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2장 황제로 가는 길 - 5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대한정의당 대통령 후보 최강철입니다. 저희 부친께서 갑자기 별세하시는 바람에 한동안 국민 여러분께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현재 남북경협과 관련해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북한이 핵 개발을 했고 남북경협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군사력을 증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이 거짓말이란 걸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수십 번이 넘도록 북한에 들어갔고, 갈 때마다 남북경협에서 발생한 이익금의 사용내역을 직접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작년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에서 평화통일방안을 언급한 적이 있을 정도로 북한 주민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한은 그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물론 통일로 가는 길이 어찌 쉽기만 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합니다. 우리는 같은 핏줄을 가진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각에서 저의 재산형성과정에 대해 비난 여론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제가 오늘 기자회견을 자청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저는 어렸을 적 복싱으로 번 돈을 기업에 투자했고 계속되는 성공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언론이 보도했던 내용 중 일부는 맞는 내용입니다. 그동안 투자를 하면서 본의 아니게 서민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저는 그동안 마이다스 CKC의 최대주주에 있으면서 회사의 일에 관여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돈에 대한 욕심도 없습니다.
제가 고아원을 비롯해서 불우한 사람들을 도운 것 또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많은 분이 제가 천문학적인 돈을 가진 것 때문에 의심하고 분노하십니다.
대통령에 나서는 사람이 기업을 운영하면 공정성을 잃을 것이란 우려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제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누군가는 제 재산이 1,000조에 달할 거란 말을 하더군요.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제 재산은 많으니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제가 국가와 사회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왔습니다.
우리나라 사회는 그동안 재벌들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 수많은 불법을 저질러 온 전력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많이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줘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번 재산은 오롯이 그들의 것이 아닙니다. 사회 구성원들로 인해 비롯된 것임에도, 그들은 아직도 자식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해야만 하는 고귀한 정신이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입니다. 저는 그 정신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저는 제가 죽은 후 모든 재산을 국가에 환원할 것입니다. 제 이름으로 된 모든 재산은 아들에게 한 푼도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 최강철.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강철의 말이 끝나는 순간 기자회견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 있고 그 모든 것의 배경에는 돈이란 괴물이 있다.
그만큼 돈이란 것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정도로 무서운 괴물이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더없이 태연한 태도로 자신의 모든 재산을 대한민국에 환원하겠다는 발표를 해 버렸다.
어떤 편법도 없다.
누구처럼 장학재단을 만들겠다던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에 쓰겠다는 게 아니라, 자식에게 한 푼도 물려주지 않고 자신의 재산을 송두리째 환원하겠다는 발표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질문을 할 수 있단 말인가?
* * *
최강철의 폭탄선언이 터진 후 대한민국 국민들은 충격에 사로잡혀 한동안 반응조차 보이지 못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누군가의 용기, 그것도 자신들이 영웅이라 생각하고 있던 최강철의 무모한 용기를 다시 접한 국민들은 아예 침묵 속에서 선거일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어이없군.”
“휴우… 다 틀린 것 같습니다.”
초췌한 표정으로 이정동이 말하자 그의 선거대책본부장인 류철호가 긴 신음을 흘렸다.
국민들의 침묵을 보면서 그들은 모든 것이 틀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최강철의 발표에 대한 진실 여부의 공방이라도 벌어졌다면 어느 정도 희망을 걸었겠지만, 국민들은 아예 최강철의 발표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인터넷이 조용했고 언론은 아예 약속한 것처럼 최강철의 발표만 보도한 후 침묵 속에 잠겼다.
대신 해외언론들이 난리가 났다.
미국을 비롯해서 중국, 일본, 유럽의 유수한 언론들은 세계 최고의 부호인 최강철이 모든 재산을 국가에 환원한다는 발표를 보도하면서 그의 위대한 정신을 입술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있었다.
해외언론은 하나같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진정한 실행표본으로 최강철을 꼽으며 대한민국의 변화를 주목했다.
처음부터 힘든 싸움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진 것은 미국을 비롯해서 일본과 중국이 자신을 지원했고, 극우단체를 비롯한 반공세력들이 일제히 캠프에 합류했기 때문이었다.
열강들의 힘은 상상외로 강했다.
최강철에 관한 자료들이 속속 들어오면서 선거에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우게 만들었다.
