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6장 미래 전략 - 2 >
윤성호와 이성일이 맥주를 싸 들고 집으로 쳐들어온 것은 저녁을 먹은 후 뉴스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을 때였다.
이 사람들이 온 이유는 뻔하다.
입국해서 방어전이 잡혔다는 이야기만 던진 후 체육관을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쫒아온 것이 분명했다. 입국하자마자 정신없이 바빴다.
제주도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삼성전자와 대우조선에 관한 일들을 처리하다 보니 그들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문을 열어주자 도끼눈을 부릅뜨고 최강철을 노려봤는데, 반항이라도 하면 금방 잡아먹을 기세였다.
“너, 죽을래!”
“그러지 않아도 내일 정도에 체육관으로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허이구, 잘도 그랬겠다.”
“정말이에요.”
“이놈이 나이가 들수록 거짓말만 늘어. 처음 복싱 시작할 때는 시합이 잡혔다는 소리만 들어도 훈련하자며 달달 볶더니, 이젠 아주 천하태평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아무래도 이 자식이 우릴 백수로 만들려고 작정한 것 같아요.”
중간에서 이성일이 끼어들며 협공을 가했다.
그 모습에 최강철의 얼굴에서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들만 만나면 편안하고 행복하다.
사업이나 교류를 위해 사람들을 만날 때는 언제나 마음 한쪽에 부담감을 가졌지만, 이들에게는 모든 것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런데 왜 맥주는 가져오셨습니까?”
“내일부터 널 죽일 거니까. 이건 죽음을 앞둔 놈에게 주는 최후의 만찬이다.”
“이왕이면 쥐포도 사오지 그랬어요.”
“오징어 있잖아!”
“쥐포가 더 맛있다니까요.”
“그냥 처먹어 인마.”
크크크…….
둘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이성일이 들어오면서 최강철의 엉덩이를 두드린 건 보너스였다.
부랴부라 상이 차려지고 맥주와 안주로 준비해 온 땅콩, 오징어가 꺼내졌다.
여자가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고 했는데, 이들도 그에 못지 않았다.
워낙 오랜 세월을 같이 보냈으니 할 말도 많고 추억도 많았다.
윤성호와 이성일은 번갈아 가며 최강철이 미국에서 한 짓에 대해 물어왔는데, 특히 아이에 관한 것과 챠베스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지영 씨는 어쩔 셈이나?”
“곧 한국으로 들어올 거야. 지금 정리하고 있으니까, 빠르면 내년 초에는 들어올 수 있어.”
“집도 새로 장만해야겠네. 신혼인데 여기서 살 수는 없잖아.”
“그래야겠지.”
“이 자식아, 돈도 많은 놈이 이젠 좋은 데서 살아라. 내가 알아봐 줄까?”
“됐다. 인마.”
“아들이면 좋겠지?”
“아뇨, 전 딸이 더 좋아요. 아들놈들은 속을 썩이거든요.”
“너 같은 아들이면 된다. 너희 부모님은 너 때문에 많이 행복해하시잖아.”
“왜 이러십니까. 갑자기?”
윤성호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칭찬을 하자 최강철이 가자미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이럴 때마다 뭔가 다른 말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성호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강철아, 너 복싱 언제까지 할 거나?”
“할 때까진 해야죠. 챠베스와시합을 할 때까지는 기다려야 되지 않겠어요?”
“그놈이 끝내 응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기다리다 안 되면 내가 내려갈 생각입니다.”
“그건 안 돼!”
“관장님이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기 때문에 드린 말씀입니다. 아마, 관장님도 제가 복싱을 접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셨을 거예요. 그렇죠?”
“귀신같은 놈.”
윤성호가 맥주잔을 들어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맞는 말이다.
최강철의 나이는 벌써 35살이었고 방어전을 끝내면 곧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복싱선수로는 전성기가 될씬 지난 나이였으니 명예로운 은퇴도 생각해야 할 시기가 되었다.
하지만, 최강철의 반응은 자신이 예측한 그대로였다.
“저는 동 싸고 밑을 닦지 않은 것처럼 복싱을 접고 싶지 않습니다. 시작을 했으니 마무리를 깨끗하게 끝내야죠.”
“챠베스는 슈퍼라이트급에선 상대할 자가 아무도 없다. 그놈은 신이 빚은 복서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위대한 선수야. 물론 네가 챠베스 보다 못하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과도한 감량을 한 재 싸우면 절대 이길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나. 네 꿈이 원지 알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패배를 하고 은퇴하느니 시기를 봐서 명예롭게 끝을 내는 게 좋아. 국민들을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강철아, 관장님 말씀이 맞다. 절대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돼.”
