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납고 벽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자 그를 반긴 건 세실과 로한, 그리고 단테가 움직인 기체를 조정하는 일부 조교뿐이었다.
세실은 단테가 훈련병들을 찾는다고 생각했는지 말했다.
“다른 훈련병들은 먼저 내무반으로 이동시켰다. 아무래도 남들이 듣기에 썩 달가운 이야기는 아닐 듯해서.”
“그렇습니까.”
어차피 오늘 훈련병들에게 허락된 것은 앞으로 타게 될 나이트 프레임을 견식하는 것뿐이었다.
세실은 격납고 안에 자리한 간부 휴게실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용케도 감시국의 눈길을 피했군.”
“……감시국 말입니까.”
감시국이라는 단어에 순간 ‘뭐지?’ 싶었으나 머잖아 그게 데지안 왕국 내부에 있는 암행조직 비스름한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그런 그의 미적지근한 반응에 세실은 휴게실의 문을 열며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여태까지 평민으로 살아왔을 테니까 모르는 거도 무리는 아니지. 듣기론 데지안 왕국에서 감시국은 일종의 괴담 정도로 여겨졌다고 하니까.”
그녀의 말을 이어 입을 연 것은 곁에 서 있던 로한이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운이 좋은 정도가 아니라, 선조들에게 감사해야 해. 마나 하트를 지켰다는 뜻은 감시국 그 미친놈들의 눈을 속였다는 뜻이니까.”
단테는 그 말에 세실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로한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테는 자신이 읊어놓은 거짓이 생각보다 허무맹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떠보는 건가?’
이야기를 들어 보면 감시국이라는 암행 조직이 생각보다 집요한 놈들일 가능성이 컸다.
때문에 단테는 언제라도 둘을 제압하고 도주할 수 있도록 둘과의 거리, 퇴로를 살폈다.
그러나 그때.
세실은 의자에 털썩 앉고는 단테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특징과 아버지의 이름을 말해 봐라. 현재는 군단의 둥지가 있는 곳이니 직접 조사는 힘들겠지만, 정보부에 한 번 물어봐서 성이나 남은 혈족을 찾아볼 테니.”
그녀는 품 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펜을 들었다.
로한은 얼른 말씀드리라는 듯 단테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단테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응?”
그의 말에 당연히 말할 줄 알았던 세실은 막 잉크가 묻어 나오기 시작하던 수첩을 탁 닫고 물었다.
“어째서?”
순간 그녀와 로한의 눈에 미약한 의심이 깃들었다.
정보부에 의뢰한다고 무조건 찾을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긴 했지만, 그래도 시도해 보는 것과 해 보지 않는 건 궤가 달랐으니 말이다.
당연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단테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특유의 무뚝뚝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제 가문이 무엇이든, 또 혈족이 남아 있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저 제국의 군인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니까요.”
-제국의 군인으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 말에 세실은 손에 쥔 펜으로 탁자를 툭툭 두드리며 물었다.
“이유는?”
“복수입니다.”
이미 예상한 답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귀관의 생각은 알겠다. 이만 복귀하도록.”
“예, 그럼.”
단테는 가볍게 경례를 올리곤 밖으로 나섰고, 자연히 간부용 휴게소 안에는 의자에 앉은 세실과 로한 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찰나의 정적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이윽고 세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중사,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요.”
그녀의 물음에 로한은 잠시 고민하는 듯 턱을 쓸다가 말했다.
“정말 운이 좋은 케이스 아니겠습니까? 솔직히 데지안 왕국 감시국 놈들이 집요한 건 사실이지만 놈들도 사람이니까 말입니다.”
데지안 왕국은 역사가 길다.
그리고 그만큼 낡고 헤져 구멍 난 부분도 어느 정도는 생각해야 하리라.
거기에 국운이 기울던 와중이니까 그것도 감안해야 하고.
“그래,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겠지.”
세실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말이 감시국이지, 실상은 그저 귀족들의 소방수 역할이나 하던 놈들이니까 말이다.
“거기에 만약 뭔가 구린 부분이 있는 놈이면, 대놓고 팔을 움직였겠습니까? 누가 봐도 의도치 않게 움직여서 당황한 모습이었습니다.”
뒤이은 로한의 말 역시 동의하는 부분이었다.