그중 가장 큰 건 미국이 주도해 준 북한의 핵 개발 소식과 최강철의 재산에 관한 부분이었다.
이 두 가지만 있다면 국민들을 설득시켜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상황은 호전되었고 금방이라도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것만 같았다.
민주연합의 선거캠프는 불과 이틀 전만 해도 승리를 확신하며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오늘. 선거캠프에 남아 있는 인원은 절반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만큼 상황이 나빠졌다는 걸 의미한다.
권력을 좇는 자들은 누구보다 시류에 민감하기 때문에 상당수가 이미 캠프에서 빠져나간 것이다.
“으… 미친놈입니다.”
“미친놈이 아닐세. 그가 해온 일들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던 일이야. 그럼에도 설마 그렇게까지 하리라 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뿐일세.”
“그래도…….”
“그는 우리 같은 범인이 아닐세. 그런 사람과 싸울 생각을 했던 내가 어리석었던 게지.”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후보님.”
“아닐세, 사람은 이기는 것보다 질 때 깨끗하게 져야 한다네. 그래야 국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어. 마음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사퇴를 하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대통령 선거는 국민들의 축제니까 나는 마지막까지 완주하겠네."
“후보님…….”
“대신, 나도 입장발표를 해야겠어. 멋있게 이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그러는 게 최선인 것 같아.”
* * *
민주연합의 이정동 후보가 기자회견을 연 것은 선거를 하루 앞두었을 때였다.
조용했던 언론이 다시 들썩인 것은 그가 내민 카드가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면 이번 대선은 영화보다 더 극적일 것이다.
그랬기에 민주연합의 프레스 센터에는 수많은 기자가 몰려들었다.
“정 기자, 자네가 봤을 때 이정동 후보가 내밀 카드는 무엇일 것 같아?”
“왜 그걸 나한테 물어. 내가 귀신이냐?”
“답답해서 그러지. 이미 판은 끝났는데 선거 하루 전에 기자회견을 하겠다니까 걱정돼서 그래.”
“뭐가 걱정되는데?”
“대한민국을 위해서는 이렇게 조용히 끝나는 게 좋아. 이정동 후보가 또 뭔가를 들고나와서 판을 깨버리면 우리나라는 진짜 진창에 빠질 수 있어.”
“휴우… 그건 그렇지.”
이정동을 기다리는 기자들이 주로 나눈 대화는 이런 것이었다.
언론들도 더 이상 어떤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수라장이었던 이 선거가 최강철의 위대한 선택으로 아름답게 끝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들은 이정동의 기자회견을 맞이해서 안색이 어두웠다.
또 다른 변수가 발생해서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지는 걸 기자들은 원하지 않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이정동과 캠프의 주요당직자들이 나타나자 기자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렸다.
이상한 건 이정동의 표정이 너무나 밝았다는 것이었다.
단상으로 올라온 이정동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들었기 때문에 기자들은 긴장된 시선으로 그의 행동을 주목했다.
이윽고 이정동의 입이 열렸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민주연합의 대통령 후보 이정동입니다. 그동안 20여 일의 공식선거 기간 동안 전국을 돌며 유세했던 저를 응원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했기에 저는 아무런 후회도 남지 않습니다.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것은 이틀 전 최강철 후보가 했던 발표에 대해서 저의 입장을 표명하기 위함입니다.
저희 당 일각에서는 최강철 후보의 진심에 대해서 의심하는 분들도 있었으나 저는 그분의 진심을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결단을 내려주신 최강철 후보께 저는 존경을 담아 지지를 표하는 바입니다.
제가 지켜본 최강철 후보는 장관으로 취임한 후 온 힘을 다해 대한민국을 이끌어 왔습니다. 남북관계를 진전시켜 평화통일에 한 걸음 다가가게 만들었으며,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아낌없는 희생을 보여주셨습니다.
저는 이런 분과 경쟁하게 되어 더 없이 영광이었습니다. 국민 여러분, 이제 선거가 내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제가 지닌 능력과 식견이 최강철 후보에 비해 현저히 부족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후보를 사퇴하지 않겠습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선거가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
기자들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연신 계속되는 충격.
일종의 항복 선언이다. 그럼에도 이정동의 행동이 더없이 멋있게 보여, 기자들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말 멋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멋있게 변했단 말인가.
