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25화 (25/197)

펄럭- 소리를 내며 녹색과 묵색이 섞인 막사의 문이 열렸다.

이윽고 막사 내부를 본 세실은 무심결 미간을 좁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뒤따르던 로한은 휘유, 하며 휘파람을 불곤 곧바로 의자에 몸을 묻는 가트에게 말했다.

“이야, 역시 귀족은 다르십니다. 저거 제도만 판다는 리터포트 초콜릿 아닙니까?”

“오, 저걸 아는가?”

“그럼요. 예전에 한 번 먹어 봤는데 맛이 죽여주더군요.”

로한은 특유의 능글맞음을 이용해 가트와 손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사이 세실은 빠르게 눈을 굴려 확신을 내렸다.

‘무능한 귀족 장교.’

당장 앉은 의자만 해도 군납되는 철제 의자가 아니라 가문을 통해 공수한 고급의 나무 의자다.

그뿐인가.

본디 기밀문서나 전략 교범, 하다못해 각종 서류가 쌓여 있어야 할 임시 서랍 위에는 족히 10개는 넘는 술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모두 고급으로.

그 때문에 세실은 로한의 성격도 모르고 신나서 말하는 돼지를 노려보며 생각했다.

‘가트 소령, 플레앙 백작가의 장남…….’

뻔한 일이다.

나이가 차면 아버지, 혹은 아들과 딸도 징병되는 평민들과 달리 귀족들은 각 가문에 많아도 2명 이상 징병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귀족이라는 점이다.

제국군은 철저한 능력 사회다.

원래 풍토가 그러했다는 설도 있고, 긴 군단과의 전쟁 때문에 그러했다는 말도 있지만 결국 제국은 능력이 우선시되는 사회라는 뜻이다.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황권이 막강하긴 하지만, 일부나마 남은 영지 귀족들의 힘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입대한 영지 귀족이 능력이 없다면?

‘난처하지.’

나름 체면을 세워 주긴 해야 한다.

그렇다고 중요한 전선을 맡길 수도 없고, 행정이나 병참과 같은 요직에 앉힐 수도 없다.

그 때문에 앞에 서 있는 가트 소령 같은 장교가 생긴 것이다.

‘한직에서 그저 시간을 때우며 제대할 날을 기다리는 한심한 놈.’

굳이 더 볼 필요도 없었다.

무능한 이와 나누는 대화만큼 불쾌한 것은 또 없었기에.

“저희는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입을 열어 나지막이 물었다.

그녀의 말에 가트는 ‘아차, 내 정신 좀 보게!’라고 작게 중얼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으로 향했다.

그는 서랍 위에 놓여 있던 반쯤 빈 술병을 들고 말했다.

“카리튼 연합 왕국 외곽 니른 양조장의 술이네. 물건이 없어서 19년산은 구하지 못했지만 15년산도 꽤 풍미가 좋지.”

“……소령님?”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눈으로 그를 지긋이 응시하자 가트는 허허, 웃으며 잔에 술을 채우고 그녀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차피 훈련병들 아닌가. 대위 재량대로 하게. 나야 전역이 1년 남았는데…….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야.”

결국 방관할 테니 알아서 하라는 뜻이다.

지극히 무능한 모습에 세실은 잠시 한숨을 쉬려다가, 로한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곤 그 잔을 받았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달리 생각하면 좋은 일이다.

무능한데 쓸데없이 적극적인 것보다는 무능하고 의욕도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을 테니까.

그녀가 의외로 한번 굽히고 잔을 받자, 가트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잔을 채웠다.

그러고는 잔을 들며 특유의 귀족적인 미소를 지었다.

물론 외모가 좋지 못해 그리 봐줄 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저나, 이번에 세르겐 후작님께서…….”

그때였다.

위이이이이잉!

찢어질 듯 울리는 경보음과 밖에서 들리는 혼란스러운 뜀박질 소리에 세실은 곧바로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았고, 가트는 언제 여유를 부렸냐는 듯 달려 들어오는 부사관들에게 외쳤다.

“적, 적습이냐?”

“예, 그렇습니다. 백…… 아니, 소령님.”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답한 것은 부사관들이 아닌 그들 뒤로 태연하게 걸어들어온 남자였다.

그를 본 로한은 세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기갑 장교네요.”

세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복에 박혀 있는 마크와 계급, 이름을 읽은 그녀도 이미 눈치를 챈 후였다.