턱을 긁으려다 멈춘 모습은 누가 봐도 그랬으니까.
그래,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일까.”
세실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왜인지 저 단테라는 훈련병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한편 그런 그녀의 반응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던 로한은 실눈이 도드라지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냥 맡겨 보죠?”
“응?”
“정보부에 신상 조사를 맡겨 보는 겁니다. 이유야 대충 붙이면 딱히 문제 될 것도 없지 않습니까.”
그의 말대로, 조교나 교관은 필요한 선에서 훈련병의 신상이나 과거를 캘 권한이 있었다.
물론 남용하면 안 되긴 하지만, 알게 뭐람.
“한번 맡겨 보고 생각하시죠. 어차피 손해 볼 게 없는 게임입니다.”
잠시 고심하던 그녀는 로한의 말에 끌리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말대로 리스크도 없으니 고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난 김에 바로 연락해야겠군.”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편 격납고 구석에 몸을 숨긴 채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단테는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을 하며 생각했다.
‘검증은 필요한 법이니까.’
오히려 예상보단 잘 넘어간 편이었다.
정보부라는 곳이 얼마나 빠르게 조사할지는 모르겠지만, 유의미한 정보가 나오기 전에 단테는 거취를 정하고 난 후일 테니까.
군에 남아 있거나, 아니면 단독으로 움직이거나.
거기까지 생각한 단테는 고개를 들어 나이트 프레임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작은 산을 보는 듯 거대한 그 크기에 압도될 법도 하건만, 정작 그의 눈은 낮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느낌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
팔을 움직였던 때의 감각을 복기해 보면, 묘하게 살짝 느리고 무거운 걸 빼고는 그리 위화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비유하자면 흔히들 하는 모래주머니를 차고 외공을 수련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이트 프레임이 쓸 만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고작 팔 한번 움직인 것으로 어찌 판단할 수 있겠는가.
‘뭐, 시간은 적지 않으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격납고를 나섰고, 곧 단테를 기다리던 조교를 따라 내무반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여러 가지 제식 훈련이었다.
“충성! 제국에 영광을!”
제국군의 경례 방법은 간단했다.
“오른쪽 검지를 눈썹 끝에! 손바닥 보이지 않도록 하고 팔꿈치 내려!”
조교들의 외침에 따라 처음엔 어색해하던 훈련병들은 차츰차츰 봐줄 만한 거수경례를 올렸다.
그러자 다음은 각종 구보나 용어들을 외우는 것들이었다.
훈련병들의 표정이 똥 씹은 얼굴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저녁 식사 후 내무반으로 인솔된 훈련병들은 점호를 끝으로 지친 몸을 모포 속에 묻었다.
전날은 끙끙거리는 소리와 훌쩍거리는 울음이 반반이었다면, 오늘은 지친 몸을 어찌할 줄 모르고 곧바로 잠이 든 아이들이 코를 고는 소리가 대다수였다.
찌르르, 찌르르.
달빛만이 스산하게 검은 하늘을 밝히는 밤에 풀벌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잔잔히 들려왔다.
밤이 온 걸 알리려는 것인지 서늘해진 공기는 모포에 묻힌 아이들에게 옅은 입김을 내뱉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시각, 모두가 잠이 든 때를 기다리던 단테는 눈을 뜨며 생각했다.
‘드디어 다 자는군.’
슬슬 수련을 다시 할 때였다.
기갑천마
수련, 그리고 기다림
야밤의 내무반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아이들이 뒤척이는 소리를 제외하면 말이다.
창밖에서 비춰 내리는 스산한 달빛만이 유일한 조명인 방 안에서, 단테는 소리가 나지 않게 모포를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음……. 우에.
잠시 아이들의 숨소리와 상태를 살핀 그는 곧 모두 잠이 들었음을 재차 확인하고 내무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익- 소리와 함께 살짝 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자, 근무를 서는 몇몇 조교들의 잡담 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정말?”
그들의 대화 소리에 단테는 망설임 없이 문을 닫았다.
‘이쪽으로 나가긴 힘들겠군.’
조금 더 내력이 쌓이면 모를까, 콩알만 한 내력으로 저들의 이목을 완전히 숨길 순 없었다.
