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장 마지막 승부 - 7 >
죽어야 하는 자릴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간 사람처럼 9라운드의 시작을 알린 이종엽은 총알처럼 튀어나오는 최강철을 보면서 입을 쩍 벌렸다.
그가 생각한 게임 양상은 챠베스가 먼저 최강철을 압박하며 압도적인 공격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경기는 시작부터 기적을 예고했다.
“와악! 국민 여러분. 최강철 선수가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강력한 라이트 훅. 챠베스가 스토핑으로 막았습니다. 아닙니다. 최강철 선수. 라이트 더블입니다. 맞췄습니다. 비틀하는 챠베스. 이게 웬일입니까. 최강철 선수 돌진합니다. 다가서는 최강철. 속사포 같은 콤비네이션 펀치를 날립니다. 전혀 새로운 사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게 어쩐 일인가요. 윤 위원님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최강철 선수가 그동안 체력을 비축해 놓았던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기회로 챠베스를 잡으려는 전략을 세웠던 모양입니다.”
“최강철 선수 밀어붙입니다. 허리케인의 진정한 모습….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나올 지경입니다…….”
이종엽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떠들었다.
정말 눈가에서 습기가 배어 올라왔다.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감행하는 최강철의 모습을 보면서 이젠 져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멋진 최후를 맞게 된다면 더 이상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고함을 질렀는지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이거야.
최강철의 경기를 진행하면서 늘 느끼던 이 소름 끼치는 함성과 고함.
기어코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고국에서 최강철의 마지막 불꽃 투혼을 보며 기뻐할 사람들을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얼마의 사간이 지났을까.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것으로 생각했던 최강철의 공격은 한순간이 아니라 영원처럼 지속되며 그렇게 강했던 챠베스를 기어코 로프까지 끌고 갔다.
정말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악, 최강철 선수. 어마어마한 공격을 퍼붓습니다. 번개처럼 터지는 콤비네이션 펀치.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이은 레프트 보디, 라이트 어퍼컷. 최강철 선수의 얼굴도, 맞고 있는 챠베스 선수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강철의 레프트 어퍼컷. 챠베스 반격합니다. 이때 최강철의 라이트 스트레이트! 챠베스 쓰러졌습니다. 만세!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챠베스가 쓰러졌습니다! 레프리, 카운터를 셉니다. 못 일어날 것 같습니다. 못 일어납니다. 만세, 만세! 최강철 선수가 이겼습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의 영웅, 불사조 최강철 선수가 기적 같은 역전승을 이끌어 냈습니다!”
두 팔을 번쩍 든 이종엽이 울부짖었다.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장면.
중계를 하는 내내 이 장면을 꿈꾸며 이렇게 되기를 빌고 빌었지만, 진짜 최강철이 챠베스를 쓰러뜨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만큼 일방적으로 당했고 최강철의 상태가 경기를 뒤집기엔 너무 힘겨웠기 때문이었다.
이종엽은 윤근모와 얼싸안았다.
중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끌어안은 채 미친 듯이 떠들어 댔는데, 기적 같은 이 승리를 보면서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 * *
8라운드에서 최강철이 다운을 당한 후 겨우 도망쳐 돌아가자, 숨을 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보였다.
광화문을 꽉 채웠던 푸른 물결들은 고전의 시간이 거듭되면서 조금씩 균열이 가더니 8라운드가 끝난 후에는 눈에 띄게 빈자리가 많아졌다.
충분히 이해가 된다.
김영호와 류광일 역시 이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최강철의 졸전에 실망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최강철이 계속 챠베스의 펀치에 맞으며 괴로워하는 걸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았기에 자리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영호야, 사람들 간다…….”
“나도 알아. 힘들었겠지. 보는 게.”
“휴우.”
류광일이 긴 한숨을 내리 쉬었다.
그러자 김영호가 그의 모습을 보면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냥 가도 된다. 억지로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
“아니, 나는 절대 가지 않아. 강철이가 데뷔할 때부터 지금까지, 난 한 번도 경기를 보면서 자리를 뜬 적이 없다.”
“이대로 있으면 너는 분명 보고 싶지 않은 장면을 보게 될 거야.”
