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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천마-1화 (1/197)

기갑천마

중원이 패한 날

짙은 어둠이 세상을 뒤덮었다.

백성은 한낱 들풀이 되어 꺾였으며, 무인들은 부러진 검이 되어 바닥을 구른다.

핏물은 강이 되어 흐르고 시체들을 파먹는 까마귀조차 대지로 추락해 짓밟히니 실로 인세의 지옥이리라.

솨아아…….

하늘도 비통한 것일까.

의협으로 쌓은 정의(正義)도 힘으로 쌓은 패도(覇道)도 부질없어진 대지 위로 서늘한 빗물이 투둑-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고요한 정적이 주변을 덮었다.

천휘, 이젠 천마라 불리는 사내는 흐릿한 잿빛 눈에 한때 거대한 성도였던, 그러나 이제는 폐허가 되어 버린 전장을 담았다.

쏟아지는 빗물 사이로 한때는 사람이었던, 그러나 핏물이 빠지고 생명을 잃어 한낱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이들을 보았다.

정도를 부르짖던 무림맹.

흑도를 추구하던 흑도맹.

패도를 뒤따르던 백월신교.

무림의 전부라 말해도 손색이 없을 이들이 하릴없는 쓰레기처럼 추욱- 늘어져 있었다.

반쯤 갈라진 요괴의 위에서 아직 소화되지 못한 무림맹 무사의 팔이 굴러다녔다.

한때 거대한 기루였을 건물 아래 깔린 흑도맹의 무인의 짓눌린 얼굴이 눈에 밟혔고.

백월신교의 신도들이 선홍빛 장기를 힘겹게 주워 담으며 다가올 죽음에 신음하니.

그는 짙은 어둠이 잠식한 하늘 사이로 흐릿하게 어른거리는 달빛을 묵묵히 응시하며 공허한 잿빛 눈을 감았다.

그때 그런 그의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정말 끝이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자조적임과 동시에,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천휘는 그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아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본좌는 끝나지 않는다.”

“훗, 끝까지……. 하긴, 천마라는 족속들은 늘 이랬죠.”

“너야말로 맹주라는 년이 패배감에 절어 버린 것이냐.”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백옥과 같은 피부에 남색 빛이 도는 검은 장발을 한 그녀의 모습은 가히 절색이었다.

한편 그녀는 천휘의 말에 씁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맹주라……. 이젠 의미가 없는 말이죠.”

맹주라 불린 여인, 남궁연희는 진정으로 그리 생각했다.

애초에 전대 맹주들이 죽고, 책임을 질 위치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떠맡은 자리다.

어떤 긍지가 있고 명예가 있을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성큼 천휘의 곁에 섰다.

무림맹주와 천마.

이질적인 걸 넘어 서로를 적대하던 두 세력의 수장들이 같은 곳을 바라보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만약 세상이 멀쩡했다면, 이것은 실로 무림의 평화라고 부를 만할 일이었다.

……그래, 세상이 멀쩡했다면 말이다.

쿠구구구구-.

정적과 빗소리만이 가득하던 성도에 귀에 익은, 그러나 절대로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듣자, 둘과 함께 소수나마 살아남아 있던 이들은 마지막 숨을 고르듯 초연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온다.”

누군가 내뱉었는지 모를 중얼거림에 모두가 무너진 성벽 너머 지평선을 응시했다.

그 말이 시작이었을까.

곧 대지가 서서히 진동하며 일련의 요괴가 저 멀리서 몰려오는 게 보였다.

“저건……?”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늘 엄청난 수로 몰려오던 요괴들이었지만, 그들의 머리 위로 하늘을 가득 메울 듯 거대한 무언가가 함께 날아오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 존재를 육안으로 살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남궁연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게 거귀……?”

거귀(巨鬼).

백월신교를 무너트리고 무림을, 중원을 초토화한 요괴의 왕.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천휘를 제외한 모두가 멍하니 거귀라 이름 붙여진 재앙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능히 하늘을 뒤덮을 듯 거대하고, 거대한 검은 장막이 움직이는 듯한 저 모습을 고작 거대한 귀신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죽을 거야.’

애초에 불가능한 싸움이었다.

차라리 남들처럼, 무림맹의 수뇌부나 녹림채의 산적들처럼 도망이라도 쳤다면 조금이나마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남궁연희뿐만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무인들은 물론, 하다못해 신교의 무인들조차 저 거대한 재앙의 앞에선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쿠웅-.

짧고 굵은 일보(一步)가 그들의 척추를 따라 공간을 진동시켰다.

“간단하게 생각해라.”

그리고 모두의 시선이 천마, 천휘에게 향하자 그는 여전히 오만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모두에게 말했다.

“놈들을 죽인다. 그리고 여기서 죽어라.”

잿빛 머리가 피 냄새가 섞인 바람에 부질없이 흔들린다.

그는 동요하는 이들에게,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할 뿐이다.

“나 또한 여기서 죽을 것이니.”

동시에 천마 특유의 패도적이고 오만한 내력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그런 그의 모습에 남궁연희는 무심결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죠. 저도 여기서 죽어야겠네요.”

