다.

척 보기에도 아스렌과 동류인 이들이 정갈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도열해 있었다.

코끝에는 왜인지 모르게 아스렌이 피워 대던 푸른 숨결의 청명한 향기가 스쳤다.

저벅.

단테의 군화가 복도를 디디자, 그 순간 복도에 도열한 엘프 마피아들은 일제히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대곤 고개를 숙이며 모두가 같은 높낮이로 읊조렸다.

“드사 노스라의 자식들이, 세계수의 적을 참살한 은인들을 뵙나이다.”

당연하게도, 장관이었다.

기갑천마

일단 찾으면

복도 내부, 벽에 달린 조명은 꽤 은은했다.

마치 숲속에 자리한 나무가 드리우는 그림자처럼 복도가 너무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조절한 듯싶었다.

그런 복도에 도열한 엘프들의 그림자가 마치 카펫처럼 단테가 가려는 길에 드리웠다.

“……아무래도, 평범한 식사 자리는 아니었던 모양인데.”

단테의 중얼거림에 로한과 리베라 역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터벅.

계단에서 한 발자국 더 올라가 복도를 디딘 채 묵묵히 엘프들의 모습을 살폈다.

모두가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가져댄 후 고개를 숙였기에, 인간과는 다른 뾰족한 귀가 유달리 도드라졌다.

‘지배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엘프인가.’

또 모른다.

마법이라는 비일상이 살아 숨 쉬는 만큼, 조금 전 그들을 안내했던 노신사도 사실 엘프일지도.

그러나 딱히 개의친 않는다.

앞으로 걸었다. 마룻바닥에 군화가 닿았다가 떨어지고, 이내 엘프들의 그림자를 밟고 지나 자리한 복도의 끝자락엔 꽤 수수하고 거대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문에는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수많은 엘프와 그들을 감싸는 거대한 나무.

‘이게 세계수겠지.’

단테는 세계수가 어떤 건지 몰랐다.

다만 각인된 모습이 꽤 정교하여 무심결 훑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귓가를 스치듯 지나간 바람이 단테의 정신을 일깨웠다.

“들어오시게, 은인이여.”

그의 시선이 앞을, 정확히는 문 너머에 앉아 있을 누군가를 향했다.

그러자 곧 문의 좌우에 서 있던 엘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끼이익- 따위의 자그마한 소음도 들리지 않고, 마치 원래 그래야 했다는 듯 열리는 문은 신비스러움을 자아냈다.

그렇게 열린 문 너머에는 의자가 등을 보이며 창가로 향해 있다.

스읍, 후.

숨을 삼키고 내뱉자 푸르스름한 연기가 허공을 향해 몇 바퀴 돌다가 흩어졌다.

의자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녀의 모습을 완전히 가렸다.

이윽고 로한과 리베라 역시 방 안으로 들어오자 엘프들은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러자 단테는 가볍게 방안을 훑으며 말했다.

“당신이 대모인가.”

방안의 모습은…… 뭐랄까, 묘했다.

단순히 모습만 보자면 평범한 집무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그 가구들의 모습이 평범하지 않았다.

‘……마치.’

태생부터 서랍으로 쓰이기 위해 자란 나무처럼, 어떠한 제조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저 나무가 자라며 알아서 서랍 모양으로 변했다고나 할까.

그때 내심 신기하게 주변을 살피던 단테의 귀로 산들바람처럼 나긋한 목소리가 울린다.

“대모 말고, 으음……. 딱히 생각나는 호칭은 없는데.”

입에 물었던 푸른 숨결을 재떨이에 비볐다.

그리고 이내 의자를 살짝 돌리자 곧 그녀의 모습이 단테의 두 눈에 담겼다.

꼰 다리를 따라 정장 바지가 다리의 윤곽을 드러낸다.

흰 셔츠 위로 검은 정장 조끼를 입고, 어깨에는 검은 코트를 걸친 채 푸른 숨결의 마지막 연기를 내뱉는 모습이 썩 인상적이었다.

이윽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어깨에 걸친 코트의 끝자락이 가볍게 흔들렸다.

“인사드리겠소.”

그녀는 의자에서 성큼 벗어나 단테의 앞까지 걸었다.

살짝 녹색이 섞인 푸른 머리카락이 어깨에 몇 가닥 흘러내리듯 미끄러지고 이내 같은 색을 가지고 있는 눈동자가 반짝였다.

“부족하게나마 드사 노스라를 맡고 있는 파르필라라고 하네. 대모 말고 그저 파르라고 부르시게나.”

그렇게 말한 그녀는, ‘아무래도 대모는 늙어 보이잖아.’라고 덧붙였다.

