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과 로한이 전투의 흔적을 살피고 고지를 가늠할 때, 이미 단테는 저 멀리 느껴지는 수많은 기척을 감지하곤 미간을 좁혔다.
‘전의를 잃었나?’
고지 위에서 분명히 기척이 느껴지거늘, 전투를 치르는 듯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 말은 곧 두 가지 중 하나의 결과로 귀결된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휴식 중이거나.
아니면, 모든 걸 체념하고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거나.
그리고 머잖아 마수가 몰려오는 걸 느낀 단테는 망설임 없이 대지를 내달렸다. 그리고 단번에 고지에 오른 그 순간.
캬아아아아!
눈에 들어온 모습은 중급 마수로 추측되는 거대한 원숭이와 같은 놈이 체념한 병사들을 집어삼키려는 모습이었다.
우웅.
순간적으로 단전을 팽창시켰다.
나아가 혈도를 향해 돌진한 내력이 케이블을 향해 밀어 넣어지고, 막 대지를 디딘 발은 찰나의 순간 쿠웅, 하고 작은 싱크홀을 남긴 채 단테와 마수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10초.
아니 5초.
단번에 마수에게 다다른 단테는 그대로 손을 뻗었고, 내력을 받아들이는 메인 코어가 미친 듯이 회전하는 걸 느끼며 그대로 목을 틀어쥐어 당겼다.
-끼에에에엑?
뿌득, 하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마수의 몸이 추욱 늘어졌다.
단테는 단번에 그저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마수를 힐끔 바라보곤 고개를 돌렸다.
〔제51 수색대대, 맞습니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그런 단테의 예상대로, 중위 계급을 달고 있는 남자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다, 단테! 뒤!〕
콕피트에 놓인 통신기의 오픈 회선으로 익숙한 유엘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러나 단테는 별달리 놀란 기색도 없이 손에 쥔 중급 마수를 허공에 던졌고, 그대로 다리를 들어 각법의 묘리를 담은 일격을 뻗었다.
끼기긱, 소리를 내며 기체가 기울어지고, 허공에서 일순간 점멸한 각법에 죽어 버린 중급 마수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앙!
마치 풍선이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뻗어진 시체가 단테의 뒤를 노리던 거대한 마수의 얼굴에 짙은 갈색의 핏물을 뿌리고, 그 즉시 허공을 가르듯 섬광이 뻗어졌다.
서걱, 투웅!
세실의 손에 들린 창이 일순간 두 개의 원을 그리며 단번에 마수의 목을 베어 넘겼다.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단테에게로 향한 통신을 열어 외쳤다.
〔단테! 누가 마음대로……!〕
일전부터 느꼈지만, 단테는 너무 과격하고 독단적이다.
물론 실력이 있기에 그런 것이겠지만 그녀에겐 어린 치기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대위님, 훈계는 이따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뭐?〕
로한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세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째 이번 일, 좀 꼬인 것 같습니다. 하핫.〕
족히 수백은 넘는 시체 너머로 그보다 배는 되어 보이는 마수들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중위, 세실 대위다.〕
그 때문에 세실은 빠르게 판단하곤 자신들의 아래에 있는 솔른이 들을 수 있도록 오픈 회선을 열었다.
그러자 솔른은 멍한 얼굴을 뒤늦게 수습하곤 빠르게 답했다.
“충성! 제국에 영광을!”
〔경례는 되었다. 싸울 수 있겠나?〕
그녀의 말에 솔른은 최대한 냉정하게 남은 병사들을 훑었다.
마음 같아선 싸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무리입니다. 싸울 무기가 없는 걸 떠나서 모두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한계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최선의 상황이 어떤 것인 줄 알면서도 때때로 어쩔 수 없이 불가능할 때가 있는 것이다.
세실 역시 이미 어느 정도는 예상한 답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빠르게 전장을 이탈해라. 유엘, 다나!〕
〔……예!〕
거의 동시에 둘의 답이 들렸다.
세실은 제일 후미에서 뒤따르던 둘을 지목해 빠르게 군장을 챙기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명령했다.