그럼 남은 건 창문뿐인데…….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위치나 크기나, 남자 한 명은 충분히 오갈 수 있을 것이다.
‘뭐, 창문도 문이니까.’
애초에 처음도 아니고, 중원의 무림인들에게 창문은 자주 애용하는 통로이기도 했다.
단테는 망설임 없이 창문을 열고 주변의 인기척을 살핀 후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털썩- 소리와 함께 바닥에 착지하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내력을 퍼트리며 주변을 훑었으나 다행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귀찮은 일은 없어서 다행이야.’
걸어오는 싸움을 피하는 성격도 아니지만, 구태여 난리를 일으키는 성격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단테는 미리 봐 놓았던 담장을 그대로 넘어 훈련소 외곽으로 향했다.
“흐아암…….”
“야, 담배 있냐?”
“돗대인데 말임다.”
중간중간 근무를 서는 병사들과 조교들의 모습이 보였으나, 단테는 그들에게 들킬 수준이 아니었기에 손쉽게 훈련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훈련소 밖의 숲으로 걸어 나온 그는 실로 오랜만에 숲으로 가득한 공간을 거닐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 참 밝구나.’
중원의 밤하늘이나 이곳의 밤하늘이나 밝은 것은 똑같았다.
그는 잔잔히 미소를 지으며 이젠 잊혀 풍화되어 버린 옛 기억을 추억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저 발걸음이 닿는 대로 걷던 그는 머잖아 작은 공터 하나를 발견했다.
“흐음.”
턱을 쓸며 공터를 살폈다. 한쪽에 바위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빼곡한 숲에 살짝 가려진 지형은 완전히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잠시 수련을 하기엔 그리 나쁘지 않은 장소였다.
더욱이 훈련소와 그리 멀지도 않으면서 근처에 훈련소와 이어지는 길이 없어 오가는 데에도 큰 부담이 없었다.
‘여기가 좋겠어.’
의도하진 않았으나 얼떨결에 괜찮은 수련 장소를 찾은 그였다.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허리를 숙여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무심히 공터와 숲 경계로 던졌다.
투욱.
떨어진 돌멩이들은 얼핏 보기엔 중구난방으로 흩어진 듯 보였으나, 실상은 돌멩이 하나하나 그가 의도한 위치에 정확히 안착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돌멩이가 바닥에 안착한 그 순간, 단테는 공터의 중앙에 기문진법의 묘리를 담은 옅은 안개를 구축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본디 제갈세가에서 파생된 간단한 진법이었다.
사문은 없고 단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다가 자연스럽게 생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전부인 진법이다.
그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끝낸 후.
공터의 중앙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고는 가부좌를 틀며 눈을 감았다.
옅은 안개가 잔잔히 코끝을 스치고, 밤 기온에 서늘해진 바람이 슬며시 육신을 감쌌다.
그는 조금 전 숲을 거닐며 보았던 백월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영롱했던 달빛을 가슴에 새기며 신교의 천마만이 익힐 수 있는 백월신공의 구결을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운기조식(運氣調息).
운기조식이라 함은 무엇인가.
중원의 무림인들은 그것을 두고 천지와 우주, 나아가 자연 그 자체와 통하는 것이라거나 또는 나약한 인간이 경지에 다다르기 위한 동아줄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운기조식이란 단지 인간의 수단에 불과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공이라는 것 자체가 그저 무림인들의 수단이었다.
‘무림에 진정 경지를 추구하는 자가 남아 있긴 했던가? 글쎄…….’
그래, 어딘가에는 남아 있었을지 모른다.
과거의 무림인들이 그러했듯, 죽립 하나를 쓴 채 낡아 빠진 검을 들고 무림을 종횡하며 언젠가 다다를 경지를 위해 무를 갈고닦았을 이들이.
그러나 천휘가 본 무림인 중 그런 이는 없었다.
스스로 정파라 자부하며 의와 협을 읊조리던 무림맹은 단지 명분 있는 패권을 위해 힘쓸 뿐이었다.
스스로 흑도라 말하던 머저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단테, 아니 천휘가 이끌던 백월신교조차도 패도라는 목적을 위해 그저 수단으로써의 무공을 연마할 뿐이었지 않은가.
