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미래 전략 - 1
피닉스 건설 본사에 근무하고 있는 원가부장 이상표는 동기인 권기웅과 함께 점심을 먹고 커피숍에 들어갔다.
권기웅은 고속도로 현장소장을 맡고 있었는데, 본사 회의차 오랜만에 서울에 올라왔다.
입사부터 가장 친하던 동기였기에 이상표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부둥켜안고 반가움을 숨기지 못했다.
20년이 넘도록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은 건 친구들밖에 없었다.
“기웅아, 얼굴이 새까맣게 탔다.”
“현장이 다 그런 거지 뭐. 저번에 인부가 교량에서 떨지는 바람에 곤욕을 치 렀다. 그렇게 안전교육을 해도 말을 안 들어서 죽겠어.”
“인부들이 다 그렇지. 그 사람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와서 안전이 원지도 잘 모르잖아.”
“그러니까 더 문제야. 본사 방침에 따라 거의 매일같이 귀가 닳도록 떠들어대도 잘 안 돼.”
“그래도 금년 상반기에 우리 회사가 안전 최우수 회사로 뽑혀서 장관상을 받았다. 워낙 철저하게 관리했더니 안전사고가 반으로 확 줄었어. 뭐든지 원칙대로 열심히 하면 성과가 나와.”
“그건 그렇지. 그런데 상표야, 우리 그룹이 재계 서열 1위에 올랐다는 게 사실이나?”
“예측이야, 하긴 아직 발표되진 않았지만 확실해. 삼성전자만 들어와도 가뿐하게 1위로 올라서는데, 대우조선까지 인수한다니 발표는 보나마나야.”
“크크… 내가 전생에 착한 일을 많이 한 모양이다. 정동 그룹 무너질 때는 하늘이 노랗더니, 이게 무슨 일이라나. 요즘 마누라가 신나서 펄쩍펄쩍 뛰어다닌다.”
“왜?”
“왜긴,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이전보다 오히려 월급이 올랐잖아. 동네 아줌마들한테 피닉스에 다닌다고 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단다. 남편이 피닉스 부장이라면 껌뻑 죽는다는구먼.”
“그건 나도 그래. 요새 마누라가 나를 하나님처럼 모셔.”
커피를 마시며 두 사람이 유쾌하게 웃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다.
정동 그룹이 부도가 났을 때는 자신의 인생이 끝난 줄 알았다.
젊은 시절을 정동 건설에서 보내며 아이들을 키웠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직장을 그만둘 때도 꿋꿋이 버텼다.
정동 건설을 자신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으니 버릴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바보라며 손가락질했으나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배신하기에는 그들의 삼성이 너무 강직했다.
하긴 어리석은 짓이기도 했다.
가족들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의 입장에서 자신만의 고집을 부린다는 건, 어쩌면 이기적인 행동이었는지도 모른다.
고집을 부렸지만 자연스럽게 마음이 위축되었고 행동이 제한되었다.
그런 와중에 마이다스 CKC가 정동 그룹을 인수하면서 기적처럼 그들의 인생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정말 꿈도 꿔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창업주의 2세가 경영에 들어오면서 엉망으로 변했던 그룹의 면모가, 새로운 전문경영인을 맞이하며 일신하더니 피닉스 그룹은 단시간 만에 국내 최고의 기업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건설의 매출액은 마이다스 CKC가 인수하고 피닉스로 회사명을 바꾼 후 무려 3배나 뛰었다.
시장의 평가는 업계 최고등급을 확보해서 돈을 빌려주겠다는 은행들이 줄을 섰지만, 마이다스 CKC는 절대 그들의 자금을 차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이상표의 웃음이 그친 것은 권기웅이 노조 이야기를 꺼냈을 때였다.
“상표야, 이번 추투(秋關)에 우리 노조도 가담한다고 소문이 돌던데 그게 사실이나?”
“어떤 새끼가 그래!”
“우리 현장에 있는 애들이 그러더라고. 그룹 계열사별로 민노총에 가입해서 추투에 참여할지 모른다고.”
추투!
민노총에서 주관하며 노동자의 권리확보를 위해 시행하는 가을 투쟁의 줄임말이었다.
어쩌면 이번 추투는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
기업마다 불법해고가 판을 쳤고 임금이 밀린 회사가 한 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벌써 죽기 살기로 싸우겠다는 투지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러나 피닉스는 다르다.
불법해고는 물론이고 임금이 밀린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미친 새끼들, 우리 회사 임금은 국내 최고수준이야. 무슨 문제가 있어야 싸우든지 말든지 하지. 그런데도 정신을 못 차리고 지랄들을 떨고 있어. 그건 절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그럼 헛소문이나?”
“노조 간부 몇 놈이 그렇게 선동질을 하는 모양이더라. 하지만, 그건 절대 안 돼. 사장님은 취임하신 후 그동안 노조가 하는 일에 무조건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어. 그래서 지금까지 노조가 원하는 것은 대부분 들어줬더니, 노조 간부 이 새끼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거야.”
