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함 하나의 크기가 웬만한 성 하나와 맞먹는다.
기본적으로 서른 기 이상의 나이트 프레임과 각종 무기를 적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비행함이 지상으로 착지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물론 평원이라면 가능은 하겠지만 다름이 아닌 황실 비행함이 아닌가.
수백에 달하는 마수가 죽은 자리에 착지하기를 종용하는 미친 군인은 이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상으로 내려온 건 비행함을 호위하는 작은 호위함 하나뿐이었다.
우우웅!
물론 작다는 기준이 비행함보다 작다는 것이었기에 꽤 거대한 소음과 바람이 연대 중심부 공터를 가득 채웠다.
몇몇은 모자가 날아가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일 정도였다.
그러나 호위함이 대지에 깔끔히 착지하자, 그때까지도 멍한 눈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가트와 달리 세실과 로한은 열리는 문을 향해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경례를 올렸다.
“충성! 제국에 영광을!”
“추, 충성!”
뒤이어 가트 소령 역시 경례를 올리긴 했으나 어벙한 모습을 숨길 순 없었다.
때문에 121연대의 병사들은 내심 한심한 눈으로 자신들의 지휘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상황으로 깨달은 것이다.
곧바로 지휘권을 잡고 명령을 내리던 세실과 술이나 마시다가 패닉에 빠지는 가트의 모습은 확실히 비교되었으니.
“이야, 이게 누구야.”
“어?”
그때 막 열린 문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세실의 얼굴에 살짝 놀라움이 감돌았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적절히 섞인 제복을 입고, 갈색 머리를 깔끔한 포마드 스타일로 넘기긴 다소 유쾌한 인상을 지닌 남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얼굴 보기가 힘들다, 세실.”
“오, 오빠?”
오빠.
그 한마디가 가져온 파장은 상상 이상이었다.
병사들은 물론, 가트 소령까지 뒤늦게 자신이 보인 추태를 떠올리고 사색이 된 것이다.
반면 로한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를 바라보며 친근하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세로스 단장님.”
“쯧, 넌 아직도 안 죽었냐?”
“아쉽게도 말입니다.”
“그래, 이왕이면 빠른 시일 내로 죽어.”
“참고하겠습니다.”
그러나 세로스는 로한이 그리 달갑지 않은지 혀를 차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실로 오랜만에 본 여동생을 향해 말을 건넸다.
“그나저나 저번에 아버지께서 찾아갔다며? 참, 아버지도 너무하시지. 나한텐 한 번을 찾아오시지 않으면서…….”
짐짓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었으나, 그 안에 일말의 질투나 시기는 없었다.
때문에 세실은 드물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에 답했다.
“아직도 절 어린애로 아시니까요.”
“하긴, 그 양반이 오죽 딸 바보여야지.”
세로스는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르겐의 광적인 딸 사랑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때 한창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던 세로스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세로스 단장님, 시간이…….”
“아, 그런가?”
‘촉박하진 않을 텐데.’라고 중얼거리던 그는 곧 그녀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못 이기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 이쪽은 내 부관인 마리야. 평소엔 귀여운데 지금은 초조할 이유가 있어서.”
“…….”
대체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그보다 한 발자국 뒤에 선 마리가 그를 힐끔 노려보았으나 기분이 나쁘다기보다는 투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때문에 세실은 단번에 둘 사이의 묘한 기류를 눈치채곤 말을 돌렸다.
“초조한 이유라면……?”
“아, 그게 말이지.”
그녀의 물음에 세로스는 살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제국 특유의 검은 바탕에 황금색 문양이 그려진 거대한 비행함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저 위에서 잠에 취해 있을 한 여자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우리가 모시고 가는 분께서 일어나면 꽤 시끄러워질 수 있어서.”
“아.”
그제야 세실은 머리 위에 있는 비행함이 다름이 아니라 황실 비행함임을 깨달았다.
아니, 애초에 오빠인 세로스의 신분이 로열 가드 아닌가.
로열 가드.
황실에 존재하는 3개의 근위대 중 황족을 호위하는 그들이 움직였다는 뜻은 하나뿐이다.
“어떤 분께서…….”
“제4 황녀 전하. 북부 근처를 직접 시찰하시고 돌아가는 길이야.”
“4황녀께서요?”
이번에 반문한 것은 로한이었다.
물론 제국의 황자, 황녀들은 필수적으로 군에 입대해야 하기에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나 그가 알기론 제4 황녀는 아직 입대할 나이가 아닐 텐데?
하지만 머잖아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천재 소리를 듣는다고 했나.’
황족의 입대 나이는 과거 성인으로 인정받았던 열아홉 살이다.
그런데 지금 열여덟 살인 그녀는 여덟 살 정도 때부터 군략, 특히 대(對)마수전에 특히 재능을 보였다고 들었다.