그 때문에 그는 운기조식에 그리 대단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저 백월신공의 묘리를 이해하고 허공에 흩어진 자연지기를 온전히 내력으로 갈무리하여 단전에 담는 것만을 신경 쓸 따름이다.
스읍, 후-.
백월신공의 토납법에 따라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는다.
그 사소한 기류에 허공에 농밀하게 퍼져 있는 자연지기가 딸려와 단테의 혈도를 따라 천천히 단전으로 흡수되었다.
‘일전에는 단전을 만드는 것에 그쳤지만…….’
만들어진 그릇에 단순히 담기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이제부턴 운기행공을 통하여 천천히 그릇의 크기를 늘려 가야 하리라.
체내의 혈도 중 백월신공의 길을 따라 천천히 내력을 순환시켰다.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 만큼 무리할 생각은 없었기에 몇 번을 순환시킨 그는 이내 운기행공을 마무리하고 눈을 떴다.
“하아…….”
꽤 오랜 시간을 운공했기 때문인지 가부좌를 튼 몸이 살짝 굳은 게 느껴졌으나 기분은 오히려 좋았다.
‘꽤 많이 늘었어. 상상 이상인걸.’
콩알만 했던 단전의 크기는 호두 정도의 크기로 변해 있었다.
초반이라 성취가 빠른 것이기도 했으나 그것보단 허공에 퍼져 있는 기의 질과 양 차이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이 속도면, 두 달 뒤 나이트 프레임을 조종하게 되더라도 한 시간 정도는 운용할 수 있을 듯싶었다.
물론 추측이었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단테는 대략적인 시간을 가늠하더니 돌아가기엔 대략 두 시간이 좀 안 되게 남아 있다는 걸 깨닫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외공을 수련할 시간이 났으니 말이다.
그는 한쪽 구석에 박혀 있는 바위를 잠시 바라보다가, 곧 적당한 크기의 바위의 양옆을 쥐고 손가락에 내력을 담아 찍어 눌렀다.
그러자 곧 쩌저적- 소리와 함께 바위 옆면에 손가락이 박히자 단테는 그대로 힘을 주어 바위를 뽑아 올렸다.
콰드드득!
꽤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 박혀 있던 바위는 잠깐 버티는 듯했으나, 이내 속절없이 딸려 나와 대지 위로 모습을 드러내야 했다.
그는 잠시 바위의 크기를 가늠하곤 가볍게 정권을 내질러 쓸데없이 도드라진 부분을 부숴 버렸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바위를 등에 이고 천천히 몸을 굽혀 양팔과 두 다리로 대지를 딛고 엎드렸으니.
흔히 말하는 팔굽혀펴기 자세였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그는 등과 허리, 나아가 팔과 다리에 하중을 주는 무게감을 즐기며 망설임 없이 팔을 굽혔다.
부들거리는 몸과 달리, 단테는 즐거웠다.
훈련소 조교들이 시키는 외공 수련은 뭐랄까, 너무 강도가 약해서 아쉬운 것도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부족한 수련은 여기서 해야겠어.’
마침 근처에 보이는 바위나 나무도 적지 않으니, 당분간은 저것들로 수련할 수 있을 듯싶었다.
물론 무게가 가벼워지면 따로 다른 수련 용품들을 들여와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얼마나 수련에 집중했을까.
단테는 한참이나 팔굽혀펴기에 심취한 나머지 아침 점호가 시작되기 직전 겨우 내무반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은 본격적인 훈련이었다.
아침 점호를 하고 구보를 한다.
식사를 하고 각종 교관과 조교들에게 나이트 프레임과 기초적인 전술에 대한 것을 배우고, 다시금 육체적으로 굴려진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잠이 든다.
물론 단테는 잠을 자지 않은 채 매일 밤 간이로 만든 훈련장에서 수련을 거듭했지만 말이다.
육신의 피로감이 있긴 했으나, 운기조식과 쪽잠으로 충분히 버틸 만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넘어 한 달을 지나, 마침내 두 달이 되기 하루 전…….
“스읍, 후.”
단테가 만든 훈련장에 깊은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상의를 대충 벗어 근처 나무의 가지에 걸어 놓고는, 허공의 무언가를 노려보며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신중하게 내뻗는 보법에는 하나하나 짙은 패도의 기운이 담겨 있었고, 단테는 머잖아 내력을 이끌어 일보(一步)를 내디뎠으니.
