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40화 (40/197)

전장에 닿기 전, 쏘아진 수십 발의 포격이 허공에 섬광의 잔상을 일으키며 상급 마수에게 꽂혔다.

콰과과광- 따위의 굉음을 울렸으나 그것에 유의미한 타격을 입은 마수는 없었다.

단지 검은 흙이 튀었다.

언젠가 묻혔던 시체가 부서진 채 튀어나왔지만, 나아가 상급 마수들의 괴성에 묻혔다.

-캬아아아아!

우우웅!

그럼에도 포격은 이어졌다.

마력 포대가 붉게 달아오르고, 연기에 마수들의 모습이 가려짐에도 절박하게 쏘아진 포탄이 마수들을 괴롭힌다.

하지만멀지 않은 곳에 다다른 마수들의 모습에 포격이 멎었다.

뒤이어 단테를 뒤따른 로한의 통신이 울린다.

〔30분이다. 30분만 버티면 인근 군단에서 출격한 비행 함대가 올 거야. 문제는 그 30분을 버틸 수가 있냐는 건데…….〕

긴장 때문일까.

존댓말은 고사하고 기체가 쥔 대검마저 떨렸다.

단테는 라이플 말고 대검을 쓰는 그를 힐끔 바라보곤 답했다.

〔가능할 거다.〕

그의 시선이 보름달을 배경 삼아 서 있는 오만한 나이트메어에게 닿았다.

놈은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되는 듯 오만한 시선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확신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놈은 절대로, 이끌고 온 놈들이 모두 죽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니까.

끼기긱, 소리를 내며 단테가 몰고 온 기체의 관절부가 꿈틀거렸다.

나아가 그의 몸 곳곳에 연결된 케이블이 한층 성장한 그의 내력을 품고 확장되었다.

우우우웅!

기체의 심장이 되는 3세대 메인 코어가 하나의 원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푸른빛이 도는 코어의 색이 검게 물들고, 나아가 기체의 붉은 안광이 묵빛으로 변하니.

〔자, 잠깐. 무슨?〕

로한의 멍한 시선이 단테의 기체를 향했다.

같은 3세대 나이트 프레임, 아틀라스와 달리 자이언츠는 기동성에 중점을 둔 기체다.

그 때문에 관절부가 비이상적으로 돌출되는 것을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콰드드득, 소리와 함께 단테가 걸었다.

아니, 단테가 탄 기체가 발을 내디뎠다.

쿠웅.

짧고 강렬한 울림이 대지를 따라 강을 건너 몰려오는 상급 마수들 사이로 닿았다.

-캬아아아!

흑백사가 입을 쩍 벌리며 포효했다.

-우어어!

마치 신화 속 현무를 빼다 박은 듯한 거북이 울었으며.

철그럭!

족히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거인이 온몸에 두른 사슬을 철컹거리며 마주 걸었다.

“참 많이도 데려왔구나.”

검게 그을린 하늘 아래에 태산을 이어 놓은 듯 거대한 괴물들과 금속으로 만들어진 거인에 의지한 인간이 마주했다.

손에 검을 쥐었다.

기체, 자이언츠가 검을 쥐었다.

검은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다.

무심결 손을 들어 쓸어 넘겼다.

일전과 달리 번뜩이는 적안이 생을 넘어 찾아온 과거의 적을 두 눈에 담았다.

저 하늘에 고고히 떠 있는 나이트메어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내 금방 네게 닿을 테니.”

단전이 꿈틀거린다.

나아가 단테의 발이 서서히 대지와 멀어지고-.

쿠웅.

다시금 대지에 닫는 그 순간.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군림할 대지를 잃은 천마가 다시금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콰과과과과광!

지축이 뒤틀리고, 나아가 천지가 굉음하니.

곧 갈라진 대지가 솟구쳐 상급 마수들을 뒤덮는다.

쿠웅.

내딛는 걸음에 공간이 진동한다.

나아가 마수들을 뒤덮는 대지가 하나의 재앙이 되어 놈들의 육신을 꿰뚫었다.

-캬아아아악!

