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38화 (38/197)

단테와 로한은 곧바로 막사로 안내되었다.

그들은 별달리 말을 하진 않았으나, 은연중에 둘의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자신들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자각은 하고 있는 듯싶었다.

막사 내부에 도착해 짐을 푼 로한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병신들.”

예전처럼 처참하게 밀리는 전황도 아니다.

그럼에도 로한은 어째서 케린이 저런 전술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

“잘못된 신념이 무섭다더니.”

비웃음을 머금는다.

케린 같은 군인을 한두 명 본 것이 아니었다.

때문에 단테가 뭐라 물으려던 그때.

스르륵 소리가 들리자, 로한은 자신도 모르게 권총을 뽑고는 막사의 문 쪽을 바라보았다.

단테 역시 경계는 섞이지 않은 시선을 향했다.

하나, 막사 내부로 들어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었으니.

“저, 저는 보리스 중위입니다.”

조금 전, 케린의 막사에서 발로 차인, 안경잡이 장교였다.

기갑천마

언제쯤 알게 되었나

그리 크지 않은 키와 체구, 거기에 살짝 실금이 간 안경을 쓴 그는 군복이 어울리지 않았다.

특히 안경 너머로 도드라진 다크서클이 가뜩이나 유약한 인상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단테가 물었다.

로한도 굳이 말하진 않았으나, 마찬가지로 찾아온 이유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때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보리스는 곧 로한이 앉기를 권하자 자리에 앉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형벌 부대의 지휘관입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대충 찾아온 이유를 가늠하기엔 충분했다.

보리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착잡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소위도, 중사도 봤을 겁니다.”

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둘이 찾아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그가 덧붙였다.

“케린 소령은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손이 떨렸다.

원래 담배를 태우지 못한 젊은 중위는 이제 담배 연기가 가시지 않는 손으로 구겨진 담뱃갑을 꺼내 입에 물었다.

스윽.

로한이 내민 고급 라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올리자 로한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스는 살짝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곤 묵묵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스읍, 후-.

내뱉어진 회색 연기가 막사 내부의 조명에 부딪혀 사라진다.

보리스는 이내 결심한 듯 품에서 일련의 고철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자연히 둘의 시선은 탁자로 향했다.

자세히 보니, 고철이 아닌 군번줄이었다.

“……조금 전 전투에서 죽은 형벌 부대원들의 군번줄입니다.”

죽은 이는 족히 수십을 넘는데, 찾은 군번줄은 채 20개를 넘지 못했다.

태반이 핏물이 섞인 진창에 처박히거나 시체조차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리스는 공허한, 그리고 죄책감이 섞인 눈으로 묵묵히 탁자 위를 응시하다가 눈을 감았다.

“그들도 사람입니다. 사람이란 말입니다.”

형벌 부대.

그 목줄을 찬 이상 그들은 온갖 궂은일을 하며 죗값을 받는다.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범죄자니까.

그러나 케린은 다르다.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단지, 장병들을 살리기 위한 미끼로 보는 것이다.

문득 보리스의 시선이 우그러진 군번줄에 닿았다.

그는 에릭이란 이름이 각인된 군번줄을 손가락으로 쓸며 결국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에릭입니다. 조금 전 죽었죠. 하반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입술을 깨문다.

그러나 그때, 조금은 떨떠름한 로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죄목은 뭡니까?”

“……상관 살해입니다.”

보리스는 침묵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어쩌면 그들이 물어보리라는 걸 예상한 것일지도 모른다.

상관 살해.

즉, 하극상.

그 말을 들은 로한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으나, 보리스는 반쯤 탄 담배를 한 모금 머금고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말했다.

“상관의 오판으로 중대가 몰살되었습니다.”

지독하리만큼 틀에 박힌 이야기다.

상관은 무능했고, 그것을 스스로는 몰랐으며, 잘못된 명령으로 중대가 몰살되었다.

