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73화 (73/197)

‘인질이 먹혀들 줄은 몰랐는데, 크흐.’

장 피르의 눈에는 점점 불안감이 사라지고, 오히려 옅은 미소까지 띤 채로 손안에서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리베라를 내려다보았다.

‘꼼짝도 못하다니.’

아무래도 제국군 장교를 인질로 잡은 선택은 옳았다.

보라.

저 거대한 기체가 자신의 엄포에 옴짝달싹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밑에서 셀리가 외쳤다.

“장! 빨리 활로를 열어. 놈들이 객차를 뚫고 오고 있어!”

그러나 장 피르는 셀리의 말을 아주 깔끔히 무시했다.

밑에서 군인들이 온다고?

어쩌란 말인가.

“리베라 대위. 덕분에 살았군.”

씨익- 하고 장 피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시에 그는 마치 장난이라도 치듯 그녀의 관자놀이에 서늘한 총구를 들이밀며 속삭였다.

“당장 기체에서 내리고……. 그래, 아예 마스터키를 넘기도록 해야겠어.”

그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욕망이 차오르고, 밝은 미래가 그려지는 듯했다.

어차피 리베라 대위가 자신의 손에 있으니 저 기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목숨만 부지하는 건 하책이다.

오히려 기체까지 얻으면…….

‘밑에 있는 놈들 전부 죽어도 이득이지.’

에이스 기체를 기반으로 자유 프란을 점령하고, 그 직후 쿠데타를 일으켜 총통에 오르는 것도 꿈이 아닐 것이다.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한 장 피르는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기체를 넘겨! 안 그러면 이년은 죽는다!”

그의 외침이 달리는 열차의 바람을 타고 단테에게 닿는다.

곧 번뜩이는 섬광과 단테는 벤데타를 역소환시켰다.

휘이잉!

밀려오는 바람이 허공에 붕 뜬 단테의 몸을 살짝 뒤로 밀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앞선 열차의 천장에 착지했다.

펄럭- 하며 제복의 끝자락이 휘날리고 바람에 머리가 흩날렸다.

“그래, 말을 잘 듣는군.”

어떤 망설임도 없이 기체를 역소환했다.

그 모습에 장 피르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리베라의 머리를 무심결 쓰다듬었다.

그러자 관리가 잘된 그녀의 머릿결이 느껴진다.

‘아까 보니, 얼굴이 꽤 반반했지.’

제국의 기체를 빼앗고, 제국의 여자를 빼앗았다.

장 피르는 밀려오는 고양감과 우월감에 살짝 몸을 떨며 리베라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대위님, 너무 걱정하지 마. 죽이진 않을 테니.”

오히려 죽여 달라고 하지 않을까?

그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내려 셀리를 떠올리고는 비릿하게 웃었다.

‘슬슬 갈아치울 때도 됐지.’

마침 질려가던 참이다.

이왕이면 이번에 죽어 주면 좋겠는데.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단테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새 꽤 가깝게 다가온 단테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리베라, 가지가지 하는구나.”

걱정이라기엔 무심하고, 짜증이라기엔 덤덤하다.

오히려 조금은 재미있어 하는 목소리에 장 피르가 묘한 위화감을 느낀 그때.

“말을 왜 그렇게 해? 너무하네.”

그 순간.

여태까지 순순히 장 피르의 인도에 따르던 고개가 들어지고, 리베라는 마치 악동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당황했다는 듯 미간을 좁히는 장 피르에게 시선을 돌리며 붉은 입술을 달싹거렸으니.

“재미있었지? 제국군을 막 가지고 논 거 같고.”

“……뭐?”

“그런데 어쩌나.”

순간 그녀의 은빛 눈동자가 비웃음을 머금었으니.

“가지고 놀아진 건, 너인데.”

그 말이 내뱉어진 직후, 그녀를 포박하고 있는 밧줄이 뚜둑-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이년이!”