-쿠어어!

핏물이 튀었다.

언제나 강자였던 괴물들이 흔들리는 대지와 진동하는 공간 속에서 핏물을 흘리며 괴성을 내질렀다.

두려움 따위 모르던 놈들의 뇌리에 두려움이 각인되었다.

살과 뼈에…… 아니,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한 생명으로서의 본능이 부르짖고 있었다.

마수들도 바보가 아니다.

저 거대한 금속 안에 자리한 것이 단번에 찢어발길 수 있는 작은 고깃덩어리임을 알았다.

피육을 꿰뚫는 파편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거대한 육신에 비하면 단지 생채기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 분명히 그럴진대.

두려웠다.

저 작디작은 고깃덩어리가 두려웠다.

분명히 짓밟으면 그뿐일 텐데.

그리고 그 순간.

어느새 제일 선두로 달려오던 마수 앞에 다다른 단테가 검을 늘였다.

검파를 손에 쥐고 천천히 들어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푸욱- 따위의 묵직한 울림이 검신을 따라 흘렀다.

서서히 뽑힌 검의 표면에 검붉은 핏물이 주르륵 흐르고, 나아가 갈라진 대지 사이로 머금어져 작은 강을 이뤘다.

쿠우웅.

육신이 허물어진다.

동시에 마수들의 머리 위를 날고 있던 나이트메어의 날개가 크게 펄럭이고.

-아아아아아아아.

맑고 기괴한, 소름끼치는 동시에 청아한 울림이 내뱉어지자 일순간 상급 마수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하나, 단테는 당황하지 않았다.

갈라진 대지가 솟구쳐 엉망이 된 길목에 서서 서서히 몸을 털고 일어서는 상급 마수들을 응시했다.

‘폭주인가.’

나이트메어, 몽귀의 수많은 사술 중 하나였다.

그는 군림보에 의해 죽은 상급 마수가 기껏해야 대여섯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막 일류에 다다른 참이었다.

깨달음은 높다 하여도 내력이 충분치 않으니 오히려 만족할 만한 결과인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검파를 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아아아아.

다시금 들린 나이트메어의 기이한 울음과 함께, 상급 마수들의 파도가 다시금 그를 향해 밀려왔다.

기갑천마

악몽이 깨졌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이 몸 누인 대지 위로 거대한 거인들이 우뚝 섰다.

그러나 그들 중 태반은 멍한 눈으로 저 멀리 홀로 검을 휘두르는 기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쿠어어어어어!

족히 수십, 아니 백은 넘을 상급 마수들이 하나의 기체를 무너트리지 못했다.

오히려 몇몇은 기체가 휘두르는 거대한 검에 핏물을 흩뿌리며 대지로 추락한다.

-캬아아아!

붉게 물든 안광 수십이 전설 속의 괴물과 같은 포효를 내지른다.

갈라진 대지 위로 핏물과 나이트 프레임의 부속품이 떨어진다.

콰득, 소리와 함께 견갑이 날아갔다.

케이블이 끊겼다.

관절부는 과열되어 붉게 물들다 마침내 불이 붙었다.

누가 보아도 위태롭다.

하지만동시에 경이로웠다.

〔저게……. 말이 돼?〕

그 대단하다는 4세대 나이트 프레임이 아니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인물 또한 에이스 파일럿이 아니었다.

아니, 그 두 개가 합쳐진다 한들 저런 광경을 보여 줄 수 있을까.

짙게 깔린 어둠 속 검은 섬광이 일대를 지배한다.

마장기 내부에서 팽창된 케이블이 마치 인간의 혈관처럼 도드라지고 꿈틀거렸다.

콰아아아앙!

폭발하는 검은 섬광이 순식간에 거대한 거인의 팔을 잘랐다.

그뿐인가.

이어진 반원은 하나의 거대한 칼날이 되어 뒤따르던 마수의 다리를 날려 버렸다.

-케에에에!

고통 섞인 마수의 비명이 울린다.

도축 당하는 짐승의 심정이 저리할까.

〔소위라고? 지랄.〕

무심결 케린은 중얼거렸다.

