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아아아아악!”
“떠, 떨어진다아아!”
반면 로한과 리베라도 나름대로 죽을 맛이었다.
그들로서는 단테의 속도가 이렇게 빠를지 미처 모른 탓이었다.
하나 정작 단테는 묘하게 미간을 좁힌 채 생각하고 있었다.
‘몸이 크니 이질적인 느낌이군.’
반발력이나 기체 자체가 이질적인 게 아닌 감각의 문제다.
사람과 같았기에 크기와 같은 부분에서 조금쯤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걸 감안한다고 해도 벤데타의 움직임은 실로 만족스러웠다.
단테는 발아래로 빠르게 스쳐 지나간 사단 병력과 협곡 내부에 차려진 막사를 훑고는, 이내 협곡의 벽을 박찼다.
콰드드득!
무게가 실려 벽이 함몰되고 흙먼지가 떨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다만 내부로 진입할수록 기감에 걸리는 수많은 인기척과 짙은 피 냄새에 미간을 좁힐 뿐이다.
‘부디 아니길 바라지만…….’
묘한 이질감은 서부에 다다랐을 때부터 있었다.
분명 블랙 가드 측은 둥지라고 말했고, 프란 공화국도 둥지라고 알고 있는 것 같았으나 단테는 느꼈다.
둥지라고 확신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말이다.
쿠우웅!
다시금 협곡의 벽을 박찼다. 뒤늦게 단테의 침입을 확인한 몇몇 나이트 프레임들이 총구를 돌렸으나, 그들이 조준했을 땐 이미 단테는 사라진 후였다.
그렇게 두어 번쯤 더 협곡의 벽을 박찼을까.
목이 찢어지라 비명을 내지르던 리베라의 입이 다물어지고, 로한 역시 숨을 허억, 집어삼키며 단테가 선 대지 위로 떨어졌다.
“다시는 이딴 짓…… 어?”
로한은 늘 그랬듯 투덜거리며 무어라 중얼거리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고개를 돌린 그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단 로한뿐만이 아니었다.
리베라는 언제 웃음을 헤프게 흘렸냐는 듯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협곡…… 아니, 협곡 안에 자리한 거대한 지옥을 바라보았고.
“……이, 이 미친 새끼들이!”
로한 역시 뒤늦게 정신을 차린 채 드물게 눈을 번쩍 뜨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허.〕
그리고 단테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눈앞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협곡 안, 그들이 다다른 공간은 실로 거대했다.
마치 하나의 도시는 족히 넣을 수 있을 듯한 거대한 동굴이었다.
다만 비어 있지는 않았다.
“으아아아아!”
“죽여어어!”
그 안에 있는 건 두 가지뿐이었다.
거대한 알과 같은 것을 향해 돌진하는 프란 공화국의 병력, 그런 병력을 막아서기라도 하려는 듯 수없이 뻗어지는 촉수와 가디언들.
얼마나 전투가 이어진 건지 대지에는 시체가 가득했고, 작은 호수만큼 뚫려 있는 천장이 있음에도 공간에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1년 동안 둥지를 잡겠다고 이 지랄을…….”
〔아니.〕
로한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때문에 로한과 리베라의 시선이 단테에게 닿은 그때. 단테는 실로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저건, 둥지가 아니야.〕
말 그대로 저건 둥지가 아니다.
비록 외양은 둥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단테는 확신했다.
저놈은…….
〔네임드다.〕
이미 태어난 네임드라고 말이다.
기갑천마
개미지옥
우웅.
공간이 일순간 어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단테의 기체가 역소환되고, 그의 육신은 그대로 추락해 대지를 디뎠다.
떨어진 높이는 족히 30m를 넘었으나, 정작 대지에 닿은 단테의 발 어귀에선 작은 소리조차 울리지 않았다.
하나 로한과 리베라는 눈앞의 참극에 말을 잃어 그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정보가 잘못됐어.”
리베라가 무심결 중얼거렸다.
블랙 가드라고 반드시 옳은 정보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지만, 이번의 경우엔 심했다.
물론 정보국도 할 말은 있겠지.
‘몰랐을 거야.’
프란 공화국이 상상 이상으로 멍청하고, 고집스러우며, 아둔하다는 것을 말이다.
비단 단테뿐만 아니라, 리베라와 로한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여태까지 서부에서 근 1년간 일어났던 모든 이상 현상이 이 둥지 때문이라고 말이다.
실로 지옥이 따로 없다.
거대한 공동의 바닥에는 마치 살점을 반죽해서 눌러 놓은 듯한 역겨운 붉은색 고깃덩어리들이 꿈틀거렸다.