과거의 구태의연하고 치졸했던 모습과 너무 크게 대비되어 기자들의 얼굴에는 감격에 겨운 환한 웃음이 저절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최강철은 서지영과 손을 잡고 투표장에 들어가 선거를 한 후 시간에 맞춰 대한정의당의 선거캠프로 향했다.
그의 옆에는 신규성과 김도환, 이창래가 따르고 있었는데 정철호는 제우스의 경호팀을 동원해서 철저하게 경호를 하는 중이었다.
그가 선거캠프로 들어서자 이미 들어와 있던 150명의 국회의원이 일제히 일서서서 그를 맞이했다.
특히 맨 앞에 앉아 있던 대한정의당 지도부는 최강철이 들어서자 허리를 깊게 숙여 맞아들였는데, 벌써 대통령을 대하는 자세였다.
“그동안 고생하셨습니다.”
“별말씀을요. 대표님께서 애를 많이 써 주셨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면 출구발표가 나온다고 하니까 앉아서 차나 한잔 하시지요.”
“감사합니다.”
그가 당사에 들어선 것은 5시 반이었으니 이제 출구조사 발표까지는 30분이 남았다.
분위기는 더없이 좋았다.
이미 언론은 물론이고 인터넷상에는 최강철의 승리를 확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컸다.
중간중간 보도된 선거참여율도 역대 최고였다.
5시, 현재 무려 85%의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투표가 종료되는 6시엔 88%까지 오를 것으로 예측되었다.
지도부와 차를 마시며 선거기간 동안 벌어졌던 일들에 대해 한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이윽고 시간이 되자 선거캠프가 팽팽한 긴장 속에 빠져들었다.
이길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막상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이 되자 모여든 대한정의당 관계자들은 입술에 침을 바를 정도로 긴장했다.
이미 켜 놓았던 텔레비전에서 카운터다운이 나타났다.
6시에 맞춰 출구조사를 발표하기 위한 사전행동이었다.
“국민 여러분, 투표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공영 3사가 공동으로 조사한 출구조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최강철 후보 73%, 이정동 후보 26%입니다. 출구조사 결과 최강철 후보가 압도적으로 앞서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지역별로…….”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대한정의당 당사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방송국의 카메라들이 그 모습을 찍느라 분주하게 움직였고, 지도부는 최강철과 악수를 나누며 축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앞설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너무 커다란 격차였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침묵은 이런 선거결과를 예상케 만드는 전주곡이었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 * *
2011년 2월 25일.
최강철은 서지영과 함께 국회로 향했다.
대통령 전용 차량에 탄 그의 모습은 말끔한 정장 차림이었는데 옆의 서지영은 미색 투피스를 곱게 차려입었다.
그들의 차는 경호 차량에 둘러싸여 천천히 여의도로 들어섰다.
“여보, 넥타이 삐뚤어졌어요.”
“응?”
“이리 와 봐요.”
서지영이 몸을 돌려 최강철의 넥타이를 바르게 매주며 포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선거기간 동안 최강철과 함께 유세 활동을 벌였는데 출중한 미모 때문에 많은 화재를 양산해 냈었다.
“당신, 이제 대통령이네요.”
“응.”
“잘 할 수 있죠?”
“잘해야지. 당신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요.”
“그럴게요.”
“벌써 도착한 모양이네.”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최강철이 국회 앞에 모인 수많은 사람을 확인하고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가슴이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이제 곧 자신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차에서 내리자 기자들이 터트린 카메라 플래시가 별빛처럼 터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최강철의 모습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미친 듯이 셔터를 눌렀는데, 그 사이로 최강철의 이름을 연호하는 지지자들의 모습도 보였다.
천천히 차에서 내려 경호원들의 보호 속에서 국회 본관 앞으로 나갔다.
국회의장을 비롯해서 접견을 나온 인사들과 차례대로 악수한 후 최강철은 연단에 섰다.
약식 취임사다.
누군가는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서 갖가지 식전행사와 이벤트로 자신의 취임을 축복했으나, 최강철은 측근들에게 행사를 최소화하도록 지시했다.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을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국민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란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연단에 나선 최강철은 단상 위에 올려진 선서를 잠시 지켜보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선서,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며 대통령으로서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2011년 2월 25일 대통령 최강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