블랙 가드라는 놈들이 괴물이라는 건 익히 들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저건 좀 과하지 않은가.

‘……가문이라더니.’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제각기 무력 단체에 불과한 엠퍼러 가드와 로열 가드와 달리, 블랙 가드는 하나의 가문이라고.

그땐 단순히 웃으며 넘겼던 말이었으나 지금은 절실히 체감하고 있었다.

‘단장급은 되려나.’

저 정도의 실력이면 말이야.

그때였다.

〔구경 왔냐!〕

홀로 단테가 놓친 마수들을 위태롭게 막던 로한이 오픈 회선으로 욕지거리를 참으며 외쳤다.

그러고는 뒤를 노리는 마수의 입에 대검을 쑤셔 박았다.

푸른 검에 보랏빛 핏물이 흐르고, 그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린 파일럿들은 제각기 무기를 들고 단테를 지나 돌진하는 마수들에게 향했다.

〔으아아아아!〕

〔막아아!〕

단테가 홀로 최전선에서 무수한 마수들과 대적하고 있다곤 하나, 이미 폭주 상태에 돌입한 마수들에게 단테의 기체는 단지 먹잇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쿠어어어어어!

거북이를 억지로 늘려 놓은 듯, 심장이 반쯤 드러나고 눈이 수십 개가 돌출되어 있는 상급 마수가 부리에 가까운 입을 벌렸다.

갈라진 대지 위를 짓밟은 거대한 발이 지축을 흔들었다.

움푹 들어간 대지에 고여 있던 핏물이 들어차고, 때때로 쏘아진 마력포가 웅덩이에 떨어져 허공에 묽은 핏물을 낭자하게 흩뿌렸다.

〔죽어어!〕

대위 계급을 가진, 이름 모를 파일럿이 마나 하트를 진동하며 손에 쥔 거대한 렌스를 뻗었다.

쇄도한 렌스는 단번에 상급 마수의 몸을 꿰뚫을 듯 푸른 마나를 머금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때.

-우어.

짧고 굴은 울림.

그것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뿐이었으니.

〔끄아아아아악!〕

대지를 뚫고 솟구친 마수의 촉수가 단번에 기체를 꿰뚫고 허공을 날았다.

족히 작은 언덕과 맞먹을 거인은 하릴없이 추욱 늘어져 몸을 떨다가 이윽고 대지로 추락했다.

-쿠우어.

상급 마수가 웃었다.

기분이 좋은 듯, 딱딱한 부리를 부딪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소령님!〕

〔……그래.〕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솔른이 외쳤다.

케린은 곧바로 놈에게 뻗어지는 것으로 화답했고, 머잖아 놈의 앞에 도달한 그녀는 망설임 없이 망치를 쑤셔 박았다.

콰아앙, 소리와 함께 부리가 박살 났다.

하나 놈은 채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이어진 솔른의 창에 눈이 꿰뚫렸다.

검은 눈동자가 터졌다.

푸르스름한 핏물이 터지고, 놈은 본능에 가깝게 다친 몸을 떨며 반쯤 부식된 등딱지로 몸을 숨긴다.

때문에 케린이 놈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려던 그때.

-쿠어.

비웃음마저 섞인, 붉은 안광을 뿜는 마수의 울음이 울리자 솔른이 외쳤다.

〔소령님!〕

〔어?〕

그리고 그제야 케린은 일전에 파일럿 한 명을 보내 버린 공격이 바로 자신의 발밑에서 뻗어지고 있음을 깨닫고 미간을 좁혔다.

‘빌어먹을.’

피하기엔 늦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찍어 내리던 망치를 거두지 않고 오히려 최대한의 출력을 더했다.

우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망치에 밀어 넣어진 금색 마나가 공간을 찢어발기며 그대로 허공에 긴 궤적을 남겼다.

비록 죽어도, 놈은 데려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콰아아앙!

마력 포대가 있는 언덕이 아닌, 참호 선이 파진 지상 쪽에 배치된 포대가 불을 뿜었다.

