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병장에 모인 훈련병들과 조교, 교관들의 모습은 평소와 사뭇 달랐다.
훈련할 때 입는 훈련복이 아닌 제국군을 뜻하는 검은 제복을 입고 있기 때문이었다.
검은 정모가 눈을 살짝 가렸다.
슬슬 다가오는 추위를 대비하려 입은 코트가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고, 등에 멘 군장과 허리춤에 찬 권총의 서늘한 감촉이 옷을 뚫고 전해지는 듯했다.
터벅-.
그리고 머잖아, 늘 그랬듯 단상에 오른 세실이 마찬가지로 제복을 갖춰 입고 그들을 한번 훑었다.
“제군.”
무덤덤한 그러나 아주 미약한 떨림이 느껴진다. 단테는 제모(制帽)에 살짝 가려진 그녀의 갈색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림을 느꼈다.
하나, 세실은 입을 열었다.
단테나 로한을 제외하곤 알아차리기 쉽지 않은 꾸며 낸 목소리였다.
“비록 시기가 앞당겨졌다지만, 우리는 오늘 전선으로 향한다. 억울해하지 마라. 원래부터 가야 했을 전선이다.”
이 자리에 아이들을 동정하는 여인은 없다.
단지 군인으로서, 장교로서, 또한 교관으로서 자신이 가르친 훈련병들을 바라보는 대위가 있을 뿐이다.
“훈련이라고 말했지만 실전이다. 몇몇은 죽을 테고, 몇몇은 평생을 가져가는 후유증을 얻을 수도 있다.”
사실이다.
실전 훈련이라는 속 편한 이름이 붙여진 그 기간에 죽어 나간 훈련병들이 제국 역사상 족히 수천은 된다.
아무리 훈련병이라는 특수성에 일선 부대가 편의를 봐준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본 장교는…….”
세실은 다시금 훈련병들을 훑었다.
“귀관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
제국법에 의해 싸우길 강제된 아이들에게 진심을 담은 명령을 하달했다.
“그러니 살아남아라. 그리고 당당히 이곳으로 돌아온다, 60명 전원.”
그리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훈련병들이 탈 트럭의 후미가 열렸다.
세실은 큰 목소리의 변화 없이 명령했다.
“이동한다. 전원 승차.”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세실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말았다.
어쩌면, 이미 겨울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기갑천마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제3 육군 기갑 훈련소에서 움직인 인원은 대략 80여 명이었다.
장교와 부사관들 태반은 군용차에, 나머지 분대장과 훈련병들은 각각 트럭에 올라 도로를 따라 내달렸다.
트럭의 뒤가 뚫려 있기에 간간이 바람에 제복 끝자락이 펄럭였다.
단테는 마지막으로 탔기에 흑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것을 느끼며 점차 멀어지는 훈련소를 응시했다.
‘기체는 현지로 수급이 된다고 했지.’
훈련기로 쓰이는 2세대 나이트 프레임이 아니다.
제국군에서 현역으로 쓰이는 3세대 나이트 프레임 60기가 그들의 전선 쪽으로 배정된다고 세실이 말했다.
그 말인즉,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제식명조차 알 수 없는 2세대 나이트 프레임도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제국군에서 사용한다는 3세대 나이트 프레임은 과연 어떨까?
‘제식명이 아틀라스라고 했던가.’
그리 나쁘지 않은 어감이다.
한편 단테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트럭 내부의 공기는 한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의 준비할 시간조차 없이 향하는 전장이다.
이 자리에 있는 태반이 전쟁을 알았다.
직접 참극을 본 이도 적지 않으며, 나아가 그로 인해 죽다 살아난 이들도 없지 않다.
그러나 단테는 달랐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조급함에 마음을 가라앉히려 눈을 감는다.
설렘이나 기꺼움이 아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앞둔 이의 심정이었다.
길어야 며칠이면 다시 전장에 선다.
일전에 꺾였던 전장에 다시금 발을 내딛는 기분은 실로 묘한 것이다.
‘음…….’
그때였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살짝 고개를 돌리자, 웬 옅은 적색 머리의 여자와 함께 앉아 있던 유엘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누가 봐도 그를 보고 있다가 시선을 돌린 모양새였다.
“정말 그렇게 말했다고?”
“어, 음…….”
얼핏 들려오는 대화를 들어 보면, 자신과 나눴던 대화를 곁에 있는 여자에게 말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단테는 이내 관심을 거뒀다.
이미 할 말은 모두 했다.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녀에게 말한 대로 헌병들이 찾아오면 대충 탈영하면 그만 아닌가.
어차피 자신은 죽지 못한 망령일 뿐이니, 명예 따위는 애초에 관심사가 아니었다.
유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단테는 다시금 눈을 감았다.
그리고 흔들리는 트럭의 위에서 가벼운 복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복기할 것은 나이트 프레임에 탄 전투가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의 것.
언젠가 수천의 마수들과 대적할 때였다.
