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5장 공룡을 잡다 - 6 >
역시 여우다.
한 번에 두 가지를 꺼내 들어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수법은 그의 부친과 닮았다.
총수가 말한 집권당 운운한 것은 삼성이 그동안 지원해준 것을 잊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고, 대한정의당에 대한 것은 마이다스 CKC가 집권당에 결코 이롭지 못한 존재라는 걸 부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쉽게 말려들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마이다스 CKC를 이끄는 사람이 한국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은밀히 미국 쪽에 확인해 본 결과 맞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나는 미국에 친구들이 많거든요.”
“그가 누군지 가르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그게 정확하지 않아서…….”
총수는 대통령의 태도를 보면서 의심쩍었으나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원가 아는 듯했지만 노회한 대통령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더 찾아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통령님, 정체가 밝혀지지 않는 것도 의심스러운 일입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정체를 숨기겠습니까. 저는 혹시 마이다스 CKC가 미국 즉의 사주를 받은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외환위기도 미국의 자본들이 만들어 낸 거 아니겠습니까. 그 들이 대한민국의 최대기업을 통째로 삼키기 위해 위장전술을 쓰 지 않는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오.”
총수의 말에 대통령의 얼굴에서 쓴웃음이 떠올랐다.
의문에 대한 확신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총수의 표정이 처음으로 변했다.
그가 오늘 이 자리까지 온 것은 무슨 수를 쓰든 마이다스 CKC를 삼성전자에서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3가지를 준비해 왔다.
첫 번째는 마이다스 CKC가 대한정의당을 지지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미국에 대한 의심이었다.
마지막에 대한 것은 이 두 가지에 대한 대통령의 반응을 보고 제시할 생각이었는데 대통령의 확신을 보자 불안감이 확 올라왔다.
“아시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시지요.”
“마이다스 CKC는 국내에서 피닉스 그룹 이외에 다른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업이 방산업체요. 이건 국가의 극비사항이기 때문에 자세한 건 말해 줄 수 없으나 사실이오. 그들은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고 있어요. 아무런 득도 없이.”
“나 역시 삼성전자가 마이다스 CKC에 넘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곳의 회장이 한국 사람이란 게 밝혀진 이상 막을 명분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입장이요. 그들이 여기서 철수 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될 거요. 국가에서는 그들이 방산업체를 세워서 고전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요. 정부에서 할 수 있는 모든 편의를 봐주고 있지만 회사 운영에 대한 자금에 대해서는 어떤 지원도 못 해주고 있단 말이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대통령은 그들의 투자금액을 말하지 않았으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방산업체다.
정확히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이 질색을 할 정도면 소규모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금방 금산 쪽에 비룡이란 회사가 세워졌다는 경영전략팀의 보고 내용이 떠올랐다.
정부의 통제로 인해 언론에서 전혀 보도하지 않았으나, 무려 천만 평 규모의 공장이 세워졌다는 소릴 듣고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었다.
그 정도라면 국내 제일의 규모로서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워낙 외지에 있었고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관심을 끊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게 대통령이 말한 방산업체였던 모양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삼성의 막강한 로비에도 정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구나.
어이가 없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했다.
어떤 미친놈이 그런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국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천하의 둘도 없는 애국자겠지만, 경영을 하는 자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나 다름없었다.
그랬기에 그는 대통령의 얼굴을 바라보며 갈등 속에 사로잡혔다.
이런 상황이라면 마지막 제안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입을 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가지고 있는 삼성전자에 대한 미련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가업을 자신의 대에서 뺏긴다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대통령님, 그들이 왜 그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마이다스 CKC가 대한정의당을 지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요하다면 제가 증거자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내 편이 아니면 적이지 않습니까. 무섭게 성장하는 대한정의당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통령님께서 삼성을 안아주셔야 됩니다.”
“음…….”
“대통령님, 삼성은 신의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저희 손을 잡아주시면 중심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저를 믿어주십시오. 삼성전자는 대한민국의 대표기업입니다. 그런 삼성전자가 정체도 불분명한 투자회사에게 넘어가게 내버려 두시면 절대 안 됩니다. 대통령님, 삼성을 구해주시길 이렇게 간절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총수의 시선이 눈에 띄게 떨렸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삼성전자를 지키고 싶다는 열망은 그의 포커페이스까지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천천히 그의 손이 움직여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런 후 하안 봉투가 악마의 숨결처럼 은밀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의해 하안 봉투는 대통령 앞으로 공손하게 내밀어졌는데, 가벼웠음에도 더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때 그동안 평온한 모습으로 종수를 대하던 대통령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졌다.