덕분에 케린을 노리고 뻗어진 마수의 촉수가 일순간 느려진 덕에 케린의 망치가 놈보다 더 빨리 닿을 수 있었고.

콰드드드득!

실로 묵직한 피육음과 함께, 놈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하나 케린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으니.

‘지상에서?’

그녀의 시선이 지상에 닿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익숙한 동시에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얼굴이었다.

실금이 간 안경.

좁은 어깨와 평균보다 작은 체구.

마지막으로, 학자와 같은 얼굴.

‘……보리스 중위.’

그가 이끄는 형벌 부대가 진창에 파묻혔던 마력 포대를 끌고 마수들을 향해 포격을 갈기고 있었다.

그뿐인가.

“갈겨어!”

“쏴!”

기관총을 들고 무차별적으로 화력을 지원했고, 때때로 몇몇은 아예 착검한 채 돌격하기까지 했다.

……의미 없는 짓이다.

총을 쥔 보병은 중급 마수에게나 통한다.

고작 야전에 투입되는 마력 포대 역시 마찬가지다.

착검 돌격? 논하기도 우습다.

〔……멍청한 놈들.〕

비단 형벌 부대뿐만이 아니다.

뒤늦게 현실을 깨달은 것인지, 그들을 전장으로 내몰던 병사들 역시 미친 듯이 총을 쏴 대며 최대한의 저항을 하고 있었다.

“끄아악!”

“내, 내 팔! 내 팔이이!”

핏물이 튀었다.

뼈조차 가루가 된 고깃덩어리가 허공을 날았고, 죽어 버린 육신이 마수에게 짓밟혀 진창 속에 빠졌다.

〔소령님.〕

〔그래.〕

곁에 선 솔른의 목소리에 그녀는 달려오는 거대한 뱀을 응시하며 망치를 쥐었다.

이제 와 감흥에 젖기엔 너무 마모된 육신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단지 달려드는 마수들을 짓이기며 미친 듯이 망치를 휘둘렀다.

메인 코어가 진동하고, 마나 하트가 과열되며, 검은 케이블이 붉게 달아오른다.

때마침 완전히 걷힌 구름이 전장을 비추었다.

거인의 사슬이 이름 모를 기체의 허리를 휘감고 잡아 뜯었다.

미스릴로 만들어진 장갑이 우그러지고 동시에 콕피트에서 묽은 핏물이 터졌다.

단테는 하아, 하고 숨을 내쉬었다.

‘몇이나 베었지.’

분명 직접 베지 않았음에도 손이 저렸다.

관절이 아렸으며, 나아가 핏물이 모자란 듯 입가가 말랐다.

안광을 잃은 거인이 단테의 발밑에 깔려 꿈틀거렸다.

촉수를 뻗어 대던 마수는 단지 고깃덩어리로 전락하여 추욱 늘어졌고, 깃털을 펄럭이며 하늘을 달던 새의 날개는 뜯어져 바닥을 굴렀다.

손이 가벼웠다.

문득 시선을 내리자 검신이 보이질 않았다.

긴 전투 끝에 부러진 탓이다.

〔단테, 물러서. 더는 기체가 버티지 못할 거다.〕

귓가로 로한의 우려와 묘한 두려움이 섞인 목소리가 울렸다.

케린이나 다른 장교들과 달리 그의 행적을 낱낱이 본 그였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허공에서 묵묵히 지상을 관조하던 나이트메어의 입이 열렸다.

-아아아아아아.

섬뜩하면서도 음울한 울림이 울려 퍼졌다.

단테는 미간을 좁혔고, 전장을 종횡하던 모든 생명이 일순간 멈췄다.

우웅.

검은 장막이 드리운다.

나아가 모두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여기는…….’

단테는 검게 그을린 듯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눈을 떴다.

분명 조금 전까진 기체의 콕피트 안에 있었을 터인데.

머리가 지끈거렸다.

낯이 익은 곳인데, 왜인지 기억이 나질 않는 탓이다.

그리고 그때.

“사, 살려 주십시오!”

“으아아아악!”

“이, 이 개자식들아아!”