그제야 무언가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깨달은 그가 리베라를 향해 총구를 겨눴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은 늦은 대응이었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정확히 그녀의 미간을 향해 쏘아진 탄환이었으나 리베라는 고개를 숙였고, 곧 정수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 열차의 천장에 박혔다.

“이런……!”

때문에 장 피르가 다급히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던 그때.

“궁금한 게 있는데.”

리베라는 순수한 미소 사이에 살기를 숨기곤 빠르게 장 피르의 품으로 파고들어 속삭이니.

“왜 아무것도 모르는 버러지 주제에 깝치는 거야?”

콰드득!

그녀의 주먹이 장 피르의 턱에 정확히 꽂혔다.

동시에 그의 몸이 살짝 들리며 눈이 터질 듯이 부푸니.

“끄르……륵!”

턱이 갑자기 올려지며 혀끝이 이빨 사이에 껴서 절단되었다.

동시에 2개의 이빨이 강하게 맞물려 산산이 부서지고, 핏물과 함께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리고 그 핏물은 당연히 리베라의 손에 닿았다.

“아, 더러워.”

“끄륵…….”

단 일격.

리베라가 주먹을 거두자 장 피르는 그대로 천장 바닥에 쓰러졌고,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천진난만한 얼굴로 돌아와 어느새 뒤에 선 단테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 연기 어땠어?”

“별로였다.”

“힝.”

힝이고 나발이고, 단테는 그저 너털웃음을 흘린 채 그녀를 지나갔다.

그런 단테의 뒤로 리베라는 완전히 기절한 장 피르의 다리를 잡고 질질 끌어 기관실 내부로 통하는 통로 안으로 던졌다.

콰앙!

“자, 장!”

장 피르의 몸이 떨어지며 차가운 철 바닥에 닿는다.

그러자 곧 내부에서 당황한 셀리와 단원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그 즉시, 단테와 리베라는 차례대로 열려 있는 천장으로 떨어져 장의 기절한 몸 위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콰직!

물론 단테가 떨어졌을 때 갈비뼈 부근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리긴 했으나 딱히 상관 쓸 일은 아니겠지.

“다, 당신은?”

그런 둘을 본 셀리는 단테를 보고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인질로 데려간 리베라를 확인하곤 다급히 권총을 꺼냈다.

그러나 그때, 단테는 셀리와 운전을 하던 단원을 훑고는 내력을 끌어 올렸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그의 주먹에 묵빛 아지랑이가 일렁거린다.

동시에 정체를 모를 위압감이 기관실을 뒤덮으니.

“무, 무슨.”

“……끄으윽.”

셀리의 안경에 순식간에 습기가 차고, 등에는 땀이 비 오듯 내렸다.

거기에 운전대를 잡고 있는 단원은 몸을 떨며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결정해라.”

그리고 단테는 그런 둘에게 선택지를 말해 주었다.

“죽을지, 아니면 살지.”

무심한 적안은 말한다.

죽음을 택한다면 고통 없이 보내 주리라고.

그런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한 셀리는 결정을 내렸다.

털썩.

주저앉음과 동시에 뿌옇게 변한 안경이 바닥으로 추락하고, 그녀는 반쯤 본능적으로 바닥에 엎드려 중얼거렸다.

“사, 살려 주세요.”

그리고 그 직후.

멈춘 열차의 상공으로 웬 거대 전함이 접근했고, 곧 외부 회선으로 세르겐의 노성이 울려 퍼졌다.

〔딸아! 내가 왔다!〕

기갑천마

제국군의 주둔지

자유 프란.

공화국 내의 혁명 조직 중 가장 큰 조직이자 급진적인 그들이 결국 사고를 쳤다.

무려 제국군 장교들이 탑승한 열차를 테러한 것이다.

열 명의 장교가 죽었고, 서른 명의 장교와 부사관이 부상을 입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중 태반이 위관급이라는 점일까.

그러나 영관급도 세 명이나 죽었기에 제국의 분노는 대단했다.

더욱이 민간인들까지 건드렸다는 사실이 퍼지자 공화국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다다랐다.