혈관이 도드라지고, 때때로 마수와 인간의 시체가 뒤엉켜 바닥을 구른다.
그리고 그 살점 사이에서 뻗어진 촉수는 핏물과도 같은 점액을 흩뿌리며 공화국군들을 공격했다.
“으아아아아!”
콰과과광!
비명과 폭음이 뒤섞였다.
허공에 핏빛 살점이 부유하고, 나아가 죽어 버린 이들의 원혼이 떠도는 환영처럼 자욱한 수증기가 허공에 떠돈다.
그뿐인가.
그들이 선 언덕 아래로 수백 발의 마력 포대가 둥지를 향해 쏘아진다.
나이트 프레임의 발치에 장착된 무한궤도가 혈관과 마수들의 시체를 짓밟으며 돌진하고 말이다.
“……가관이군.”
때문에 단테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참혹하다거나, 인류애적인 마음이 치솟진 않았다.
다만 이런 광경이 너무나 익숙하다는 것이 어딘가 입맛을 씁쓸하게 만들 따름이다.
“둥지가 아니라니, 단장?”
그때 로한이 반문했다.
“누가 봐도 둥지잖아, 퉤!”
내뱉은 침에 공화국에 대한 짜증과 혐오, 한심함이 섞여 있었다.
그러나 단테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러니까 무슨 근거로…….”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단테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때.
“여기 있다!”
뒤늦게 그들을 발견한 공화국 장교의 외침과 함께 일련의 병사들이 그들을 포위했다.
수십 개의 총구가 들이밀어졌다.
그리고 이름 모를 장교가 그들을 향해 일갈했다.
“투항해라! 그렇지 않으면 발포하겠다!”
이미 그들 중 한 명, 단테가 제국의 에이스 파일럿이라는 것을 눈치챈 이들이 태반이다.
때문에 사살하진 못해도 팔다리 하나쯤은 날려 버릴 각오로 총을 겨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단장.”
리베라가 작게 중얼거리며 미간을 좁혔다.
평소 헤프게 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모습과 괴리가 썩 심했으나, 단테도 로한도 그것이 오히려 리베라의 본모습에 가깝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나.
“멍청한 놈들.”
정작 단테는 쯧- 하고 혀를 찰 뿐, 그들을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듯 둥지만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익!”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걸까?
장교는 일단 제압을 하려는 듯 단테의 종아리를 향해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뭘 잘했다고 이 새끼들이…….”
로한은 욕지거리까지 입에 담으며, 허리 어림에서 리볼버를 꺼내 총구를 비스듬하게 내렸고, 직후 장교가 방아쇠를 당긴 듯 타앙- 하는 총소리와 함께 총탄이 발사되었다.
그와 동시에 로한이 신경질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순간적으로 은빛 총구에 푸른색 섬광이 맺힌다.
그리고 곧 바닥에 박힌 총탄은 그대로 산산이 부서져 솟구쳐 단테를 향해 쏘아진 탄환에 부딪쳤다.
쏘아진 탄환은 정확히 단테의 종아리를 향했다.
그것이 적중했으리라 확신한 장교가 주변의 병사들에게 체포를 명하려던 그때.
티잉, 소리와 함께 탄환이 허공에서 경로를 잃고 곧 추락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보던 장교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벌렸다.
“무, 무슨…….”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확신이 없으면 쏠 수 없는 도탄 사격이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예였기에 병사들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놀란 공화국군과 달리 단테는 여전히 둥지를 보고 있었고, 리베라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에겐 놀라운 일이 아닌 탓이다.
그때였다.
“들어 본 적이 있다.”
장교들 사이를 헤치며 터벅- 하는 걸음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화국군을 상징하는 푸른 제복이 펄럭거리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회색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는 나이가 꽤 있음에도 여전한 미모를 뽐냈으나, 한 가지 흠결이라면 왼쪽 눈을 가린 검은 안대일까.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며 말했다.
“제국에는 기체를 다루는 소양뿐 아니라, 과거 인외의 경지에 다다랐던 무인들처럼 기예를 단련하는 이들이 있다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하시나. 이미 대충은 눈치챘으면서.”
로한의 이죽거림에 그녀, 카트린 준장은 쓴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테의 기체를 보고 의심했고, 조금 전 로한의 기예를 보고 확신했다.
“빌어먹을 의회 놈들.”
그녀는 실로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고는 주변 장교들의 시선은 개의치 않고 실로 반갑다는 듯이 경례를 올렸다.