윤성호에 이어 이성일 까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하자, 최강철이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직 챠베스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뭐해, 일단 마셔. 관장님도 드세요.”
잔이 들렸고 최강철로 인해 분위기가 풀어졌다.
맞는 말이다. 나중 일을 가지고 벌써 고민을 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그들이 가져온 맥주 3병은 금방 비워졌다.
내일부터 훈련을 시작할 선수에게 많은 술을 마시게 할 정도로 윤성호는 어리석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며 훈련 스케줄과 미국으로 넘어가는 일정까지 전부 끝낸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표정은 편안하게 변해 있었다.
“아휴, 아깝다. 조금 천천히 마실걸.”
“네가 자꾸 건배하자고 그랬잖아. 나는 아껴먹고 있었는데!”
“어째 너희는 만나기만 하면 투덕거리나. 어른도 계신데. 하여간 이것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온 나도 대단해.”
“말썽은 관장님이 제일 많이 부렸거든요.”
“하아, 이놈 봐라. 내가 무슨 사고를 쳤는데?”
“인혜 누나 때문에 매일 술 마시고 안 들어와서 우리가 얼마나 찾아다녔는데요. 선수는 내팽개치고 연애에 빠져서 말이지.”
“이놈아, 사랑은 위대한 거야. 사랑가지고 시비 걸지 마라.”
최강철의 말에 새삼스럽게 그때가 생각난 듯 윤성호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정말 오래되었다.
최강철과 보냈던 17년의 세월이 마치 꿈결처럼 지나간 것 같았다.
이성일이 불쑥 입을 연 것은 두 사람이 처음 미국으로 넘어가서 지냈던 이야기를 할 때였다.
“그때, 관장님이 우리 돈 다 따먹었잖아요!”
“무슨 돈?”
“고스톱 쳐서 우리 돈 따먹은 거 기억 안 나요?”
“아, 그거…. 이 자식아 깜짝 놀랐잖아. 코 묻은 돈 따먹은 거 가지고 뭘 그래. 그럼 고수가 따지, 하수가 따냐?”
윤성호의 어깨가 올라갔다.
미국으로 넘어가 시합이 없을 때면, 세 사람은 저녁에 모여 고스톱을 즐겼다.
일가친척 하나도 없는 낯선 땅이었고 두 사람은 영어도 잘 안 될 때였기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생각난 김에 오늘 한판 붙읍시다.”
“허허, 애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어디서 함부로 덤비는 거야?”
“1시간만 칩시다. 딱 10시까지. 오케이?”
“성일아, 오늘 우리 관장님 주머니 탈탈 털어버리자. 가만있어 봐. 화투가 어디 있었는데…….”
최강철이 벌떡 일어나 안방에서 부스럭거리며 한참 찾다가, 거의 5분이 지난 후에야 먼지가 뽀얗게 묻은 화투를 가지고 나왔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올 때 집들이하면서 이성일이 사놓고 간 것이었다.
“덤벼, 오늘 고스톱의 진수를 보여준다. 관장님 돈 잃고 돌려 달라기 없습니다.”
“카카카…. 내가 할 소릴 네가 하는구나.”
“점 100원이야. 외상 이런 거 절대 없어!”
* * *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은 오후 3시 무렵이었다.
대통령이 직접 긴급회의를 소집했는데 사안이 꽤 급했기 때문이었다.
집무실에 모인 사람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 재무부 장관 등 경제계의 주요 인사들이었다.
오늘 대통령이 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기업들의 부도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고금리 정책 때문이었다.
외환위기 속에서 달러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거의 30%에 달하는 고금리 정책을 폈지만, 그것이 기업의 발목을 잡아 고통을 받고 있었다.
실패한 정책.
경제계의 전문가들이 주장한 이 정책은 달러 유출을 막는 효과는 미비했고, 기업들의 어려움만 가중했으니 최악의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대통령은 점점 어려워지는 현실에 불같이 화를 냈다.
대한민국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자들이 머리를 맞댄 재 내놓은 정책이 실패로 나타나 국민들을 더욱 힘들게 만들자, 대통령은 최근 들어 밤잠을 못 자며 괴로워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무슨 수를 쓰든 새로운 정책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었다.
참석자들이 전부 자리에 앉자 대통령이 노구를 이끌고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보고고 나발이고 필요 없다.
이런 상황에서 형식적인 절차는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재무부 장관, 지금 국고에 남은 달러는 얼마요?”
“정확하게 47억 달러입니다.”
“우리가 진 빚은?”
“그게…… 800억 달러 정돕니다.”