그리고 에릭은 중대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잘못을 부정하는 상관의 미간에 마탄을 박아 넣었다.

“죄입니다. 죄지요. 동기가 어떻든 사람을 죽인 것은 처벌받아 마땅한 중죄입니다.”

목에 걸린 솔라 신의 묵주가 흔들렸으나, 보리스는 외면했다.

그저 죽은 이들의 군번줄을 천천히 훑으며 덤덤한, 그러면서도 처참한 목소리로 나열할 뿐이다.

“홀든 병장은 빵을 훔쳤습니다.”

배고픈 아이를 위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실수로 제빵사의 다리를 부러트렸죠.”

미끄러운 겨울밤 일어난 일이었다.

제빵사는 용서해 주지 않았고, 홀든은 배상할 돈을 구하지 못해 군대로 끌려왔다.

강간하려는 의붓아버지를 죽였다.

돈을 위해 행인을 때렸으며, 술에 취해 감당하지 못할 실수를 저질렀다.

누군가는 악의를 품고 죄를 지었으며, 또 누군가는 아직도 참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모두가 죄인입니다. 누군가는 참회하고, 누군가는 아직도 죄를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입니다.”

끊임없이 잃어 가는 시대다.

혹자는 위선자라고, 그저 이상에 미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잃어선 안 되는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람이 사람을 연민하지 못한다면.

“이 전쟁에서 이긴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정적이 흘렀다.

손에 쥔 담뱃재가 길게 늘어져 투욱- 떨어지고, 묵묵히 얘기를 듣던 단테는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감정의 동요가 없다.

그저 물을 뿐이다.

보리스는 단테와 로한을 바라보며,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막아야 합니다.”

그도 쉽지 않다는 걸 안다.

태반 수준이 아니라,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를 하는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 달라는 것이 얼마나 염치가 없는 일인지를 알기에 그는 자신을 내려놓고 빌고 있었다.

“…….”

침묵이 흘렀다.

단테는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로한 역시 골치가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게 얼마나 정적이 흘렀을까.

침묵을 깬 것은 단테의 눈짓을 받은 로한이었다.

“중위님, 일단 일어나시죠.”

“그, 그럼?”

특유의 능글맞은 목소리로 보리스를 일으켜 세운 그는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보리스를 다독이며 말했다.

“사안이 사안이니, 고민을 좀 해 보겠습니다. 그 정도 시간은 주실 수 있겠죠?”

“……알겠습니다.”

그는 단번에 거절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는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막사를 떠났다.

그렇게 다시금 둘이 남게 되자 로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아직도 저런 낭만주의자가 남아 있다니…… 참, 세상은 넓다니까.”

내심 단테도 동의하는 바였다.

케린의 방식이 마음에 드냐, 안 드냐를 떠나서 보리스는 지극히 이성적인 동시에 이상적이었다.

여러모로 군인과는 맞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소위님?”

로한의 물음은 단테의 의견을 구함과 동시에 그의 의중을 확인하고자 내뱉은 물음이었다.

단테는 답했다.

“글쎄.”

잠시 생각을 정리해야 할 듯싶었다.

그 때문에 로한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곤 밖으로 나섰다.

겸사겸사 병영의 분위기를 살피려는 의도였다.

스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막사에 홀로 남은 단테는 이내 가부좌를 틀었다.

허공에 잔잔히 흐르는 기를 토납하며, 조금 전 보았던 광경을 떠올렸다.

형벌 부대를 미끼로 쓰는 케린의 모습과 과거 자신의 모습이 어느 순간 겹쳐졌다.

순간 우스워졌다.

케린이 이루고자 하는 대의가 무엇인지 눈에 보였다.

아니, 그건 대의가 아니라 편집증적인 광기에 가깝다.

그리고 그것은 언젠가 단테가 한번 겪었던 광기였다.

그 때문에 알았다.

얼마나 오만하고도, 부질없는 발악인지를.

번뇌라고 부르기도 하찮다.

