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41장 전설, 그의 아름다운 향기 - 4 >
“고국에 계신 국민여러분, 지금 이 환호소리가 들리십니까. 전 세계의 복싱 팬들이 최강철 선수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하는 함성입니다. 최강철 선수는 현역시절 41전 전승 KO승이라는 신화를 남기며 은퇴한 후, 7년이나 지난 지금 다시 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저희는, 그리고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은 최강철 선수의 복귀를 간절히 만류했으나. 그는 남자로서, 그리고 위대했던 복서로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링에 오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끝내 그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최강철 선수가 메이웨더의 도발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을 당했다며 기자들에게 고백했을 때, 눈물이 핑 도는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 정도였다면 싸워야죠! 지든 이기든, 저는 최강철 선수의 결정을 그때부터 응원했습니다. 최강철 선수는 불굴의 투지를 가진 전사입니다.
그런 전사가 패배의 두려움 때문에 상처받는 걸 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최강철 선수, 링에 올라와 관중들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듭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모습입니다. 저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 지난날의 행복들이 떠오르는군요. 오래전 우리는 무풍지대처럼 링을 달리며 상대를 쓰러뜨리던 최강철 선수의 투혼을 지켜보는 행복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것이 최강철 선수가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주었는지를. 하지만 지금은 알 것 같습니다.
최강철 선수가 링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흥분 속에 사로잡혀 있으니 말입니다.”
“그건 전 세계의 복싱 팬들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보시다시피 관중들은 최강철 선수가 보내는 감사 인사에 기립박수로 답례하고 있잖습니까? 오래전 은퇴한 최강철 선수가 무려 1억 2천만 달러라는 엄청난 대전료를 받은 건 복싱 팬들이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알려주는 것입니다.”
“최강철 선수는 이번에 받은 대전료를 전부 사회에 환원한다는 인터뷰를 했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무려 1,700억에 달하는 거액인데 말이죠.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사실 그동안 최강철 선수는 파이트머니의 대부분을 고아원이나 불우한 청년들에게 장학금으로 내놓았습니다. 작년에 엔젤재단에서 그동안 최강철 선수가 기부한 금액을 합산해서 발표했는데, 무려 5,200억에 달했습니다. 진정한 영웅입니다. 영웅은 황금을 돌처럼 본다던데 최강철 선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누구보다 최강철을 잘 아는 이종엽과 윤근모가 번갈아 가며 소리를 질러댔다.
두 사람은 최강철이 은퇴한 후 2년이 지났을 때 동시에 방송을 접었었는데, 이번 시합 때문에 MBC측에서 특별히 초청을 받고 미국으로 날아왔다.
와아, 와아.
최강철의 출전으로 인해 뜨거워졌던 특설링의 한구석부터 시작된 함성이 점점 파도처럼 커지며 중앙으로 몰려왔다.
“말씀드리는 순간 챔피언 메이웨더 선수가 출전하고 있습니다. 무적의 챔피언, 화려한 테크닉과 방어력으로 상대를 압살해 온 메이웨더 선수는 41전 전승을 기록하고 있으며 무려 5체급의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전적이고 기록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최강철 선수와 메이웨더 선수는 전적 수가 똑같군요. 하지만 KO율에서는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는 전승 KO승을 거두었기 때문에 펀치력에서는 훨씬 앞선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전적이지만 최강철 선수가 싸워 온 면면은 메이웨더와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복싱의 황금기 때, 전 세계 복싱 팬들을 잠 못 들게 만들었던 무적의 선수들이 전부 최강철 선수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물론 메이웨더 선수도 대단한 선수들을 꺾어왔지만, 지명도 면에서 봤을 때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프레드 아두, 토머스 헌즈, 슈가레이 레너드, 듀란, 휘태커, 챠베스 등 전부 전설로 치부되었던 선수들이었습니다.
”
“그래서 최강철 선수를 역대 최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최강철 선수가 현역시절에 메이웨더와 만났다면 저 선수가 저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윤근모가 링에서 껑충껑충 뛰면서 코칭 스탭과 장난치고 있는 메이웨더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시합 전에도 완벽하게 최강철을 무시하던 그는 링에 올라온 이 순간에도 아예 최강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자신의 코너에서 마음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 * *
“하아, 저 새끼 정말 밉상이군.”
