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67화 (267/308)

< 제37장 마지막 승부 - 6 >

몸에서 생기가 돌아오는 걸 느끼며 팔을 들어 캔버스를 짚고 일어섰다.

쓰러지기 전보다 훨씬 낫다.

자신의 몸이 생기를 찾은 이유가 단순히 신체의 한계를 극복했기 때문이라고 믿지 않았다.

러너하이 일수도 있지만,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러너하이는 체력의 회복이 아니라 체력이 극한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감각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루시퍼의 도움을 받은 것도 아니다.

루시퍼는 다시 살고 있는 자신의 삶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도움을 주거나 간섭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이런 초 회복 현상은 애초부터 루시퍼에게 부여받은 능력일 가능성이 컸다.

카운터 8에 일어나 주먹을 들어 올리자, 레프리가 다가와 싸우겠냐는 의사를 물었다.

당연하지. 싸우지 않을 거면 뭐 하러 일어났겠나.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프리의 몸이 비켜났다.

반대쪽에서 챠베스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몸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다.

더군다나 다운을 당하며 캔버스에 쓰러질 때, 데미지가 올라왔었다. 그래서 최강철은 챠베스가 롱훅을 날리며 접근하자 외곽으로 멀찍이 돌았다.

지금은 자존심을 찾을 때가 아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20초.

일단 이 시간을 넘기고 난 후 다음 라운드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체력이 회복되면서 방어막이 견고해졌다.

벌써 몇 라운드 째 일방적으로 공격을 했기 때문인지 챠베스의 주먹은 상당히 커져 있었다.

반격에 대한 위험성이 줄어들자 자신도 모르게 펀치의 강도를 키워나간 것이 원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날카롭다.

각도를 줄이며 뻗어 나오는 그의 회오리 펀치는 방어만 해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 * *

“어떻게 된 거야?”

“헉헉, 뭐가요?”

“다운당한 다음부터 오히려 좋아졌다. 일부러 그런 거지?”

윤성호의 얼굴에서 기대감이 스멀거리며 피어올랐다.

그는 최강철이 지금까지 당해준 게 체력을 회복하기 위함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 순간 최강철이 보여준 스텝은 평상시에는 못 미치지만, 훨씬 경쾌하고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후훅…. 일부러 맞는 놈이 어디 있어요. 계속 맞다 보니까 신체가 열 받은 모양입니다.”

“강철아, 계속할 거냐?”

“그럼요.”

그럴 수도 있다.

복싱을 오래 하다 보면 체력이 방전되었던 선수가 기적처럼 상대를 박살 내며 승리를 쟁취하는 경우를 본다.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였으나 선수의 정신력이 적의 공격에 대한 충격을 받아들이며 버티기를 반복하다가 축적된 체력으로 한 번에 승부를 걸었을 때 발생한다.

다시 말하면 모험이 성공했을 경우 기적처럼 발생하는 행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영악한 최강철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마지막 반전을 위해 늑대의 발톱을 숨겨 놓고 있었던 것 같았다.

“강철아, 이번 9라운드에서 끝을 보자. 더 해봤자 의미가 없어. 무슨 소린지 알지?”

“압니다.”

“그래, 영웅은 자신의 처참한 시체를 길가에 묻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까 드넓은 광야의 중심에 있는 절벽에서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 어울려.”

“멋진 표현이네요. 관장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이번 라운드에서 끝을 보죠.”

최강철이 거친 숨을 뱉어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체력이 돌아왔다 해서 완벽할 리 없다.

더군다나 돌아온 체력이 언제 다시 고갈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윤성호의 말대로 이번 라운드에서 승부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 * *

이종엽과 윤근모는 쉬는 시간이 되었음에도 멍하니 링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일방적인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다운을 당하고 말았다.

최강철이 언제 이렇게 무기력한 경기를 한 적이 있단 말인가.

다운을 당하는 순간 가슴 한쪽이 찢어질 것처럼 아파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부여잡았다.

이번 다운은 불의의 펀치를 맞고 다운을 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충격은 훨씬 컸다.

다행히 겨우 일어나 8라운드를 무사히 마쳤지만, 어떤 희망도 보이지 않았다.

이종엽의 입이 슬그머니 열린 것은 담당PD가 마지막 광고를 내보내면서 자신을 향해 준비하라는 사인을 보낼 때였다.

“윤 위원님. 한국이 걱정되네요. 지금쯤 초상집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휴우…. 아무래도…….”

“이 경기를 계속 중계방송 해야 된다는 것이 정말 괴롭습니다.”