쿠웅.
흔히 천마군림보라 일컬어지는 일보를 밟았다.
수천의 뿌리를 머금은 대지가 일순간 진동한다.
그에 말미암아 흙과 돌덩이가 허공으로 치솟아 비가 되어 흩날렸다.
-가라.
내뱉는 말 한마디에 수백의 백월단이 일순간 쇄도했다.
신교의 교리와 패도를 토대로 쌓아 올린 제일의 무력대가 마수들의 선봉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를 종횡하며 힘줄을 끊었다.
단번에 땅을 박차고 뒤통수를 잡아 뜯었으며, 나아가 스스로 입안으로 들어가 내력을 터트려 통째로 머리를 부숴 버렸다.
캬아아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는 거대한 몸뚱이가 갈라진 틈으로 추락한다.
힘줄이 꿈틀거리는 팔뚝이 허공을 돌아 미처 피하지 못한 무인의 육신을 짓누르고, 나아가 포효한다.
단테…… 아니, 천휘는 모든 것을 묵묵히 응시했다.
서서히 죽어 가던 중원 무림을 다시 눈에 담았다.
심상에 불과한 복기임에도 그날의 혈향이 짙게 깔리는 듯한 것이다.
‘나이트메어, 아니…….’
문득 전장의 하늘에 그놈이 떠올랐다.
족히 성벽과 맞먹을 법한 거대한 육신의 흉흉한 눈빛이 그와 마주했다.
온몸에 가득한 깃털과 말을 연상시키는 몸뚱이, 그리고 등에 달린 4쌍의 날개와 불길한 기세를 뿜는 안광까지.
반마반조(半馬半鳥)의 괴물.
놈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자 그는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몽귀(夢鬼).’
놈은 바로 몽귀라는 것을.
순간 감았던 눈을 떴다.
얼마나 복기에 심취했던 것인지 이미 주홍빛 하늘이 트럭을 향해 살짝 빛을 드리우고 있었고, 때마침 트럭이 멈춰 섰다.
“전원 하차!”
조교들의 외침이 울렸다.
그들의 말을 따라 트럭에서 내리자 곧 꽤 거대한 건물들이 드리운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오호, 기갑 장교들인가?”
“아니, 부사관 같은데?”
트럭이 멈춘 곳이 대로의 한편이기 때문일까.
슬슬 저무는 하늘 아래 집으로 돌아가던 행인들의 눈길이 그들에게 머물렀다.
조금은 앳되어 보이는 얼굴.
그에 반해 정갈하게 갖춰 입은 검은 제복에 달린 기갑 부사관 훈련병 마크를 본 이들은 머잖아 그들이 전선으로 훈련을 나서는 훈련병들임을 알아보았다.
시선이 쏠렸다.
그러나 중원에서 군관을 보는 눈빛과는 사뭇 달랐다.
‘동경…… 아니, 존중인가.’
새삼 단테는 묘한 감흥을 느꼈다.
그들의 시선이 훈련병들에 닿는 순간, 미약하게 얼굴에 감도는 호의를 본 탓이었다.
관무불가침의 원칙을 입에 담으며 내심 관군을 경원시하던 무림인으로서는 신선한 모습이었다.
그때 앞서 달리던 군용차에서 내린 세실이 각을 맞춰 도열한 훈련병들의 앞에 섰다.
“오늘은 이곳에서 머문다. 이곳을 떠나면 쭉 숙영이니 몸 관리에 만전을 기하도록.”
쉽게 말하면 쉴 수 있을 때 쉬라는 뜻이었다.
세실은 그 말을 끝으로 로한과 함께 도시의 행정관으로 보이는 이를 따라 다시 군용차에 올랐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자, 이번엔 분대장들이 나서 트럭이 멈춰선 뒤쪽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날이 늦었으니 층별로 빠르게 입실한 후 식사를 한다. 움직여!”
“예!”
듣던 중 반가운 말이었다.
비록 제대로 된 훈련은 오전에 한 구보와 사격밖에 없었으나, 심리적인 압박감이 생각보다 컸던 탓이다.
그들은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여관으로 들어섰다.
“아이고, 어서 오세요!”
이미 여관을 통째로 빌려 놓은 듯, 문을 열고 들어서자 텅 빈 여관과 주인이 그들을 반겼다.
단적으로나마 기갑 파일럿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여기 있다.”
단테는 조교들이 나눠주는 키를 받곤 곧바로 방을 향했다.
그가 속해 있는 곳이 1분대이기 때문인지 로비를 제외하고 제일 하층인 2층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적당히 넓고 조촐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나름 만족스러웠다.
나아가 늘 10명씩 함께 재우던 훈련소와 달리 홀로 있을 수 있다는 것부터 썩 나쁘지 않은 이점이었다.
그는 등에 멘 군장을 방구석에 내려놓은 뒤 곧바로 방을 나섰다.
도시의 식당이라…….
썩 궁금한 것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