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7장 마지막 승부 - 2 >
최강철은 서지영의 출산이 다가오자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와 시간을 보내다가 의사가 입원하라는 시기에 맞춰 병원으로 향했다.
장모님은 오래전부터 그녀의 곁에서 수발을 들고 있었는데, 곧 손자가 나온다는 사실에 안절부절못했다.
최강철은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움직이지 않았다.
산통주기가 계속 짧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아이가 나올 것 같았다.
통증이 올 때마다 그녀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럼에도 예쁘다.
서지영은 통증이 사라지면 최강철을 향해 예쁜 미소를 지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버릇처럼 중얼거렸다.
그녀가 보기엔 자신보다 최강철의 얼굴이 더 긴장된 것처럼
보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상태를 체크하던 의사가 그녀를 데리고 분만실로 향했다.
벌떡 일어나 따라갔다.
이미 장모님은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초긴장 상태에 빠져 있었다.
최강철은 속마음과 달리 침착한 표정으로 분만실의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서지영의 나이가 꽤 있기 때문에 분만이 쉽지 않을 거란 의사의 말이 자꾸 떠올라 초조함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드디어 분만실에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우렁차게 새어 나오는 걸 들으며 최강철이 양손을 꽉 부여잡았다.
“득남을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담당 의사가 분만실에서 나와 웃는 얼굴로 축하를 해주자, 초조함에 빠져 있던 최강철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보다 서지영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그런 후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지영씨, 수고했어. 그리고 고마워.”
“우리 아기… 봤어요?”
“아직, 이제 볼게.”
“얼른 봐요. 당신 닮아서 너무 잘 생겼어요.”
그녀의 성화에 천천히 일어나 간호원의 손에 들려 있는 아이에게 향했다.
이제 갓 태어난 놈이 잘생겼을 리 없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은 채 아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아기야…. 나에게 와줘서 고맙구나.
* * *
박종용은 구닥다리 코란도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라디오에서는 대한민국이 IMF 지원자금을 모두 상환했다는 소식과 이틀 전에 입국한 최강철의 경기일정이 잡혔다는 뉴스가 번갈아가며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불과 2년 만의 외환위기 탈출.
세계 유수 언론들이 예즉한 것처럼 대한민국은 초스피드로 국가의 경제위기를 빠져나오며 세계를 경악시켰다.
더 재밌는 것은 대한민국의 체질이 외환위기로 인해 단단하게 변화되었다는 것이었다.
한국 경제는 피닉스 그룹을 중심으로 무섭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IMF에서 요구했던 기업들의 혹독한 구조조정 요구도 기업을 변화시키는 긍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루루루루…….
중소기업의 품질부장인 박종용은 지금 현장으로 달려가는 중이었다.
건설 중인 콘크리트의 품질을 체크해서 이상 유무를 확인하겠다는 발주처 감독의 오더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상관없었다.
워낙 철저하게 품질관리를 해 왔기 때문에 꼼꼼한 감독이 직접 와서 테스트를 한다 해도 꼬투리 잡힐 일은 없었다.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회사는 외환위기 속에서도 꿋꿋이 버텨냈고, 오히려 한 단계 더 성장하면서 매출액을 배 이상 끌어 올렸다. 그래서 오늘 기본급의 100%나 되는 보너스가 나온다.
이제 현장에서의 일만 끝나면 일찍 집으로 들어가 오랜만에 가족과 외식을 할 예정이었다.
전화를 받은 마누라의 목소리가 붕붕 날아다니는 게 느껴졌고, 옆에서 고기 먹자고 떠드는 딸들의 음성도 들렸다.
확장이 된 경부고속도로는 차량의 흐름에 여유가 있어 쾌적한 상태였다.
차량 간격은 널찍했고 속도는 100km/h가 훌쩍 넘고 있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기흥휴게소를 통과할 때였다.
앞에서 달리던 승용차가 비틀거리더니 중앙분리대를 들이박고 다시 차선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 사람 뭐야, 졸고 있는 거야?”
너무 놀라 크락션을 두들겼다.
그대로 두면 큰 사고가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크락션을 두들겨도 승용차는 계속해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박았다가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순간적으로 졸음운전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랬기에 그는 옆 차로로 이동해서 과감하게 승용차를 추월하며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고개가 꺾였다.