“실물로 보니 반갑군. 개인적으로 네놈들이 몸담은 조직에게 빚이 있다. 다시 소개하지. 프란 공화국의 군인이자 힘없는 졸장인 카트린 준장이다.”
“졸장이라…….”
그때 단테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틀린 말도 아니군.”
질책과 무시가 담긴 목소리였으나, 카트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썩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를 지칭하기엔 꽤 미화된 말이지.”
안대를 쓴 얼굴이었음에도, 꽤나 아름답게 미소가 지어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단테는 몸을 돌려 성큼 앞으로 걸었다.
터벅. 터벅.
내딛는 걸음에 목걸이가 흔들린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의 앞에 다다른 단테는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1년 전인가.”
그녀의 시선이 저 멀리,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군인의 목숨을 잡아먹고 있는 둥지에게 닿았다.
그리고 이 질긴 악연의 시작점으로 기억을 되돌렸다.
“방공 기지를 지으려고 일대를 정찰하던 수색 중대가 협곡을 발견했다.”
위치가 실로 절묘했다.
법국과 제국을 적당히 등지고 선 협곡은 잘만 공사한다면 국경을 지켜 줄 든든한 요새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비무장 지대에서 말이죠.”
그때 로한의 이죽거림이 들려왔으나 카트린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부로 들어선 중대의 통신이 곧 끊겼고, 상부에선 나이트 프레임 소대를 보내 확인토록 했지. 그러나 그들도 머지않아 통신이 끊겼어. 단 한마디를 남기고 말이야.”
-안에, 둥지가 있습니다.
도망치듯 협곡의 끝에 다다른 한 파일럿이 내뱉은 유언이었다.
그리고 그 즉시 둥지 발견이라는 중대한 사실이 총통에게 전해졌다.
“알고 있겠지.”
카트린은 단테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선을 맞췄다.
그리고 왜인지 지끈거리는 왼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덧붙였다.
“독자적인 둥지 파괴 전적이 있는 타 국가들과 달리, 우리 공화국은 늘 법국이나 연합 왕국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
약소국의 한계이자 무능한 위정자들에게 수많은 견제를 당하는 군대의 한계였다.
그럼에도 국가를 지키고자 군은 또 한 번의 굴욕을 감내할 마음을 먹고 합동 작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때였지. 위대하신 의원들께서 공화국의 자주국방을 울부짖은 것이.”
카트린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감과 동시에, 그녀의 주변에 있던 고급 장교들의 표정 역시 그리 다르지 않게 변했다.
툭.
그녀의 손가락이 눈가를 두드렸다.
검은 천으로 만들어진 안대가 흔들리고, 카트린은 실로 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결과가 이거고.”
무능한 위정자들의 무능한 결정.
무능한 결정에 불복하지 못한 무능한 군인.
그리고 결과로 나타난 예정된 참극.
순간 그녀는 시원하게 웃었다.
그녀는 스스로가 한 일의 무게를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다, 단테 대위.”
정적이 흘렀다.
이 사실을 처음 들은 공화국군의 군인들도, 이미 알고 있던 이들도, 로한과 리베라. 나아가 단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콰아아아앙!
뻗어진 포탄이 대지에 박히며 마수들의 살점을 터트리는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단테가 입을 열었다.
“늘 의문이었다.”
“응?”
그는 시선을 다시금 시선을 돌려, 둥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네임드를 향해 미친 듯 쇄도하는 공화국군을 보았다.
나이트 프레임의 성능이나 마수를 상대할 때의 가치는 인정했으나, 그럼에도 어떻게 이 세상이 50년이나 버틸 수 있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늘 그를 맴돌았다.
그런데 자신을 굳이 이곳으로 인도한 블랙 가드의 행보를 보자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무언가 있다. 어쩌면 50년보다 더 깊이 이 세상에 뿌리를 내린 무언가가.’
둥지가 아닌 것조차 눈치를 채지 못하고, 1년간 무수한 피를 흘렸음에도 네임드를 잡지 못한 채 소모전만 거듭했다.
……과연, 이곳만 이럴까.
그럴 리가 없다.
분명 대륙의 수많은 곳에서 비슷한 일들이 즐비하게 일어나겠지.
그런데도 대륙은 여전히 건재하다.
때문에 확신하는 것이다.
비단 나이트 프레임과 블랙 가드 말고도 진정으로 이 전쟁을 지탱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걸 말이다.
그가 찾아야 할 것들이 늘었다.
때문에 단테는 굳이 더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병력을 물려라, 카트린.”
“뭐?”
그의 말에 카트린이 되묻자 단테가 답했다.
“일단 먼저 정정하지. 저건 둥지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너희가 발견했을 때부터 둥지가 아닌 네임드였을 수도 있지.”