“원래, 그런 새끼다. 신경 쓰지 마.”
최강철이 반대쪽에서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는 메이웨더를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이성일이 침을 튀기며 그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자신이 봐도 열이 올라와 견딜 수 없을 정도였으니, 놈의 얄미운 상판을 계속 최강철이 보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 면에서 메이웨더는 심리전에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능력을 지닌 게 분명하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울화통이 터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니 말이다.
“얼굴이 검어서 그런가 번들거리네. 저 새끼 바셀린을 아주 떡칠한 거 아냐?”
“피부가 좋아서 잘 먹은 거다.”
“그럼 내 피부는 나쁘다는 겁니까? 관장님, 설마 바셀린 싼 거 쓰는 건 아니죠?”
“이놈아, 세계에서 제일 비싼 거다. 괜한 거로 시비 걸지 마라.”
“그런데 왜 난 저놈처럼 반짝반짝 윤이 안 나요?”
“나이 먹어서 그래. 저놈은 이제 서른 살이다. 피부 탄력이 너보다 훨씬 좋다고.”
“흐으… 말을 해도 꼭…….”
코너에 서서 팔, 다리를 풀며 대화하던 최강철이 윤성호를 노려봤다.
그러고 보니 오랜 세월이 지나긴 했다.
윤성호의 얼굴은 주름살이 가득했고 어느새 허연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보이고 있었다.
“강철아, 고맙다.”
“뭐가요?”
“난 지금 너무 행복해.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해서 미칠 것 같다.”
“링에 올라온 게 그렇게 좋습니까?”
“응. 마치 고향에 돌아온 기분이야.”
“하하… 사실 나도 그래요. 링에 올라오니까 힘이 불끈불끈 올라옵니다.”
“그래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알지?”
“압니다. 그리도 더 이상 싸울 놈도 없어요. 저놈의 모가지만 치면 다시는 링에 올라올 일이 없을 겁니다.”
“잘해, 져도 멋지게 져야 팬들한테 쪽팔리지 않는다. 돌아갔을 때 고개 반짝 들고 다닐 정도로는 싸워야 해.”
“관장님은 어째 맨날 질 생각부터 합니까?”
“상대가 너무 세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죽는소릴 해야 네가 더 힘을 내잖아.”
“그렇긴 하죠.”
“심판이 부른다. 가자, 가까운 곳에서는 얼마나 더 밉상인지 확인해 보자고.”
* * *
윤성호도 이성일도 가까이 따라왔지만, 슬금슬금 다른 곳을 쳐다봤다.
붉은 입술,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 상대를 향해 던지는 차가운 시선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을 것 같은 미소.
참, 이놈은 특별한 놈이다.
“잘 생겼네.”
“뭐라는 거야?”
“인마, 너 잘 생겼다고. 흑인치고는 꽤 잘 생겼어. 그 얼굴에 싸가지 없는 웃음만 빼면 여자들이 줄줄 따르겠다.”
“이… 미친. 뭔 개소리지?”
“안타까워서 그래. 난 잘생긴 놈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그런 느낌을 못 받았어.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웃음 때문이더라. 이 자식아, 사람을 대할 때는 그런 웃음을 지으면 상대가 기분이 나빠져.”
“어이, 노인네. 당신 내가 두려워서 이러는 거지?”
“크크… 별소릴 다 듣겠네. 진심이야 인마. 오늘 내가 네 얼굴에서 그 싸가지 없는 웃음을 완벽하게 지워줄 테니까 앞으로는 그런 웃음 짓고 다니지 마!”
심판의 주의사항과 최강철의 말이 동시에 끝났다.
심판은 두 선수가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할 일만 열심히 했는데 베테랑의 면모가 풀풀 흘러나왔다.
코너로 돌아오자 목덜미가 뜨뜻해졌다.
지금까지 무시하듯 자신을 쳐다보지 않던 메이웨더가 뒤쪽에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철아, 준비한 대로만 하자. 알았지?”
