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5장 공룡을 잡다 - 7 >
최강철이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삼성전자에 대한 경영권을 완벽하게 장악한 후였다.
일사천리.
마이다스 CKC를 대표한 신규성에 의해 긴급 주주종회가 열렸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장이 선임되었다.
삼성전자의 신임사장은 신규성이 추천한 이무송으로 결정되었는데, 그는 옥스퍼드를 졸업한 후 GM에서 20년을 근무하며 부사장까지 올랐던 사람이었다.
주주종회의 안건은 사장교체 건도 있었지만, 더 큰 결정은 삼성전자라는 타이틀을 버리고 피닉스 전자로 상호명을 바꾸는 것 이었다.
반대하는 주주들의 이유는 신빙성이 중분했다.
그동안 삼성전자란 명칭으로 신뢰를 쌓아왔는데 갑작스럽게 명칭이 바뀐다면 시장의 반응이 나빠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대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마이다스 CKC의 주장대로 삼성전자는 피닉스 전자로 탈바꿈되었다.
마이다스 연합이 가진 37%의 주식에 우호지분까지 합쳐졌으니 신규성의 주장을 꺾을 수 있는 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오랜만에 최강철은 본 신규성과 김도환은 무척 반가워했다.
“회장님, 방어전이 결정되었더군요. 11월이죠?”
“랭킹 4위인 카라발롭니다. 장소는 미국이고요.”
“이번에는 얼마나 받습니까?”
최강철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자 김도환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김도환은 아직도 복싱에 빠삭하다.
오랜 세월 복싱 전문기자를 했기 때문인지 그는 아직도 매달 링지를 구독하면서 랭킹에 들어있는 선수들의 이름을 줄줄 외웠다.
“2,500만 달럽니다. 아무래도 빅 이벤트가 아니니까요.”
“그게 적나요. 지금 환울로 따지면 500억이 넘습니다. 일반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돈이에요.”
“일반인들뿐인가요. 저도 그 돈을 벌려면 몇백 년 일해야 하는데요.”
김도환의 말에 신규성이 불쑥 나섰다.
그의 연봉이 2억이었으니 정확하게 250년이 걸린다.
신규성이 우는 표정을 짓자 김도환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연봉으로 얼마나 걸리는가 계산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들의 연봉은 국내 그 누구보다 최고수준의 대우를 받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이 단판승부로 벌이는 돈에 비한다면 조족지혈이다.
한국에 들어온 지 3일 만에, 최강철은 그들을 점심에 초대해서 자리를 갖고 있는 중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추진경과를 듣고 앞으로의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었다.
“챠베스 그놈은 정말 안 한 답니까?”
“올라오기 싫다네요.”
“하아, 그거 정말 죽이지도 못하고 어쩌죠. 그 자식 당당하게 올라와서 싸우면 얼마나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와 싸우는데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고 싶겠어요.”
“체급만 맞았으면 죽여주는 경기가 되었을 텐데, 아까워 죽겠네. 그놈과 회장님이 붙었다면 개런티로 한 오천만 달러는 받았을 겁니다. 안 그래요?”
“하하… 꿈도 크군요.”
“신이 빚은 복서. 크으, 아쉽다. 아쉬워……. 전 체급을 통틀어 가장 테크닉이 좋은 두 사람이 붙을 기회였는데, 이렇게 엇나가다니 아쉬워 죽겠네요.”
“제가 내려가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건 절대 안 되죠. 무패의 전적에 오점을 남길 생각이세요. 그렇게 감량을 하면 서 있기도 힘들어집니다. 차라리 그냥 은퇴하세요. 이제 회장님 나이도 35살입니다. 이번 방어전 끝나면 36살이라고요. 돈 때문에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도 나이가 꽤 되었네요.”
“도대체 언제까지 하실 생각입니까?”
“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에요. 앞으로의 계획도 있고
“아기는요?”
“저도 이제 곧 아기 아빠가 됩니다. 지영 씨가 한국에 오기 전, 알려주더군요, 2개월 되었답니다.”
“아이고, 잘됐네요. 잘됐어. 그렇지 않아도 사모님 나이가 있어 걱정했는데, 더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김도환과 신규성이 필쩍필쩍 뛰자 최강철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밥을 먹으며 온통 화제는 최강철이 가지고 온 기쁜 소식에 집중되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하며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순간과 키우면서 가졌던 고중들을 털어놨는데, 대부분 비슷한 말들이었다.