더욱이 일신의 무력도 꽤나 다듬었다지.
그러나 그때.
로한의 생각은 끊기고 말았으니.
쿠웅-!
짧고 간결한 울림에 모두의 시선이 언덕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그곳엔 조금 전까지 평원 위에 서 있던 한 기체가 서 있었다.
“오호.”
세로스의 작은 탄성과 함께, 머잖아 기체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그대로 안광이 꺼졌다.
그리고 머잖아 등 뒤의 콕피트가 우웅 소리를 내며 열리고 한 남자가 기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땀에 살짝 젖은 검은 흑발.
왜인지 공허한 적안이 눈에 밟혔다.
그는 망설임 없이 기체 아래로 뛰었고, 순간 병사들이 어어- 하는 탄성을 내질렀으나 그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작은 휘청거림도 없이 그대로 대지에 안착했다.
‘단테…….’
그 때문에 세실은 묘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가 하려던 행동을 확인한 유일한 목격자였기에 더더욱 그랬다.
단테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길목을 가로막던 병사들은 언제 훈련병들을 우습게 봤느냐는 듯 황급히 길을 텄고, 단테는 머잖아 세실의 앞에 도착해 그녀와 마주했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분명 다 크지 않아 세실과 키가 비슷한 단테였는데, 풍기는 분위기가 고작 훈련병의 것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이내 단테의 입이 열리고.
“훈련병 단테, 복귀했습니다.”
내뱉어진 말에 로한은 실소를 터트렸다.
그도 그럴 게 고작 훈련병이 무단으로 나이트 프레임에 탑승해 상급 마수를 상대로 살아 돌아와 놓고 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라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그때였다.
“이야, 네가 저 기체의 파일럿이었구나?”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세로스가 단테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잠시 바라보던 단테는 팔을 움직였고.
“그래, 그래…… 응?”
“충성, 제국에 영광을.”
당연히 악수하리라 생각한 세로스는 망설임 없이 악수를 거부하고 경례를 올리는 단테를 보며 다소 멍한 얼굴을 지었다.
“……푸흡!”
어찌 보면 때때로 목숨을 내놓고 사는 로한이 웃음을 참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더욱이 마리는 드물게 인상마저 일그러트리며 단테를 노려보았다.
“아, 어…… 하하핫!”
하나 그때.
잠시 멍한 눈으로 뻘쭘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던 세로스 이내 웃음을 터트리곤 단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 이거 진짜 물건이네?”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로열 가드의 단장이다.
비록 로열 가드 내에서도 꽤 많은 단장이 있긴 했으나 그렇다고 일개 장교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직책인 것이다.
그런데 하다못해 장교도, 부사관도 아직 아닌 훈련병에게 악수를 거절당하는 건 세로스의 입장에서도 나름 신선한 일이었다.
그는 한참을 웃었다.
그 탓에 난처해진 세실이 뭐라고 변호를 하려던 그때.
“아하하……. 아, 결정했다.”
세로스는 짐짓 호탕한 웃음을 겨우 멈춘 후, 부동자세로 경례를 올리고 있는 단테에게 성큼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곤 말했다.
“너, 로열 가드하자.”
기갑천마
네 주제를 알아라
“너, 로열 가드하자.”
세로스가 가볍게 던진 그 한 마디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뭐?”
세실은 할 말을 잃었고, 로한은 어느새 웃음을 멈추곤 새삼 즐겁다는 듯한 얼굴로 둘을 살폈다.
그러나 제일 격한 반응을 보인 것은 다름이 아닌 마리였다.
“다, 단장님!”
그녀는 이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세로스를 바라보며 외쳤으나, 정작 그는 태연하게 곁에 있는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왜, 마리 너도 봤잖아. 그 기동 실력은 어지간한 장교급이었다고. 지금 수습인 단원들 절반은 이길걸.”
“그, 그건 그렇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확실히 상급 마수의 움직임을 피한 건 대단한 것이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단장님 재량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폐하의 윤허도 있어야 하고, 애초에 정식 과정을 밟아 들어온 수습 기사들의 반발이……!”
로열 가드는 황실을 수호하는 3개 가드 중 가장 양지에 있는 단체다.
즉, 대외적으로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 엠퍼러 가드나 암중에서 황실을 수호하는 블랙 가드를 제외하면 그들이 황실의 얼굴인 것이다.
그런 만큼 출신, 실력, 충성심, 인성까지 철저한 심사를 통해 선발되는 자들이 로열 가드다.
이렇게 졸속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속이 타는 마리와 달리, 세로스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괜찮아. 수습으로 추천하는 거 정도는 괜찮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정식 기사로 임명받을 거라고.”