“그 씨발 놈들 미친 거 아니나?”
“내일 노조가주관하는 투표가 열린다. 거기서 민노총 가입 찬반이 결정될 거야. 사장님이 어제 경영 회의 자리에서 임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대. 가입은 노조가 지닌 기본적인 자유의사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겠지만, 민노총에 가입하는 것으로 결정된 계열사들은 그룹에서 이탈시키고 마이다스의 자본이 회수될 거라 공표하셨어.”
“그 말은 민노총에 가입하는 계열사는 죽이겠다는 뜻이잖아.”
“맞아. 내가 알기로 그건 사장님의 의지가 아니라 마이다스 CKC 쪽 결정인 것 같아. 그들은 노조가 추투 같은 것 때문에 회사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면 언제라도 회사를 죽일 수 있는 사람들이야.”
“하아, 정말 그렇게 되면 큰일이잖아.”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당장 우리 건설 쪽도 노조 간부 몇 놈이 그런 소리를 했다가 박살이 났어. 당장 노조에 호의적이었던 젊은 애들부터가 결사반대야. 내 생각에 이번 노조 집행부는 노조원들에게 쫓겨날 거다. 지금 분위기가 그래.”
“개새끼들 당연히 그래야지. 그런 새끼들은 우리 현장으로 보내 줘. 내가 터널 현장에 집어넣고 코피가 나올 때까지 돌릴 테니까.”
“회사가 잘못되면 수많은 직원이 눈물을 흘린다. 그런 일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돼. 경영증이 노조 활동을 반대하는 것도 아닌데, 왜 굳이 민노총에 가입해서 쓸데없이 투쟁을 해.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해결하면 되는 거야.”
“당연한 말이지. 그럼… 당연하고, 말고!”
* * *
최강철의 지시로 인해 이무송과 부사장급인 기술연구소장 장후복이 제우스로 호출된 것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였다.
현재 피 닉스 그룹의 위상은 외환위기 속에서도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비록 대우조선 인수와 관련된 언론 보도가 터지며 부정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마이다스 CKC 쪽에서 언론홍보를 통해 모든 부재를 떠안을 정도로 충분한 자금이 있다는 것을 공표했기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대우조선을 피닉스 그룹에 편입시켜 세계 제일의 선박제조회사로 키우겠다는 플랜을 발표하자, 언론의 반응은 금방 긍정적으로 변했다.
외환위기 속에서 거듭되고 있는 마이다스의 행보에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이다스가 최근 들어 보여주고 있는 일련의 행보들은 대한민국 경제계를 발칵 뒤집어 버릴 정도로 태풍의 연속이었다.
“사장님, 마이다스 쪽에서 갑자기 호출한 이유가 월까요?”
“글쎄요, 나도 그것 때문에 한참 고민을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릿속에 떠오른 건 한 가지뿐이더군요.”
“그게 뭡니까?”
장후복이 궁금하다는 듯 이무송을 바라봤다.
사장이라고 해서 절대 꿇리지 않는 모습.
그는 MIT공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후 미국의 GE와 IBM에서 20여 년 동안 상임연구원으로 재직했다. 그리고 3년 전 삼성에 스카우트 된 사람이었다.
조직 생활에 약하다.
평생을 연구에만 전념해 왔기 때문에 한국사회가 요구하는 위아래에 대한 예의 같은 건 몸에 배어있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무송도 그의 행동에 불쾌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2차 구조조정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삼성 종수와 관련된 자들은 대부분 제거했지만, 아직도 예전에 저지른 불법과 관련한 자들이 남아있거든요.”
“그렇다면 저는 왜 부롭니까. 혹시 연구소 쪽도 자를 생각인가요?”
“그건 두고 봐야지요.”
장후복의 질문에 이무송이 말을 흐렸다.
정말 그렇다면 문제다. 연구원들은 삼성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자산인데, 회사가 바뀌었다 해서 종수 일가와 관계가 있다고 단칼에 쳐 낸다면 많은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마이다스 CKC의 건물이 눈앞으로 나타나자 두 사람의 대화가 멈췄다.
테해란로에 있는 마이다스 CKC 건물은 작년에 인수한 25층 짜리 빌딩으로, 지어진 지 7년밖에 되지 않았다.
현관에 차를 댔으나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잠시 당황한 태도를 보이다가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무시?
무시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오만일 수도 있었기에 불쾌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이무송은 표정을 숨기고 마이다스 CKC의 사장실로 올라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장실 앞에 신규성이 나와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불쾌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이다스 CKC 한국지부를 담당하고 있는 신규성은 이무송의 목숨을 단칼에 자를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이구, 사장님. 사무실에 계시지 않고요!”
