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9장 고 아니면 스톱! - 1 >
최강철은 청와대에서 나와 곧바로 대한정의당의 당사로 향했다.
당사에서는 당대표인 정우석이 오전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가 돌아오자 반색을 하며 맞아들였다.
총선의 여파 때문인지 당사는 수많은 인물로 북적였지만, 대표실에는 오직 그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최 의원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밥 먹고 다른 일 하면서 기다렸어요. 그래 갔던 일은 잘되었습니까?”
강직한 성격이지만, 신중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정우석 대표가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왔다.
다른 때였다면 그는 농담부터 건네 왔을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최강철이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먼저 자리에 앉으시죠. 이야기가 꽤 길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정우석 대표의 표정이 슬쩍 굳어졌다.
꽤 오랜 세월 최강철을 지켜봤기 때문에, 그의 음성으로부터 사안의 심각함을 느꼈다.
최강철은 대통령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처음부터 천천히 꺼냈다.
대통령이 그에게 했던 세 가지 이야기를.
정우석 대표는 최강철의 입이 열릴 때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짐작했던 것보다 사안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당의 통합제의도, 미사일 사거리 양해협정의 변경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그가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난다는 것과 그곳에 최강철을 대동한다는 것이었다.
“최 의원님, 대통령의 뜻이 정확하게 무엇입니까?”
“대통령께서는 북한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것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시더군요.”
“최 의원님을 대동한다는 건 피닉스 그룹이 움직여 주기를 바랐기 때문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접니까, 아니면 그쪽이 먼저였습니까?”
“대통령께서 제의했고 그쪽에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음…….”
정우석 대표의 눈이 무언가를 생각하며 번쩍였다.
당대표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국내정치 상황에 대한 탁월한 판단력과, 국제정세와 사회 전반에 대한 식견을 갖추고 있어야만 당을 이끌어 나갈 수 있다.
무거운 신음을 흘린 정우석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최강철이 말을 끝낸 후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무래도 대통령이 손도 안 대고 코를 풀려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악입니다. 반전이 필요한 상황이지요. 북한과의 화해 무드라…. 역대 정권들이 늘 써먹던 수법을 다시 꺼내 들었군요. 그래 최 의원님은 대통령의 말에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니 왜요, 대통령의 의중을 몰랐단 말입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북한과의 관계가 개선된다면 대통령께서는 정국을 완벽하게 반전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걸 알면서 그런 대답을 했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군요. 왜 그러셨습니까?”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요. 북한은 태생적으로 외부의 도움 없이는 경제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백두산 혈통은 체제보장을 위해 그동안 쇄국정책을 써 왔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이 없다면 이런 상태로는 국민들이 모두 죽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아요. 그자들은 지금까지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의 원조를 받아서 국민들은 죽든 말든 내버려 둔 채 군사력을 증가시켰고 지도부의 배만 불려왔습니다. 그런데 또 원조를 한다고요. 뻔히 알면서 그런 정치를 하는 건 대통령의 욕심일 뿐입니다.”
정우석 대표가 강경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북한은 남한과 주변국으로부터 엄청난 원조를 받았지만, 한 번도 고맙다는 말없이 그 돈을 엉뚱한 곳에 써왔다.
그랬기에 정우석은 최강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렇게 만들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는 대통령이 원하는 것처럼 단순하게 돈과 식량을 주는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요.”
“다른 생각이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 * *
총선이 끝난 후 10일이 지나 국회 개원행사가 열렸다.
개헌 국회에서는 거대 야당인 대한정의당의 3선 의원 박문석이 국회의장으로 자연스럽게 선출되었는데, 그동안의 관례에 따른 것이라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국회가 발칵 뒤집힌 것은 국회의 단상에 대통령이 올라와 연설문을 낭독했을 때였다.
대통령이 미사일 양해각서변경과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회담에 대해서 입을 열었기 때문이었다.
두 가지는 모두 극비리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국회가 개원되자마자 여의도에 풍파가 일어났다.
제2야당으로 전락한 자유민족당이 격렬하게 반대하며 들고 일어섰기 때문이었다.