고통에 찬 목소리가 울렸다.

때때로 저주가 담겼고, 때때로 울분이 섞였다.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검게 그을린 듯한 공간은 마치 묵빛 그림이 그려지듯 빠르게 변했다.

대지를 내디뎠다.

짙은 혈향이 바람을 타고 코를 간지럽히고, 피로 물든 하늘 위에는 절망과 고통이 자리하니.

언덕 위에 선 단테의 시선이 평원에 닿았다.

피난 가던 수천의 백성들이 마수, 아니 요괴들에 의해 갈가리 찢겨 죽고 있었다.

“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노인이 품에 손주를 안고 죽었다.

때때로 젊은 사내가 아내를 대신하여 요괴의 입에 몸을 던졌고, 죽어 버린 어미를 찾는 갓난아기가 바닥을 기어 다니다 요괴의 발에 짓밟혔다.

실로 처참한 광경의 연속이었다.

단테는 입을 다물었다.

기억을 떠올릴 필요도 없이, 익숙한 광경이기 때문이었다.

참극은 빠르게 이어졌다.

마치 시간을 빠르게 돌리듯, 해가 지고서야 평원 위의 모든 백성의 생명이 꺼졌다.

그리고 그 순간.

바닥에, 수풀에, 요괴의 이빨에 꿰뚫린 민초들이 일순간 눈을 뜨고 단테를 바라보았다.

피눈물이 흘렀다.

입술을 달싹거리며 손을 뻗었다.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명령으로 죽어 간 수많은 무력대들이 원망하며 스스로 목을 베었다.

다시금 시선을 돌렸다.

죽인 정사지간의 문도들이 그를 향해 검을 찔렀다.

우웅.

어느새, 공간은 다시금 검게 변했다.

그러나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으니.

붉게 물든 수백, 수천 개의 눈이 단테를 둘러싼다.

그들은 묻는 듯했다.

어째서 우리를 그렇게 죽였느냐고.

단테는 답하지 않았다.

단지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몰골을 살폈다.

검은 머리에 적안을 한 단테가 아니다.

잿빛 머리와 잿빛 눈을 가진, 넝마가 된 장포를 입고 핏발이 선 눈으로 무림을 종횡하던 과거의 천휘였다.

그때 그의 앞으로 한 사내가 걸어왔다.

-아직도 살아 계십니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때때로 그리워하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기생오라비와 같은 얼굴은 그대로였고, 잘려 나간 팔다리는 온전히 붙어 있었다.

놈은 손에 쥔 철선을 처억- 펼치고는 입가를 가리며 눈매를 올렸다.

-지치시지 않으셨습니까, 교주님.

“사마제천.”

오랜 벗이자 수하의 이름을 부른다.

천휘의 부름에 놈은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예, 접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면상이구나.

여전히 놈은 기생오라비와 같았고, 여전히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그 때문에 천휘는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턱, 하고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머지않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리 빨리 찾아오지 말거라.

천휘, 아니 단테의 목소리가 검은 공간을 울렸다.

그러자 사마제천 역시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러시지요, 교주.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단테는 단번에 놈의 목을 비틀었다.

콰드득!

짧고 굵은 떨림이 공간을 울린다.

단번에 끊어낸 사술의 고리가 뒤틀리고, 나아가 검은 장막이 하릴없이 갈라지니.

악몽이 깨졌다.

기갑천마

이 전쟁에 어떤 의미가 있던가

“여, 여긴?”

케린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콕피트 안에 있었을 텐데 ‘어째서?’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단테와 마찬가지로 검게 물든 공간은 물감에 번진 듯 흐려지고, 나아가 낯이 익은…… 그러나 쉬이 기억이 나지 않는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언젠가의 전장.

그 전장에 선 그녀는 멍한 눈으로 죽어 가는 병사들을 응시했다.

‘……이건.’

기억이 났다.

동시에, 애써 잊었던 기억이기도 했다.

-지휘, 지휘를!

-끄아아악!

-퇴로가 보이지 않습니다!

잘못된 지휘로 병사들이 죽었다.