운전자는 50대 남자였는데 이미 고개가 꺾인 것이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고민할 새가 없었다.
고속도로를 100km/h 이상 달리는 차들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계속 추월하고 있었기 때문에 승용차를 그대로 두면 대형사고가 날 게 분명했다.
그대로 승용차를 추월해서 앞을 가로막았다.
콰앙!
박히는 순간 브레이크를 풀었으나 정신이 멍해지는 충격이 몰려왔다.
그럼에도 그는 브레이크를 풀었다가 밟기를 반복하며 코란도로 승용차를 가로막았고 점차 속도를 줄여나갔다.
완벽하게 승용차가 정지하는 순간 박종용은 급하게 차에서 뛰어내려 달렸다.
자칫 잘못하면 죽는다. 승용차 운전자도 자신도.
미친 듯 달려 승용차에 도착한 그는 문이 잠겨 있는 걸 확인하고 곧바로 들고 온 망치로 창문을 깨뜨렸다.
의식을 일은 운전자를 깨울 새가 없었다.
그를 뒤로 젖혀 액셀러레이터에서 발을 떼어낸 후 시동을 껐다. 그리고 차에서 가져온 비상삼각대를, 차량의 뒤로 뛰어가 세웠다.
싸늘한 바람에도 땀이 비 오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힘든 것을 느낄 새가 없다.
뒤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는 차량이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한다면 자신들의 목숨은 한순간에 저승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승용차 운전자는 한참을 흔들어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겨우 눈을 떴는데 목소리가 떠 있었다.
“119에 전화를, 부탁…… 합니다.”
“전화는 이미 했어요. 일단 나가셔야 됩니다.”
차 문을 열고 운전자를 부축해서 자신의 코란도로 향한 후 부랴부랴 갓길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그대로 널브러졌다.
* * *
119에 운전자를 넘겨주고 집으로 돌아온 박종용은 차량의 수리를 맡기고, 가족들과 외식을 하면서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딸들은 돼지갈비를 먹느라 정신없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마누라는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눈을 부라렸다. 아마,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당신 미쳤어!”
“왜 그래?”
“그러다가 죽으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당신 눈에는 나하고 애들이 안 보여!”
“그럼 어떡해. 그냥 내버려 두면 엄청난 사고가 터질 게 분명한데…….”
“지금 다른 사람 생각할 때야. 그러다 당신 죽으면 그 사람들이 고마워 할 것 같아. 괜한 일에 참견해서 개죽음당했다고 웃기나 하지. 생각 좀 하고 살아. 이 원수야!”
말하다가 열이 받은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결혼한 지 18년 만에 장만한 25평 아파트의 대출금이 아직 3천만원이나 남았는데, 자신이 잘못된다면 가족은 고통스러운 삶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이제 몸까지 돌린 재 박종용을 노려보며 화를 내기 시작했는데 생각할수록 아찔한 모양이었다.
휴우…. 괜히 말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자신만을 믿고 살아온 마누라에게 잘못하면 죽을 뻔했다는 말을 하다니,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바보처럼 웃으며 마누라를 달랬다.
“내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데 죽을 짓을 했겠어. 이것저것 다 따져보고 들어갔지. 랭 좀 친 거 가지고 월 그래.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하여간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짓 하지 마. 당신 죽으면 우린 전부 같이 죽는다는 거 잊지 말라고!”
“알았어.”
마누라가 본격적으로 화를 내기 시작한 것은 9시 뉴스에서 그의 영상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에 설치된 CCTV를 통해 그가 의식을 잃은 운전자를 구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송되었는데 앵커는 그를 의인으로 추켜세우며 연신 이런 행동을 본받아야 된다고 떠들어댔다.
볼수록 위험한 장면.
화면을 본 마누라는 박종용을 향해 눈물까지 글썽이며 화를 냈는데, 목이 멜 정도였다.
그녀의 눈으로 봤을 때 박종용의 행동은 죽으려고 환장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를 달래느라 생고생을 했다.
괜한 만용을 부려 마누라를 걱정시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머리를 흔들면서 변명을 하느라 애를 썼다.
전화벨이 무섭게 울리기 시작한 것은 뉴스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박종용 선생님이시죠. 저는 문화일보의 정찬우 기자입니다.