“힘내게. 사람에게는 기적이란 게 있지 않겠나. 다운당하고 일어났을 때 움직임을 보니까 조금 회복한 것 같았어. 마지막까지 지켜보자고… 최강철은…….”

윤근모의 말이 PD의 사인에 의해 끊겨졌다.

PD가 급히 팔을 돌리며 멘트를 시작하라는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참 열심히 산다.

이 와중에도 방송국을 먹여 살리기 위해 광고는 열심히 돌아갔고, 자신에게 최강철의 비참한 모습을 계속 중계 방송하라며 팔을 빙빙 돌려대는 PD의 모습을 보자 화가 불끈 치밀어 올랐다.

그럼에도 이종엽은 마이크를 자신의 입에 가져다 댄 후 전쟁을 독려하는 선동꾼처럼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9라운드의 시작을 알렸다.

“이제 9라운드가 시작되었습니다. 최강철 선수는 8라운드에 불의의 일격을 받고 다운을 당했으나 불굴의 정신으로 일어났습니다. 아직도 저는 최강철 선수가 불리함을 극복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불사조, 최강철. 그가 마지막 투혼을 불태워 주기를 진심으로 간절하게 기원하는 바입니다…….”

* * *

최강철은 고개를 좌우로 꺾고 숨을 고른 후 앞으로 나갔다.

숨결의 진퇴가 다르다.

다른 라운드에서는 링으로 나설 때 폐부를 파고드는 고통에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훨씬 가라앉은 상태였다.

챠베스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다.

그 표정은 변함이 없었고 밀고 들어오는 압박도 이전과 똑같았다그는 최강철이 뒤로 밀리는 순간부터 팬케이크 스텝을 밟으며 접근해 들어왔는데 막상 당해보자 그 압박력이 무시무시했다.

체력의 부족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 경기를 어렵게 만들었다.

팬케이크 스텝을 장착한 챠베스는 독수리의 날개에 미사일을 장착한 것처럼 말도 안 되는 펀치들을 마음껏 뿜어냈다.

최강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챠베스의 팬케이크 스텝을 부숴놓는 것이었다.

불끈 다가서며 강력한 라이트 훅을 관자놀이를 향해 내리꽂았다.

앞으로 전진하는 팬케이크 스텝을 막아 챠베스의 후속 공격을 미리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챠베스의 스토핑.

챠베스는 계속 공격을 당하던 최강철의 반격에 위빙과 더킹 대신 블로킹과 스토핑을 주로 사용했다.

공격의 날카로움이 무뎌진 적에게 위빙과 더킹으로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고도의 전술이었다.

하지만 같은 선택을 한 챠베스의 스토핑은 실수였다.

스토핑에 이어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날아오는 순간 최강철의 몸이 숙여지며 미사일 같은 라이트 훅이 다시 날아갔던 것이다.

라이트 더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체력적인 문제 때문에 단발 공격을 해 왔으니, 챠베스는 최강철이 스토핑에 막힌 라이트 훅을 다시 날릴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게 분명했다.

챠베스의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머리 위로 스쳐 지나가고 대신 자신의 라이트 훅에 묵직한 감촉이 느껴지는 순간 최강철은 본능적으로 앞을 향해 돌진했다.

이미 라이트 훅에 적중된 챠베스는 놀란 눈을 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중이었다.

충격을 받았다.

작정하고 날린 주먹이었으니 충격을 받지 않았다면 사람이 아니다.

재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챠베스의 몸통을 들이박은 최강철은 그대로 콤비네이션 펀치를 꺼내 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내 체력이 어디까지 버텨줄지 모르지만 이번 공격에 실패한다면 이 경기에서 이기기 힘들 것이다.

윙, 윙, 위잉…….

칼날 같은 펀치들.

방향과 각도를 무시하고 챠베스의 빈틈을 노리며 날아간 펀치들이 가딩 사이를 뚫고 들어가 전신을 유린했다.

펀치가 적중될 때마다 챠베스의 몸은 움찔거렸다.

완벽한 가딩 상태에서 기회를 노리며 위빙과 더킹, 심지어 스웨잉까지 모든 방어기술을 펼쳤지만, 최강철의 펀치는 전갈의 독침처럼 그사이에 들어 있는 빈틈을 찾아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챠베스는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뒤로 밀리는 순간 최강철에게 기회를 준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각도가 작아졌고 펀치에 힘을 빼면서 챠베스는 최강철의 콤비네이션 중간을 차단했다.