〔거점까지 호위해라. 단, 상급 마수와 조우한다면…….〕
이번 통신은 오픈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지목된 유엘과 다나는 그녀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닫곤 어딘가 복잡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습니다!〕
채 3분도 걸리지 않아 퇴각 준비를 끝낸 수색대대의 생존자들은 유엘과 다나의 호위를 받으며 빠르게 후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세실이 전방에서 몰려오는 마수에 집중하려던 그때.
“……앞길에 영광이 있기를.”
솔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세실의 귀에 꽂혔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것은 세실이 아닌 바로 단테였다.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단, 단테에!〕
이미 단테는 마수들을 확인한 직후 곧바로 고지 아래로 내려간 후였으니까.
때문에 솔른은 무심결 실소를 터트렸다.
세실 대위.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다.
‘북부에서 활약하다가 상부의 배려로 훈련 부대에 배속되었다지?’
때문에 그는 그녀가 데려온 병력이 훈련병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훈련병이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라.”
괴물인가?
아니면 훈련병인 척하는 베테랑?
그는 떠나는 것도 잊은 채 단신으로 하급 마수의 머리를 터트리고 중급 마수에게 달려드는 단테를 바라보다가, 머잖아 정신을 차리고 멀어지는 대대의 뒤를 따랐다.
콰아아앙!
캬아아아아아!
뒤에서 들려오는 전투의 폭음과 괴성을 들으며, 솔른은 시원한 미소를 짓고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치익, 습.
회색 연기가 기분 좋게 하늘 위로 올라간다.
그래 괴물이면 어떻고, 베테랑이면 어떤가.
‘전능하신 주신 솔라이시여. 한낱 미물이 실언을 했습니다. 당신은 존재하십니다!’
살았으면 된 거다.
살았으면 말이다.
기갑천마
제국이라는 후견인
타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당!
나이트 프레임 제식 장비 중 하나인 152mm 라이플이 불을 뿜었다.
키에에엑!
쏘아진 마탄은 마수들의 피부를 꿰뚫고 내장을 헤집었고, 나아가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흘렸다. 그게 원래 있던 구멍이든, 아니면 새로 뚫린 구멍이든 말이다.
서걱, 툭.
소리가 울린다.
세실은 녹색 마나를 머금은 거대한 창을 크게 한번 휘둘러 살점이 묻어난 핏물을 바닥에 털었다.
창의 궤적에 따라 긴 실선이 그어지고, 다시 허공에서 회전한 창대는 하나의 목숨을 수확했다.
거대한 마수와 거대한 기체가 뒤엉킨다.
다행히 상급 마수는 없지만, 중급 마수의 수가 적지 않았다.
때문에 로한과 세실은 중급 마수들을 찾아서 죽이기에도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뒤늦게 단테를 찾던 세실은 그야말로 경악하고 말았다.
〔다, 단테! 너무 깊어!〕
당장 세실과 로한만 하더라도 선봉에서 밀려오는 마수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훈련병인 단테는 그들보다 앞선… 차라리 포위당했다고 말하는 게 옳을 정도로 깊숙이 마수에 파묻혀 있었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곁에서 다가오던 마수의 콧구멍에 총구를 박아 넣고 방아쇠를 당기던 로한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에이, 상급 마수랑 마주한 놈 아닙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죠.〕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다.
물론 단테의 실력을 의심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도 전장은 어디까지나 숱한 경험과 순간적인 판단이 쌓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 아닌가.
‘게다가 무기도…….’
그녀의 시선이 단테의 주먹, 정확히는 단테가 탄 아틀라스의 주먹을 향했다.
분명 훈련병들에게 기체를 보급했을 당시 기본적으로 라이플과 미스릴 소드를 지급하건만, 어째서인지 단테는 늘 육탄전을 고집하는 것이다.
육탄전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구태여 나이트 프레임 전용 무기가 지급되는 이유가 있다.
일단 마나를 담기 쉽고 기체의 부담도 상대적으로 덜하기 때문이다.
물론 육탄전을 전문적으로 하는 기체가 없진 않다.
문제는…….
‘4세대 기체들이나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게 육탄전인데.’
3세대까진 어디까지나 양산형 기체이기 때문에 저런 격렬한 육탄전을 지속하면 고장이 날 수가 있다는 점이다.
물론 나이트 프레임이 그렇게 허술하게 만들어지진 않았으나 그렇다 한들 한계는 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 순간.