‘첸서 소위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들어오며 백작을 언급한 걸 보면…….

‘가문의 가신이거나, 하다못해 그 자리를 약속받은 자겠군.’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영지 귀족의 가신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널렸으니까.

“크흠! 그래, 수는?”

한편 가트는 뒤늦게 자신이 보인 추태를 느꼈는지 태연함을 가장해 첸서에게 물었다.

그러자 첸서는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늘 그랬듯, 중급 마수가 일부 끼어 있는 하급 마수 무리입니다. 마력포로 사격 후 돌입하면 무리 없이 격퇴할 수 있습니다.”

“그렇군. 음, 그래야지.”

완전히 평온을 되찾은 가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첸서는 힐끔 로한과 세실을 바라보다가 그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출격하도록 하겠습니다.”

“고생하게.”

첸서는 그 말을 끝으로 막사를 나섰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세실은 힐끗 자신의 눈치를 보는 가트에게 말했다.

“훈련병들을 모아 전투를 직접 참관시키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녀의 말에 가트는 살짝 눈을 빛냈다.

놀란 적이 언제냐는 듯, 오히려 술까지 챙겨 밖으로 나서는 게 아닌가.

먼저 나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로한은 피식 웃으며 카악, 퉤, 하고 바닥에 침을 뱉곤 말했다.

“플레앙 백작가가 망할 때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겠습니다. 쯧.”

“……그러게 말이야.”

그녀는 그렇게 답하곤, 밖으로 나섰다.

내심 동의하는 말이었기에.

콰아아아앙!

마침 밖으로 나서자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연대 본부가 있는 코앞은 아니었고, 저 멀리 내려 보이는 평원을 향해 포병들이 마력포를 쏘고 있던 것이다.

우웅, 콰과과광!

마석을 동력으로 쏘아진 포격이 평원을 길게 내달려 오는 마수들의 사이로 떨어진다.

콰앙- 소리와 함께 놈들의 육신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마수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그저 앞으로 달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력을 돌려 저 멀리서 돌진하는 마수들의 정체를 확인한 세실은 무심히 중얼거렸다.

“검은 늑대.”

제일 첫 실습에서 사용된 하급 마수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로한과 조교들의 인솔하에 뒤로 도열한 훈련병에게 닿았다.

아니, 정확히는 단테에게 닿은 시선이었다.

‘일격에 머리를 터트렸지.’

새삼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으니.

“아틀라스다!”

병사들이 외친 것인지, 훈련병들이 외친 것인지 모를 외침과 함께 하늘을 메울 듯 거대한 거인들이 그대로 평원을 향해 쏘아지듯 쇄도했기 때문이었다.

기갑천마

서른쯤 될 것이다

검은 늑대들 사이로 족히 2배는 될법한 거대한 뱀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평원의 잡초는 한낱 먼지가 되어 바스라지고 놈들이 남긴 궤적을 따라 흙먼지가 일었다.

작은 언덕들이 모여 질주하면 저런 모습일까.

분명 연대의 병영은 평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건만, 마수들과 눈이 마주칠 정도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콰아아앙!

검은 파도에 마력포의 섬광이 꽂힌다.

하반신이 날아간 늑대는 뒤에서 달리던 동족에 의해 머리가 으깨져 쓰러지고, 푸르던 초원은 금방 검은 선혈과 온갖 장기가 뒤덮인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몇 번을 봐도, 지긋지긋하다니까.〕

첸서는 질린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그대로 대지로 착지했다.

쿠웅, 하는 짧고 굵은 소리가 평원을 따라 울리고, 뒤이어 착지한 부사관들의 통신이 이어졌다.

〔저희는 그래도 다행이죠. 길면 일주일은 안 오지 않습니까. 여기로 전출된 게 제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습니다.〕

〔하긴…… 맞다. 거기에 소위님은 곧 기사가 되지 않으십니까. 진짜 부럽네요.〕

굳이 답을 하진 않았지만, 첸서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걸 굳이 참지 않았다.

부사관 놈들의 말대로 가트에게 기사 작위를 약속받았으니까.

그래도 남은 군 생활을 하긴 해야겠지만 달갑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운이 좋았어.’

이름뿐인 남작가의 장남으로 가문을 일으켜야 할 책임이 있었다.