그런 말을 하는 것치고는 젊은 얼굴에 비해선 말투가 매우 노인 같지 않은가.

“단테 소령이다. 파르.”

“알고 있지. 일단 앉으시게.”

스스로를 파르필라, 파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그녀는 단테 일행을 집무실 우측의 의자로 안내했다.

그들이 의자에 앉자 파르필라는 구석의 탁자에 놓인 물병을 쥐며 물었다.

“차는 다들 마시는가?”

“넵!”

단테와 로한을 대신하여 답한 건 리베라였다.

그녀는 말로만 들었던 엘프 마피아들의 보스를 본 건 처음이었기에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에 찬 표정을 하고 있었다.

반면 로한은 어딘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르필라와 로한의 시선이 맞닿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마치 그를 훑듯이 스쳐 지나갔다.

꾸깃.

로한의 미간이 좁혀졌다.

기분 나쁜 감각이 척추를 따라 흘렀다.

그러나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저 자리에 있을 뿐.

‘……찝찝한데.’

엘프를 그저 신기해하는 리베라와 달리, 로한은 대략적으로나마 그들에 대해 듣고 아는 게 있기에 내심 껄끄러움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것을 겉으로 드러낼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탁.

“입맛에 맞을는지.”

한편, 단테는 자신의 앞에 놓인 찻잔을 응시했다.

대충 색과 느낌을 보면 녹차와 비슷해 보였다.

그러나 막상 입으로 가져가자 의외로 시큼한 느낌이 느껴졌다.

미간을 좁히려다가 멈추었다.

독특한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기에.

그러자 파르필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자신의 앞에도 차를 놓고는 한 모금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라이무’라는 과일을 말려서 만든 차라네. 적잖이 풍미도 있고 입맛을 돋우는 터라 식전에 꽤나 즐기지.”

단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식전에 마시기엔 부담되지 않는 적당한 차다.

“식사 초대는 거짓이 아닐세. 다만 그 상대가 나일 뿐이지. 혹 불쾌했다면 사죄를 드리겠네. 그래도 종족의 은인이 나타났다는데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그녀는 혹 단테의 기분이 상했는지를 살피며 소탈하게 말했다.

그러나 정작 단테는 아무런 유감도 없이 묵묵히 차를 마실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리베라와 로한은 그 묘한 분위기에 입을 다물고 눈을 굴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침묵이 이어졌을까.

“그래서.”

어느새 차를 다 마신 단테는 시선을 들어 파르필라에게 물었다.

“식사는 뭐로 준비했지?”

“하핫.”

뜻밖이라면 뜻밖인 단테의 말에 파르필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자, 곧 문이 열리고 일련의 요리사들이 음식들이 담긴 접시들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실례를.”

마피아들과 달리 인간들인 요리사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들이 앉아 있는 의자 사이의 탁자에 온갖 종류의 음식들을 빠르게 진열하고 자리를 떠났다.

채 5분도 걸리지 않아 완료된 세팅에 로한은 어이가 없다는 시선을 보냈으나, 단테는 잠시 음식을 훑고는 물었다.

“엘프라고 하지 않았나?”

그가 그렇게 물은 이유는 간단했다.

단테, 그러니까 진짜 단테의 기억 속에서 엘프들은 오직 채식만을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탁자 위에 놓인 음식들 모두에 고기가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아.”

단테의 물음에 파르필라는 특유의 묘한 색깔의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단테와 마찬가지로 의문을 품은 로한과 리베라에게 서두를 꺼냈다.

그들과도 아예 무관하진 않은 이야기다.

“원래 엘프들은 채식하는 게 맞지. ……세계수가 살아 있었을 때까지만 해도 말이야.”

그녀의 시선이 왼쪽 벽에 걸린 액자에 닿았다.

과거 세계수와 대수림을 묘사한 한 인간의 그림이다.

적잖이 비슷하여 걸어 두었다.

“생명에게 영양소라는 게 필수적이라는 건 다들 아는 이야기지. 다만 우리는 세계수가 내린 은총으로 그것의 태반을 공급받고 있었기에 굳이 살생할 필요가 없던 것이네.”

“그 말은…… 지금은 육식을 해야 한다는 말이겠군.”

“그렇지.”

단테의 말에 씁쓸하게 답한 그녀는 문득 한창 인간 세계에 자리를 잡을 때를 떠올렸다.

그 당시 고기를 먹어야 한다는 말에 자살한 엘프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세계수의 죽음이 제일 컸겠지만.

파르필라는 당장이라도 고개를 치켜들려는 음울한 마음을 억누른 채 먼저 식기를 들고 웃었다.

좋은 날이지 않은가.

“자, 일단 들지.”

그녀의 말에 단테 역시도 식기를 쥐었다.