“진다고 해도 강철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강철이란 말이야. 저놈은 최선을 다했어. 그러니까 마지막 죽는 순간을 난 지켜줘야겠다.”
“멋있는 놈이야. 넌.”
김영호가 눈을 뜨면서 웃었다.
그러자 류광일이 남아있던 소주병을 들어 올려 입으로 부었다.
벌써 그들 앞에는 빈 소주병이 5개나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최강철의 마지막 경기라는 특수성 때문에, 다른 때보다 3병이나 더 가져왔지만 벌써 모든 술이 동난 상태였다.
“아무래도 이번 라운드가 끝일 것 같다. 그러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너도, 그동안 강철이 응원하느라 수고 많았다.”
“수고는 무슨. 저놈 때문에 내 삶이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렇다.
최강철이 사각의 정글에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경기를 보면서 얼마나 즐거웠던가.
사람은 언제나 태어난 이상 죽게 되어 있다.
단지 그 죽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이냐는 차이가 있을 뿐,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랬으니 처연한 마음으로 친구의 손을 마주 잡았다.
끝까지 같이 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최강철의 마지막을…….
* * *
두 눈을 부릅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기대했던 그 모습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는 최강철의 모습을 보면서 김영호와 류광일은 두 눈 만 부릅뜬 채 화면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들뿐만 아니다.
마지막까지 최강철의 최후를 지켜보겠다며 기다리던 푸른 물결들이 급격한 흐느낌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미 수많은 여자가 비명과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들의 반응은 여자들과 달랐다.
멋진 최후를 위해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영웅의 마지막 발악을 보는 것처럼, 그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비참한 마지막을 맞아들일 각오를 새롭게 했다.
그러던 한순간.
챠베스가 최강철의 공격에 의해 안면을 허용하며 비틀거리는 순간부터 푸른 물결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패배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기적을 바라는 간절한 소망과 기도가 담긴 몸짓이었다.
그리고 그 물결은 점점 커지며 파도가 되었고 해일로 변해갔다.
“최강철, 최강철, 힘내라. 힘내!”
“제발, 제발… 조금만 더.”
순간이 영원으로 변하는 순간, 푸른 물결은 거칠게 요동치며 광화문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지진이 발생한 것은 기어코 최강철의 공격에 의해 챠베스가 쓰러졌을 때였다.
모든 사람이 뛰었다.
푸른 물결이 동시에 구르자 광화문 일대가 전부 무너지는 것 같은 진동이 발생했다.
“만세, 만세!”
“허리케인, 허리케인, 허리케인!”
수없이 터지는 기쁨의 함성.
자리를 떴던 사람들이 돌아와 더 큰 푸른 물결을 만들었고 주변 빌딩을 가득 채운 사람들마저 달려 나와 그 대열에 합류했다.
서로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최강철의 마지막 승리는 그만큼 극적이었고 아름다웠으며 눈물이 나올 만큼 기쁜 것이었다.
김영호도 류광일을 끌어안고 울었다.
진하고 뜨거운 눈물이다.
“크윽…. 강철아, 이 새끼야. 고맙다!”
* * *
최강철은 레프리가 승리를 선언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캔버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대로 그냥 쓰러져 잠들고 싶었다.
전신에 남아있던 모든 기운을 쏟아붓고 나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와아, 와아, 허리케인…. 허리케인!”
귓가로 들려오는 관중들의 환호성 소리.
그들의 환호성은 그 어떤 때보다 컸고 격렬했으며 진정이 담겨 있었지만, 최강철은 고개를 들어 그들을 향해 인사를 할 수 없었다.
쿵, 쿵, 쿵…….
미친 듯 달려오는 발소리.
당연히 윤성호와 이성일의 것이겠지.
그들은 달려왔지만 쉽게 최강철의 몸을 끌어안지 않고 한동안 호위하듯 그의 주변에서 머물렀다.
그런 후 시간이 지나자, 이성일이 먼저 숙이고 있던 자신의 머리 쪽으로 대가리를 가져다 대었다.
놈은 자신이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코를 끙끙거렸는데, 몸이 벌벌 떨리고 있었다.