쿠웅-!
짙고 무거운 중압에 일순간 공기가 흔들렸다.
순간 단테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비단을 감아 쓸 듯 부드럽게 말아 쥔 주먹은 일순간 하나의 만월이 되어 어둠을 밝힌다.
머잖아 만월에 닿은 이름 모를 요괴의 허상은 고통 섞인 비명을 내지르며 독이 있는 발톱을 휘둘렀다.
‘감히.’
그러나 한낱 이름조차 얻지 못한 미물이 그에게 발톱을 박아 넣을 수는 없는 일.
단테는 몸의 움직임을 일순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발톱을 피하고 그대로 놈의 육신으로 파고들었다.
-끼에에악!
당황한 놈의 괴성이 귓가에 어른거린다.
그러나 단테는 연민 대신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단번에 놈의 폐부로 주먹을 말아 올렸고, 곧 내력을 폭사시키며 읊조렸다.
“끝이다, 미물.”
그리고 그 순간.
콰드드드득!
단테의 주먹에 뚫린 폐부에 찬 핏물이 놈의 입으로 터져 오르고, 그는 기울어 가며 천천히 사라지는 허상 속의 요괴를 바라보며 가볍게 손을 털었다.
그리고 그는.
이내 걸어 놓은 훈련복을 걸치며 서서히 밝아 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인가.’
한쪽에선 아직 검은색이 어른거렸으나, 다른 한쪽에선 남색 빛의 하늘이 서서히 어둠을 잠식하고 있는 걸 보니 머지않아 해가 뜨리라.
아직 시간이 꽤 남긴 했지만, 단테는 미련 없이 훈련장 밖으로 나섰다.
기갑천마
실습 (1)
끼이익- 소리를 내며 내무반의 창문이 열렸다.
해가 뜨기 전에 들어온 그를 반기는 건 훈련병들의 뒤척임이 아닌 한산함이었다.
‘오늘이 복귀 날이었던가.’
며칠 전, 마나 하트를 만드는 것에 끙끙대던 마지막 훈련병들까지도 성공하자 세실은 신병 휴가라며 모든 훈련병에게 2박 3일 동안 인근 도시로 외출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 때문에 현재 그를 제외한 모든 훈련병은 밖에 나가 있는 상황이었다.
단테는 가볍게 흙이 묻은 옷을 털며 세실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뭐? 휴가가 필요 없다고?
그녀는 ‘굳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대신 훈련 대신 온전한 휴식을 보장받는 것을 대가로 걸었다.
그것이 나름 타당하게 느껴졌는지 세실 역시 고개를 끄덕이곤 알겠다고 허락한 것이다.
나가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나갈 이유도 없을뿐더러, 차라리 그 시간에 수련하는 게 옳다고 본 것이다.
‘뭐, 이 세계는 나중에 둘러보면 그만이니.’
급할 게 뭐가 있겠는가.
그런 생각을 끝으로 새 옷을 관물대 안에서 꺼내 들곤 내무반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복도에서 담배를 뻐끔거리며 당직을 서고 있던 조교 한 명이 그를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오늘도 방에서 운동하고 나오냐?”
“예.”
“하여간 성실하다니까…….”
늘 마주치는 만큼 수련을 하는 걸 아예 숨길 순 없었기에, 대충 새벽에 훈련병들이 깨기 전 맨몸 운동을 하는 것으로 둘러댄 후였다.
단테는 대충 답해 주곤 곧바로 샤워실로 향했다.
끼이익-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살짝 서늘한 공기가 그를 반겼다.
달아오른 몸을 식혀 주는 듯한 그 감각이 썩 나쁘지 않아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샤워기 앞에 서서 손잡이를 돌렸다.
솨아아아-!
샤워기의 물줄기가 머리를 적시며 몸의 굴곡을 따라 바닥으로 추락했다.
지난 두 달간 외공도 빠짐없이 수련했기 때문인지 꽤 탄탄해진 근육이 도드라져 보였다.
하나 정작 단테는 육신이 아닌 단전의 성장에 만족해하며 젖어 가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시 50년을 버틴 이유가 있긴 하구나.’
제일 처음 가졌던 의문이자, 여전히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의문.