콰과과과광!
단테의 주먹이 중급 마수의 육신이 허공에 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일순간 하급 마수 다섯을 그대로 깔아뭉갰다. 그 모습에 세실은 무심결 휘두르던 창을 멈췄고, 로한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대위님.〕
‘…쟤, 미친놈이라니까요.’
굳이 뒷말을 내뱉진 않았지만 세실 역시 비슷한 생각이리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다시 묵묵히 마수들을 베어 넘길 따름이었다.
막 해가 질 무렵, 주홍빛 하늘 아래에서 벌어지던 전투는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캬르르……. 쿨럭!
끼이이이…….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훈련병들의 피해는 전무 했다.
그래, 훈련병들의 피해는 말이다.
〔……끄으응.〕
〔아, 아파.〕
마수들에 의해 기동 불능한 기체가 5기. 그마저도 1기는 거의 완파되어 파일럿이던 훈련병은 반쯤 정신을 놓은 상태였다.
“……아, 으으윽! 내, 내 팔이!”
고통에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몸을 비튼다.
특히 탑승했던 기체의 왼쪽 팔이 날아간 탓에 멀쩡히 팔이 붙어 있음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환상통을 느끼는 것이다.
“복귀시켜.”
그 때문에 세실은 그를 비롯한 나머지 4명도 연대 복귀를 명령했다.
그러자 호위로 붙여진 기체까지 이탈하자 남은 기체는 세실과 로한의 것을 합쳐도 10기를 넘지 못했다.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어차피 1차 목적이었던 수색대대 구출은 이룬 후였으니까.
이제부턴 부가적인 목표였다.
〔일대를 수색한다. 주변에 남은 마수나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해.〕
마수를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혹시 모를 생존자를 찾기 위한 수색 명령이었다.
당연하게도 10기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건 지극히 비효율적이기에 세실은 2인 1조를 원칙으로 훈련병들을 짝지었다.
〔단테, 넌 나와 함께 간다.〕
그리고 그녀가 지명한 짝은 다름이 아닌 단테였다.
벌써 돌발 행동이 몇 번인가.
이번엔 직접 곁에서 감시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단테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평소에는 어찌어찌 명령을 듣는 척할 수 있다지만, 마수를 찢어 죽일 땐 그만큼 귀찮은 게 없는 것이다.
〔또 돌발 행동을 하면, 군법으로 다스릴 거다.〕
〔예, 알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세실의 으름장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단테의 무성의한 답에 세실은 어딘가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둘은 그저 앞으로 걸었다.
대화할 이유가 없기에 입을 열지 않고 걷는다.
그들이 택한 수색 경로는 지극히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오죽하면 발치에 뭔가 걸려서 시선을 내리자, 멧돼지가 보였을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저 멀리 부자연스럽게 꺾여진 나무들에 공터가 된 곳을 발견한 단테는 미간을 좁히곤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윽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 뒤따른 세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아주 제대로 쓸고 갔어.〕
거대한 공터에 자리한 것은 세 가지였다.
마수, 제국군, 그리고 쓰러진 나이트 프레임.
둘은 아무런 말없이 공터를 훑었다.
태반이 하급 마수였으나, 일부 중급 마수의 시체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보다 배는 되는 제국의 병사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대지를 구르고 있었다.
차라리 목이 뜯긴 게 행운이었다.
상체와 하체가 분리된 병사는 고통에 스스로의 머리에 총탄을 박아 넣었다.
배가 터진 병사는 자꾸만 흐르는 창자를 집어넣다가 그대로 죽었고, 그마저도 팔다리가 날아가 못한 병사는 스스로 혀를 깨물었다.
둘 다 이런 참상엔 익숙했다.
그러나 분노하지 않을 순 없는 것이다.
단테는 눈앞의 지옥도를 천천히 두 눈에 담으며 미간을 좁혔다.
‘1시간…… 아니, 어쩌면 30분.’
이 참상이 일어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둘은 대화 따위 없이 묵묵히 공터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쿠웅-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팔다리가 바닥을 굴렀다.
핏물이 빠져 벌레들이 먹잇감으로 전락한 장기가 꿈틀거리고, 선홍빛 뇌의 주름 사이로 개미가 기었고, 긴 창자의 끝자락이 나뭇가지에 걸려 덜렁거렸다.