그렇기에 제국사관학교로 향했지만, 온갖 차별과 무시를 겪으며 절망하던 그에게 임관 후 만난 가트 소령은 그야말로 신이 내린 동아줄이었다.

무능하다.

탐욕스럽고 멍청하다.

쓸데없이 겁도 많다.

‘어쩌라고?’

영지가 있다.

돈이 있으며 권력이 있다.

그럼 된 것이다.

-출세만 시켜 준다면, 기꺼이 주군이라 부르며 아첨을 떨어 주리라.

비단 그만의 생각이 아니었다.

긴 역사 동안 수없이 도태된 이름뿐인 귀족들의 공통된 생각인 것이다.

그 때문에 이번 전투도 그리 길게 끌 생각이 없었다.

가트 소령의 체면을 세워 줄 필요가 있으니 말이다.

끼기긱- 하는 관절부의 울림을 들으며, 첸서는 거대한 미스릴 소드에 마나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엄호해라. 중급 마수부터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소위님.〕

첸서의 명령에 총을 쥔 부사관들은 기체를 조작해 일제히 전방을 향해 152mm 라이플을 겨눴다.

마나 하트가 빠르게 기체의 메인 코어를 자극한다.

마석이 가공되어 동력원으로 자리 잡은 3세대 메인 코어가 파일럿의 의지에 따라 맹렬히 회전하고, 나아가 거인의 심장이 되어 주인의 의지를 대변한다.

타다다다다당!

당겨진 방아쇠에 호응해 일순간 섬광이 번쩍인다.

뿌려진 죽음이 늑대들의 몸을 꿰뚫고, 족히 수백의 총탄이 무리 중간에 숨어 있던 뱀에게 향하는 통로를 열었다.

검은 파도가 반으로 갈라진다.

-캬아아아아!

-키에엑! 키이이엑!

주욱 나온 주둥이에서 비명과 함께 검은 핏물이 흩뿌려졌다.

눈알이 터지고, 심장에 총탄이 박힌 늑대들의 몸이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하릴없는 고깃덩어리가 되어 추락했다.

그러나 파도는 기세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앞서 죽은 동족의 검은 핏물을 뒤집어쓰고, 더욱 맹렬하고 섬뜩한 기세로 그들을 향해 쇄도하는 것이다.

콰아아아앙!

기체들이 선 중앙을 기점으로 좌우에 배치된 마력 포대가 쉴 틈 없이 불을 뿜었다.

벌써 마석을 두 번이나 갈았기에 포대의 끝이 벌겋게 달아올랐으나, 그들은 쏘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라이플을 쥔 기체들이 열어준 통로로 몸을 던진 첸서와 부사관들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소위님, 내기하시겠습니까?〕

〔좋지. 뭐로?〕

〔이번 휴가 때……. 흐, 아시지 않습니까.〕

〔알겠다. 알겠어.〕

짐짓 음흉한 목소리였지만, 첸서는 거부감 없이 넘겼다.

그리고 곧바로 첸서를 필두로 한 4기의 나이트 프레임이 빠르게 평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웬만한 뒷산과 맞먹을 법한 거인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늑대들을 베고, 찢고, 가르며 앞으로 쇄도했다.

그때 측면에서 다른 늑대보다 조금 더 거대한 늑대가 첸서를 향해 입을 쩌억 벌리며 도약했다.

하나…….

〔하급 마수 주제에!〕

첸서의 기체가 쥔 미스릴 소드에 붉은 마나가 맺혔다.

그리고 그 검이 휘둘린 직후, 별달리 유의미한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채 늑대는 그대로 반으로 갈라져 나이트 프레임의 발에 짓밟히고 말았다.

검은 핏물과 장기가 풀 위를 덮었다.

첸서는 기체에 연결된 케이블을 따라 느껴지는 생생한 손맛에 짐짓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전투를 즐기지 않는다곤 해도 이렇게 압도적인 싸움은 전투가 아니라 단지 스포츠처럼 느껴질 뿐인 것이다.

〔이거, 훈련병들이 존경한다고 사인해 달라고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큭큭!〕

〔아까 보니까 얼굴 좀 반반한 남자애들도 있던데? 후훗, 꼬셔 볼까?〕

〔미친년,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비단 첸서뿐만이 아니었다.