‘중원은 단 5년 만에 무너졌거늘, 어찌 이곳은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틸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에 그는 어느 정도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중원에 비해 압도적인 마나의 질. 그리고 그 마장기라는 것의 위력.’
그는 어느새 덥수룩해진 머리를 힐끔 바라보다가 생각을 이어 갔다.
두 달 동안 받았던 교육 중에선 군단, 그러니까 대군주와 마수들에 대한 것과 50년 동안의 역사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걸 들으며 단테는 마장기(魔裝機)라는 게 나이트 프레임뿐만 아니라 마석과 마도 공학으로 만든 병기까지 총칭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제국은 물론 이 세계도 군단에 의해 멸망할 뻔했으나 마장기의 활약으로 구사일생했다는 것도 말이다.
뚜욱.
단테는 샤워기의 손잡이를 조금 전과 반대로 돌려 잠그곤 들고 온 수건으로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었다.
그러고는 거울에 비치는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중얼거렸다.
“정말 그뿐일까.”
마나의 질, 마장기의 위력.
그 두 가지 차이만으로 무려 45년이란 간극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인가.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역시, 전선이라는 곳에 가 봐야 알겠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지 않았던가.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 낸 후 밖으로 나왔다.
아직 다 털어지지 않은 물기가 머리에 남아 있긴 했으나 조금 돌아다니다 보면 저절로 마르겠지.
단테는 발걸음을 내무반이 아닌 식당으로 옮겼다.
훈련병들이 없긴 했으나 조교들이나 교관들은 남아 있었기에 식당은 여전히 운용하고 있었으니.
그때 막 발걸음을 뗀 단테의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누구야? 밥 먹으러 가는 건가?”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로한이 보였다.
단테는 어깨에 걸친 수건으로 목덜미로 흘러내린 물기를 닦아 내곤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습니다.”
“아쉽네. 같이 먹어 주고 싶은데…….”
로한은 힐끔 고개를 돌리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세실을 바라보며 말했다.
“대위님하고 같이 먹기로 해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그럼.”
더 나눌 이야기는 없었기에 단테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다시금 식당으로 걸어 들어갔다.
이젠 익숙해진 식판을 들고 음식을 받으러 가자 조교는 아무런 말 없이 다른 이들보다 2배는 많은 양을 단테의 식판에 담아 주었다.
그걸 들고 늘 앉는 구석 자리로 가서 먹기 시작한 그는 뒤늦게 세실과 함께 들어오는 로한을 힐끔 바라보곤 생각했다.
‘귀찮은 놈.’
그의 머릿속에서 로한에 대한 평가는 딱 그 한 줄이었다.
물론 정말로 귀찮다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일전에 한 생각이 틀렸어.’
놈은 제갈씨가 아니라 사마씨를 닮았다.
겉으론 웃고 다니지만, 속에는 아마 구렁이를 백 마리쯤 키우고 있으리라.
그러나 그 말은 곧 단테의 예상 범주에 드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왜냐고?
‘사마제천, 그놈이 생각나게 하는 놈이야.’
사마씨는 대대로 백월신교의 대군사를 맡았으니까.
듣기론 최초로 ‘천마’라는 명칭을 제안한 것도 놈들이라고 들었는데.
어쨌든 단테는 저런 놈들을 잘 알았다.
‘아마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며 입맛대로 주변을 움직이려는 놈이겠지.’
가령 흑막을 자처하는 놈들과 닮아 있다고 해야 할까.
하나 단테의 관심은 딱 그 정도였다.
주욱- 빵을 찢어 치즈라는 걸 올려 입에 털어 넣은 그는 입을 우물거렸다.
귀찮게만 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노골적으로 주시하는 행동은 썩 귀찮긴 해도 선을 넘지는 않는다.
그러나 놈이 선을 넘는다면…….
‘아마 제국은 시체를 하나 치워야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단테는 이내 잡념을 모두 지워 버리고 눈앞의 식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훈련병들 복귀 시작했다.”
“으아아…… 휴식 끝이구먼.”
그리고 막 마지막 빵을 입에 털어 넣은 그때 근처에서 들려오는 조교들의 대화를 들은 단테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 일련의 훈련병들의 모습이 보이자 때가 되었음을 실감했다.
‘바로 오늘이.’
나이트 프레임에 오르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