“휴우, 그렇게 빠져나갔는데도 아직 그렇게나 많단 말이오?”
“대통령님, 그래도 남아 있는 외재는 장기 저리로 빌린 것들이 많습니다. 악성 단기 재무는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이보시오 재무부 장관, 아직도 그 소리요. 단기재무건 장기 재무건 대한민국이 어려우면 빼내 가는 게 그들의 행태라는 걸 직접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옵니까!”
“……죄송합니다.”
대통령의 고함에 재무부 장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다.
참으로 죽을 맛이다.
힘든 시기에 괜히 장관을 맡아서 생고생하고 있으니, 그의 처지도 참 불쌍하다.
“경제수석, 지금 기업들이 계속 부도나는 이유가 고금리 때문이라면서요. 맞습니까?”
“예, 대통령님. 그렇게 분석되고 있습니다.”
“잘못된 정책으로 기업들을 죽였으면 대책이 나와야 할 것 아니오.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겁니까!”
“그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재무부 장관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서 달러가 더 빠져나가면 국가 부도 사태를 맞게 됩니다. 기업들이 어렵다 해서 정책을 바꾸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그리 죽으나 이리 죽으나 뭐가 다르단 말이오. 기업들이 다 나자빠지면 국가 부도와 뭐가 달라. 당장 고금리 정책을 완화시켜요!”
“대통령님, 달러가…….”
“내가 직접 IMF쪽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겠소. 어차피 그놈들도 발을 들여놨으니 빼지도 못해. 대한민국이 망하면 그자들도 온전할 수 없으니 내가 단판을 지겠습니다.”
대통령이 단호하게 칼을 빼 들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해답은 아니다.
IMF는 대통령의 말대로 그렇게 단순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었다.
달러를 지원하면서 철저하게 알짜기업들과 국가기간망, 보유자원 등을 담보로 잡는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이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원금회수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랬기에 재무부 장관이 천천히 입을 열어 대통령을 향해 직언을 했다.
“대통령님, 지금까지 IMF가 500억 달러를 지원하면서 우리나라의 수많은 자원과 기업이 저당 잡혔습니다. 그들은 시간이 갈수록 악질적인 조건들을 내세워왔으나, 우리는 결국 그들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피눈물 나는 일이지요. 그렇기에 지금은 대통령님이 그들에게 직접 요청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대통령님께서 나선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조건들을 내세울 겁니다.”
“답답하구려, 그럼 내가 어쩌면 좋겠소. 어떻게 해야 매일 자살까지 하고 있는 국민들의 고통을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이오!”
* * *
최강철의 시합이 잡히자 외환위기 속에서 고통받고 있던 국민들의 얼굴에서 흥분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계속 기업들이 부도를 맞고 있지만, 처음 외환위기가 닥칠 때보다 그나마 상황은 나아진 상태였다.
피닉스 그룹을 필두로 기업들이 살아남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했고, 정부가주도한 벤처기업 육성이 서서히 빛을 발하며 경제의 엔진이 서서히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아직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회는 암울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최강철은 피지컬 훈련을 시작했다.
예전과 똑같은 패턴.
윤성호의 스케줄에 맞춰 전신의 근육량을 끌어올리는 훈련은 처음만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금방 숙달이 된다.
이완되었을 뿐 근육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일반인들이 보기엔 전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지독한 훈련이다.
오전 4시간, 오후 4시간 동안 시행되는 각종 체력강화 훈련은 오랫동안 복싱으로 단련한 최강철도 녹초가 될 만큼 힘든 것이었다.
“헉, 헉, 헉!”
런닝머신에서 언리미티드 러닝을 1시간 동안 시행하고 내려온 최강철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매일 마지막 순간에 시행되는 이 언리미티드 러닝은 순간 스피드와 지구력을 동시에 장착하게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훈련이었다.
“물 마셔!”
최강철이 바닥에 쓰러지자 윤성호가 다가와 물병을 내밀었다.
안쓰러운 얼굴.
복서로서 황혼기에 달한 최강철이 아직도 이렇게 미친 듯이 훈련을 하고 있는 건, 그가 가진 부담감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나타낸다.
대한민국의 영웅은 절대 지면 안 된다는 부담감 말이다.
낯선 사내들이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최강철이 물을 마시며 지친 육체를 서서히 회복하고 있을 때였다.
“누구십니까?”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내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윤성호가 입을 열었다.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조치했기에 분명 관원들이 제지했을 텐데, 사내들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그의 앞으로 나서며 어디선가 안면이 있는 사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최강철 선수, 저는 대통령 비서실장 이병준입니다.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