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8장 용이 여의주를 무는 방법 - 1 >
최강철이 만들어 낸 기적의 역전승리는 또다시 한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놨다.
다가오는 총선으로 인해 언론에서는 연신 정치 분야에 대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지만, 최강철이 마지막 경기를 승리하는 순간 모든 초점은 한곳으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자정 뉴스까지 메인은 모두 최강철의 몫이었다.
시합 과정은 물론이고 시합 전의 에피소드와 경기를 마친 후 탈진해서 쓰러졌던 모습, 인터뷰, 숙소로 돌아가기까지의 일들이 전부 속보가 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그만큼 그가 만들어 낸 승리는 국민들에게 거대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어떤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지지 않겠다는 투혼.
단 한 명의 복싱선수로 인해 국민의 사상과 감정이 달라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 모든 것이 최강철로부터 현실로 벌어졌다.
19년 동안의 복싱 인생에서 그가 만들어 낸 절대무적의 위업과 투혼, 그리고 상대에 대한 배려와 감동은 하나하나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속으로 들어와 국민성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최강철이 세계챔피언으로 군림했던 7년 동안 대한민국은 그의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하나로 뭉쳐 축제를 벌였다. 그러니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언론이 다시 한번 뒤집힌 건 대한정의당에서 마지막까지 노출하지 않았던 종로의 공천 확정자가 발표된 후였다.
그동안 대한정의당은 다른 지역구에서 전부 공천자를 확정했지만, 종로만큼은 후보자를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갖가지 구설수가 난무했었다.
종로를 근거지로 4선을 지내고 있는 제1야당의 민강호가 워낙 막강했기에 집권당조차 최근에서야 후보를 냈으니, 언론에서는 대한정의당이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해 발표를 미루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정치부의 기자들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언론이란 언론이 전부 뒤집어졌다.
대한정의당이 내놓은 후보가 바로 최근에 기적의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3체급을 석권한 후 은퇴한 국민영웅, 최강철이었기 때문이었다.
* * *
“최강철이 종로에… 으…….”
대한정의당의 발표로 인해 발칵 뒤집힌 건 언론뿐만이 아니었다.
제1야당 역시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 중심에 있는 건 민강호였다.
민강호.
군부정권의 전신인 민정당 시절부터 보수우익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며 강력한 차기 대통령 후보까지 거론되는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종로 사무실에서 선거캠프를 차려놓았던 민강호와 지지자들은 언론의 뉴스를 보며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번 선거도 무조건 이긴다고 자신했다.
집권당에서 힘들게 공천한 후보는 민강호의 상대가 되지 않았고, 난립하는 무소속들도 떨거지들에 불과했으니 이번 총선에서 금배지를 다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이번 선거에 당선되면 당대표에 도전해서 당당히 차기 대권을 노릴 생각이었다.
그랬기에 그의 야망을 알고 있는 수많은 사람은 스스로 캠프에 참여해, 종로의 사무실이 인산인해를 이룰 지경이었다.
줄을 서기 위함이다.
민강호가 대권에 성공하는 순간 캠프에 참여한 자들은 전부 정부의 요직이나 공기업의 사장 자리를 꿈꿀 수 있으니,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 득실거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민강호와 그의 핵심참모들 10여 명이 사무실에 모인 것은 특종으로 터진 언론들의 뉴스를 확인한 직후였다.
다른 놈이라면 그 누가 되든 충분히 싸울 수 있으나 최강철이라면 상황이 다르다.
그는 오랜 세월 국민들의 영웅으로 불리어 왔으니 가장 최악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강호는 정치 10단이라 불릴 만큼 노련했고 측근들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쉽게 드러낼 정도로 어리석은 자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최측근인 유종득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봤어도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유종득은 현직 대학교수로 민강호의 오른팔 역을 맡고 있는 브레인이었는데 그에게는 장자방과 같은 존재였다.
“이봐, 유 교수. 자네 생각은 어떤가?”
“다른 자들과는 파괴력 자체가 다릅니다. 의원님 그는 국민영웅으로까지 불리고 있는 자입니다. 아무래도 특단의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죽여야지요.”
“어떻게?”
민강호는 스스로 해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오직 중심에서 존재할 뿐 어렵고 더러운 일은 측근들이 알아서 해결하도록 만드는 묘한 능력을 지닌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수많은 의혹 속에서도 살아남아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최강철은 복싱만 한 놈입니다. 그런 놈이 정치 1번지 종로에서 정치를 시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웃긴 일입니까. 이건 종로사람들을 우습게 아는 것입니다.”