나이트 프레임, 특히 제국의 주력 기체 중 하나인 3세대 나이트 프레임 아틀라스의 압도적인 성능은 고작 하급이나 중급 마수들이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더욱이 길면 일주일에 한 번이나 공격할까 말까 하는 여유로운 주기는 그들의 마음을 해이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아니, 해이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렇게나 쉬운데!〕

첸서는 미친 듯이 나이트 프레임, 아틀라스가 쥔 미스릴 소드를 휘둘렀다.

붉은 오러가 허공에 일순간 남아 잔상이 긴 궤적이 되어 검은 핏물과 춤췄다.

‘세실이라고 했던가?’

듣기론 육군 장성 중 한 명인 세르겐 소장의 딸이라고 했다.

세르겐 소장이 누구인가. 제국군의 장성이자 영지가 있는 후작이며, 나아가 많은 제국군이 존경하는 인물이다.

잘하면 그녀와 연을 쌓을 수 있다.

아니, 어쩌면…….

그때 부사관의 말이 그의 망상을 깨웠다.

〔소위님, 도착했습니다.〕

첸서와 부사관들은 어느새 검은 늑대들을 완전히 뚫고 중급 마수들의 앞에 도착했다는 걸 깨달았다.

하나 이번에도 마수들의 결말은 다르지 않으리라.

〔흐아압!〕

마나 하트가 빠르게 뛰었다.

미스릴 소드에 담긴 붉은 오러가 폭발적으로 달아오르고, 이내 살기를 느낀 뱀이 샤아아- 하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입을 벌렸으나 때는 늦은 후였다.

푸르른 검신에 붉은 살기를 머금은 무기가 뱀을 입을 단번에 꿰뚫었다.

턱 아래로 들어가 입을 통과해 머리를 꿰뚫은 검에 꼬치처럼 꿰인 뱀은 몸을 잠시 부르르 떨다가 머잖아 추욱 늘어졌다.

타다다다당!

-캬아아!

물론 이것이 전투의 종결을 알리진 않았다.

그저 껄끄러운 장애물을 치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평원을 가득 채울 듯 달려오던 마수들의 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줄은 후였다.

그 때문에 지켜보던 훈련병들은 내심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다.”

“와……!”

“우리도 저렇게 싸운다고? 가능한 거야?”

그도 그럴 것이, 고작 10기의 나이트 프레임으로 평원을 가득 채운 마수들을 저지한 것처럼 보인 것이다.

하나 단테는 달랐다.

“빨리 쏴! 놓치면 우리가 뒈진다고 개새끼야!”

“갈겨! 갈기라고!”

“왼쪽! 거긴 오른쪽이고, 새끼야!”

시선을 내려, 나이트 프레임이 아닌 좌우에서 마력 포대를 쏘는 포병들과 소총을 들고 언덕 아래로 미친 듯이 갈겨 대는 병사들을 보았다.

가끔 나이트 프레임이 놓친 마수들을 정리하는 것은 그들의 몫이었다.

그뿐인가.

일전에 그들이 수를 줄여놓았기에 나이트 프레임들이 날뛸 수 있었다.

결국 나이트 프레임 역시 보병들 없이는 안 되는 것이다.

그때였다.

“……?”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을 옮겨 첸서의 기체를 바라보자 순간 그의 발밑이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미간이 좁혀진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어떤 전조인지 깨달은 탓이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미간을 좁힌 그 순간.

콰과과과과광!

거대한 폭음이나 다름없는 울림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첸서의 기체가 솟구쳐진 무언가를 따라 하늘로 날았다.

그리고 그가 미처 균형을 잡기도 전에.

차르르르륵!

마치 촉수처럼 뻗힌 무언가에 아틀라스의 몸체가 휘감기더니 그대로 압축되었다.

〔끄아아악! 아아아아악!〕

〔소, 소위님!〕

몸을 억지로 짓눌러 뼈를 부러트리는 감각이 온몸을 휘감았다.

부사관들은 콕피트가 떠나가라 고통에 몸부림치는 첸서의 비명에 아연실색하며 총을 갈겼으나, 땅이 한번 뒤집히며 일어난 흙먼지에 시야가 확보될 리가 만무했다.

그리고 마침내 먼지가 걷어진 순간.

〔어……?〕

통신기에서 고통 섞인 울음이 멎고, 첸서라고 불렸던 작은 고깃덩어리를 보호하던 강철의 파편이 후두둑-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멍한 눈으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모습을 드러낸 존재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이 섞인 거대한 뱀.