이쯤 되면 말을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결국 마리는 체념했고, 세로스는 여전히 웃으며 단테의 어깨를 흔들며 어필했다.
“알겠지만 절대 쉽게 오는 기회가 아니야. 복무 기간도 줄고 제대 후에도 영지 귀족들이 가신으로 데려오려고 줄을 선다고.”
이어지는 설명은 꽤나 장황했다.
정말 국가적인 사활이 걸리지 않으면 전투 임무에는 파견되지 않고, 자신들이 모시는 제4 황녀는 똑똑하고 아름다우시니 만족할 거라는 말이 태반이었다.
‘말이 너무 많아.’
언제까지 하나 지켜보려다가 슬슬 기가 빨리는 느낌이다.
때문에 단테는 그의 말을 끊고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암, 그럴 줄…… 응?”
순간 세로스의 얼굴이 다시 멍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반응도 경악 그 자체였다.
“거, 거절한 거지, 지금?”
“대체 왜?”
“내가 말했잖아. 쟤 미친놈이라니까…….”
유엘의 곁에 서 있던 다나는 입을 쩍 벌리고 중얼거렸다.
“……쟤, 대체 뭐야?”
그리고 그런 다나의 말은 유엘을 비롯한 모두의 심정을 아주 잘 대변해 주는 말이었다.
유엘은 멍한 눈으로 단테를 바라보았다.
설마설마했다.
아무리 일반적인 시선으로 예측하지 못할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해도 설마 이번에도 그럴까 싶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름 아닌 로열 가드가 아닌가.
남들은 돈을 내서 갈 수 있다면 전 재산을 처분해서라도 입단하고 싶어 하는 곳이다.
그런데 어째서…….
문득 그녀의 시선이 근처에 서 있던 페고르에게 닿았다.
일전부터 보였던 증오나 무시, 나아가 질투는 없고 그저 허탈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해.’
페고르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그가 귀족이란 이름에 대해 얼마나 큰 반감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은 하고 있다.
단테가 몰락 귀족이라고 하자 대놓고 거리를 두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다.
단지 손바닥을 파고들듯 꽉 쥐어지는 그의 손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할 뿐.
한편 세로스도 나름 당황한 상태였다.
설마 거절당하리란 생각은 하질 못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저, 정말로? 로열 가드인데?”
“예.”
“왜? 남들은 오지 못해서 안달 난 자리인데?”
“전 아닙니다.”
단테는 끈질기게 늘어지는 세로스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로열 가드는 황족들이나 따라다니는 놈들이란 뜻이 아닌가.
전생에서부터 황제나 황족 따위에게 학을 떼던 그에겐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와…….”
하나, 세로스에겐 단테의 태도가 적잖은 충격으로 다가온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로열 가드 자리를 거절당하리라 생각했겠는가.
그렇기에 그는 완전히 한 방 먹었다는 얼굴로 단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긴…… 그런가.”
‘내가 너무 성급했어.’라고 중얼거린 세로스는 그제야 단테의 진의를 깨달았다는 듯 감탄한 얼굴로 외쳤다.
“하긴, 그 정도 능력이면 내가 끌어 주지 않아도 머잖아 올라오겠지.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실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내를 보았다는 듯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
딱히 공감이 되진 않았으나 굳이 정정하진 않았다.
괜히 말을 이어 더 시끄러워지는 것보단 대충 저렇게 생각하게 두는 게 편할 테니까.
세로스 역시 단테가 답하지 않자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위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시간을 꽤 지체했기에 슬슬 돌아갈 요량이었다.
“세실, 제도에 오면 연락해. 같이 밥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잖아? 어머니께 연락 좀 자주 하고.”
“……어, 응.”
피를 나눈 남매이지만, 세로스 특유의 쾌활하고 자유로운 성격은 좀처럼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세로스는 그저 즐거운 듯 호위함의 좌석에 앉은 후 세실과 단테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의 곁에 선 마리는 한숨을 내쉬며 ‘제발 체통을…….’ 따위의 첨언을 하고 있었고 말이다.
호위함의 문이 닫히고,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일순간 바람이 휘날리며 빠르게 솟구쳤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로한은 헤실 웃으며 말했다.
“폭풍이 지나간 것 같군요.”
“……그러게.”
머잖아 호위함을 적재한 비행함은 빠르게 구름 위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시 눈에 담던 단테는 성큼 세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래.”
그녀는 묘한 눈으로 단테를 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잡아 두고 있을 이유를 찾지 못한 것도 있으나 일단 쉬게 하는 것이 옳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 때문에 단테는 막사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때.
“자, 잠깐. 단테라고 했나?”
막 가트 소령 옆을 지나가던 단테는 자신을 부르는 그를 바라보았다.