“음…….”
“놈을 죽이는 건 여기서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종로는 보수의 심장과 같은 곳입니다. 놈이 국민영웅이란 소리까지 들었지만, 종로에서만큼은 의원님이 영웅이십니다. 놈은 정치에 정자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합니다. 아직 한참이나 어린놈이 감히 종로를 상대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다니요. 저한테 맡겨주시면 그놈 죽일 방법을 강구해 놓겠습니다.”
“조심해야 하네. 철저한 네거티브는 오히려 역공을 받을 수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염려하지 마십시오.”
“마음껏 해 봐. 하지만 하다가 안 되면 언제든지 발을 빼도록. 놈은 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은 놈이라서 잘못하면 역공을 받을 수 있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의원님께 절대 누가 되지 않는 전략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유종득이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자 민강호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나타났다.
세상 참 우습다.
정치를 오래 하다 보면 의외의 경우도 생기는데 그는 이럴 때마다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권모술수를 써서 적을 쓰러뜨렸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느낌이 들었다.
최강철.
그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은 천근처럼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측근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정치의 생명은 스스로 자신감을 잃지 않는 것이고 따르는 무리에게 찬란한 미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랬기에 그는 가슴속에 가득 찬 불안감을 숨긴 채 측근들을 향해 여유 있는 시선을 보냈다.
“놈이 이곳에 공천을 받았다고 했을 때 잠시 당황했으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리 큰일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구만. 놈이 국민들에게 영웅이란 소리를 듣지만, 정치에 들어오는 순간 그건 허상으로 바뀌게 될 거야. 자네들도 알다시피 신성이라 불렸던 자들이 정치판에 들어와 얼마나 많이 쓰러졌단 말인가. 놈에게는 조직도 주민들을 다루는 정치적 능력도 없어. 자네들처럼 지역주민들을 장악한 참모들도 없고, 선거에 대한 노하우도 전혀 없는 놈이지. 오히려 잘 된 것일 수도 있어. 진정한 강자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높은 곳으로 오르는 법이지. 국민영웅 최강철을 쓰러뜨리고 대선에 도전한다면, 차기 대권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넘어올 거야. 그러니 자네들이 열심히 뛰어주게. 내가 이겨야 자네들이 내각의 수장으로 올라설 것 아니겠는가!”
* * *
여소야대.
제1야당의 의석수는 집권당보다 훨씬 많다.
현재 80여 석에 불과한 집권당이 원활하게 국정을 수행할 수 있는 건 92석이나 확보하고 있는 대한정의당이 긴밀하게 협조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대한정의당이 야당의 입장에서 사사건건 집권당의 발목을 잡았다면 외환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수많은 난관에 부딪혔을 것이다.
그만큼 제1야당은 정부의 정책에 비협조적이었다.
차기 대권을 탈환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실정을 물고 늘어져야 했으니 협조라는 단어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비록 정권을 빼앗겼지만, 아직도 제1야당의 힘은 대단했고 그 힘의 원천은 보수언론과 영남이란 지역적 연고에서 나왔다.
확실한 지역 기반과 언론을 등에 업은 이상 정권을 재창출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들의 판단이었다.
제1야당이 여의도 당사에 언론을 불러 모은 건, 최강철이 종로출마 발표를 한 지 불과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C일보의 베테랑 정치부 기자 왕정근은 J일보의 마종석을 향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지금 브리핑실에는 30여 명에 달하는 각 언론사 정치부 기자들이 득실댔고, 3대방송사의 카메라도 모두 보였다.
오늘 제1야당이 발표할 폭탄이 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빠진 언론들은 거의 없었다.
언론들은 제1야당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 어느 때 다시 집권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놓고 비토를 놓는 건 자살행위기 때문이다.
“마 기자, 넌 어때?”
“뭐가?”
“넌 너무 음흉한 게 탈이야. 오늘부터 최강철 죽이기가 시작될 텐데 어쩔 생각이냐고?”
“기자의 본분은 충실하게 사실을 국민들한테 전달하는 거지. 난 보고 듣는 대로 기사를 쓸 뿐이야.”
마종석이 빙그레 웃으며 원론적인 말을 하자 왕정근의 눈깔이 뒤집혀졌다.
역시 구렁이가 열 마리쯤 속에 들어 있는 놈이다.