“알았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난 이제 여한이 없다. 너 그거 아니? 지금 내 마음은 미치도록 좋아하고 사랑했던 담배를 마누라 때문에 할 수 없이 끊었다가, 7년 만에 다시 한 대 피워 문 심정이야.”
“표현력이 점점 좋아지시네요.”
“우리 욕심부리지 말자. 준비한 대로 밀어붙이다가 안 되면 깔끔하게 포기하는 거야. 오케이?”
“역시 관장님은 머리가 좋습니다. 그러죠, 욕심은 부리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가지고 있는 걸 전부 쏟아부은 후 정신을 잃으면 그때 관장님이 타올을 던지세요. 그땐 저도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미친놈. 알아서 해, 이 자식아!”
윤성호가 피식 웃었다.
차라리 링에서 죽겠다는 말이었다.
허리케인의 복싱 인생에서 대충의 패배는 존재하지 않는다.
쓰러뜨리거나, 쓰러지거나.
마우스피스를 끼워주며 소리 지르는 윤성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준 최강철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천천히 몸을 돌려 링의 중앙으로 향했다.
* * *
빠르다, 하지만 그냥 빠른 게 아니다.
마주 서는 순간 강력한 라이트 훅을 날렸으나 메이웨더는 단 두 걸음 만에 공격을 피해내며 좌측으로 빠져나갔다.
최강철은 슬쩍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그의 스텝을 따라 움직였다.
나는 즐겁다.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어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퉁퉁, 투투퉁… 퉁퉁…….
박자를 맞추듯 메이웨더의 스텝을 따라가며 펀치를 던졌다.
맞아 죽더라도 갈긴 펀치가 아니라, 춤추는 것처럼 리듬을 타며 메이웨더의 십자 암브로킹을 향해 던진 주먹들이었다.
최강철이 리듬을 타며 움직이자 메이웨더가 비슷한 반응을 일으켰다.
작용과 반작용.
그의 경기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가 언제나 적의 움직임에 따라 최적의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었다.
최강철이 가드 위로 장난스레 펀치를 툭툭 던지자, 메이웨더가 가소롭다는 미소를 지으며 상체를 움직이지 않은 채 스토핑을 걸어 펀치들을 젖혀냈다.
그런 후 패링에 이은 스트레이트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위잉, 위잉.
번개처럼 터진 펀치는 마치 송곳처럼 그의 몸에서 삐져나와 최강철의 안면을 향해 날아왔다.
그때 가볍게 움직이던 최강철의 반응이 변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최강철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스토핑으로 막아낸 후, 패링으로 레프트를 무력화 시키며 번개처럼 펀치를 갈겼던 것이다.
쿠웅!
정확한 라이트 훅이 메이웨더의 관자놀이에 틀어박히는 순간 주먹에서 짜릿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쉽게 기회가 찾아올 줄 몰랐다.
놈의 레프트 숄더롤을 깨뜨리기 위해 패링에 이은 반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1라운드가 시작된 지 불과 1분도 되지 않아 강력한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놈의 머리통에 박아 넣었다.
휘청.
메이웨더의 신형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바보 같은 놈.
남들에게는 그토록 증오심을 심어주며 이성을 상실케 만들더니, 불과 몇 마디 농담으로 쉽게 무너지다니 생각보다 훨씬 멘탈이 약한 놈이다.
최강철은 메이웨더가 뒤로 물러나는 순간 폭발적으로 신형을 전진했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던 모습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찾아볼 수 없었고 대신 그의 몸에 남은 것은 광폭한 전사의 투지뿐이었다.
파방… 콰과광, 콰쾅…….
이봐 메이웨더.
남들이 나를 보고 허리케인이라고 불러.
그 별명이 왜 생긴 것인지 너도 내 경기를 지켜봤으니 잘 알고 있을 거야.
지금부터 나는 허리케인이라고 불렸던, 바로 폭풍 같은 공격을 너에게 보여줄 생각이다.
너는 더욱 조심해야 했어.
나는 이런 기회를 그냥 넘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사람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