“그게 무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단테의 말에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만약 저것이 네임드였다면 공화국의 수준으로는 1년이나 전선이 이어질 수가 없을 텐데.
그러나 단테는 그 이상의 설명을 늘어놓지 않고 몸을 돌렸다.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옷자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머잖아 단테는 언덕의 끝으로 성큼 걸어가며 말했다.
“로한, 리베라. 카트린 준장에게 기체를 얻은 후 곧바로 합류해라.”
둘 역시 저번 둥지 파괴 작전의 공로로 에이스로 확정되었으나, 기체가 만들어지는 데에 시일이 걸려 아직 전용기가 없는 상태였다.
때문에 그의 말에 카트린은 미간을 좁히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잠깐, 단테 대위…….”
그들은 모르고 있었으나, 단테는 한참 전부터 그들에게 너무나 태연하게 하대를 내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간단하게 비유해 주지.”
지금의 단테는 대위가 아닌, 오직 단테로서 이 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그는 어느새 눈을 가리는 흑발을 쓸어 넘긴 채 목걸이를 쥐었고, 나아가 특유의 적안을 번뜩이며 말을 이었다.
“놈은 지금까지 너희를 사육하고 있던 거다. 땅에 박혀서 둥지인 척하면 알아서 벌레들이 기어 온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 마치 개미지옥처럼.
단테는 느꼈지만 로한과 리베라, 나아가 공화국군의 누구도 느끼지 못한 차이는 단 하나뿐이다.
때때로 느껴지는 네임드의 심장 고동.
동시에 실로 순수한 생명에 대한 악의.
네임드의 기운이 담겼던 영약을 먹었기 때문인지, 그게 아니면 단순히 무인으로서의 직감인지는 모른다.
사실 이유는 중요치 않다.
다만 간단한 이치가 있을 뿐이다.
단테는 놈이 네임드임을 알았다.
“벤데타.”
그것이면 된 것이다.
그의 입술이 달싹여지며 벤데타의 이름을 읊조리자, 거대한 빛이 번뜩임과 동시에 일전에 협곡을 질주했던 거대한 거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쿠웅-!
짧고 간결한 울림이 공터를 채우고, 이내 거대한 보랏빛 망토가 휘날리니.
〔1년이면 충분히 포식을 했겠지.〕
순간, 벤데타의 안광이 마치 단테와 같이 붉게 물들었다.
〔식사 시간은 끝이다, 버러지.〕
쿠구궁!
일전에 협곡을 도약했던 것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발 구름으로 언덕을 도약했다.
그러자 언덕의 끝자락이 무너지고, 이내 거대한 공동의 하늘에 검은 거인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콰아아아앙!
곧 이변을 느낀 것인지 대지와 공동을 꿰뚫은 수십 개의 촉수가 벤데타의 장갑을 산산이 부숴 버릴 듯 쏘아졌다.
“……저런!”
그 모습에 카트린은 물론, 공화국군의 장교들 역시 미간을 좁힌 채 단테의 추락을 예상했다.
‘자신감은 좋았지만…….’
너무 성급했다.
때문에 카트린은 곧바로 자신의 기체에 올라 그를 구원할 생각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막 세워 둔 기체로 향하려던 그녀의 어깨를 틀어쥐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려 확인하자, 다름이 아닌 로한과 리베라였다.
“어디 가십니까, 준장님.”
적발이 바람에 미약하게 휘날리고, 곧 실눈이 살짝 떠지며 그녀에게 말했다.
“기체는 주고 가셔야죠. 저희 단…… 단테 대위 말 못 들었습니까?”
“그게 무슨……!”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국신문을 읽은 그녀로선 단테와 함께 특임대에 몸담았었다는 남녀를 모를 수가 없기에, 둘이 리베라와 로한이라는 건 이미 눈치챈 상태였다.
때문에 그녀는 말했다.
“지금 그 단테가 위기에 처했는데, 무슨……!”
애초에 타국의, 그것도 제국의 장교에게 기체를 빌려주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은 둘째로 치더라도, 지금 저들의 상관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태연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위기? 누가?”
하나 그때.
리베라는 어느새 다시금 돌아온 웃음이란 가면을 쓴 채, 살짝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단테가?”
그리고 그 순간.
〔하찮다.〕
단테의 실로 오만한 목소리와 함께, 어느새 뽑힌 그의 거대한 검이 벤데타의 손에 쥐어져 허공에 긴 만월을 그리니.
서거걱!
콰드드드득!
이윽고 수십 개의 촉수가 핏물을 뿌리며 일제히 대지로 추락했다.