역시 백전노장이다.

절대 적의 공격이 마음껏 펼쳐지지 못하도록 틈을 노려 반격을 해왔는데, 그때마다 최강철도 타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최강철은 챠베스가 던진 날카로운 레프트 보디가 옆구리에 꽂히는 순간, 마주 달려나간 라이트 훅이 기관차처럼 그의 안면을 깔아뭉갰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전략.

이미 이 경기는 처음부터 잘못 시작되었으니 정상적인 전략으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콰앙!

강력한 라이트 훅에 적중된 챠베스가 다시 한번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9라운드.

격렬한 경기를 계속 이어왔으니 그 역시 이젠 지칠 때가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강한 주먹에 적중되었기 때문인지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던 챠베스의 두 다리가 흔들거렸다.

최강철의 폭발적인 진격.

마치 경기를 시작했을 때 챠베스를 압도했던 그때처럼, 최강철은 물러서는 적을 향해 무시무시한 펀치들을 난사했다.

둘 중 하나는 죽는다.

이미 죽음을 각오한 이상 나의 죽음 앞에서, 나는 반드시 당신의 시신을 먼저 확인해야 되겠다.

천둥벼락이 친다.

마지막 공격을 쏟아붓고 있는 최강철의 몸에서 나온 펀치들은 천둥이 되었고 번개가 되어 챠베스의 전신을 찢어나갔다.

챠베스가 이빨을 깨물며 마주 다가왔으나 이미 늦었다.

한번 가동된 최강철의 콤비네이션 펀치들은 그의 죽음을 각오한 반격을 철저히 깔아뭉개며, 전진해 나갈 뿐이었다.

최강철은 자신의 라이트 스트레이트에 적중된 챠베스를 보면서, 레프트 어퍼컷과 라이트 보디 공격을 동시에 터트렸다.

그리고는 어깨로 다시 챠베스의 몸통을 들이박고 짧은 양훅으로 안면을 갈겼다.

숨이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다리가 천근처럼 무거워져 갔다.

보완되었던 체력은 라운드 종반에 이르자 수명이 다 된 것처럼 빠져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계속되는 공격에 충격을 받아 희미해진 챠베스의 시선을 보면서, 최강철은 마지막 불꽃을 불태웠다.

가라, 챠베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선물이다.

챠베스를 로프로 몰아넣고 자신이 지금까지 복싱을 하면서 가다듬어왔던 패턴펀치들을 한꺼번에 모두 퍼부었다.

1개의 패턴펀치는 12개의 펀치로 구성되었고, 그는 5개의 패턴 콤비네이션 펀치를 가지고 있었다.

이 펀치로 모든 강자를 꺾었다.

그가 정상적인 컨디션에서 시전하는 패턴 콤비네이션 펀치는 그 자체가 공포였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무한의 상태에서 전력을 다했다.

그가 지닌 5개의 패턴펀치를 모두 퍼부은 후 실패하면 장렬히 산화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최강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로프에 몰린 채 방어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던 챠베스가 2번째 패턴콤비네이션에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치명상은 라이트 어퍼컷이었고 목숨을 끊어버린 건 크로스 카운터인 라이트 스트레이트였다.

정적.

챠베스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MGM 호텔 특설링은 무서운 고요 속에 사로잡혔다.

기적의 역전.

무기력한 경기를 하면서 관중들과 세계 복싱팬들을 안타깝게 만들던 최강철의 모습이었다. 그의 폭발을 바라던 사람들은 기어코 최강철이 챠베스를 캔버스에 쓰러뜨린 모습을 보자,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전율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 경악과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와아…. 와아… 와, 와.”

한꺼번에 터진 관중들의 함성과 비명.

광활한 MGM 호텔 특설링 전체가 관중들이 터트린 함성과 몸부림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흔들거렸다.

광란이다.

허리케인의 마지막 경기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관중들은 그의 기적 같은 역전승을 확인하며 이성을 상실한 채 허리케인을 연호했다.

그들을 더욱 미치게 만든 것은 챠베스를 쓰러뜨린 후 레프리가 승리를 선언했을 때, 최강철이 털썩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기 때문이었다.

모든 힘을 퍼부은 후 탈진한 채 주저앉은 그의 고개가 캔버스를 향해 떨어졌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연민을 느꼈겠지만, 대부분 사람이 느낀 감정은 결코 연민이 아니었다.

불멸의 전사.

그렇다, 치명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고 마침내 거대한 적을 쓰러뜨린 그는 불멸의 전사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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