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분명히 그랬을 텐데.
“……이상한 일이군.”
천휘, 아니 이젠 단테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그는 미간을 좁히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본좌는 분명 죽었을 터인데.”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심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중원과는 사뭇 다른 양식의 건축물들과 그 너머로 살짝 보이는 어딘가 비루한 분위기의 도시였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거울에 비친 스스로를 바라보았다.
살짝 곱슬거리는 흑발, 그와 대비되는 적안의 소년이었다.
그리고 잠시 이 낯선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그는 쉬이 인정하긴 어려운 결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으니.
‘……환생이라도 한 것인가.’
아무래도 다시 살아난 듯싶었다.
그것도 중원이 아니라, 다른 세상 다른 사람으로 말이다.
기갑천마
본좌는 본좌다
“으음.”
잠시 이 모든 것이 거귀가 만든 환영이나 환상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디 아무리 강한 환영이나 환상이라고 하더라도 미약한 이질감은 느껴지기 마련이다.
가령 사소한 인식의 뒤틀림이나 기묘한 위화감이라거나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집중하고 주변을 살펴도 그런 건 느껴지지 않았다.
즉, 현실이다.
‘문제는 여기가 중원이 아니라는 것인데.’
굳이 깊게 들어가지 않아도 거울에 비친 얼굴은 누가 봐도 색목인이 아닌가.
아니, 자세히 살피니 약간 중원인 같은 면모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색목인에 훨씬 가까웠다.
본래 그의 얼굴은 더더욱 아니었고 말이다.
“으음…… 큭?”
잠시 혼란스러움에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이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휘청거렸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머리를 누가 통째로 쥔 채 우그러트릴 듯 쥐어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끄으윽…….”
족히 수십 번은 사선을 넘어온 그였지만, 고통은 생각 외로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그렇게 얼마나 고통과 치솟는 짜증을 감내했을까.
그는 곧 사그라드는 고통과 함께 뇌리에 자리 잡는 낯선 기억을 느끼며 무심결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빌어먹을, 이게 대체 무슨……?”
고통은 사라졌으나 그 빈자리에는 본능적인 혐오감과 저릿한 위화감이 차올랐다.
그는 한동안 혼란과 역겨움에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곧 그 기억의 주인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단테?”
천휘는 미간을 좁히며 낯선, 그러나 어째서인지 익숙한 그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뇌리에 가득 찬 낯선 기억의 주인은 바로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단테의 것이었다.
‘진정 뭐에 홀리기라도 한 건가?’
분명히 현실일 터인데…… 어째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는 혹시 흑도, 그러니까 사파라고 불리는 버러지들이 자신에게 기이한 짓거리를 한 것이 아닌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흡성대법이니, 귀혼술이니 하는 것들은 과거 백월신교의 주도하에 모조리 뿌리를 뽑아 놨다.
그 사이한 무공을 익힌 놈들은 노인이든 젖먹이 아기든 모조리 죽였으니까.
“그럼 대체……?”
그는 작게 중얼거리며 자신이 서 있는 방 안을 훑었다.
분명히 처음 보는 허름한 방이다.
하지만 천휘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었다.
‘시설, 이민자 고아들……. 그중에서도 마나 감응력이 있는 아이들을 따로 추려 수용한 시설이다.’
마나?
영문을 모를 단어에 순간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내 그것이 기(氣)를 뜻하는 단어란 걸 깨닫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이런 시설이 존재하는지 이해한 것이다.
다만 의문을 가지자 곧바로 관련된 정보가 떠오르는 느낌은 절대 달갑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변을 살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정확히는 사람이 곳곳에 있지만, 대부분 잠을 자고 있는지 옅은 숨소리를 제외하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혹시 모르니 문의 옆에 있는 서랍장을 끌어 입구를 막고, 창문에 달린 가림막을 끌어 가리고는 바닥에 정갈하게 가부좌를 틀었다.
그러고는 눈을 감고 천천히 호흡을 내뱉으며 생각했다.
‘먼저 이 상황에 대해 파악해야 한다.’
비록 호법을 서 줄 사람은 없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큰 상관은 없었다.
먼저 이 몸의 원래 주인인 단테의 일생을 훑을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 세계에 대해 알 수 있으리라.
이곳이 중원과 단지 거리만 떨어진 곳인지.
그게 아니면 정말 낯선 세계인지 말이다.
가부좌를 틀고 준비를 마친 그는 묵묵히 뇌리에 새겨진 기억의 첫 장을 열었다.