지금 집 앞에 와 있는데 잠시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요?”
* * *
참 귀찮아 죽겠다.
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별 것 아닌 일에 신문 기자들이 시도 때도 없이 쫒아와 인터뷰를 요청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회사까지 알게 되었다.
“박 부장, 자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런 거야. 무슨 영웅 놀이를 그렇게 심하게 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겁니다.”
“네가 만약 잘못됐어 봐라. 가족들과 회사를 생각해서라도 조심해야지. 나이가 오십을 바라보는 사람이 그게 원 짓이야. 안 그래?”
“예, 사장님.”
할 말은 많았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언론에 한 번 이름이 나온 이후로 수많은 사람의 잔소리를 들었다. 가족 친지들은 물론이고, 친구들과 회사의 상사들까지 잘했다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은 남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돌아온 것은 언론에 난 몇 줄의 기사와 지인들의 잔소리뿐이었다.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흔들며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그런 거지. 이번 일은 인생을 살면서 스쳐 지나가는 작은 소란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어디야. 신문에 얼굴까지 나왔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만족할 일 아닌가.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시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득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나, 남들의 황당해하는 시선과 가족들의 원망 소리가 귀에 생생했기 때문이었다.
어이없는 일이 발생한 것은 회사에 복귀한 후 정신없이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삐리리링… 삐리리링…….
계속 울어대는 전화벨 소리에 박종용은 인상을 북북 긁으며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마침 콘크리트 압축강도를 시험하기 위해 몰드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는 중이었고, 장갑을 껴 행동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전화번호다.
“여보세요?”
“박종용 씨 인가요?”
“그렇습니다만. 어디시죠?”
“여기는 피닉스 전자 경영전략실입니다. 곧 우리 회사 홍보실에서 박 선생님을 찾아갈 겁니다.”
“왜요?”
“선생님께서 저희 회사의 '올해 영웅상'에 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 소립니까. 월 바라고 한 거 아니니까 저 좀 내버려 두 세요. 귀찮아서 일할 수 없단 말입니다.”
“하하…. 그리 크게 귀찮게 해드리지 않을 겁니다. 시상식에만 참여해 주시면 되거든요.”
* * *
반드시 부부동반을 해서 와 달라는 홍보실장이란 사람의 말을 듣고,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소정의 상금과 상품을 준다고 했기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막상 시상 당일이 되자 꺼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한참이나 지난 일이었고 남에게 칭찬을 받고자 한 일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상을 받는다는 게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이미 피닉스 전자 쪽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고급승용차를 대 놓고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한숨을 길게 내리 쉰 후 오랜만에 화장을 한 마누라와 함께 승용차에 올라탔다.
가는 동안 최고급 승용차의 내부를 구경하며 이것저것 만져대는 마누라의 행동을 감시하느라 상을 받으러 간다는 사실조차 까먹었다.
그의 입이 떡 벌어진 것은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였다.
수없이 몰려든 기자.
그리고 검은 양복을 입은 피닉스 전자의 경영진과 직원들의 행렬.
승용차가 도착하자 홍보실장을 비롯해서 국내 최대기업인 피닉스 전자의 사장이 직접 마중을 나와 있었다.
하아…. 이게 원 일인지 모르겠다.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 그들의 손에 이끌려 시상식장에 들어가자, 거의 1,000명에 달하는 피닉스 전자의 직원들이 전부 일어나 뜨겁게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을 돌려 살펴보다 KBS를 비롯해서 삼대방송국의 카메라가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건 그냥 상을 주는 게 아니라 전쟁에서 돌아온 영웅을 맞이하는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를 가장 놀라게 만든 건 이틀 전에 입국했다는 최강철이 웃은 얼굴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었다.
“박 선생님, 선생님을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선생님께서 다른 이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선 용기는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될 것입니다.”
“아이고…. 별말씀을…….”
“사모님, 이렇게 훌륭한 분과 함께 하시니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부군께서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용기를 지니신 분입니다. 이게 다 옆에서 내조해 주신 사모님의 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마누라는 아예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최강철을 보는 순간 마누라는 망부석처럼 움직이지 못했는데 말을 붙여오자 벙어리처럼 버벅거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