내부의 범죄 집단을 단속하지 못했다는 이유였으나, 특히 제국의 장성이자 세습 후작인 세르겐의 딸이 열차에 있었다는 사실도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단테에게는 딱히 의미가 없는 정세였지만 말이다.

“그냥 지금 만나러 가시지.”

아스렌의 말에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공화국 내에 제국군이 주둔하기로 합의가 된 도시 ‘루틀담’의 플랫폼 위였다.

“아쉽군요.”

한편 아스렌은 고개를 젓는 단테를 아쉬운 눈으로 훑고는 반쯤 걸레짝이 된 열차를 바라보았다.

결과적으로 장 피르를 비롯한 자유 프란의 단원들은 모조리 체포되어 제국군에게 신병이 인도되었다.

그리고 열차는 어찌 되었든 굴러가긴 했기에 무사히 플랫폼까지 올 수 있었고 말이다.

때문에 열차에 내린 직후 아스렌은 이왕 온 김에 루틀담에 있는 드사 노스라 사무실로 단테를 초대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단테가 거절하자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수긍했다.

“그래도 조만간 대모님께서 절 보내실 수 있습니다. 단테 소령님과 두 분은 패밀리를 떠나 모든 엘프들의 은인이시니까요.”

사실 보고를 올리면 대모님께서 모든 일을 내려놓고 곧바로 루틀담으로 오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쉽긴 하지만 은인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

어차피 머지않아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기에 그는 다시금 중절모를 벗어 가슴에 가져다 대곤 경의를 담아 고개를 숙였다.

“은인분들의 앞날에 세계수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그들이 알진 모르겠으나, 엘프들에게 세계수의 축복이 겸비된 감사 인사는 상대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최고 수준의 경의 표시였다.

그는 그렇게 인사를 남긴 채 시선이 몰리기 전 중절모를 깊게 눌러쓰더니 빠르게 플랫폼 밖으로 향했다.

마피아와 군인이 오래 붙어 있어봤자 좋을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아스렌이 떠나간 직후.

“크흠.”

플랫폼에 서 있던 그들의 뒤로 익숙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울린다.

시선을 돌리자 곧 갈색빛이 도는 백발을 가진 세르겐이 보였다.

단테는 곧바로 몸을 돌렸고, 그는 몇 번 목을 가다듬다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고맙네, 단테 소령.”

이윽고 세르겐의 시선이 세실에게 닿는다.

그녀는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음에도 먼저 나서서 제국군의 하역 작업을 돕고 있었다.

세르겐의 얼굴에 자랑스러운 표정이 스쳤다.

동시에 단테에 대한 고마움이 커졌다.

단테가 어떤 과거를 가지고, 또 어떤 존재임을 떠나 고마움은 진짜였다.

물론 세실이 고작 레지스탕스에게 당할 정도로 약하게 크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단테의 무력을 대략이나마 가늠하고 있는 세르겐으로서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닙니다.”

단테는 그런 세르겐의 감사에 무심히 답했다.

애초에 선의가 없었기에 딱히 와닿지는 않는 것이다.

세르겐도 그런 단테의 본심을 느낀 것인지 헛기침을 한번 크흠, 하곤 말했다.

“어차피 하역 작업은 부사관들과 병사들이 할 테니까, 세실을 데리고 먼저 주둔지로 향하게.”

그 말에 로한은 순간 흠칫했으나, 이어지는 세르겐의 말에 안심할 수 있었다.

그는 로한은 물론 열차 내에 있던 이들을 훑으며 말했다.

“큰일을 겪었는데, 쉬어야 하지 않겠나.”

안도의 숨을 내쉰다.

아무래도 요새 피해망상이 심해진 느낌이다.

그는 겉으론 무표정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 생각했다.

‘빌어먹을 4원로.’

품속의 통신기가 입속의 가시처럼 걸리는 느낌이다.

로한은 괜스레 겉에 입은 제복을 한번 여미곤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곧 세르겐의 말을 전해 들은 세실과 단테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에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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