이 사람들은 알까.
자신도 오래전 두 명의 아이를 낳고 길러봤다는 사실을.
최강철이 그들의 입을 틀어막은 건 식사가 거의 끝나갈 때였다.
“신 사장님, 큰일은 모두 끝났군요. 이제 후속 작업을 해야 할 텐데 정리는 시작하셨습니까?”
“예, 일주일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먼저 종수 쪽의 인물들을 한꺼번에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무상태와 그동안의 입, 출납 구조를 면밀히 살피는 중입니다. 대중 봤지만 엉망이더군요. 이 정도로 삼성전자가 엉망인 줄 몰랐습니다. 구멍가게가 따로 없어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총수쪽으로 들어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예요. 더군다나 비자금을 만든 흔적들이 여기저기 묻어나왔는데, 사용처가 불분명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탈탈 털면 얼마나 나올지 모르겠습니다.”
“두 가지겠죠. 하나는 정치권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또 하나는 외국의 비밀계좌에 들어 있을 겁니다.”
당연한 말이다.
재벌들이 비자금을 조성하는 건 오직 자신들의 안위를 위함이었으니, 사용처는 불을 보듯 뻔했다.
김도환이 슬그머니 나선 것은 이 상황이 답답했기 때문이었다.
“찾아볼까요. 이번에 제우스팀에 국정원 출신들이 5명이나 들어왔습니다. 개들을 이용하면 뭔가 나올 것도 같은데요.”
“아뇨, 항복하고 물러선 적장의 목은 베는 게 아닙니다.”
“그대로 두면 계속할 테니 그게 문제죠.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놈은 어딜 가서라도 똑같은 짓을 할 겁니다.”
“그냥 두고 보겠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워낙 자금을 불투명하게 운용하면서 자신들의 뱃속을 재웠기 때문에, 투자자들이 극심한 피해를 보고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죠. 몇 놈을 색출해서 박살을 내면 더 이상 그런 짓 못 하게 될 겁니다.”
“아주 감방에서 못 나오게 만들어야 합니다. 종수라도 자기들 재산은 불과 5%도 안 되는 놈들이, 기업을 맘대로 주무르며 쓰레기장으로 만들고 있으니 그런 놈들은 다 죽여 버려야 해요.”
김도환이 거품을 물자 최강철이 싱긋 웃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직은 아니다.
재벌들의 고질적인 병폐를 고치기 위해서는 당당하게 그들을 단죄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자신에게는 아직 그런 힘이 없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슬쩍 눈을 돌려 다시 신규성을 바라봤다.
“부재상태는 어떻던가요?”
“은행융자가 800억 정도가 됩니다. 외재도 2천만 달러 정도가 있고요.”
“다행히 부재는 그리 크지 않군요.”
“문제는 현재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겁니다. 가전 분야를 비롯해서 컴퓨터의 매출액이 계속 감소하는 중이고, 주력인 반도체 국제가격도 떨어지는 중이에요. 이대로라면 적자폭이 커질 겁니다. 총수가 삼성전자를 던진 게 이해될 정도예요.”
“연구원들을 중원하세요. 그것도 최고의 인재들을 스카우트 하십시오.”
“적자폭이 커지고 있다니까요!”
“그러니까 말이죠. 이럴 때 더욱 베팅을 해야 합니다. 최고의 인재들은 위기 속에서 커나가는 겁니다.”
“하아, 우리 회장님 정말…….”
신규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항복을 표시했다.
어쩌면 당연한 지시였을지 모르지만, 현재 상황을 본다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대부분의 기업은 몸집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었다.
어떡하든 지금의 위기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자금의 지출을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자금이 넉넉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물 쓰듯 쓴다면 얼마나 버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강철의 입이 다시 열린 것은, 그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터트린 후였다.
“신 사장님, 피닉스 전자의 주식을 계속 걷어 들이세요. 앞으로 피닉스 전자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될 겁니다. 그러니 물량이 나오는 대로 무조건 당겨 오십시오.”
“얼마나요?”
“될 때까지. 물량이 나오는 한 모두.”
“휴우, 아예 다른 투자자들의 씨를 말리실 생각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저는 피닉스 전자의 주식을 마이다스 CKC가 모두 소유하기를 원합니다.”
“도대체 왜요?”
“마음대로 돈을 쓰고 싶기 때문이죠. 제가 원하는 대로 말입니다. 아무 제약 없이.”