“강철아, 너 죽은 거 아니지?”
“…미친놈아. 힘들어 죽겠다.”
“크큭, 미친놈은 너다. 이 자식아. 넌 내 친구지만 괴물이 틀림없어. 미친 괴물 말이야. 관장님, 이놈 안 죽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성일의 말을 들으며 최강철은 힘들게 고개를 들어 윤성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본 채 눈물을 펑펑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휴우…. 훅, 훅.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호흡을 가다듬으며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그런 후 무릎을 꿇은 채 윤성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왜 그렇게 바보처럼 울고 있어요.”
“강철아, 이놈아!”
윤성호가 덥석 허리를 숙여 최강철을 안았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오열하기 시작했다.
최강철의 처음과 끝을 같이한 윤성호와 이성일.
두 사람은 지옥 같았던 마지막 시합을 같이하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끔찍한 고통의 순간들을 겪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눈물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무사히 모든 것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최강철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흘린 것이다.
* * *
호흡을 가다듬고 이성일에게 부축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부축된 몸으로 링을 돌며 관중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관중들은 최강철이 탈진한 상태로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중들뿐만 아니라 중계방송에 참여했던 전 세계의 방송국들이 중계석을 이탈하지 않은 채 지금의 상황을 끊임없이 떠들었다.
복싱 역사를 통틀어 유일무이한 위업을 달성한 영웅의 마지막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최강철이 인사를 할 때마다 관중들은 허리케인을 연호하며 특설링을 뜨겁게 달궈놓았다.
그를 향해 쏟아지는 별빛.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곧 링을 떠나는 영웅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수많은 카메라가 축복하는 광경이었다.
링 아나운서는 끈질기게 기다렸다.
이렇게 탈진할 정도로 지친 선수에게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링 아나운서는 복싱팬들을 위해, 그리고 수많은 언론을 위해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그가 다가온 것은 최강철이 관중들에게 인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 후 겨우 허리를 폈을 때였다.
“허리케인, 이렇게 인터뷰를 요청하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마지막 인터뷰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훅훅…. 괜찮습니다.”
정중한 링 아나운서의 멘트에 최강철은 천천히 입을 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역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었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먼저 오늘 경기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상당이 어려운 경기를 하셨는데 그 원인이 뭔가요?”
“아시겠지만 저는 체중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에, 체력의 문제가 상당히 발생했습니다. 모든 것이 저의 잘못입니다. 더 열심히 훈련해서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올라오지 못한 것에 대해 복싱팬들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에도 기적적인 역전승을 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전혀 새로운 사람처럼 챠베스 선수를 몰아붙여 승리를 거두셨는데요. 미리 준비했던 건가요?”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버티며 체력을 충전했을 뿐입니다.”
“챠베스 선수에 대해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챠베스 선수는 뛰어난 인성과 실력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는 신이 빚은 복서라는 말이 더 없이 어울릴 만큼 압도적인 경기력을 선보였습니다. 저의 마지막 상대가 되어 준 챠베스 선수에게 경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제 오늘로서 허리케인의 신화가 모두 끝났습니다. 저 역시 슬픈 마음으로 당신을 보내야 하는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허리케인, 복싱팬들께 한 말씀 해주십시오.”
링 아나운서가 애잔한 눈으로 최강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이 순간의 이별이 아쉽고 슬펐던 게 분명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그에게 가볍게 목례를 한 후 마이크를 잡았다.
“저를 사랑해 주신 복싱팬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제가 걸어왔던 19년간의 복싱 인생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그 시간은 저에게 더없이 영광스러웠고 자랑스러운 순간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과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고국에서 응원해 주신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최강철이 영어로 말하던 것을 한국어로 바꾸어 멘트를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영어로 말할 때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늘 저의 마지막 경기를 보면서 많은 실망과 고통을 느끼셨을 거로 생각합니다. 모두 저의 불찰이었음을 인정하며,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국민 여러분. 저는 시합에서 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여러분과 저, 그리고 대한민국은 결코 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이제 저는 복싱을 은퇴하지만, 더 훌륭한 모습으로 여러분께 인사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