기체 서너 개를 합친 듯한 거대한 몸뚱이를 본 그들은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상급 마수……?〕

이게 대체 왜 여기에?

……라는 물음을 던진 부사관은 마치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내려지는 꼬리에 본능적으로 권총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막 권총과 손가락이 닿은 그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기체가 꼬리에 치여 허공을 날았고, 그대로 남아 있던 늑대들의 틈으로 추락했다.

당연하게도 연대는 침묵에 휩싸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과거 실존했다던 소드마스터와 같이 전장을 종횡하던 기체가 한낱 고철로 변했다.

“올해는 악운이 꼈나 봅니다. 죽을 땐가?”

로한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가트 소령의 손에 쥐여져 있던 양주병을 뺏어 원샷했다.

너무나 무례한 짓이었으나 가트 소령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이며 어벙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뿐인가.

병사들 역시 멍한 눈으로 난생 처음 보는 상급 마수를 바라보며 손을 떨었다.

“아, 아아…….”

죽음이다.

저건, 예정된 죽음인 것이다.

심지어 세실마저도 침음성을 흘리며 미간을 좁혔다.

그녀조차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지켜보던 단테는.

내면의 단전을 살피고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모습에 유엘과 다나, 페고르가 살짝 눈을 굴렸으나 단테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향한 곳은 격납고였다.

마침 출격하지 않은 나이트 프레임 한 기가 구석에 서 있었다.

급작스레 벌어진 이변 때문인지 정비병은 그를 막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상급 마수를 바라볼 뿐이었다.

덕분에 단테는 방해 없이 콕피트를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의자에 앉자 케이블이 우웅- 소리를 내며 따끔한 감각이 일순간 몸을 휘감았다.

반발감이 일었다.

2세대 나이트 프레임과 달리 완전히 동화할 때까진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탓이다.

하나 단테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서서히 깨어나는 새로운 육신의 감각을 느끼며 드문 미소를 지을 따름이다.

그리고 머잖아 나이트 프레임이 그의 의지를 대변할 준비가 된 순간.

스릉.

서늘한 붉은 안광이 거인의 잠을 깨웠다.

조종석 너머로 백색과 흑색이 섞인 뱀이 몸을 비틀었고, 단테는 곧바로 내력을 끌어 올려 그대로 격납고를 뚫고 하늘도 도약했다.

쿠우우웅-!

격납고의 바닥이 갈라지고, 족히 수십m를 날듯이 뛰어 그대로 평원에 착지했다.

콰아앙-!

굉음이 대지를 울렸다.

-샤아아아.

거대한 뱀이 그를 오연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실로 오만했으며, 또한 위압적이었다.

단테는 그런 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나지막이 입을 열어 뱀, 아니…….

〔서른쯤 될 것이다.〕

흑백사(黑白蛇)에게 말했다.

〔내 손으로 찢어 죽인 네놈의 동족의 수 말이다.〕

마침내.

천마가 재림했다.

기갑천마

북부는 다르길 바란다

흑색과 백색이 어지럽게 섞였다.

얼룩인 듯싶다가도, 점처럼 느껴지는 묘한 무늬를 가진 뱀이 푸른 혀를 날름거리며 안광을 번뜩였다.

-샤아아아아.

실로 오만한 눈동자다.

마치, 네놈은 내 상대가 되지 않는 듯한 지독히도 가소로운 눈빛인 것이다.

그 눈빛을 보며 단테는 말했다.

-내 손에 죽은 네놈의 동족이 족히 서른은 넘는다고.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놈의 푸른 피를 맛 본 적도 있을 정도이니.

‘쓰고, 떫었지.’

목을 축일 때 그리 달갑진 않았다.

그는 족히 중원의 성벽과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육신을 눈에 담으며 무심결 중얼거렸다.

“상급 마수라…….”

중원에선 요괴의 격을 나누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누지 못했다.

몇몇 시도가 있긴 했다.

하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책을 엮을 서생이 남아 있질 않았다.

정보를 모을 개방의 거지들이 몰살당했고, 하오문은 진즉에 도망친 후였다.

각 맹회의 정보 단체들은 비어 버린 무력대를 대신하기 위해 발이 묶였고, 결국 정보를 모으는 것을 빠르게 포기한 것이다.

하나 제국은, 나아가 이 세상은 달랐다.