“……아.”
“대충 이해했으면…….”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는 카트린에게 리베라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닥치고 기체나 좀 주시죠? 이왕이면 제국에서 밀수입한 거로. 공화국 기체는 아무래도 너무 구식이라서.”
이번엔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기갑천마
지박식귀(地縛食鬼)
허공에 뜬 단테의 붉은 눈동자가 협곡의 끝에 자리한 거대한 지옥을 담았다.
끝과 끝이 아득히 멀다.
대지는 붉은 살점으로 만연하고, 뚫린 하늘로는 해가 들어와 언뜻 몽환적으로도 보이는 거대한 공간의 끝자락에는 기만과 탐욕으로 점철된 짐승이 꽈리를 틀고 있다.
콰드드득!
그를 향해 뻗힌 촉수와 가디언들은 단테의 의지를 대변하는 벤데타의 손길에 하잘것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핏물을 흘린 채 바닥으로 추락했다.
머지않아 그 위로 벤데타가 착지했다.
파앙!
거대한 살덩이가 짓밟히며 핏물을 꿀렁 뱉어 냈다.
신경이 살아 있는지, 때때로 꿈틀거리며 혐오감을 더했다.
그러나 단테는 그를 감싼 액체가 보내 오는 생생한 감촉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언뜻 알처럼 보이는 붉은, 그리고 검은 거대한 둥지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미간을 좁혔다.
“으아아아!”
타다다다당!
미처 퇴각 명령을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반쯤 광기에 정신을 놓아 버렸는지 모를 수많은 공화국의 군인들이 여전히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하윽, 하으윽…….”
하반신이 날아가 장기를 질질 끌며 바닥을 기거나.
“헤, 헤헤헤, 헤헤헤!”
터진 고막에서 흐르는 핏물을 손에 담고, 죽어 버린 시체들 사이에 누워 미친 듯이 웃는 병사들.
“돌진해! 돌진하란 말이다!”
그리고 무언가 망가진 듯 검게 죽어 버린 눈을 가진 채 지극히 기계적인 말로 군인들을 향해 돌진을 명령하는 수많은 독전관들까지.
누군가 본다면 인세의 지옥이라 학을 뗄 광경이었으나, 단테에겐 너무나 익숙한 광경일 따름이다.
다만, 문득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운남에서 귀태에 관한 소문을 들었어요.
귀태(鬼胎).
네임드를 중원에서 부르던 말이다.
단테의 기억이 과거 남궁이란 성을 가진 채 전장을 종횡하던 여인을 불러 왔다.
-마치 신에게 공양하듯, 인간을 바치고 그것을 받아 먹던 귀태가 있다고 하더군요.
무심결에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반쯤은 잊었고, 반쯤은 기억하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깨져있던 유리의 조각처럼 맞춰진다.
남색 머리카락이 흔들리고.
피로에 찌든 얼굴에 달빛이 비춰짐과 동시에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니.
-지박식귀(地縛食鬼).
기억과 생각이 겹치며, 머지않아 그녀가 읊조렸던 놈의 이름이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를 감싼 묵빛 액체가 일순간 진동하며 그의 몸을 훑었다.
그래, 마치…….
정답이라는 듯.
‘넓기도 하군.’
고개를 들어, 이제는 익숙해진 콕피트 너머의 시야로 거리를 쟀다.
단번에 도약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방법이 없지는 않다.
콰득!
순간 벤데타의 허벅지에 걸쳐진 장갑의 내부로 혈관과 닮은 것들이 도드라졌다.
기체의 메인 코어가 두근거리고, 곧 벤데타의 다리에 아지랑이 같은 내력이 감싸여졌다.
콰아앙-!
그의 기체가 허공으로 비스듬히 솟구쳤다.
폭발적인 도약과 함께 핏물과 살점이 튀어 오르고, 그 순간 이전보다 배는 늘어난 네임드의 공격이 그를 감싸듯 뻗어진다.
파스읏!
바람이 스치고, 동시에 빠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한 살점들이 바닥으로 추락할 정도다.
그러나 정작 단테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진짜가 아니다.’
곁에서 그를 공격하는 무수한 것들은 단순한 속임수다.
단번에 그것을 간파한 단테는 그대로 호신강기를 발밑에 둘렀고…….
콰과과과광!
그 순간 아니나 다를까, 대지에서 일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검은 송곳이 그의 발밑을 노리고 뻗어졌다.
돌과 흙, 핏물과 살점,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잔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뒤늦게 전장의 이변을 눈치챈 병사들의 시선이 이름 모를 나이트 프레임에 닿았다.