나중에 부사관을 할 테니 함께 출세나 해 보자고 시시덕거리던 부하들이 마수들의 입과 발톱, 촉수에 제각기 작은 조각으로 찢겨 나갔다.

-소대장님!

그녀를 살린 것은 막 하사로 임관했던 솔른이었다.

그는 죽어 가는 병사들의 모습에 망연자실한 케린을 들쳐 업고 빠르게 전장을 이탈했다.

장면이 바뀐다.

절망하는 과거의 자신이 울부짖었다.

솔른의 멱살을 잡고 차라리 죽었어야 했다고 울부짖었다.

솔른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다.

가문에서 입대를 말렸을 때, 제국을 위하겠다는, 미래를 위하겠다는 대의를 품었던 어린 소녀는 사라지고 현실에 수긍하며 마모되고 망가진 여자만이 남았다.

얼마나 군에 있었지.

5년, 아니 7년은 넘었나.

계급장이 바뀌었다.

얼굴에 잔주름이 생겼고, 어느새 그녀가 입은 군복은 구식이 되었다.

소위가 소령으로 진급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죽어 간 수많은 병사의 이름과 얼굴이 흐릿해졌다.

매일 전사자 가족들의 편지가 도착했다.

-당신이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거짓말이야. 그가 죽었을 리가 없어.

-무능한 년. 네가 죽였어.

그때마다 솔른의 위로를 받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전쟁이 원래 그런 거라며 듣는 말에도 점점 지쳤다.

문득 눈에 형벌 부대가 보였다.

‘어차피 죽어야 한다면.’

저들은 죄인이다.

죄를 저지른 이들의 목숨이 일반 병사들의 목숨보다 무거울까.

말도 안 되는 생각임을 알았다.

스스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형벌 부대를 밀어 넣어.

-예? 그, 그러면.

-……명령이다.

투입된 형벌 부대는 전멸했고, 형벌 부대의 지휘관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했다.

그러나 케린의 시선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닿았다.

‘전장에서는 한 명도 죽지 않았어.’

피를 흘린 것은 죄수들뿐이었다.

그렇기에 스스로 떳떳하진 않아도 후회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 분명히 그랬을 텐데.

“아, 아아…….”

케린이 선 곳은 산이었다.

흙과 돌, 내지는 뿌리로 이루어진 산이 아닌 시체의 산이었다.

피로 물든 손이 올라온다.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팔을 틀어쥐었고, 나아가 머리채를 쥐었다.

-어째서, 어째서…….

-살고 싶었어. 살고 싶었다고…….

-죽어, 죽으라고!

검은 하늘이 수천 개가 넘는 피눈물로 뒤덮였다.

몸이 떨리고, 이빨이 딱,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뭐라고 말을 하려 했다.

변명을 하려 했다.

“……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시야가 물든다.

붉게, 검게, 붉게, 검게…….

무심결 허리로 손을 뻗었다.

아니, 뻗어진 죽은 이들의 손이 권총을 쥐여 주었다.

팔을 들었다.

관자놀이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기라고 종용한다.

눈물이 흘렀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끼긱, 소리가 아주 느리게 흘렀다.

눈을 감았다.

이대로 당기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방아쇠가 끝에 다다른 그때.

콰드득- 따위의 소리와 함께, 그녀를 감싸고 있던 공간이 깨졌다.

“허억, 허억……!”

시야가 다시 밝게 돌아왔다.

검은 장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손에 쥔 권총이 힘없이 추락했다.

텅그렁, 소리가 울렸다.

뒤늦게 전장을 바라보니, 사방이 고요했다.

모두가 악몽에서 깨어난 듯 때때로 통신기 너머에서 신음이 울린다.

“아, 아아…… 솔른!”

본능적으로 연인의 이름을 찾았다.

버팀목이 되어 주던, 같은 죄를 공유하는 이의 이름을 읊조렸다.

〔……케린.〕

때마침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우직했던 그가 흔들리는 모습에 케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황급히 통신기를 쥐어 무어라 외치려던 그때.

〔……미안해.〕

타앙!