적잖이 살이 찐 몸과 작은 눈매 너머로 탐욕이 일렁거렸다.
“나는 가트 소령…… 아니, 가트 백작이라고 한다. 플레앙 백작가의 장남이지. 물론 아직 작위를 승계받지 않아 소백작이긴 하지만사실상 내가 승계받은 거나 다름이 없으니…….”
뭐가 그리 급한지, 횡설수설하는 그를 잠시 바라보던 단테가 다시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가트는 황급히 덧붙였다.
“기사 작위를 주겠네! 거기에 봉토를 하사하고 원한다면 괜찮은 혼처도 알아봐 주지!”
“오…….”
가트의 말에 로한은 실로 진심 어린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 돼지 새끼가 로열 가드도 거절한 놈한테 뭐라는 거지?
비단 그뿐 아니라, 세실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더욱이 그녀는 첸서를 떠올리곤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가트를 바라보았다.
물론 영주가 인재를 탐내는 것은 흠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시기는 가려야 할 거 아닌가.
아직 첸서의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했거늘.
그 때문에 그녀가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였다.
“하.”
단테의 입에서 드물게 한숨이 흘렀다.
그러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제 모를 돼지를 향해 전음을 흘렸다.
-하찮다는 말조차 무용하구나. 네 주제를 알아라.
“뭐, 뭣이?”
순간 가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귀족인 그가 평민에게 듣기엔 정도를 넘어선 모욕인 탓이다.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 어?”
손을 뻗어도 잡히는 게 없었다.
허겁지겁 고개를 숙이자…… 아니나 다를까, 권총이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로한의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울렸다.
“짜잔.”
“로, 로한 중사!”
다름 아닌 로한이 범인이었다.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밀어 넣고 총을 빙빙 돌리며 씨익 웃었다.
그걸 보며 가트가 뭐라고 말하려던 그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세실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가트는 되레 역정을 내며 세실에게 외쳤다.
“무슨 짓이라니! 조금 전 저 평민 놈이 날 모욕했소!”
“……모욕?”
로한이 반문했고, 가트 소령이 고개를 끄덕이려던 그때.
뒤늦게 묘한 기류를 읽은 그는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쯧.”
“추하다. 추해.”
“하, 쪽팔려.”
훈련병들의 시선까지 갈 필요도 없이, 평소 여유 있게 풀어주던 가트를 잘 따르던 병사들조차도 인상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몇몇은 차마 보질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돌리기까지 했다.
“바, 방금 놈이 내게 한 말을 듣고도……!”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가트가 황급히 세실에게 물었으나, 돌아온 답은 경멸을 넘어선 혐오에 가까운 대답뿐이었다.
“단테는 한숨을 쉬었을 뿐입니다, 가트 소백작.”
“……무, 무슨?”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분명, 분명 들었건만…….
그때였다.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단테는 세실에게 가벼운 묵례를 하고 그대로 막사로 향했다.
그 모습에 가트가 단테를 불러 세우려 했으나 로한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진정하시죠, 하핫!”
“비켜! 분명 놈이 나한테 모욕을 했단 말이다! 평민, 평민 놈이……! 감히 나한테!”
평민 놈.
그 말에 로한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러고는 그는 손에 쥔 권총을 가볍게 한 바퀴 돌려 가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알겠습니다. 일단 진정을 좀 하시고…….”
그러고는 직접 그의 권총집에 권총을 꽂아 주곤 가볍게 속삭였다.
“적당히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곧 전출될 텐데 굳이 나쁜 모습으로 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 그게 무슨?”
“아이고.”
그래도 머리는 좀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가지가지 한다는 듯한 표정을 한 로한은 평소 일자로 보였던 실눈을 살짝 뜨곤, 단테와 달리 어딘가 섬뜩한 적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럼 상부에서 상급 마수가 나타난 지역을 너 같은 병신한테 계속 맡기겠어? 아마 계급 강등당하고 좌천되는 것도 각오해야 할 거야. 다름이 아닌 로열 가드의 단장이 대략적인 상황을 훑고 갔으니까.”
“그, 그런……?”
가트의 두툼한 턱살이 흔들렸다.
난생 처음 겪어 보는 난리에 미처 알지 못한 사실을 로한이 지적한 것이었다.
사실이었다.
상급 마수에 제대로 대응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술이나 마시다가 어벙하게 서 있는 걸 본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니다.
더욱이 로열 가드가 연루된 일을 고작 백작가 따위가 은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야말로 제대로 외통수에 걸린 것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한층 더 싸늘해진 주변의 시선과 세실의 얼굴이 눈에 밟혔다.
결국 가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막사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거, 더럽게 처량하구먼.”
그 뒷모습을 본 로한은 이내 시원하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그런 그의 손엔 어느새 품속에서 꺼낸 가트의 고급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