뒤이어 로한과 리베라도 함께하자 식사가 시작되었다.

꽤나 상급의 고기를 썼는지, 하나같이 맛이 있었다.

단테는 고기를 잘게 다져 뭉친 후 소스를 바른 음식을 먹으며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쁘지 않군.’

제국에선 먹어 보지 못한 것도 꽤 있다.

더욱이 음식의 질도 좋아 유일한 취미라 할 수 있는 미식을 어느 정도는 채워 주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식사가 막바지에 다다른 그때, 파르필라가 단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바라는 건 있으신가.”

세계수를 죽인 네임드는 나이트메어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네임드 중 손에 꼽을 정도로 큰 피해를 준 놈이라는 건 부정하기 힘들었다.

그런 나이트메어를 죽인 그들이다.

‘비록 현재는 종족이 분열되었다 하지만…….’

현재 엘프들의, 정확히는 마피아가 된 엘프들은 같은 종족으로 뭉치지 못하고 패밀리들끼리 반목하고 있었다.

때문에 단테를 비롯한 그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면 자칫 세력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파르필라는 그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힘이 닿는 데까지 들어줄 생각이었다.

그것이 종족의 은인에 대한 예의이자 경의, 나아가 보상이 될 테니까.

“저는…….”

“정보 수집에 능통하다 했지.”

리베라는 눈을 번뜩이며 무어라 말하려 했으나, 그녀의 말을 끊고 단테가 입을 열었다.

그의 물음에 파르필라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로는 우리 엘프들을 따라잡을 종족이 없네. 애초에 대륙에서 활동 중인 정보 길드 태반이 우리와 닿아 있으니.”

몇몇 개는 아예 주인이고, 하다못해 지분이라도 가지고 있단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은인이라도 밝히고 안 밝힐 정보 정도는 구분해 놓는 게 옳은 판단이니까.

단테는 파르필라를 응시했다.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그렇기에 단테는 그들이 말한 부탁을 사용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마수 하나를 찾아 줬으면 하는데.”

“마수라면……?”

순간 파르필라의 미간이 좁혀진다.

동시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펜을 쥐었다.

단테가 말하려는 게 결단코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단테는 곁에 앉은 로한과 리베라를 아주 찰나의 순간 의식했으나 이내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네임드를 죽이고 심장을 갈랐는데 고치가 있더군.”

“고치라…….”

어딘가 심상치 않았다.

파르필라는 치솟는 불길함에 미간을 좁히곤 수첩에 간략하게 단테의 말을 옮겨 적었다.

“그런데 그 안에서 나온 마수가 인간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뭐라?”

그리고 그 순간.

단테의 말을 들은 파르필라는 필기를 멈추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단테는 덤덤하게 말을 이을 뿐이었다.

“백색의 소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반쯤 진물로 만들어 놨는데도 빠르게 재생했지. 본연의 전투력은 하찮으나 마수들이 그놈의 명령을 듣자 자아를 잃어버리고 날뛰었어.”

“그럼 그때 마수들이 그렇게 지랄했던 것도…….”

그제야 로한과 리베라는 그 거대한 공동에서 단테를 덮친 마수들의 파도가 왜 일어났는지를 깨닫고 멍하니 둘을 살폈다.

파르필라는 수첩을 탁- 하고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빈 접시와 식기 사이로 놓인 수첩에는 그 짧은 사이에 그녀가 적어 놓은 수십 가지의 정보들과 가정이 적혀 있었다.

단테의 시선이 수첩에 닿는다.

‘꽤 정확하군.’

모두가 단테 역시 생각했던 시나리오들이다.

가령 인간의 모습으로 국가의 수도로 침투한다는 가설부터, 그 능력이 지성체에게 통할 시 멸망까지 얼마나 걸릴지에 대한 간략한 계산까지.

이윽고 단테와 파르필라의 시선이 맞닿고, 파르필라는 중얼거렸다.

“……결국 진화했는가.”

포식자에게 진화란 결국 약자를 얼마나 잘 뜯어먹고 죽일 수 있느냐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진화는 놈들에게 매우 성공적이리라.

스윽-,

손을 품속으로 넣어 푸른 숨결을 꺼냈다.

그러고는 불을 붙이자 곧 청명한 푸른 연기가 천장을 향해 뭉게뭉게 떠올랐다.

그녀는 실로 복잡한 얼굴로 생각했다.

정녕 신은 대륙을 버렸는가.

“일단 찾으면.”

그때였다.

상상도 못 한 마수들의 진화에 반쯤 절망한 파르필라의 귓가에 단테의 목소리가 꽂혔다.

시선을 내려 단테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순간적으로 굳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죽인다.”