C일보나 J일보나 제1야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보수 언론이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벌써 오늘 상황에 대해서는 높은 놈들끼리 전부 이야기가 끝났을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나 마종석은 펜대를 잘 굴려서 비위를 맞춰주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가 뻔한 질문을 한 것은 상대가 워낙 대단한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칫 제1야당이 불러주는 대로 기사를 썼다가는 국민들로 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을 수도 있었다.
“오죽하겠냐. 여우 같은 놈.”
“왕 기자. 조심해. 다른 때와는 달라. 괜히 자네 생각을 첨가해서 끌쩍이면 큰일 날 수도 있어.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안다.”
“잘 생각해. 괜히 윗대가리가 주문한다고 곧이곧대로 썼다가는 정말 한순간에 골로 갈 수가 있으니까.”
“야, 씨발.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이런 일 한두 번 하냐. 뭐가 그렇게 겁이 나는 거야. 국민영웅이고 지랄이고 기자가 까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린다고. 제1야당이 그거 해달라고 우릴 부른 거 아니냐. 일을 해야 용돈이 생기지. 일 안 하면 누가 용돈 주겠어?”
“적은 돈에 목숨 걸지 마. 내가 이상한 소릴 들어서 그래.”
“어떤?”
“최강철 뒤에 엄청난 배경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대한정의당이 그놈을 종로에 공천한 것도 전부 그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래.”
“지랄한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니까 알아서 해. 하지만 웬만하면 노골적으로 까지 마. 나중에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마종석이 말을 끝내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문이 열리며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제1야당의 주요인물들이 한꺼번에 들어왔는데 원내총무를 비롯해서 중진들이 대거 모습을 보였다.
발표를 맡은 것은 권인숙 의원이었다.
그녀는 방송국의 앵커 출신으로 벌써 10년 전에 정치에 입문했는데, 정권이 바뀐 후부터 제1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오늘 저희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대한정의당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최강철 선수를 종로에 공천해서 국민들을 모욕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아직 시합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을 공천했다는 것은, 대한정의당이 얼마나 국민 여러분을 우습게 보는지 단적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최강철 선수는 복싱선수지 정치인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올바르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정치인이 소신을 가지고, 국회를 운영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국회의원이 된다면, 이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한민국 국회는 그야말로 정치철학조차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정상적인 기능을 상실케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희당은 대한정의당이 최강철 선수의 공천을 철회해 줄 것을 정중하게 권유드리는 바입니다.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탁월한 식견으로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정치인들이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대한정의당은 이런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주시길 부탁합니다.”
* * *
제1야당의 성명서는 기사화되어 동시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최강철에 관한 어떤 기사도 특종이었으니 언론이 이런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기사를 내는 온도가 극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보수언론들은 제1야당의 성명서에 적극 호응하며 최강철의 정치입문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대다수의 언론들은 단순한 사실만 보도했다.
제우스가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었다.
제우스는 이제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보수언론을 제외한 대부분 언론이 그들의 뜻대로 움직일 정도였다.
돈은 귀신도 움직인다는 진리와 국정원에 비견될 정도의 정보력을 갖춘 제우스의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거대해져 가고 있었다.
신규성이 제우스의 사무실을 찾은 것은 제1야당의 성명서로 인해 전국이 발칵 뒤집혔을 때였다.
최강철의 선거 대책본부장은 김도환이었으나 신규성의 역할도 그에 못지않았다.
“김 사장님, 회장님은 언제 들어오신 답니까?”
“어제 통화해 봤는데 일주일 후에 들어오신다는군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휴우, 큰일이군요. 놈들이 점점 더 크게 압박을 가해 올 텐데 자리를 비우고 계시니…….”
“왜요, 걱정되십니까?”
“당연하죠. 정치인들은 온갖 감언이설에 능하다고 들었는데 하는 짓을 보니 정말 귀신같은 자들입니다. 이제 포문을 연 이상 아마 회장님에 관한 별별 소문을 전부 가져다 울궈먹을 겁니다. 제가 아는 사람을 통해 들어보니, 아이를 미국에서 난 것도 시비 걸 모양이더군요.”
“하하하…. 그자들이 오죽할까요. 하지만 신 사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회장님이 무조건 이깁니다. 회장님은 욕심을 부린다면 당장 대통령 자리에도 오를 수 있는 분입니다. 하물며 그까짓 종로의 국회의원이 대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