그러자 곧 천마 천휘가 아닌, 고아 단테의 일생이 하나의 소설처럼 스쳐 지나갔다.
기억은 아주 멀리.
이젠 흐릿하게 남아 버린 작은 파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데지안 왕국.’
단테의 고향이었다.
그리고 이젠 멸망한 국가이기도 했다.
나라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부모님을 잃은 단테는 제국군에 의해 구출되어 시설로 보내진 것이다.
‘나이는 열여섯 살.’
나라가 멸망한 것이 열다섯 살쯤이니 단테는 약 1년간 이 시설에서 머물고 있던 것이다.
물론 자유를 보장하긴 했지만 마나 감응력이 좋은 아이들만 추려서 관리하는 이유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군인으로 키우려는 건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멀리 가서 찾지 않아도 신교의 백월단이나 흑월단 역시 비슷하게 단원을 보충하지 않는가.
다만 의문이 들긴 했다.
대체 어째서?
다시 생각해 보면 왕국이 멸망한 원인은 대체 무엇인가.
제국이 그들을 공격한 거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아니, 오히려 제국은 그들을 보호하며 최대한의 난민을 수용하기까지 했다.
그런 점을 보면 제국은 국력이 약한 국가가 아니다.
그걸 달리 말하자면 굳이 제국에 충성심을 가지지도 않은 이들을 인재로 가져다 쓸 이유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장 중원의 황제만 해도, 한족을 제외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을 오랑캐라 싸잡아 꺼리지 않는가.
그런데 굳이 고아인 아이들까지 모아서 이럴 필요가 굳이 있는지가 그가 가진 의문이었다.
기억을 뒤지다 보면 답이 나오리라.
천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묵묵히 단테의 기억을 훑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는 눈을 뜨고 나지막이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으니.
“거귀, 그리고 요괴.”
거귀(巨鬼). 그리고 요괴(妖怪).
이곳의 말로는 대군주와 마수.
이제야 이유를 가늠할 수 있었다.
‘전쟁이었군. 인간과 인간, 종족과 종족, 민족과 민족이 아닌 인간과 마수의 전쟁.’
무려 50년간 이어진 긴 전쟁.
모든 것의 원인은 그것이었다.
단테의 고향이었던 데지안 왕국의 멸망도, 마나 감응력이 있는 난민 아이들을 굳이 제국이 시설에 모아서 관리하는 이유도.
‘인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겠지.’
전쟁만큼 사람을 쉽게 잡아먹는 괴물이 존재할까?
천휘는 문득 조소를 머금으며 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찌 놈들을 잊을까.
혼이 담긴 육신이 변했다 한들.
놈들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놈을 죽이지 못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남궁연희도, 그 자신도 목숨을 버리며 절초를 펼쳤건만 놈에게 상처만을 입혔을 뿐, 죽이지 못한 것이다.
그뿐인 이야기였다.
문득 처음 요괴가 나타난 밤을 떠올렸다.
‘……4년, 아니 5년 전이었나.’
시작은 사소했다.
백월신교의 총본산인 신강 외곽 마을 두 곳이 하루아침에 증발한 것이었다.
처음에는 곤륜이나 소위 협객이라 자처하는 버러지들이 저지른 짓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진상을 파악하려던 그때 서역 방향에서 놈들, 그러니까 요괴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반년.
십만의 무림인과 백만에 달하는 신도를 이끌던 백월신교가 신강을 포기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그마저도 천마인 그가 직접 백월단을 이끌고 두 달을 버텨야 했고 말이다.
그 뒤는 뭐…….
뻔하지 않은가.
무림맹은 물론 흑도맹에도 위기를 알렸다.
그러나 놈들은 당연하다는 듯 무시했고, 되레 총본산을 잃은 신교를 공격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하지만 요괴들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본격적으로 중원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결국 무림은 패배했다.
패배했다고 단언하는 이유 역시 간단했다.
‘본좌와 남궁연희가 이끌던 결사대가 사실상 무림의 마지막 병력이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그는 다시금 무미건조한 얼굴로 돌아와 이내 중얼거렸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씁쓸해할 일이 아니다.
비록 이전의 육신을 잃었다고는 하나, 새로운 육신으로 복수할 기회를 얻었으니 말이다.
문득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었던 남궁연희가 생각나긴 했지만 이내 떨쳐 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죽은 옛 인연이 아니라 거귀와 요괴의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한참 거귀…… 아니, 대군주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니 단테를 비롯한 시설의 아이들을 어디에 쓰려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장기(魔裝機).
나이트 프레임(Knight Frame).