“아, 안 돼!”
“포병! 포병 어디 갔어!”
일단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가디언들과 전투를 벌이던 나이트 프레임들의 무한궤도가 회전하며 언뜻 기둥처럼 보이는 것을 향해 돌진했고, 보병들이 소총을 갈겨 댔으나 의미는 없었다.
이대로 단번에 꿰뚫릴 것이다.
왜냐고?
모두가 그렇게 끝장났으니까.
“……솔라 신이시여.”
검은 기체의 발밑까지 다다른 거대한 송곳을 본 한 장교가 무심결 중얼거렸다.
학습된 공포와 죽음은 그저 신을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습.〕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소리와 함께.
터어엉!
기체가 꿰뚫리고, 내부에 탄 파일럿이 짓눌리는 소음이 아닌 무언가 퉁겨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 그 순간.
터엉-!
소리가 울린 직후 당연히 추락하리라 생각한 검은 기체가 더욱 높게 솟구쳤다.
동시에 그의 발밑에는 검은색보다 조금 옅은 무언가가 마치 깨진 유리처럼 추락하는 것이다.
천장에 닿을 듯 뻗어지는 기체의 뒤에 호신강기의 잔해와 보랏빛 망토가 휘날렸다.
단테는 순간 주춤거리는 놈의 공격을 느끼며 다시금 시선을 내렸다.
스스스슥!
-키에에에에에!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놈은 단테가 허공에 높이 뜬 것을 기회라 여겼는지, 일대를 잠식할 듯 무수한 공격을 그에게 향했다.
그걸 보며 단테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마치 살점으로 된 이무기가 입을 벌리는 것 같다-라고 말이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군.’
본능에 가까운 직감으로 활로를 찾았으나, 보이는 건 거대한 기체가 뚫기엔 너무나 좁은 틈뿐이다.
그러나 그때 무언가 재미있는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가능한 것인가.’
그는 물었다.
그리고 벤데타는 꿀렁거리며 답했다.
충분히 가능하다고.
〔그렇다면야.〕
단테는 드물게 입꼬리를 올렸다.
조소나 비웃음이 아닌, 실로 오랜만의 진실된 흥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콰과과과과과과광!
뻗어진 수많은, 족히 일개 연대 정도는 궤멸시킬 수 있을 정도의 충격이 단테를 감싸듯 쇄도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일대를 뒤덮었다.
〔……이런.〕
막 기체에 앉아 지켜보던 로한마저 탄식했고, 이번만큼은 리베라도 눈살을 찌푸리며 연기가 걷히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끝인가.〕
그리고 마찬가지로 기체에 앉아 출격을 준비하던 카트린 역시 침음성을 흘리며 단테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제국의 에이스, 그것도 네임드를 사냥한 에이스라지만 저런 공격에 직격당한다면 어쩔 도리가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나 그 순간.
-파앙!
짧고 강렬한 빛이 일순간 연기를 뚫고 번뜩였고, 이내 실타래처럼 얽인 촉수의 사이로 아주 작은 무언가가 추락했다.
처음에는 기체의 잔해로 생각한 그들이었으나, 유달리 시력이 좋던 한 장교가 외쳤다.
〔사, 살았어!〕
경악, 아니 어쩌면 경외에 가까운 외침이다.
그 외침을 들은 다른 이들은 단테가 죽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멍한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저기서……. 기체를 역소환했다고?〕
〔그게 말이 돼?〕
그들은 이내 연기 속에서 번뜩인 빛의 정체를 깨닫고 전율했다.
말이 쉽지, 그 찰나의 틈을 찾아 정확한 순간 역소환하는 걸 모든 에이스들이 할 수 있었다면 전쟁은 진즉에 끝이 났으리라.
아니,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다.
저런 빠른 소환과 역소환이 되는 기체가 존재한다는 것부터 가정해야 했으니.
그리고 그 순간.
우우웅!
단테는 마치 그들에게 쐐기라도 박듯, 허공에서 다시금 벤데타를 소환했다.
붉게 물든 안광이 번뜩이고, 이질적이고 유려한 기체의 장갑이 단테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거린다.
까드득!
단테가 정확히 둥지를 향해 추락하는 그때, 둥지의 바로 아래에서 지독한 살기와 함께 소리가 울렸다.
벌레가 입가를 열었다가 닫는 듯 뱉어진 소리는 단테에게 확신을 더해 주었다.
쿠웅!
이윽고 벤데타의 발이 둥지를 디뎠다.
검붉은 껍질의 감촉이 온전히 느껴지고, 단테는 공화국군이 근 1년간 닿지 못한 둥지에 오연히 서서 내력을 끌어 올렸다.
