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갑천마-5화 (5/197)

“끄응…….”

“하아, 하아…….”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로한의 주도하에 이뤄진 ‘엎드려.’와 ‘일어나.’는 날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부족한 훈련병들은 어느 순간 탈진해서 바닥에 쓰러졌고, 남아 있는 이들은 단테를 포함한 세 명이 끝이었다.

‘으음.’

그는 고개를 돌려 나머지 두 명을 바라보았다.

“……후, 흐읍.”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금안을 가진, 어딘가 묘하게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가진 여자.

“……아. 죽겠다아.”

그리고 덥수룩한 남색 머리에 마찬가지로 남색 눈을 가진, 어딘가 모르게 능글맞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둘을 잠시 바라보던 단테는 곧 시선을 거뒀다.

사실 둘의 체력이 대단한 게 아니라 나머지가 수준 미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아니, 이게 당연한가.’

애초에 단련된 육신도 아닐뿐더러, 밥도 먹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정확히는 단테의 육신이지만.

뚜둑- 하며 무릎이 뻐근하게 울린다.

족히 수백 번은 굽혔다 펴며 관절에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에겐 전혀 불쾌한 감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근육과 관절의 통증은 묘한 만족감까지 안겨 주었다.

과거 한창 수련에 정진했을 때를 떠올리게 만들지 않는가.

나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니.

한편 로한은 연병장 곳곳에 널브러진 훈련병들을 잠시 훑어보다가 혀를 차며 대놓고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이번 기수는 고작 세 명인가? 영 상태가 별로인데.”

그는 진심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좁혔지만, 연병장에 누워 있는 이들은 억울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엎드렸다가 일어나기만을 몇 시간을 반복했는데 지치지 않는 저 세 명이 비정상 아니냔 말이다.

그렇다고 그걸 직접 입 밖으로 내뱉는 이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저 수석 조교라는 미친놈에게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는 걸.

“뭐, 오늘은 이 정도면 되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로한은 잠시 붉은 머리를 긁적거리다가 조교들에게 눈짓했다.

조교들은 곧바로 연병장 바닥에 널브러진 훈련병들을 일으켜 세우며 외쳤다.

“일어나!”

“눕고 싶으면 내무반으로 들어가서 누워라!”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에 연병장 바닥과 하나가 되어 잠시나마 짧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훈련병들은 누가 먼저랄 거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조교들의 인솔을 따라 내무반으로 향했다.

그렇기에 단테와 끝까지 살아남은 나머지 둘 역시 그들을 따라가려던 그때.

“아, 귀관들은 잠시 남지.”

로한의 목소리가 그들을 잡아 세웠다.

고개를 돌리자 로한은 특유의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이름이 어떻게 되지?”

“유엘 드 로트메일입니다.”

“오호.”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금발의 여자였다.

그녀의 말에 로한은 붉은 눈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망명 귀족이셨군. 마나 하트가 있나?”

“예, 그렇습니다.”

시설에서 바로 훈련소로 온 훈련병이 귀족의 성을 쓰는 경우는 한 가지뿐이다.

몰락한 망명 귀족.

아마 그녀는 데지안 왕국 출신이리라.

그리고 그런 경우라면 거의 무조건 마나 하트는 기본적으로 만든 후였다.

그는 존댓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당당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가, 이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망명 귀족이 없는 게 이상하지.”

데지안 왕국의 멸망은 사실상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세간은 가장 오래된 왕국이니 뭐니, 하면서 띄워 주기 바빴으나 실상은 가장 근대화에 실패한 국가였으니까.

‘기용 가능한 나이트 프레임이 고작 1개 군단급이라고 했던가?’

나이트 프레임은 1개의 기체가 일반 연대급, 간단히 산술적으로 따지자면 1천 명의 보병으로 편제를 나눈다.

그러니 군단급이라고 하면 고작 50여 기가 전부라는 뜻이다.

오죽하면 작년까지 버틴 게 용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일까.

로한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남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진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는 로한이 묻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페고르입니다. 귀족이 아니고 평민 나부랭이라 마나 하트는 없습니다.”

“……뭐?”

페고르의 말에 입을 연 것은 로한이 아니라 유엘이었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자신을 겨냥해서 비꼬는 그를 바라보며 미간을 좁혔으나, 정작 페고르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녀의 시선을 넘기며 덧붙였다.

“아, 제가 실수했나 봅니다? 그런데 참 염치도 좋으십니다, 귀족 아가씨.”

“……무슨 뜻이지?”

“정말 모르시나?”

그녀의 물음에 페고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비틀린 입꼬리 사이로 그녀에게 비수가 될 말을 내뱉었다.

“무능해서 나라를 말아먹은 주제에 무슨 염치가 있다고 그렇게 당당하지?”

“……!”

서늘한 비수처럼 꽂히는 그의 말에 유엘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고 반박하려는 듯 몇 번 입술을 오물거리던 그녀는, 이내 고개를 푹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이야!”

그때 로한은 묘한 눈웃음을 지으며 페고르를 바라보다가 이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깡이 대단하네?”

그리고 곧바로 허리에 찬 리볼버를 꺼낸 후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으읏!”

총탄은 빠르게 페고르의 귀 옆을 스쳐 연병장 구석의 벽에 박혔고, 페고르는 당황과 분노로 얼룩진 표정으로 로한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로한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검은 군홧발로 페고르의 배를 정확히 가격했다.

“커헉!”

마나까지 담아 배를 강타하자 페고르는 속절없이 무릎을 꿇고 피를 토했다.

그러나 로한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에게 성큼 다가가 리볼버의 해머를 젖혔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장전되고, 그는 총구의 끝을 페고르의 관자놀이에 겨냥한 후 허리를 굽히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 만한 병아리 새끼야, 뒈지고 싶냐?”