그때였다.
키이이…….
미처 죽지 못한 마수가 단테와 세실을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포효 따위가 아니다.
그건 애원이었다.
죽여 달라고, 제발 죽여 달라고.
적에게 하는 읍소이자, 마수에겐 너무나 관대한 예우다.
그 때문에 단테와 세실은 놈을 무시했다.
그저 최대한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기를 바랐다.
이윽고 둘의 발걸음이 공터의 중심에서 멈췄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듯 콕피트를 열었다.
우웅, 소리를 내며 콕피트가 열리자 뒤늦게 불어오는 짙은 피 냄새가 이 처참한 현장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기분이었다.
“단테.”
딱딱하게 굳은 세실의 목소리가 바람을 따라 귀에 꽂혔다.
단테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대로 기체 아래로 추락했다.
족히 20m가 넘는 높이였지만 이미 둘에겐 딱히 의미가 없는 높이이기도 했다.
대지에 안착하자, 세실의 얼굴이 제일 먼저 눈에 밟혔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일 먼저 병사들을 살폈다.
하지만 곧 전멸이라는 걸 깨닫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반면 단테는 주변을 살피며 생각했다.
‘일격이었나.’
병사들을 이렇게 만든 공격은 채 두 번을 닿지 않았다.
단 일격에 이런 참극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 말은…….
‘상급 마수인가.’
문득 그의 시선이 쓰러진 나이트 프레임에 닿았다.
그러고는 살짝 내력을 돌려 청각을 키웠다.
“하아, 하아…….”
아직 숨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싶어 다른 곳에도 귀를 기울였지만, 생존자는 저 기체의 훈련병이 유일한 듯싶었다.
단테는 세실의 곁을 스치듯 지나 그 기체의 앞으로 다다랐다.
굳이 콕피트를 따고 들어갈 이유가 없었다.
가슴 부위가 완전히 뭉개진 채 기대어 앉아 있는 기체는 나무만 치우면 내부로 들어갈 길이 열렸으니까.
“이 소리는…….”
때마침, 단테를 뒤따른 세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고는 단테가 뭘 하기도 전에 녹색 빛이 감도는 손으로 단번에 가슴에 박힌 나무를 뽑아 던졌다.
콰드드드득!
실로 살벌한 소리가 울렸으나, 정작 그 자리에 서 있는 둘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안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다.
살짝 기울어지긴 했어도, 똑바로 서서 내부를 살피기엔 딱히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둘은 콕피트 내부로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훈련병의 상태를 확인하곤 침묵했다.
조금 전 나무에 망가진 것인지, 하반신의 형체가 없었다.
나아가 복부에도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그런 고통에 훈련병, 아니 소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고통에 눈물과 침을 흘리며 몸부림치고 있었다.
“하아, 끄윽, 끄아아……!”
고통에 눈이 멀었다.
초점도 없다.
눈앞에 누가 서 있다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감당하지 못할 고통 속에서 죽음을 염원하며 수없이 꿈틀거릴 뿐이다.
그때 세실은 스륵, 하고 자신의 제복을 벗었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처참한 소녀의 상처에 덮어 주며 그녀를 꼬옥 끌어안았다.
“……아? 어?”
고통 속에, 검게 그을린 세상에 온기가 소녀를 감쌌다.
세실은 그저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고, 소녀는 신음을 참고 피가 섞인 눈물을 흘렸다.
“대……위님.”
갈라지고 앳된 목소리다.
미약하게나마 초점이 돌아오고, 뒤늦게 단테를 본 그녀는 단테를 향해 나지막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상……급.”
다리가 짓눌렸다. 복부에 온갖 파편이 파고들었고, 시야는 누가 인두로 눈알을 지진 것처럼 흐리고 따갑다.
때문에 그녀는 고통 속에서 단지 단어만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상급.
그 단어에 단테는 무심히 몸을 돌렸다.
콕피트를 벗어나 공터를 걸었다.
문득 죽여 달라고 염원하던 마수가 보였다.
단테는 망설임 없이 놈의 머리를 잡았다.
콰드드득!
하나의 생명이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단테는 손에 묻은 핏물을 털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기체 위로 향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