단전이 울컥, 하며 내력을 쏟아 냈다.
혈도를 따라 종횡한 내력이 육신에 닿았다.
그러나 단테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묵빛의 액체에 내력을 흘렸다.
두근.
기대했던 짙은 내력을 삼키고 음미하듯, 벤데타의 검은 심장이 뛰었다.
단테는 실로 아이처럼 내력을 게걸스럽게 받아 넘기는 벤데타에게 읊조렸다.
“일단 인사부터 해 주자꾸나.”
마침, 얼마 전 죽였던 네임드가 유달리 마음에 들어 했던 것이 있다.
비록 한 번에 참살하진 못하겠으나 건방진 놈의 얼굴을 볼 정도는 되리라.
액체 안에서 손끝을 말아 올렸다.
동시에, 둥지 위에 선 벤데타의 손끝 역시 말아 올려졌다.
팔의 혈도를 따라 내력이 흐른다.
동시에 벤데타의 관절부 아래 박힌 수십 개의 케이블을 따라 내력이 흘렀다.
이윽고 단테는 눈을 감았고, 벤데타는 안광을 터트리니. 침묵과 공허 속에서 쥐어진 묵빛 구가 핏물을 머금고 다시금 세상에 재림한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천마묵환강(天魔黙丸鋼).
초절정에 거의 닿았기 때문일까.
이전보다 배는 커진 거대한 원이 둥지를 향해 추락한다.
그리고 회전하는 구가 둥지에 닿은 그 순간.
파앙.
아주 찰나의 순간, 공기가 소멸하며 원을 그리는 수증기가 허공으로 솟구치고.
콰과과과과과광!
침묵을 깨는 거대한 폭음과 안개가 벤데타를 감쌌다.
〔……꿈인가?〕
무심결에 이름 모를 공화국의 파일럿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들은 로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화답하니.
〔나도 처음엔 꿈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어째 몇 달 사이에 더 강해진 느낌인데?”
……라고 중얼거린 걸 빼면 말이다.
죽음과 처절함이 남은 전장이 침묵했다.
폭음이 땅을 울리고, 근처의 시체들을 허공으로 날려 버렸으나 그럼에도 정적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는 인외의 경지에 경악했고.
누군가는 재앙의 끝을 소망했으며.
누군가는 그저 상황을 살피며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그때.
〔쯧.〕
일순간 공간을 뒤덮을 듯 흩어진 연기 사이로 벤데타가 솟구치며 단테의 목소리가 울렸고.
까드득.
단지 단테에게만 닿았던 벌레의 입질 소리가 공동을 가득 채웠다.
그때 허공으로 솟구친 벤데타의 오픈 회선으로 단테가 외쳤다.
〔도망쳐라. 살고 싶으면!〕
이름도 모르고, 낯선 기체가 내뱉는 말임에도 최전방에서 싸우던 보병들과 장교들은 일제히 몸을 돌려 달렸다.
직감이었고, 본능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채 열 발자국을 내딛기도 전.
콰과과과광!
공동이 흔들리고, 벽이 갈라지며, 대지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따, 땅이!”
달리던 병사가 갈라진 대지에 삼켜지듯 사라졌다.
고정된 마력 포대들이 추락하고, 나이트 프레임들 역시 균형을 잃고 그대로 전복된다.
“어, 엄마……!”
단단하던 대지는 바다라도 된 것처럼 흔들리며, 오직 흙으로 이루어진 파도로 그들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곧 추락하던 나이트 프레임의 콕피트를 검은 송곳이 꿰뚫는다.
콰드드득- 소리와 함께 송곳의 끝자락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눈에 담은 단테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송곳이 아니라……〕
갈라진 대지의 틈으로 수많은 검은 송곳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시에 뒤집힌 일대의 땅은 마치 시체들을 합장하듯 집어삼키니, 곧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짐승…….
아니, 거대한 곤충과도 같은 네임드를 눈에 담으며 단테는 덧붙였다.
〔다리였나.〕
그리고 그 순간.
-끼에에에에에엑!
마침내 길고 길었던 기만을 끝내고 강제로 대지 위로 끌려 올라온 네임드는 여덟 갈래로 갈라진 입을 쩌억 벌리며 포효했다.
기갑천마
반격의 서막과 낯선 목소리
-끼에에에에에엑!
내뱉어진 포효와 함께 녹색 점액에 흙이 뒤섞인 침이 흐른다.
게걸스러운, 또 혐오스러운 놈의 모습은 마치 온갖 종류의 곤충을 합쳐놓은 듯이 기괴했다.