자유민족당은 미사일 양해각서와 김정일과의 영수회담도 반대했는데, 그동안 북한이 해왔던 적대행위를 감안하면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은 미사일 사거리 변경에 대해서 결사반대를 부르짖었다.
한미동맹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상태에서 미국이 원하지 않고 주변국이 싫어하는 짓을 굳이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미국이 미사일 사거리 변경에 악감정을 가져 주한미군을 철수라도 한다면 어쩔 것이냐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미국에 의해서 자연스럽게 힘을 얻어갔다.
미국의 국방부 장관 저스틴 호프만이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주한미군의 감축을 슬그머니 언급했던 것이다.
참으로 얄미운 전략을 구사한다.
한편으로는 정부의 미사일 사거리 변경요청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척하면서 다른 한쪽으로 야당의 손을 들어주는 행태는 그동안 미국이 자주 써먹던 당근과 채찍 전술이었다.
* * *
미국 백악관.
대통령 집무실에는 클린턴과 국방부 장관 저스틴 호프만, 안보수석 짐 해커가 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클린턴은 하얀 와이셔츠의 소매를 팔뚝까지 걷어 올린 상태였다.
회의를 하는 건지,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자리는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과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클린턴이 국방부 장관을 바라본 것은 시계가 오후 3시 15분 전을 가리키고 있을 때였다.
오후 3시에 국무회의를 소집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자리에서 일어날 시간이었다.
“국방부 장관,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연장요청은 어떻게 처리하는 게 좋겠소?”
“그게 좀 애매합니다. 그들의 요청이 워낙 강하고 이유가 명백하거든요. 지금의 180km 가지고는 북한과 전쟁이 벌어졌을 때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800km면 북한 전역을 커버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죠?”
“일단 중국과 일본이 반대하고 있습니다. 800km는 중국 일부와 일본 영토의 상당 부분을 사거리로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등 뒤에서 칼을 찌를 수 있단 얘기군요?”
“한국이 그럴 리는 없지만, 그냥 싫은 거죠. 한국이 미사일 중무장을 한다는 건, 그들이 결코 원하지 않는 일이니까요.”
“그래도 그들이 반대할 명분은 없을 텐데요?”
“그러니까 우리를 압박하는 겁니다. 결코 한국의 요구에 응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죠. 그들은 정부와 상?하원에 적극적인 로비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양해각서를 변경한다면, 미국과의 관계가 경색될 거라며 엄포를 놓고 있는 중입니다.”
“허어… 그것참.”
“사실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한국은 우방국이지만, 군사력이 강해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건 왜 그렇죠?”
“미사일은 현대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옵션 중 하나입니다. 800km에서 ICBM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는 않겠지만, 만약 양해각서가 변경된다면 한국은 그 이상의 기술력을 금방 보유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는 안 되죠. 한국은 세계에서 우리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랍니다.
군사력이 강해질수록 우리 무기를 수입하는 금액은 점점 줄어들 테니, 우리 입장에서도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저스틴 호프만이 자기 생각을 강하게 어필했다.
방산 업체의 강력한 로비를 받고 있는 그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말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의견은 그동안 조용히 앉아 있던 안보수석 짐 해커에 의해 가로막혔다.
“국방부 장관께서는 미국을 욕보이려 하는군요. 미국은 자유와 정의를 생명처럼 여기는 국가이고, 한국은 우리의 오랜 우방입니다. 그런데 그까짓 작은 이익에 연연해서 세계의 조롱거리가 될 생각입니까. 중국은 이미 ICBM을 보유해서 우리나라를 위협할 능력을 갖추었고, 일본은 전범 국가이니 한국의 미사일 사거리 증가에 대해 논할 가치도 없는 국가입니다. 저는 한국의 요구를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한국 대통령의 의지가 확고할 뿐만 아니라, 우방의 발목을 잡을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향후, 우리나라의 최대 적은 중국이 될 것입니다.
한국의 군사력을 증진시켜, 중국을 견제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란 걸 우린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국방부 장관, 내가 가급적 말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행동을 조심하세요. 방산 업체와 관련된 시크릿 페이퍼의 내용을 대통령 앞에서 내 입으로 꼭 말해야 되겠소!”
* * *
최강철은 아침 일찍 일어나 세면을 하고 수염을 깎았다.