온갖 복잡한 말로 점철된 이 세계의 결전 병기였지만, 쉽게 말하자면 마수를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강철 인형이다.
물론 이 세계의 사람들은 기갑 거신이니, 마도 공학의 정수이니, 말하며 연호하긴 하나 그에게 와닿을 리가 없다.
‘하지만 성능은 확실한 편인가 보군.’
이미 증명되었다고 보는 게 옳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멀쩡하지 않은가.
당장 기억을 되짚어도 대군주와 마수들에 의해 멸망한 나라는 분명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이 대륙이 무너질 위기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대군주와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 선두에 선 병기가 바로 마장기, 즉 마나를 이용하는 무기이고 말이다.
‘마나, 마나라…….’
본디 무림에서도 기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이 세계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그러니 고아들까지 모아 격리·관리 후에 군인으로 키우는 것이겠지.
기억에 따르면 이 시설의 아이들은 모두 열여섯 살 때 훈련소로 보내진다.
그리고 약 6개월의 교육 끝에 ‘부사관’이라는 직책이 되어 전선으로 나간다.
그리고 때마침, 내일이 바로 훈련소로 떠나는 날이었다.
문득 아이들의 대화가 떠올랐다.
-귀족들은 4년이나 사관학교에 다닌대.
누군지 모를 아이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을 곱씹던 그는 이내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도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있는 건가? 어째 인간이란 족속은…….’
중원 역시 마찬가지로 소위 성씨나 가문, 내지는 신분 따위로 벽을 세우지 않았던가.
고작 잘 태어난 것이 스스로 이룬 전부임에도 으스대는 놈들이 바로 그 귀족이라는 놈들이었다.
평민들은 그런 보이지 않는 권위와 실체화된 폭력 속에서 학습된 공포에 눌려 수탈당하기 일쑤였고 말이다.
입맛이 썼다.
그나마 나은 점이라면, 이 세계의 귀족들은 평민들의 눈치를 좀 보는 듯하다는 걸까.
다시 원 주제로 돌아와 천휘의 입장에서 훈련소로 가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사관학교라는 곳으로 가게 되면 4년이란 시간을 버리게 되리라.
그러니 차라리 반년이라는 시간만 투자하고 곧바로 전선으로 나가는 것이 옳았다.
사실 굳이 군에 투신하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굳이 훈련소라는 곳을 가 보려는 이유는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마장기, 그리고 나이트 프레임.
그것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고작 5년 만에 무너진 중원보다 10배는 더 되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는지 말이다.
스윽.
천휘는 가부좌를 틀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후 거울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딘가 오만함과 씁쓸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시선으로 낯선, 그러나 익숙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하는 소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단테.”
익숙하지 않은 이름을 입에 담아 보았다.
“천휘든 단테든, 본좌는 본좌이니라.”
결국, 그는 천마였다.
그는 그것을 되새기며 붉게 번뜩이는 눈으로 번뇌를 끊었다.
“이번엔 패하지 않는다. 네놈이 거귀든 대군주든, 결국 본좌의 손에 죽게 될 터이니.”
과거에는 패배했다.
하지만 이번엔 죽일 것이다.
중원을 침략했던 놈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찢고, 죽이고, 죽이다 보면 언젠가 놈에게 닿을 테니.
‘일단 단전을 만든다.’
남은 시간은 대략 반나절.
조금 빠듯하긴 해도 불가능한 시간은 아니다.
아예 가 보지 못한 길이라면 모를까, 이미 한번 걸어 본 길이니 말이다.
그는 조금 전 가부좌를 틀었던 그 자리에 털썩 앉고는 눈을 감았다.
곧 정적이 방 안을 감쌌고.
우웅.
머잖아 패도적인 내력이 공간을 울렸다.
기갑천마
북부로 가겠다
눈을 감고 내면을 관조하자 곧 이질적인 감각이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기를 심장에 담는다니?’
그것은 바로 단전의 위치였다.
보통은 하단전이라 불리는 아랫배에 기를 쌓는 게 일반적인 데에 반해, 이곳은 중단전이라 부르는 심장을 그릇으로 쓴다는 것이다.
‘허, 이 무슨?’
무림인들이 굳이 하단전을 그릇으로 삼는 이유는 간단하다.
중단전에 비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성취도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튼튼한 그릇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성취가 느리다고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초입의 얘기.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중단전보다 배는 더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다.
반변 중단전은 장점에 비해 단점이 너무나도 명확했다.
그릇을 만드는 것이 쉽고 빠르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정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에 대해 의견은 분분했다.