섬뜩한 총성이 울리고, 통신이 꺼졌다.

떨리는 시선으로 솔른의 기체를 보았으나, 이미 안광이 꺼진 상태로 묵묵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쿠웅.

언제나 그가 애용했던 거대한 창이 바닥에 추락해 하릴없이 나뒹굴었다.

“아, 아아…….”

눈물이 흘렀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떨리는 시선이 입을 벌리며 달려오는 마수에게 닿았다.

“아아아아악!”

거대한 망치를 쥐었다.

메인 코어가 폭발적으로 진동하고, 무기가 아닌 온몸에 살기가 감도는 금빛 마나가 폭주하여 그녀를 일순간 마수에게 쇄도하게 만들었다.

-샤아아아!

거대한 뱀이 입을 벌렸다.

뻗어진 산성액이 팔을 녹아들게 했으나 그녀는 미친 듯이 놈에게 무기를 휘둘렀다.

콰드득, 소리를 내며 뼈가 갈라진 마수가 그녀가 탄 기체의 팔을 물어뜯었으나 케린은 그저 괴성을 내지른 채 미친 듯 놈을 때릴 뿐이었다.

〔퉤, 저 미친년이!〕

뒤늦게 악몽에서 깨어난 로한이 입안에 찬 핏물을 뱉으며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뿌드드득, 소리와 함께 콕피트 안으로 뱀의 이빨이 박혔다.

동시에 고통이 찬 케린의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악!〕

뒤늦게 로한이 상급 마수의 숨통을 끊고 놈을 뜯어냈으나, 얼핏 보이는 케린의 상태는 참혹했다.

〔……틀렸나.〕

길고 날카로운 이빨이 복부를 완전히 꿰뚫었다.

바닥에 추락하며 뽑힌 이빨에 딸려 나온 선홍빛 장기가 꿈틀거린다.

로한은 망설임 없이 시선을 돌렸다.

비단 케린과 솔른뿐만 아니라, 전장에 서 있는 모든 군인이 악몽을 겪었다.

비록 찰나의 시간이었다곤 하나 마수들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기엔 충분한 시간인 것이다.

쿠웅, 쿠웅…….

로한의 곁으로 단테의 기체가 걸었다.

그 때문에 로한은 통신을 열어 단테의 안위를 물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끼기긱, 소리를 내며 단테의 기체가 허리를 숙였다.

거대한 관절부가 살짝 도드라지고, 이윽고 그의 손에 솔른의 창이 쥐어졌다.

〔단테, 일단 지금은…….〕

이미 시간은 많이 벌었다.

희박한 확률이었으나, 어찌어찌 30분에 가깝게 시간을 번 것이다.

당연히 단테의 상상 이상의 실력 때문이다.

이후의 일은 어떻게 되더라도, 일단은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부턴 살아남는 영역인 것이다.

그렇기에 로한은 금방이라도 다시 싸울 듯 무기를 쥔 단테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단테가 탄 기체, 자이언츠의 시선이 달에 닿았다.

과거 경갑을 입은 기사와 같은 모습을 한 거인이 자국이 남을 정도로 세게 창대를 쥐었다.

불이 붙었다 꺼진 케이블이 꿈틀거렸다.

미스릴 장갑 아래로 이어진 관절이 우그러질 듯 수축하고, 나아가 그의 허리가 뒤로 꺾였다.

팔을 앞으로 뻗는다.

디딤 발이 된 다리가 대지를 움푹 들어가게 만들고, 나아가 일치된 선을 그린 손끝이 서서히 창을 밀어낸다.

창을 던진다.

아니, 차라리 쏘았다는 표현이 알맞으리라.

그렇게 창이 손을 떠난 순간, 기체의 팔을 연결하던 관절과 케이블이 뚜둑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파앙!

처음엔 단지 공기가 울렸다.

쿠우웅!

이윽고 원을 그리며 공간을 찢은 창의 끝이 달을 향해 긴 선을 그었고.

콰과과과광!

마침내, 완전히 검은 섬광으로 변모한 하나의 선이 달을 등지고 서 있는 규격 외의 짐승에게 닿으니.