뜻은 알겠다.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 피닉스 전자가 향후에 얼마나 성장할지 모르지만, 지금으로 봐서는 이제 겨우 반도체에 진입해서 성과를 보이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 피닉스 전자가 무너진다면 마이다스 CKC는 엄청난 피해를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그랬기에 신규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회장님, 아무리 좋은 회사도 몰빵은 하는 게 아닙니다. 투자의 기본은 위험을 최소화하는 거잖습니까. 차라리 그 돈으로 유망한 다른 기업들을 장악하는 게 낫습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제가 확신하죠.”
이런 젠장. 또 이런다.
최강철이 눈가에 가득 든 웃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신규성이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지금의 마이다스 CKC가 어마어마한 자산을 확보한 것은 전부 최강철의 지시로 인한 것이었다.
실무에 끼어들어 시시콜콜 간섭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그려낸 밑그림에 따라 움직였더니 불과 300억으로 시작했던 투자자본이 벌써 4조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최강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렇기에 이젠 더 이상 반박하며 반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입은 또다시 떠억 벌어졌다.
“신 사장님, 우리 자본 중에서 2,000억을 빼내세요.”
“2,000억요? 지금 자본은 전부 주식과 부동산에 들어가 있는 상태입니다. 대우조선을 인수하려고 손해를 보면서 1,500억을 확보한 게 얼마나 된다고 또 그러세요. 그 돈을 마련하려면 아까운 주식들을 처분해야 합니다.”
“처분하세요.”
“사용처는요?”
“최대한 빨리 자금을 마련해서 현재 움직이고 있는 IT 벤처기업들의 지분을 확보하십시오.”
“IT 벤처기업이라뇨. 그런 눈곱만한 회사들을 왜 건드린단 말입니까?”
“정부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곧 벤처육성방안을 내놓을 겁니다. 그래서 선제적으로 움직일 필요성이 있습니다.”
“허어…….”
“창업하는 대로 가리지 말고 지분을 확보하세요. 새롬기술, 한글과 컴퓨터, 로커스, 핸디소프트, 다음, 네이버 등 가리지 말고 쓸어 담으시면 됩니다.”
“걔들 규모야 뻔합니다. 회사당 기껏 몇십 억이면 지분을 전부 장악할 수 있어요. 더군다나 우리가 나서면 시장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체급이 맞지 않으니까요.”
“당연한 말씀을…. 그러니까 마이다스 CKC가 직접 나서면 안 되죠. 아시잖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끝내면 되는 거죠?”
“올해 안으로 끝내야 합니다. 반드시, 내년부터는 사고 싶어도 살 수 없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로 피닉스 전자 사장으로 취임한 이무송 씨를 만나야겠습니다.”
“이 사장을요?”
이번에도 신규성의 눈이 커졌다.
최강철은 피닉스 그룹을 탄생시킨 이후에 그룹사장단을 만난 적이 없었다.
심지어 계열사 지주회사인 피닉스 건설 사장까지 만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룹 사장들은 아예 그룹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신규성이라 알 정도였다.
“제가 그 사람한테 말할 게 있습니다. 여기 있는 두 분과 같이 만나는 것으로 하죠. 이무송 사장한테는 기술연구소의 소장과 함께 나오라고 지시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또 어떤 놀라운 일을 벌일지 궁금하다.
최강철이 하는 행동은 그냥 심심해서 만들어 내는 게 하나도 없었으니, 신규성은 대답을 하면서도 궁금증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최강철은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대신 김도환에게로 눈을 돌렸다.
“김 사장님, 그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아직 입니다. 아무래도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는 내년 이후에야 가능할 겁니다. 지금 상황에서 그걸 꺼내는 건 시기상조에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이런 위기상황에서 개헌을 한다는 건 어렵겠죠. 하지만, 철저히 준비해 놔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정의당이 개헌에 대한 관련 사항들을 꼼꼼히 체크하고 있습니다. 천천히 물밑에서 냄새를 풍기고 있는 중입니다.”
“반응은요?”
“나쁘지 않습니다. 집권당은 당연히 찬성이고 제1야당도 칼을 꺼내 들면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자들은 이번 대선에서 진 것이 외환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영남 세력을 기반으로 충분히 이겼을 거라는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사장님이 제우스를 움직여서 서서히 여론을 형성시키세요. 대통령 단임제의 탄생배경과 왜 연임제가 필요 한지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주면 국민들도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