하지만 천휘는 이유 따위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하단전이 중단전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뿐.
‘……그런가? 그런 거였군.’
하나, 곧 허공에 만연한 기를 느끼자 천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원의 것보다 훨씬 순도가 좋으니, 굳이 어려운 길을 갈 필요가 없던 것인가?’
이곳의 기, 그러니까 마나는 중원의 그것과 비교해 봐도 훨씬 농도가 짙고 순도가 좋았다.
그러니 중단전을 사용하더라도 잠시 번뇌할지언정 정체되지는 않는 것이다.
즉, 효율성의 차이였다.
이대로 이 세계의 방식대로 마나를 쌓아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럴 이유는 없지.’
더 좋은 길을 알고 있는데, 걷지 않는 것만큼 우둔한 짓이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단테의 몸에는 마나를 담은 흔적이 없었다.
‘귀찮은 일을 할 뻔했군.’
심장에 이미 단전이 만들어져 있었다면, 고작 반나절이 아니라 며칠 동안 다시 그릇을 다듬는 데에 시간을 쏟아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이미 자리를 잡은 단전을 옮기는 것은 꽤나 심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으니.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눈을 감고 사방에 흩어져 원시적으로 떠다니는 기를 느꼈다.
보통은 기를 느끼는 것에 짧게는 몇 달, 길게는 몇 년까지도 간다고 하지만 그에겐 의미가 없는 말이다.
‘이리 오거라.’
허공에 떠다니는 기를 천천히 느낌과 동시에 내면에 심상心象을 떠올렸다.
그 자신이 하나의 그릇이 되는 일이니 천천히, 그리고 견고하게 쌓아 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짙은 어둠이 자리한 새벽의 어스름이 서서히 물러나고, 주황빛 물결이 지평선을 따라 서서히 푸른빛에 자리를 내주는 때가 되자 마침내 그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하아…….”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다시금 생겨난 단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비록 아직 콩알 크기의, 삼류라고 부르기도 아까운 수준의 내력이었으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쌓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뚜둑-.
가부좌를 풀고 굳어버린 몸을 이리저리 비틀자 조금의 고통과 함께 시원함이 몰려왔다.
“흐음.”
그런 후,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아직 완전히 날이 밝지는 않은 듯 하늘은 옅은 남색을 띠고 있었다.
천휘는 잠시 날이 다 밝지 않은 밖을 응시하다가 생각했다.
‘둘러볼 시간은 있겠어.’
안 그래도 이 세계가 궁금했던 참이다.
비록 단테의 기억 때문에 상식적으로 부족한 것은 없다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 기억으로만 아는 것은 큰 차이가 있으니까.
그는 단전을 만드느라 땀에 전 옷가지를 벗고 옷장에 있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후,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끼이익.
그러자 문은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열렸고, 천휘는 내심 의외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관리하지 않는 것인가?’
백월단이나 흑월단에서는 아이들을 관리할 때 혹여 도망이라도 갈까 합숙시키는 것도 모자라, 도망자가 발생했을 시 그 방의 아이들 전원을 처벌하는 것이 원칙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당연히 방문이 잠겨 있으리라 생각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만 달리 생각을 해 보니, 이것이 곧 자신감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어차피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인가.’
그것이 권위에 의한 복종이든.
혹은 강압에 의한 강제이든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복도로 나가자, 과연 1층에 다수 군인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하나 그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흥미로운 눈빛으로 건물 내부를 살폈다.
‘확실히 중원과는 다르군.’
뭐랄까, 서역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느낌을 풍겼다.
그보다 무겁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투박하다고 해야 할까?
잠시 주변을 살피던 그는 곧 밖으로 나갈 생각에 1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막으면 귀찮아지겠지.’
혹 막지 않더라도, 괜히 동선이 보고되어 귀찮은 일에 엮이는 것은 피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명쾌한 해답을 찾았다.
‘창문.’
어차피 열리고 닫히는 건 똑같다.
그는 곧바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향의 창문을 열어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그의 방은 2층이었으나 굳이 내력을 쓸 필요도 없이 손쉽게 뒤편의 화단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꽤 단련된 몸이다.’
숙련된 방식으로 단련한 몸이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단련된 잔근육이 곳곳에 자리 잡아 적당히 쓸 만한 몸이었다.
천휘는 그에 만족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래, 그러려 했다.
“왜 그러십니까, 병장님?”
근처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는 인기척이 느껴지자 곧바로 몸을 숨겼고, 군인으로 보이는 두 명의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했다.