부서지고, 절망하고, 마침내 한낱 망령이 되어 버린 이는 그저 되뇌며 명상하고, 숨을 삼킨다.

스읍, 후-.

토납한 기가 단전을 거쳐 혈도를 종횡했다.

한 번의 회전에 축기된 내력이 뒤따르고, 더할 나위 없이 잘 짜인 그릇이 서서히 몸집을 키웠다.

나아가 이미 걸었던 경지에 다다르니.

“하아.”

눈을 뜬 단테는 무심결 숨결에 담기는 내력에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쌓는 기분도 썩 나쁘진 않군.’

일류(一流)에 닿았기 때문일까.

한층 가벼워진 몸이 향하고자 하는 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뻗혔다.

물론 아직 부족하지만.

“음, 어디 가십니까?”

막사를 걷고 나서자, 막 들어오려던 로한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러나 단테는 답하지 않고 병영의 중심부에 있는 막사로 향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병영 곳곳에 서 있던 병사들은 올 게 왔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케린의 막사 앞으로 다가온 단테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위님, 지금 소령님께선…….”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단테 역시 살의가 배제된 금나수를 뻗어 앞을 가로막는 병사를 제압했다.

“아악!”

손목이 꺾인 병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다른 병사들은 황급히 단테를 막으려 했으나, 그 순간 로한이 권총을 겨누며 싱긋 웃었다.

“멈춰, 대가리에 바람구멍 나기 싫으면.”

“무, 무슨…….”

물론 로한도 아무런 생각 없이 저지른 짓은 아니었다.

애초에 단테에게 소위라는 계급을 줬다는 말은 그의 판단력과 임무 수행력을 보겠다는 뜻이었기에 일단 뒤따르는 것이다.

‘이러다가 개판 났을 때 수습하는 건……. 뭐, 단장이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갑작스럽게 단테를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린 것도 단장이었고, 후배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쓰게 만든 것도 단장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살짝 빡치긴 했지만…….

‘뭐,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로한은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단테의 뒤를 따르며, 내심 묘한 기대를 품었다.

언제나 기대를 배신한 놈이었으니.

스륵, 소리와 함께 막사가 걷힌다.

이윽고 눈에 들어온 광경은 꽤 새로웠다.

술잔을 기울이는 케린과 그런 그녀를 위로하듯 품에 안은 솔른까지.

“……뭐야. 소위네?”

취기가 돈 것일까.

그녀는 피식 웃으며 단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병사들을 경계하며 뒤따라 들어온 로한이 장난스럽게 경례를 올렸다.

“저도 왔습니다, 소령님.”

“하하…….”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술잔을 기울였고, 솔른은 어딘가 복잡한 눈으로 품에 안겨 있는 케린을 응시하다가 단테와 로한에게 말했다.

“왜 왔는지는 알겠지만, 일단 돌아가십시오. 내일 제가 찾아갈 테니…….”

“로한.”

하나 그 순간.

“예, 소위님.”

단테는 성큼 그들의 앞으로 걸어가 술상이 펼쳐진 탁자의 건너편에 앉고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로한에게 말했다.

“막사 문 닫아.”

“지금 무슨…….”

“소위, 이건 하극상이야!”

그러자 뒤늦게 온 기갑 장교들이 얼굴을 굳히며 단테와 로한을 향해 외쳤다.

심지어 몇몇은 제압하겠다는 듯 권총을 뽑아 들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때.

“됐어. 돌아가.”

나지막이 울린 케린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몇몇은 차마 이 상황에 돌아갈 수 없었는지 우물거렸으나, 이내 솔른이 고개를 끄덕이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이윽고 막사의 천막이 내려갔다.

로한은 품에 곧바로 품에 넣고 다니는 사일런스 마법을 펼쳤고, 그 모습을 본 케린은 순간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잠깐, 그건…….”

그리고 그 순간.

단테의 입이 열렸다.

“케린 소령.”