수십 개는 족히 넘을 눈동자가 거대한 공동을 스윽 훑었다.
여덟 갈래로 갈라진 입안에는 가시들이 빼곡하고, 모두가 송곳이라 착각했던 열두 쌍의 다리는 그야말로 기괴함과 섬뜩함의 극치였다.
쿠구구구궁!
여태까지 그들이 둥지라 착각했던 건 놈의 등에 있던 수많은 돌기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래, 고작 돌기 중 하나.
〔허.〕
허탈한 목소리가 콕피트 안에 울렸다.
입술을 짓씹고, 안대로 가린 왼쪽 눈의 흉터가 아려오는 것을 느끼며 침음성을 흘렸다.
〔……정말로, 네임드였다니.〕
지난 1년간의 기억이 뇌리를 스친다.
이름 모를 공화국의 장병들이 총을 들고, 서늘한 군모를 쓴 채 협곡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했다.
태반은 군번줄도 찾지 못했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었다.
쿠데타를 계획하기에 군부는 힘이 없었고, 작전을 거부하기엔 또 다른 장성이 죄를 뒤집어쓰리라 생각해 자리에 남았다.
그렇게 1년이다.
점점 죽음이 무뎌지고, 의회에 둥지를 죽일…… 아니, 둥지에서 죽을 병사들을 더 요청하는 것도 덤덤해졌다.
죽음은 숫자가 되었고, 남은 것은 스스로 자조하는 힘없는 졸장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마저도 틀렸다.
〔졸장이라는 말도 아까웠군.〕
그녀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뒤에 서 있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준장님. 준장님의 잘못이…….〕
〔그럴 리가.〕
하나 부관의 조심스러운 위로를 부정한 카트린의 입가에 조소가 흘렀다.
떨리는 손을 들어 낡고 헤진 안대를 쓸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너지지 않았다.
철컥.
몸에 연결된 케이블이 그녀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그리고 카트린은 미친 듯 고동치는 마나 하트를 느끼며 이젠 하나가 되어 버린 눈을 번뜩였다.
‘아니,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반쯤은 망가진 삶이다.
갑자기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이후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녀는 이 순간 군인의 의무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포병대-!〕
카트린의 입에서 일갈이 터졌다.
동시에 네임드가 대지를 뒤엎는 사정거리 밖에 멍한 눈으로 주저앉아 있던 포병들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 자신들의 지휘관인 카트린 준장의 기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기갑 파일럿들!〕
공화국을 상징하는 푸른 국기가 각인된 나이트 프레임의 팔이 흔들렸다.
수많은 전투에서 앞장선 걸 증명하듯 흉터가 꿈틀거렸고, 때때로 케이블에서 마나가 누수되어 연한 아지랑이가 일렁거렸다.
……카트린 준장.
지난 1년간 둥지로 그들을 밀어 넣은 장본인이자.
〔길고 긴 전투를 끝낼 때가 왔다!〕
거의 매일 둥지 파괴 전투에 참여해 수없이 많은 사선을 함께 넘은 전우인 그녀가, 여전히 전장에 서 있는 전우들에게 외쳤다.
〔죽이고, 집에 가자!〕
그리고 그런 그녀의 말에, 살아남은 공화국의 군인들은 기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총을 쥐었고, 포대를 조준했으며, 나아가 기체에 올랐다.
쿠구궁!
카트린의 기체가 언덕을 미끄러지듯 내려가며 거대한 전기톱이 달린 라이플을 꺼냈다.
족히 포대와 맞먹을 총구의 아래에 달린 전기톱이 회전하며 앞을 가로막는 마수의 눈을 스쳤다.
-캬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마수의 울음이 귓가를 지나고, 카트린은 문득 콕피트 너머의 공동을 보았다.
“크아아악!”
“아아아아아아!”
-커허헝!
둥지, 아니 네임드를 지키기 위해 밀려오는 마수들은 마치 하나의 바다와 비유할 만했다.
마수들이 발로 차 날아오르는 전우들의 시신과 기체의 잔해들은 바다에 흔들리는 부표처럼 부질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바다에 닿지 않았다.
〔……과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내리비추는 빛이 검은 기체를 감싸듯 쏟아지고 마치 그림자처럼 펄럭거리는 보랏빛 망토가 눈에 밟혔다.
〔벤데타……. 라고 했던가.〕
그녀는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와 목을 손수 분리해 주곤 확신했다.
이번 전투에서 자신은 비록 죽을지 모르겠으나 그 죽음이 절대 외롭진 않으리라고 말이다.
마침내…….
반격의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