“조금 전 여기서 무슨 소리 안 들렸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길고양이 아니겠습니까? 저번에도 식당 뒤편에서 쓰레기를 뒤지던 고양이가 있었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긴, 애들 모아놓은 곳에 누가 들어오겠어.”
“보통 애들은 아니지만 말임다.”
다행히 그들은 천휘를 찾지 못한 채 근처를 서성이다 원래 서 있던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몸을 숨기고 있다가 이내 수풀에서 나와 가볍게 몸을 털었다.
‘귀찮아질 뻔했어.’
기억에 따르면 군인들은 아이들에게 딱히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확신할 순 없었다.
특히 그의 행동은 보는 관점에 따라 도망치려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으니 더더욱.
그렇게 작은 변수를 넘긴 그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훑었다.
아직 날이 다 밝지 않아서인지, 시설 내부는 꽤 한산해서 움직임에 큰 제약은 없었다.
다만 그를 불쾌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으니…… 그건 바로 모르는 물건을 보았을 때 자동적으로 머리에 떠오르는 타인의 지식이었다.
“쯧.”
무심결에 혀를 찰 정도로, 그 감각은 기묘함과 동시에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비록 역대 천마 중 성취가 낮은 편에 속하는 그였으나 일단은 천마다.
그러니 자연히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은 당연했다.
하나 곧 그는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나중에 생각해도 될 문제다.’
지금 고민한다고 갑자기 사라질 문제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러니 괜히 기분을 잡칠 바에는 그저 조금이라도 이 세계에 익숙해지는 것이 앞으로도 편한 길이었다.
그렇게 천휘는 다시 시설 안의 각종 기물(奇物)을 살피다가 곧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기관, 그러니까 기계와 마도라는 학문으로 만든 물건들이로군.’
흔히 ‘마도 공학’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잘 모르는 그가 보아도 이곳의 문명은 중원보다 훨씬 진보해 있었고, 동시에 새로운 것 천지였다.
‘이러니 거귀, 그러니까 대군주와 비등하게 맞설 수 있던 것인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시설 곳곳에 설치된 저 통신 박스만 해도 중원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 아니던가.
‘과장은 심하지만 말이야.’
고작 마석이라는 걸 주기적으로 바꾸면 산맥, 나아가서 족히 수백 리는 될 거리와 통화를 할 수 있다니, 아무래도 시설의 어린아이들에게 했던 과장 섞인 말을 듣고 착각하는 것이리라.
그래도 아예 없는 기술은 아닐 테니 일단 가능은 할 것이다.
문득 호승심이 일었다.
그 나이트 프레임이라는 것과 단신으로 맞붙는다면, 과연 이길 수 있을까?
‘점점 기대되는군.’
과연 그 기물이 본좌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인가.
천휘는 점점 더 기대를 높여 가며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때였다.
“……요새 북부가 그렇게 지옥이라며?”
귓가로 들려오는, 꽤 흥미를 끄는 목소리에 그는 소리가 들려온 건물 외곽 쪽으로 다가가 내력을 일으켜 청력을 강화했다.
그러자 곧 건물 안에서 두 군인의 잡담이 여과 없이 들려왔다.
“말도 마라. 듣기로는 형벌 부대는 물론이고 조금 여유만 생기면 모조리 거기로 밀어 넣고 있다더라.”
“대체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나도 전 근무지에서 친해진 하사한테 들은 거야.”
“에휴, 이놈의 전쟁은 대체 언제쯤 끝이 나려는 건지.”
“……어라? 무슨 소리 안 들렸어?”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끼이익, 하는 소리와 대화를 나누던 두 군인이 허겁지겁 뭐라고 외치는 것까지 들은 천휘는 곧바로 자리를 벗어나 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런 그의 적색 눈 안에는 묘한 열기가 가득 차 있었으니.
‘북부.’
그 단어를 떠올리자 북부에 대한 단테의 기억이 떠올랐다.
북부는 좌천지에 가깝다거나 하는 정보들이었다.
그는 조금 전 착지했던 화단으로 돌아와 곁에 있는 나무를 이용해 가볍게 열려 있는 창문 안에 가볍게 안착하더니, 곧 돌아다니며 묻은 먼지 등을 가볍게 털고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좌천지, 그리고 치열한 전선.’
그 말을 요약하자면…….
다른 곳보다 더 많은 요괴를 찢어 죽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갈무리된 내력을 느끼곤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래도…….
‘북부로 간다, 반드시.’
가야 할 목적지가 정해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