“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케린의 눈동자가 굴렀다.

머잖아 단테에게 닿은 그녀의 시선에 묘한 흥미가 섞였고, 그는 품속에서 작은 엠블럼 하나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는 케린의 술잔을 집었다.

술잔이 기울고.

케린과 솔른의 표정이 굳었다.

검은 바탕에 황금색 눈동자.

소령쯤 되면 모를 수가 없는 조직의 상징을 본 그녀의 입에서 작은 한숨이 흐르고, 솔른은 천천히 권총의 그립을 쥔 그 순간.

소위 단테…… 아니, 블랙 가드 단테는 무심한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언제쯤 알게 되었나. 자신의 대의가 얼마나 추악하고도 모순적인 광기에 가까운지.”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케린은…….

“……허.”

지독히도 자조적인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기갑천마

과거의 죄, 과거의 적

단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와 케린의 가슴에 꽂혔다.

추악하고, 모순적인 광기.

“하핫.”

취기가 섞인 웃음에 조소가 담긴다.

그 조소에는 자조도 섞여 있었다.

“네가 뭘 안다고.”

네가 무엇을 아느냐고.

나의 고통을, 그럼에도 택한 나의 신념과 업보를 네가 아느냐고.

단테의 무심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노곤한 표정이다.

지친 이의 표정이며, 동시에 망가진 이의 얼굴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걸 감당하려다 끝끝내 무너진, 그래서 엇나간…… 언젠가의 자신과 닮았다.

괴물이 보였다.

내딛던 걸음이 비틀리고 뒤틀려 어느새 길을 잃었음에도 멀어 버린 눈으로 방향을 가늠하는 괴물이었다.

문득 과거가 어른거렸다.

죽어 간 형벌 부대와 죽어 간 중원 무림의 수많은 이들이 겹쳐졌다.

단테는 그녀에게서 자신을 보았다.

지금의 단테가 아닌, 과거 천마 천휘를 떠올렸다.

‘수없이 죽였지.’

때론 지칠 대로 지친 신교의 무력대를 살리기 위해 피난하는 백성들을 먹잇감으로 던져 주었다.

정사지간에 있는 문파의 장문인을 죽인 후, 문도들을 겁박하여 방패로 삼았다.

패도라는 이름으로 수없이 많은 피를 몰고 다녔다.

사마제천이 죽었다.

신교의 가문들이 무너지고, 믿고 있던 호법들과 장로들 역시 태반이 죽어 나갔다.

평생을 쌓아 올린 경지는 세상을 집어삼키는 요괴들의 물결을 막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심마였고, 번뇌였으며, 나아가 광기였다.

그 때문에 다시 눈을 떴을 땐 무심결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토록 많은 피를 보았으니 분명 지옥에 떨어져야 할 텐데, 이만한 지옥이 달리 없어 이 세상에 떨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망령이라 여겼다.

그 때문에 흘러가는 대로 닿으려 무심(無心)을 견지하고, 다만 거귀, 대군주를 잡는 것을 일신의 목표로 삼았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죽어 간 이들을 위령하는 것으로 족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 자신과 겹치는 케린을 보자, 단테가 아닌 천마 천휘로서 이 자리에 올 수밖에 없었다.

술병을 쥐어 술잔에 기울여 따랐다.

“처음에는 죽은 이들의 이름을 곱씹으며 눈물을 흘렸겠지.”

이름을 되새긴다.

뇌리에 각인하고, 잊지 않으려 발버둥을 친다.

“그런데 점점 잊힐 거야. 동시에 무덤덤해졌겠지. 어쩌면 우스운 대의명분을 내세웠을지도 모르겠군.”

죽음에 죽음을 쌓는다.

어느 순간부터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 것이고, 어느 순간부터 명분을 찾았을 것이다.

방어기제에 가까운 하릴없는 명분을.

“분노는 방향을 잃고, 목적을 잃으며, 단지 네가 방어기제로 세운 생각에 잡아먹혀 맹목적으로 그곳을 응시했을 거다.”