대통령의 국회 연설이 있고 난 후 정치판과 언론이 들썩이며 대한민국 전체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러웠다.
자유선진당의 주장이 탄력을 받은 것은, 전쟁의 상처를 가슴에 안고 사는 기성세대의 북한에 대한 반감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보수언론들이 교묘하게 국민들을 자극하면서 반대여론몰이를 했기 때문에 찬반여론이 부딪치며 사회문제로까지 비화되고 있었다.
문제는 대한정의당의 일부 의원들까지 대통령의 행동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북한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대통령의 뜻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며 언론과 수시로 인터뷰를 했다. 그 때문에 국민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최강철은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맸다.
그런 후 부엌으로 가서 커피를 탔다.
향기로운 냄새.
미국에 있을 때 클로이가 명품 커피라며 선물한 코피루왁이었다.
코피루왁은 인도네시아어로 커피를 뜻하는 코피와 긴꼬리 사향고양이를 의미하는 루왁이 결합한 이름이었다.
사향고양이가 커피 열매를 먹고 난 뒤 배설한 씨앗을 햇빛에 말려 볶는 과정을 거쳐 탄생한 커피인 것이다.
최강철은 소파로 가서 천천히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전화기를 들었다.
길게 울리는 신호음.
그러나 신호음은 그리 오래 울리지 않고 바로 끊겼다.
상대방이 신호음이 울린 지 불과 세 번 만에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스, 해밀턴입니다.”
“지금 그쪽은 저녁이겠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지시한 것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모든 채널을 가동해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안보수석 짐 해커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설득시키고 있는 중이랍니다. 우리가 준 방산 업체 비리 자료를 쥐고 있기 때문에 국방부 장관은 꼼짝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잘 되었군요. 다른 쪽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속해서 관리해 왔던 상?하원 의원들을 전부 동원하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자들이 있지만, 충분합니다.
반대하는 자들은 수적으로나 영향력으로나 우리가 관리해온 의원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스, 지금 한국 쪽이 상당히 시끄럽다고 하던데요. 미국이 정리돼도 한국에서 반대여론이 들끓으면 모양새가 이상해집니다. 먼저 한국의 의견이 통일될 필요가 있습니다.
”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하… 하긴, 보스께서 어련히 잘하시려고요.”
“이제 불과 보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마무리 잘 해주시기 바랍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럼 나중에 다시 통화합시다.”
“보스, 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해밀턴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최강철이 탁자에 놓았던 커피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가 해밀턴을 만난 것은 7년 전의 일이었다.
미국 정가의 최고 로비스트 해밀턴.
그는 조지아 주립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로널드 레이건의 보좌관까지 지낸 사람으로, 미국 정가에서 가장 발이 넓은 로비스트였다.
잘 나가던 그가 이란 콘트라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서 썩고 있는 것을, 최강철이 보석금으로 3백만 달러나 지불하고 빼냈던 것이다.
그의 현재 공식직함은 마이다스 CKC의 고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 정가에서 가장 막강한 로비스트 그룹 ‘아벨’을 이끌고 있었다.
해밀턴이 이끄는 ‘아벨’은 20여 명의 최고 로비스트들로 구성된 전문가집단으로 마이다스 CKC를 위해 7년 동안 정?관계에 적극적인 로비를 벌여왔다.
돈은 귀신도 부린다.
최강철의 지시로 마이다스 CKC가 해밀턴이 원하는 만큼 ‘아벨’에 자금을 지원해 왔기 때문에, 정?관계는 물론이고 언론까지 대부분 그들의 손아귀에 들어온 상태였다.
대통령이 미국 정가에 꽤 돈독한 친분을 가진 자들이 많다고 하지만, 최강철의 영향력에 비하면 상대도 안 된다.
그가 막대한 돈을 들여 미국 정?관계를 관리해온 것은, 그가 생각하는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최강철은 커피를 다 마신 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그가 움직일 시간이었다.
가소로운 자들.
대한민족당과 일부 집권당의 수구세력들.
그들은 자신의 힘을 통해 당당하게 살아가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아직도 누군가의 힘에 얹혀살아야만, 편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을 전부 쓸어버리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