그도 그럴 것이, 번뜩이는 적안에 감도는 살기는…….

“반드시.”

그 자체로 이미 포식자를 찢어발긴 또 다른 포식자였기에.

기갑천마

감춘 속내와 어린아이

대화는 끝이 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후에 이어진 말들은 감사를 전하는 파르필라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단테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때 말이죠.”

어느새, 리베라가 둘 사이에 끼어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파르필라와 대화를 이어 나갔고, 파르필라 역시 그런 리베라의 모습이 썩 싫지는 않은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나누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탁자 위에 놓인 찻물이 식고, 그 식은 찻물조차도 어느새 다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단테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리베라.”

“네?”

“먼저 가지. 대화를 나누고 싶으면 더 나누고 와도 좋아.”

그는 머리에 군모를 쓰고, 앉아 있느라 흐트러진 군복을 가다듬으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런 그의 말의 진의를 리베라가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더 있기엔 귀찮으니까 대충 수다를 떨려면 떨다 오라는 얘기였다.

언뜻 보기엔 상관의 비꼼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리베라는 웃으며 답했다.

“네!”

상대는 리베라였다.

더욱이 단테의 말 또한 비꼼이나 돌려 말한 것이 아니라 뜻 그대로였다.

리베라가 답하자 단테는 곁에 앉아 있던 로한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떡할 거지?”

식사는 끝이 났고 용건도 끝났으니 지금 함께 갈 것이냐, 아니면 이 자리에 남아 있을 것이냐에 대한 물음이다.

당연히 로한의 대답은 전자였다.

끄응.

“가시죠.”

굳어 있던 허리에서 뚜둑- 하는 소리가 났다.

작은 고민조차 없이 대답한 느낌이라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으나, 그래도 불편한 자리에 남아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로한은 실눈의 장점을 살려 파르필라를 살폈다.

‘꺼림칙하단 말이지.’

겉으로 보이는 외모나, 태도, 모두 아름답고 고귀한 엘프의 정석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수상하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 때마다 무언가 입안의 가시처럼 걸리는 부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요즘 날마다 작두를 타는 기분인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는 것이다.

“아, 가시려는가.”

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한창 리베라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던 파르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었다.

녹색이 섞인 푸르른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린다.

“아쉽지만, 그래도 은인의 얼굴을 볼 수 있어서 좋았네.”

단테는 생각했다.

새삼 느끼지만, 말투에 비해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외모다.

마치 반로환동이라도 한 고인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는 파르필라의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 곧바로 몸을 돌려 문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문득, 머리에 한 가지가 더 떠올랐다.

‘하마터면 잊을 뻔했군.’

제일 중요한 그놈을 떠올리느라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까먹었다.

그는 살짝 시선을 돌려 다시 앉으려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파르.”

“응?”

단테의 부름에 그녀는 자리에 앉으려는 모습 그대로 멈췄다.

그러고는 뒤늦게 자신이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음을 깨닫고 허리를 편 채 되물었다.

“왜……?”

“법국에도 정보망이 있나?”

“그건 당연히 있기는 하지만…….”

“그럼 법국에 대한 조사도 부탁하지.”

단테의 적안과 파르필라의 푸르른 눈이 허공에서 마주했다.

그녀는 ‘갑자기 법국의 정보는 왜……?’라고 물으려다가 이내 단테의 시선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아스렌을 통해 보내지.”

깨달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물을 것은 아니라고.

때문에 그녀는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곤 실로 자연스럽게 리베라의 곁에 다시 앉았다.

조금 전의 말에 무게를 두지 않겠다는, 실로 계산적임과 동시에 자연스러운 처세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화답하듯 단테도 구태여 강조를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나섰다.

스윽.

문이 닫히고, 단테와 로한이 떠난 자리에 두 여자만 남았다.

리베라는 단테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미있지 않아요?”

파르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모로 흥미로운 남자였다.

그녀는 품에 손을 넣어 푸른 숨결을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곧 청명하고 시원한 느낌과 함께 폐부 깊숙이 맑은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리베라 대위라고 했는가.”

“네!”

“썩 대단한 상관을 모시고 있구려.”

“그런가요?”

투욱.

이윽고 파르필라는 손에 쥔 푸른 숨결의 재를 재떨이에 털었다.

그러고는 의자에 몸을 묻으며 문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조심하시게.”

“네?”

그게 갑자기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시선에 파르필라는 다시금 푸른 숨결을 깊게 들이마셨다.

“곁에 있던 로한이라는 남자.”

로한이 그녀에게 위화감을 느꼈듯.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어 보였으니.”

그녀 역시 로한이 감춘 장막의 일부분을 들췄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리베라는 묘한 눈으로 파르필라를 바라보다가, 이내 웃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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