형벌 부대를 갈아 넣어 일반 병사를 살린다.

피해를 줄였다고 안도하며, 술과 담배, 연인의 품에 만족하며 역겨운 자기 위안을 곱씹는다.

단테의 입에 조소가 흘렀다.

“스스로가 불쌍했나? 글쎄, 연민받아야 할 것은 의미도 없이 죽어 간 수많은 이들일 텐데.”

그녀에게 말하는 말이었으나, 동시에 과거의 자신이 우스워 내뱉는 조롱이었다.

단지 패도라는 일말의 끈을 부여잡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요괴 앞으로, 죽음으로 내몰았던가.

“그러다가 결국엔 깨달았겠지. 스스로가 괴물만도 못한 버러지가 되었음을.”

그 역시 그 상태로 죽었다면, 단테라는 이름이 아니라 천마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다시 이 세상에 신교를 세웠을지도 모른다.

흘러가듯 견지하는 무심이 아니라, 끝도 없는 복수심을 연료로 삼아 호기심 따위에 군문에 남을 일도 없었을 테지.

‘그즈음이었나.’

스스로 남궁 연희라 밝히며, 고작 후기지수인 주제에 천마인 자신에게 무림맹의 잔당과 같이 나타나 함께할 것을 천명했던 것이.

단테는 손에 쥔 술잔을 다시금 기울였다.

썩 오랜만에 머금는 술 내음이 잔잔히 목젖을 따라 흐른다.

“……너, 뭐야.”

잠깐의 침묵 끝에 케린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달리 끝없이 흔들리는 눈동자가 혼란을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말했을 텐데.”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걸 느꼈기 때문일까.

솔른은 단테의 입을 막기 위해 손에 쥔 권총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쿠웅.

단 일 보(一步).

단테의 발이 대지를 구르자 순식간에 막사 안의 공기가 짙게 내리깔리며 솔른은 반쯤 권총을 뽑은 채로 그대로 굳고 말았다.

‘무, 무슨?’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떨리던 케린의 어깨도 딱딱하게 굳었다.

감정을 추스른 것이 아니라 단테의 일 보에 압도된 것이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압감이었다.

그리고 그때.

탁, 하고 술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단테는 적안을 번뜩이며 답했다.

“단테라고.”

한편 로한 역시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자신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길 뻔했다.

조금만 긴장을 놓고 있었더라면 단테를 쏘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위험한데.’

지금껏 느꼈던 호기심과 흥미, 내지는 재미있다는 감정은 순전히 단테를 이길 자신이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에 드는 것이었다.

블랙 가드의 조장인 그였기에 가능한 자신감이었다.

언젠가 단장이 그랬다.

블랙 가드의 조장들은 과거 구시대의 소드 익스퍼트와 동급이라고.

‘그럼 단장, 저놈은 뭡니까.’

하지만 막사 내부를 가득 채운 단테의 기운을 확인한 로한은 확신을 잃었다.

‘이길 수 있나?’

일전에는 100%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한 로한은 무심결 웃고 말았다.

‘단장이 그렇게 급했던 이유가 저거였나.’

인과를 따져 봐도 부자연스러웠다.

로열 가드의 눈에 띄자마자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한 듯 급작스러운 영입을 제안한 것이다.

그것도 지극히 위험한 이를 다루듯, 일부러 힘이 전부 빠진 상황에서.

꺼림칙했다.

그를 블랙 가드 조장에 앉힌 촉이 말하고 있다.

단테를 둘러싼 블랙 가드의 움직임이 지극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때문에 로한은 실눈을 번뜩이며 생각했다.

‘알아봐야겠어.’

대체 무슨 일이 조직에서 일어나고 있는 건지 말이다.

반면, 단테는 아직도 총의 그립을 놓지 못하고 있는 솔른의 손을 힐끔 바라보곤 말했다.

