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41화 (41/197)

“살았다. 살았다고……!”

“아, 아아…… 다리가, 다리가……!”

“쿨럭, 눈이 안 보여…….”

보리스는 완전히 깨진 안경을 벗었다.

테에 의지하여 간신히 부여잡고 있던 유리가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고 동시에 흐릿한 시야가 전장을 응시했다.

어느새 검은 하늘이 남색으로 변해 있다.

저 끝, 지평선 너머에서 황혼이 떠올랐다.

밝아지는 대지 위의 참극을 눈에 담았다.

죽은 이를 끌어안고 오열했다.

살아남은 이들은 안도하며.

때때로 멍한 눈으로 의미를 찾는 듯 눈물을 흘렸다.

문득 그의 발걸음이 진창을 지났다.

묽은 핏물을 밟고 반쯤 구겨진 기체를 올라, 우그러진 콕피트의 입구를 지났다.

“……쿨럭!”

한 여자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의자에 기대어, 핏물이 흐르는 턱을 애써 들어 자신을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린다.

내장이 짓눌리고, 갈비뼈가 부러져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의 얼굴을 본 그녀는 입가에 조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통쾌하니? 죗값을, 치렀으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읊조린다.

후회는 없다.

후회는…… 없다.

보리스는 답했다.

“예, 통쾌합니다.”

“……그래, 그렇겠지.”

얼마나 자신이 미울까.

지금 그는 아마 권선징악 따위를 떠올리며 우월감에 차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반드시 그렇겠지.

큭큭- 웃은 그녀는 핏물이 가득한 손끝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차라리 후방에 자원하렴. 아니면 빨리 죽든가. 그러지 않으면…… 나처럼 된다?”

보리스는 형벌 부대에 자원한 이였다.

가문이 그리 나쁘지 않음에도, 단지 그러고 싶다는 이유로 최전선 형벌 부대에 자원한 멍청이였다.

때문에 그토록 현실을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전 올라갈 겁니다.”

그때였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나도 가치 있을 수 있게 만들 겁니다.”

어설픈 학자와 같은 모습을 버렸다.

다크서클이 진 눈동자에 또 하나의 신념이 자리하고, 그는 묵묵히 고개를 돌리며 덧붙였다.

“전 당신처럼 변하지 않을 겁니다.”

멍한 시선이 닿는다.

떠오르는 주홍빛 황혼이 그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잠시 침묵하던 케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그러렴.”

보리스가 떠났다.

몸에서 감각이 사라지고, 케린은 어느새 추워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이 전쟁이 끝나도 가치 있을 수 있게 만들 겁니다.

가치라…….

이 전쟁에 어떤 의미가 있던가.

글쎄, 모르겠다.

‘분명히 알고 있던 거 같은데…….’

언젠가 희미해졌다.

그래, 희미해진 것이다.

케린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지않아, 길고 길었던 밤이 끝나고 아침이 찾아왔다.

기갑천마

지루하진 않겠다

제국의 수도, 제도(帝都).

세간에 대륙 5대 상단 중 하나라고 알려진 ‘빈디카’의 건물은 그 명성과 걸맞게 매우 거대했다.

물론 제도의 특성상 고층 건물을 찾기 힘든 건 아니었으나 그들의 규모는 흡사 정부 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이번에 제가 연합 왕국에서 홍차를 들여왔는데 말입니다. 그게 중간에…….”

“어머, 그러셨군요. 그럴 땐 저희 빈디카와 전속 계약한 용병들로…….”

로비엔 온갖 군상이 오갔다.

하청을 받아 생필품을 납부하는 이부터, 상단에 어떻게든 거래를 트려는 상인들까지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그 빈디카의 제일 상층부.

상단의 제도 지점을 관리하는 지점장의 방 안.

일전에 단테와 마주했던 금테 단안경을 쓴 중년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묘한 눈으로 정보지를 읽다가 묵묵히 시가를 물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나아가, 탁자 위에 놓인 버번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조금 전 읽은 정보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나이트메어가 등장한 건 이변이었다.’

나이트메어뿐만 아니라, 함께 몰려온 상급 마수들 역시 상정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던 그는 둘을 살리려 개입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래, 직전까지.

‘그런데 그 무력은.’

단신으로 죽이거나 중상을 입힌 상급 마수가 두 자릿수다.

그뿐인가.

나이트메어의 뺨에 상처까지 입히고 살아남았다.

만약 자신이 거기에 서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래, 밀리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나이트메어는…….

후, 하고 내뱉는 숨결에 회색 연기가 흩어졌다.

동시에 동그랗게 깎인 얼음이 잔 안에서 빙그르 돌았다.

본디 이번 배치의 저의는 원로원의 명령을 따라 그가 보이는 행동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래야 하는지는 몰랐지만.

불쾌하다.

하지만 그것을 겉으로 내보이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당주, 블랙 가드의 주인께서 관심을 가지신 일이니까.’

그분께서 관심을 가지신 일이 ‘고작’ 일개 단장 따위의 불쾌감으로 틀어진다면 그 순간 그 자신은 물론 휘하의 부하, 그리고 그 부하들의 가족들까지 모조리 제거될지도 모른다.

블랙 가드란…… 아니, 당주란 그런 사람이었다.

평소에는 한없이 관대하나, 무언가 관심을 가지는 순간 지극히 패도적인, 그리고 조용한 움직임으로 단번에 원하는 것을 취하는 것.

그것이 현재의 블랙 가드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임과 동시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우웅.

그때 서랍에 넣어 둔 통신기가 짧게 떨리자 그는 시가를 입에서 떼어 내고 곧바로 통신기를 쥐었다.

그러자 곧 통신기 너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 리스울. 오랜만입니다.〕

“예, 4 원로님.”

〔뭐, 연락한 이유는 짐작하시겠지만 ‘그’에게 새로운 임무를 하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제4 원로.

여러모로 꺼림칙한 부분이 많은 이였으나, 리스울은 능숙하게 목소리를 무덤덤하게 꾸미며 화답했다.

“말씀하시지요.”

〔좋습니다. 이번 임무는…….〕

쉬이 납득할 수 없는, 그리고 혹여 단편적인 정보만 외부로 노출되어도 적잖은 파장을 부를 정보들이 아무렇지 않게 나열된다.

리스울은 자신도 모르게 타는 목을 위스키로 축이며 본능적으로 책상 위에 놓인 종이에 메모했다.

〔그럼, 그렇게 진행해 주시지요. 늘 기대가 많습니다. 하핫.〕

“……영광입니다. 그럼.”

〔아아, 네.〕

별다른 경례나 구호도 없이 통화는 끝난다.

분명 채 5분도 이어지지 않은 통화일 텐데, 리스울은 왜인지 지치는 것을 느끼며 식은땀을 흘렸다.

동시에 급한 마음과 달리, 정갈한 필체로 써진 임무 내용을 살핀 그는 이윽고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아무래도 조만간 로한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듯싶었다.

그 미친놈이 두 번씩이나 후배에게 존대해야 하는 명령에 어떻게 반응할지, 벌써 눈에 선했으니까 말이다.

어째 정상인 놈들이 없다.

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짝 식은 위스키로 달래며, 다시금 시가를 물고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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