“그럴 수가 있나요. 피닉스 전자의 사장님이 오시는데 제가 마중을 해야지요.”
“감사합니다.”
이무송이 몸 둘 바를 몰라 했지만, 장후복은 멀뚱거리며 신규성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지금까지 신규성을 만난 적이 없었고 이 자리에 오는 것 자체를 마땅치 않게 생각한 사람이었다.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에게도 위축되지 않는다.
그는 미국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으며 연구했던 사람이었기에 고개를 숙이는 짓은 절대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건 오히려 신규성이 먼저였다.
“장 박사님, 처음 뵙습니다. 저는 신규성이라고 합니다.”
“아…… 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전자공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석학이시라 들었습니다. 이제야 인사하는 걸 용서하십시오.”
떨떠름한 모습으로 서 있던 장후복이 그때야 표정을 풀고 어색하게 신규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도 귀가 있으니 신규성에 관한 소식은 들었다.
마이다스 CKC의 실세로서 피닉스 그룹의 회장 역할을 한다고 했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공손히 인사를 하자 더 이상 어깨를 부풀리며 서 있을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
신규성은 장후복과 인사를 나눈 후 시선을 이무송에게 돌렸다.
“사장님, 들어가시기 전에 알아두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지금 안에 회장님이 와 계십니다. 사장님을 부른 건 회장님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
“회장님이라니요?”
“마이다스 CKC의 실질적인 주인이시자, 피닉스 그룹의 회장님을 말하는 겁니다.”
“아이고!”
신규성을 말을 듣자마자 이무송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장후복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타임지를 봤기 때문에 마이다스 CKC의 회장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계 최고의 부호이자 베일에 싸여 있는 신비의 인물.
그 사람이 자신들을 불렀다는 말에 이무송과 장후복은 어쩔 줄 모른 재 신규성을 바라보다가 급히 자신들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사람한테 만큼은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본능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두 사람이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게 보였다.
신규성의 뒤를 바짝 따라 들어가던 이무송이 상석에 앉아 있는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고 발걸음을 멈춘 채 우뚝 섰다.
너무나 의외의 인물이 앉아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경직되었던 것이다.
“사장님, 반갑습니다. 장 박사님도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최강철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을 향해 다가오자 이무송과 장후복이 황당한 표정을 지은 재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국민 영웅 최강철이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이 자리에 있단 말인가?
그때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신규성이 슬그머니 나섰다.
“인사하시죠. 마이다스 CKC의 회장님이십니다. 아마 두 분도 잘 알고 계신 분일 겁니다.”
“정말…… 입니까. 최강철 선수가 정말 마이다스 CKC의 회장님이란 말입니까?”
도저히 묻지 않고는 버틸 수 없었다.
말이 되어야 수긍을 하든가 말든가 할 거 아닌가.
그랬기에 이무송은 최강철을 바라보기만 했을 뿐 내민 손을 잡지도 못했다.
“일단, 앉으시죠.”
어이없어하는 그들을 향해 최강철이 따뜻한 미소를 보이며 먼저 자리에 앉았다.
그들로서는 마치 귀신을 본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마이다스 CKC의 회장이란 신분이 아니라 복싱영웅 최강철을 직접 봤다 해도 놀라 뒤집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니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은 그들에게 신규성이 직접 차를 타와 앞에 놓아주자 최강철의 입이 열렸다.
“많이 놀라셨을 겁니다. 제가 마이다스 CKC를 미국에서 연 것은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최강철은 시간을 들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들에게 해줬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들의 얼굴은 놀람으로 인해 수시로 변했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양손을 비비며 흥분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두 분을 이곳에 모신 것은 특별히 두 분께 할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휴우…… 말씀하십시오.”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못한 이무송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오랜 세월 수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해 온 그였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정심을 찾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제가 피닉스 전자를 인수한 것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첫째는 피닉스 전자를 대한민국의 미래로 만들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비룡과 대우조선에 들어가야 할 첨단기술들을 보좌해 줄 전자회사가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재벌들의 불법적인 운영과 증여 같은 건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했습니다. 저는 피닉스 전자의 주식을 쓸어 담아, 전자에서 번 돈으로 비룡과 대우조선을 키워 볼 생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닉스 전자가 세계를 제패하는 기업으로 성장해야 됩니다. 이걸 보시죠.”
최강철이 탁자 옆에 두었던 서류를 꺼내 두 사람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후 자신이 먼저 서류를 넘기며 그동안 준비해 놓았던 미래기술들을 꺼내 들었다.
안드로이드 운영체계를 비롯해서 스마트 TV 제4의 혁명이라 불리는 인공지능, 스페이스비전, 가상현실, 로봇 등이 그의 입에서 줄줄이 열거되었다.
이것들을 먼저 선점한다.
세계의 그 누구도 절대 따라오지 못하도록 과감한 투자와 연구개발로 피닉스 전자를 성장시키는 게 최강철의 계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