긴 전쟁으로 인해 쌓인 정보를 분류하고 기억한다.

그렇게 버텨 온 50년의 기억은 미지의 적이었던 놈들의 등급마저 나눌 정도로 길게 이어진 것이다.

‘나쁘지 않아.’

단순히 개인의 기억에 의지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흑백사가 단테에게 꼬리를 뻗었다.

조금 전 첸서를 압사시켰던 것처럼 그 역시도 단번에 기체와 함께 찢어 버리려는 속셈이리라.

별다른 기교 따위 없는 단순한 움직임일 뿐이었으나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대지가 진동했다.

사방으로 흙먼지가 일어 시야를 가리고, 나아가 강철과 맞먹는 육신이 그가 탄 나이트 프레임을 단번에 찢어발기겠다는 듯 빠르고 정확하게 뻗어진다.

〔피, 피해!〕

〔틀렸어……. 늦었다고.〕

그 모습에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린 부사관들이 통신기를 쥐고 외쳤으나, 이미 흑백사의 꼬리를 피하기엔 너무 가까웠다.

그들은 또 한 명의 죽음을 예견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여전히 느리구나.〕

낯선, 그리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너무나 덤덤한 목소리에 순간 묘한 위화감마저 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저 이름 모를 파일럿의 생존을 기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다음 아닌 상급 마수다.

비록 네임드에 비해서 약하다고는 해도 웬만한 전선의 전황을 바꿀 정도는 되는 존재인 것이다.

즉, 기체 하나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운이 좋아 피한다 해도 채 몇 분을 버티지 못한 채 상급 마수의 표적은 자신들이 되리라.

〔젠장…… 다 틀렸어. 끝났다고!〕

〔죽을 거야. 죽을 거야…….〕

상급 마수는 족히 기체 20기는 있어야 해볼 만했다.

고작 8기 따위로, 그것도 장교가 아닌 부사관들로 뭘 어떻게 해 본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인 것이다.

살아남은 부사관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절망과 두려움이 감돌았다.

‘차라리 도망칠까? 그러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만연했다.

‘빌어먹을! 하다못해 지휘관이라도 정상이었으면!’

한 부사관은 어리바리나 까고 있을 가트를 생각하며 욕지거리를 집어삼켰다.

놈의 무능을 알았기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호기롭게 첸서에게 내기를 꺼냈던 그는 떨리는 손으로 의자 옆에 놓여 있는 권총을 집었다.

서늘한 감촉이 손끝을 따라서 느껴지고, 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팔을 들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앞서 간 첸서처럼 다진 고기나 되어 마수의 밥이 될 바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그나마 덜 고통스러우리라.

철걱- 소리와 함께 눈을 감았다.

나아가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고 살짝 마나를 담아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이제 당기기만 하면 된다.

당기기만…….

그러나 그 순간.

-끼에에에엑!

이변이 일어났다.

귀가 찢어질 듯한 괴성이 콕피트의 두꺼운 장갑을 뚫으며 파고들었다.

나아가 일전의 마수들이 돌진했을 때보다 더욱 거대한 진동이 대지를 잡아 뒤흔들었다.

〔무슨……!〕

〔꺄악!〕

통신기를 통해 온갖 비명이 울렸다.

그들로서는 처음 겪어 보는 상급 마수의 괴성에 오금이 저렸고, 몇몇은 동화율이 어그러져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누구도 상황을 직시하지 못했다.

대체 어째서 저 괴물이 포효하는지, 누구도 확답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머잖아 먼지가 걷히자.

비단 부사관들뿐만이 아닌, 언덕 위에 자리한 병사들과 훈련병들 역시 경악했다.

“허, 미친놈일세.”

로한은 어느새 텅 비어버린 술병을 망설임 없이 놓으며 중얼거렸다.

병이 깨지며 그뿐 아니라 가트 소령의 군화에도 유리가 튀었으나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저 모습을 본다면, 누가 그딴 사소한 일에 신경을 쏟을까.

“피, 피했다고? 장교도 못 피한 걸 고작 훈련병이?”

“말이 돼……?”

결과적으로 말하면 단테는 뱀의 꼬리에 감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놈의 머리를 그대로 땅에 처박고는 그 위에 오연히 서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모두를 응시했다.

분명 감정 따위 느껴지지 않을 안광이 말하는 듯했다.

한심한 놈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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