“놔라.”

대답도 필요 없었다.

그는 허락을 받은 것처럼 망설임 없이 손을 치웠고, 식은땀을 흘리며 단테를 응시하던 케린은 두려움과 압도감을 겨우 이겨 내곤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즉결 처형인가?”

내심 언젠가는 들킬 일이라 생각했다.

최전방 대대임을 감안하더라도, 형벌 부대가 소비되는 속도가 지나치게 비정상적이었으니까.

다만 헌병을 생각한 그녀에게 단테가 뿜어내는 위압감은 충격이자 공포였으며, 나아가 자신의 저지른 업보를 제대로 견지하게 되는 계기였다.

막사 안의 램프의 불빛이 일렁였다.

동시에 그녀의 표정에도 때늦은 후회가 감돌았다.

그것이 참회인지, 아니면 단지 죽음에 직면하여 느낀 이기적인 감정인지는 오직 자신만 알겠지만 말이다.

“케린 소령.”

이윽고 단테는 탁자 위에 놓았던 엠블럼을 쥐었다.

그로선 나쁘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으니 이제 끝을 맺을 시기였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동시에 뻗어진 내력이 그녀의 목을 틀어쥔 그때.

쿠구구궁!

단테의 손끝이 아닌, 대지의 진동이 일순간 막사를 흔들었다.

짧고 일관된 울림은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기에, 케린의 곁에 선 솔른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마수다.”

이변이었다.

본디 마수가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전장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두 번이나?

반면 단테가 느낀 것은 달랐다.

익숙한, 그리고 수없이 느꼈던 울림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몸이었다.

순식간에 흩뿌렸던 내력을 단전으로 갈무리했다.

동시에 머릿속에 로한이 내뱉었던 말이 스쳤다.

-조만간 북부가 개판이 날 예정인데, 여기가 중요 거점 중 하나라서 말입니다.

개판.

그리고 언젠가 들었던 세르겐의 말.

단테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막사 밖으로 향했다.

내딛는 걸음에 긴 코트가 펄럭거리고, 그는 뒤따르는 로한과 함께 막사 밖으로 나섰다.

정적이었다.

아니, 공포일까.

병영에 자리한 모두의 시선이 저 멀리에 닿았다.

쿠우웅!

-우어어어어어어어…….

짙게 내리깔린 어둠 아래 거대한 산맥이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본 로한조차 웃음을 버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 상급 마수들?”

그래, 상급 마수들이다.

하급 마수나 중급 마수들을 대동하지 않은, 오직 상급 마수들로만 이루어진 거대한 그림자가 지평선 끝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쿠궁, 쿠웅-!

조금 전 느꼈던 진동은 상급 마수들이 서서히 몰고 오는 죽음의 전조였다.

난생처음 보는 압도적인 공포였다.

“아아…….”

“말, 말이 돼?”

족히 수십은 넘는다.

기갑 장교 수십이, 아니 수백을 데려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모두가 밀려오는 죽음에 절망하고 체념하며 신의 이름을 부르짖던 그때.

오직 단테의 시선만큼은 놈들에게 닿지 않았다.

“하아…….”

서늘한 입김을 내뱉으며, 일류에 닿음으로서 한층 맑아진 시야로 구름에 가려진 만월을 바라보았다.

서서히 구름이 걷힌다.

고혹적인 빛을 뿜어내는 달빛 아래로 드리운 구름은 회색빛 빛에 아스라이 부서져 사라진다.

마침내, 심야의 하늘에 은빛 점이 자리하고 그 점 위에 4쌍의 날개를 가진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래…… 네놈이라 생각했다.”

거대한 달을 채우듯 선 놈을 확인한 단테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뿌득- 갈며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다.

우연일까.

놈의 날개가 크게 한번 펄럭거린다.

마치, 단테를 알아보듯이.

둘의 시선이 허공에 닿아 흩어진다.

그리고 머잖아, 단테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격납고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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