“어, 어째서…….”

“어째서?”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그러곤 바닥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을 콰득- 소리가 나게 짓밟았다.

“끄아아아악!”

뼈가 부러지는 듯한 감각과 함께 페고르의 눈에 공포가 가득 찼다.

그제야 로한은 썩 마음에 든다는 듯 히죽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귀족을 싫어하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오히려 나도 귀족을 싫어하는 편에 속하거든.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콰득!

“아, 아으윽! 끄아아악!”

그는 손가락 사이사이의 뼈마디를 군홧발로 잘근잘근 짓밟으며 나지막이 덧붙였다.

“너한테 이름을 물어봤지, 네놈의 사연을 물어봤냐?”

“그, 그만……!”

이미 페고르의 손은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올 정도로 망가진 후였다.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고작 밟은 정도로는 저렇게까지 되진 않았겠지만, 로한은 일반인이 아니지 않은가.

‘……마,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때문에 곁에 서 있던 유엘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당연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귀족이라고 유세를 부릴 생각은 없었지만, 저런 욕을 먹기에 그녀와 그녀의 가문은 억울한 부분이 꽤 많았으니까.

하지만 내심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라 침묵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가 봐도, 로한의 체벌은 너무나 잔인하며 폭력적이었다.

물론 페고르가 상관에 대한 예의나 존중 없이 잡소리를 내뱉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선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나서서 말리기도 뭣했다.

더욱이 저 로한은 자신의 입으로 귀족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 때문에 그녀는 눈동자를 굴리며 페고르의 곁에 서 있는 흑발에 적안을 한 남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서 말려요……!’

군홧발에 짓밟힌 손의 상태는 둘째 치더라도, 빨리 저 조교를 말리지 않으면 정말로 총을 쏠 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녀는 저 남자가 빨리 말리고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

그때.

“저.”

때마침 남자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며 천천히 입이 열렸다.

유엘은 물론 페고르, 또한 자리에 남아 있는 몇몇 조교들도 그것이 로한을 말리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 심지어 로한까지도 말이다.

‘대략 2분 만에 말리는 건가? 꽤 빠르네?’

당연히 로한은 페고르를 쏠 생각도, 진심으로 분노하지도 않았다.

아, 그렇다고 짜증이 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뭐랄까, 그래…….

일종의 기강 잡기의 연장선이었다.

겸사겸사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한번 보고 말이다.

‘귀족 아가씨께선 확실히 먹힌 것 같고.’

로한은 실눈 속에서 힐끔 눈동자를 돌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유엘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겉으로 여전히 당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동공이 흔들리고 목덜미엔 식은땀마저 흘렀다.

아마 말리고 싶은데 그러진 못하고 있는 거겠지.

거기까지 생각한 로한은 ‘저.’라는 말로 서두를 연 흑발에 적안을 한 훈련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말을 할까.

그만하시죠?

헌병에게 알리겠습니다?

‘아니지.’

어쩌면 잘 보이겠답시고 동조할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경험상, 그런 선택을 하는 경우도 절대 적지 않았으니까.

그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간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무슨 답을 하든, 대충 마무리하고 평가를 하면 되니까 말이다.

“무슨 일이지?”

그의 물음에 흑발의 남자는 힐끔 시선을 내려 페고르를 흘겨보곤, 이내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말했다.

“단테입니다.”

“응?”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내뱉어진 말은 이 자리의 누구의 예상과도 다른 한마디뿐이었다.

“이름을 말했으니,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습니까?”

당연히 로한은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고 멍한 얼굴로 단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기갑천마

입소 (3)

정적이 흘렀다.

유엘은 물론, 손이 아작 나는 고통 속에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페고르는 우스꽝스러운 걸 넘어서 ‘이 새끼, 대체 뭐지?’라는 표정으로 단테를 올려다보았고, 다른 조교들 역시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크, 크하핫!”

그때 정적을 깬 것은 로한이었다.

그는 언제 욕지거리를 입에 담고 화를 냈냐는 듯 너무나 통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 쿨럭!”

한참을 웃던 그는, 이내 살짝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손으로 쓸어 닦아 내곤 짓이겨진 손을 부여잡고 벌벌 떨고 있는 페고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테의 앞으로 성큼 걸어왔다.

“커흠, 그래, 단테. 붙잡아 둬서 미안하군. 어서 들어가 봐.”

그는 직접 단테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두드려 격려해 주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뒤에 서 있던 다른 조교들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 건방진 병아리는 의무실로 치워. 내일 훈련에 지장 없도록 손은 치료해 두고.”

“예.”

명령이 떨어지자 조교들은 기다렸다는 듯 페고르를 들어서 질질 끌고 의무실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단테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까 짐을 풀었던 내무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너무나 태연한 그 모습에 유엘은 뭐라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술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로한은 잠시 단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흥미로 가득한 눈으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재미있는 놈이야.”

잠깐이지만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낄 수 있었다.

옆에 있는 귀족 아가씨나 다른 조교들과 달리 저 단테라는 훈련병의 눈에 보인 감정은 하나뿐이었다.

그건 바로 귀찮음.

바로 곁에서 손이 작살나고 있는데, 단테는 그저 귀찮아하고 있었다. 아니, 권태라고 표현하는 게 더 옳은 것일까?

어느 쪽이든 범상치 않다.

로한은 머릿속에서 유엘과 페고르의 이름을 깔끔하게 지워 버리고, 그 빈자리에 오직 ‘단테’라는 이름 하나만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아직도 어쩔 줄 몰라 하며 자리에 서 있는 유엘을 힐끔 바라보고는 능글맞은 얼굴로 말했다.

“밤새 서 있을 생각인가?”

“아.”

그런 그의 말에…….

유엘은 그제야 탄식에 가까운 단말마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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