천마가 목숨을 걸었는데, 무림맹주도 함께 죽어야 균형이 맞는다. 그녀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내세우며 남은 내력을 모조리 끌어모으며 검을 뽑았다.

‘천마…… 아니, 천휘.’

한때는 적이었다.

반드시 타도해야 할 적이었으며, 악이라 생각했던 사내다.

그러나 아군이 된 이후로 등을 가장 많이 맡긴 것 역시 그였다.

모순적이게도 중원을 가장 오래도록 수호한 것 역시 마교라 불리던 백월신교였다.

무림맹은 두 명의 맹주가 죽자 곧바로 와해하여 도망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반면 백월신교는, 그들의 수장인 천마는 어떤가.

악이라는 오명에도 그들은 묵묵히 싸웠다.

광신도라 욕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요괴를 베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늘 천휘가 서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여전히 천마였다.

그래, 천마인 것이다.

터벅…….

천휘는 앞으로 걸었다.

그의 뒤로 채 한 줌도 남지 않은 무인들이 뒤따랐다.

걸음은 어느새 경보가 된다.

경보는 어느새 뜀박질이 되고.

뜀박질은 어느새 보법이 되어 성도를 미끄러져 내달렸다.

부서진 성벽을 짓밟고 뛰었다.

무너진 기와를 발판 삼아 내달렸고.

갈라진 담벼락을 부수며 쇄도했다.

-캬아아아!

이윽고 거대한 요괴가 괴이한 각도로 입을 찢으며 천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천휘는 가볍게 내력을 갈무리하며 무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꺼져라.”

손을 뻗어 가볍게 돌린 후, 내력을 담아 터트렸다.

이름 따윈 없는 본능에 가까운 그 초식에 요괴는 가소롭다는 듯 단번에 입을 다물어 팔을 자르려 했지만…….

콰과과광!

일순간 한 점에 모였다 터진 패도적인 내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잿빛 광풍이 되어 요괴의 머리를 갈가리 찢어발겼다.

“흐읍!”

곁에서 함께 내달리던 남궁연희는 남궁 특유의 검법을 유려하게 펼치며 천휘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그건 이름 모를 수많은 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름조차 가늠이 안 되는 요괴를 베고, 찢고, 죽였다.

-쿠에에엑!

일격에 배를 터트렸다.

나무보다 두꺼운 놈의 목을 잡아 비틀어 뽑았으며.

웬만한 연못보다 거대한 눈을 그어 핏물이 그득한 그 속을 칼로 헤집었다.

“끄아아악!”

“사, 살려……!”

그사이 수십의 무인이 죽었다.

때때로 거대한 요괴에게 짓밟혔고, 몸보다 거대한 이빨 속으로 빨려들어 갈가리 찢어 발겨졌다.

이미 무덤이 된 대지 위로 또 다른 피가 뿌려졌다.

붉은 핏물을 혀로 핥아 갈증을 축였다.

갈색 빛이 도는 요괴의 육편을 씹어 허기를 달랬다.

척추를 돌려 뽑았다.

심장을 들어 반으로 찢었다.

반쯤은 이성을 잃은 채로, 그들은 묵묵히 요괴를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을까.

하루.

이틀.

어쩌면 사흘.

지평선을 가득 메우던 요괴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천휘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잿빛 머리를 가볍게 털며 주변을 살폈다.

“……다 죽였나.”

요괴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 있는 요괴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살아 있는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까드득, 까드드득…….

하나 바로 머리 위에서 들리는 입질 소리에 그는 고개를 들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 네놈이 남아 있었지.”

그러자 눈에 담긴 것은 거귀였다.

웬만한 성벽보다 거대한 검은 육신을 가진 요괴들의 왕.

놈은 천휘의 바로 위에서 무에 그리 즐거운지 입질을 하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때 뒤에서 옅은 숨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살피자 예상한 얼굴이 눈에 밟혔다.

“용케도 살아 있구나. 남궁연희.”

“……쿨럭, 이젠 아예 이름으로 부르네요?”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한편 잠시 그녀의 상태를 살핀 천휘는 곧 다시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빠져라. 방해다.”

“……네?”

전혀 예상치 못한 천휘의 말에 남궁연희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림맹주를 걱정하는 천마라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가.

그녀는 대답 대신 검을 꽉 쥔 채로 그의 곁으로 다가와 섰다. 그러자 천휘는 혀를 차더니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쯧, 미련한 년.”

“늘 생각하지만, 당신은 입이 험해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가 없었다.

선천지기(先天眞氣)마저 끌어모아 저 괴물에게 죽음을 내리는 것.

그것이 무림맹주와 천마가 할 마지막 일인 것이다.

쿠웅!

둘은 동시에 대지를 박차며 거귀를 향해 날았다.

그리고 곧 천지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은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한 섬광이 거귀와 둘을 감쌌고.

-까, 드득, 까드득!

곧 두 구의 시체가 대지로 추락했고.

허공엔, 반쯤 얼굴이 일그러진 거귀만이 고통에 신음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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