-아아아아.

울리는 섬뜩한 외침에 수십 개의 보랏빛 장막이 쇄도하는 창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창은 단번에 그 막을 꿰뚫고 놈에게 쏘아진다.

한 겹, 두 겹, 세 겹…….

부서진 유리처럼 잔재가 추락했다.

나아가 마지막 장막에 다다른 창대는 처음 쏘아질 때와 달리 고작 작은 마디에 불과했다.

-아아.

짧은, 그리고 어쩌면 비웃음까지 머금은 놈의 울림이 지상에 흩뿌려졌다.

하찮은 미물 주제에 이 정도면 썩 나쁘지 않았다 말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때.

쩌저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보랏빛 장막이 깨지고.

-아.

나이트메어의 입에서 당황이 섞인 울림이 내뱉어진 그 순간.

파슷-거리는 소리와 함께, 나이트메어의 뺨에 핏물이 튀었다.

-아, 아아.

고통 섞인…… 아니, 분노한 음성이 공간을 울린다.

동시에 상급 마수들은 모두 제자리에 서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대군주의 자식이 진노하였다.

마치 재앙을 피하려는 움직임인 듯, 상급 마수들은 제각기 몸을 떨며 몸을 움츠렸다.

두려움에 고개를 처박고, 때때로 도망치는 것이다.

하늘이 개벽한다.

검은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4쌍의 날개가 미친 듯이 휘날리며 다가올 재앙을 예고했다.

그때였다.

건방지게도 대군주의 자식에게 상처를 입힌 미물이 말했다.

〔다음에 만나면, 날개를 뜯어 주마.〕

노곤한 시선으로 내뱉은 말이다.

그리고 그때.

막 하늘을 뒤덮은 보랏빛 섬광이 대지에 꽂히려던 순간.

〔……수고했다, 제군. 지금부턴 우리에게 맡기도록. 그대들의 분투에 경의를.〕

우웅, 소리와 함께, 구름을 짓누르며 내려온 수십 대의 크고 작은 비행 함대가 일대를 뒤덮었다.

제국군 특유의 검은색으로 도색된 포대가 일제히 나이트메어를 조준하고, 경량화된 마력포를 탑재한 호위함들이 지상에 남은 상급 마수들을 일제히 포격했다.

콰과과광!

-카아악! 키에엑!

쿠웅, 콰아아아앙!

마력 포대가 불을 뿜고, 상급 마수들의 촉수가 허공을 향해 뻗어지며 몇몇 비행함이 격추되어 바닥을 굴렀다.

뒤이어, 허공에서 내려진 케이블을 통해 수십 대의 나이트 프레임이 대지를 디뎠다.

그들은 도끼, 창, 라이플 등을 손에 쥐고 능숙하게 상급 마수들을 사냥했다.

-아아, 아아아.

당황한 듯한 울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이윽고 나이트메어는 대지에서 학살당하는 상급 마수들을 뒤로 한 채 서서히 흐려졌다.

도망치는 것이다.

뒤늦게 비행함의 포대가 불을 뿜었으나 그들은 허공을 포격할 뿐이었다.

실로 허망하게 놓친 것이었으나, 그것이 네임드였기에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괜히 세계수를 죽인 것이 아니다.

“빨리도 온다. 빨리도 와.”

로한은 씨익 웃으면서 담배를 물었다.

이미 그의 기체도 반쯤 폐기 직전이었기에, 그는 전투에서 벗어나 의자에 몸을 묻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걸레짝이 된 단테의 기체에 닿았다.

기체 내부에 내장된 케이블이 마치 사람의 혈관처럼 도드라지고, 창을 쥐었던 팔은 끊어졌다.

‘미친놈.’

이로써 확신이 들었다.

저놈은 고작 난민 출신의 훈련병 따위가 아니다.

무언가 있다.

자칫 잘못하면 진실에 잡아먹힐 정도로 위험한 무언가가.

로한의 실눈이 드물게 떠졌다.

입꼬리를 굳히고, 그는 한동안 묵묵히 담배를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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