지금까지 인자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고 두 눈에서는 파란 번개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분노다.
그것도 눈앞에 있는 자의 어리석은 행동에 태산이 무너져도 꿈쩍하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분노가 무섭게 터져 나왔다.
“이봐, 자네 뭔가 오해를 한 거 같구만. 이 친구야, 좋게 대해줬더니 내가 자네 눈에는 양아치로 보이나!”
“대통령님…….”
“너는 아직 먼 것 같구나. 하는 짓을 보니 너의 부친은 자식 농사를 망쳤다. 머리만 좋으면 뭐하겠나. 인간이 지녀야 할 정의가 없는데. 그동안 재벌들이 벌인 행태가 대한민국을 수렁 속으로 빠뜨렸어. 너희 같은 작자들이 자기들 안위만 생각하고 국가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 너는 마이다스 CKC회장을 본받아야 한다. 그 친구가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 그런 모습을 봤다면 절대 이런 짓을 하지 못했을 거야. 나는 그가 해온 일들을 확인한 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회장, 그런데도 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런 짓을 하는구나. 당장 쓰레기통에 집어넣기 전에, 내 눈앞에서 사라져. 안 그러면 너를 비롯해서 삼성 전체를 쓸어버릴 테다!”
* * *
마이다스 CKC 연합이 삼성전자의 주식을 쓸어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삼성생명의 물량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고 거기에 더불어 종수 일가가 가지고 있던 지분까지 토해졌기 때문이었다.
거칠 것 없이 오르던 주식은 무려 전체주식의 10%에 가까운 물량이 쏟아져 나오며 급전직하했다.
그 물량을 그대로 받았다.
불과 2달 만에 마이다스 CKC 연합이 장악한 삼성 주식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37%에 달했다.
모든 것이 종수 일가가 삼성전자를 포기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총수는 청와대에 다녀온 후 가족회의를 열어 일가가 가지고 있는 삼성전자의 주식을 전부 처분하는 것으로 결정했는데, 그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대통령의 불같은 분노였고 또 다른 하나는 거의 배나 오른 주가가 원인이었다.
어차피 외환위기로 인해 국가가 어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삼성전자를 포기하더라도 다른 계열사를 살리겠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배경에는 총수의 무서운 심계가 담겨 있었다.
대통령은 마지막 순간 마이다스 CKC 회장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암시했는데, 그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대통령까지 알고 있는 걸까.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대통령은 그를 본받아야 한다며 고함치는 순간 그 친구라는 표현을 썼다.
정확한 신분을 알지 못하면 절대 쓸 수 없는 표현이었으니 예전부터 아는 사이란 뜻이었다.
그렇기에 미련 없이 삼성전자를 포기했다.
더불어 그동안 애써 모아 놓은 자신의 현금을 회사를 위해 쏟아붓는 것이 찜찜했기에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도 들었다.
삼성전자가 떠나도 여전히 자신은 삼성이란 왕국의 황제였다.
* * *
최강철은 미국에서 머물며 홀리오 챠베스와의 마지막 승부가 결정되기를 기다렸다.
물론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서지영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정치에 입문한 오바마, 상원군사위원장 마이크 헐, 국무장관 미카엘 등 정치계 인사를 비롯해서 워렌 버핏, 빌 게이츠, 마이클 델 등 경제계 인사 그리고 슈가레이 레너드, 듀란 등 자신과 싸웠던 복서들 야구, 농구의 스타들과 만나며 교분을 쌓았다.
그가 특히 신경 쓴 것은 그동안 교분을 쌓아왔던 뉴욕타임지 사장 잭슨, 워싱턴 포스터지의 찰스 해밀턴을 비롯해서 언론의 수장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미래를 위해서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 최대한 많은 교분을 확보할 필요성이 있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렸으나 돈킹의 적극적인 추진에도 홀리오 챠베스 쪽은 꿈쩍도 안 했다.
체급이 아래인 자신이 두 체급 위에서 싸웠던 최강철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최강철로 하여금 슈퍼라이트급으로 내려오라는 주장을 거듭했는데, 그런 조건에서 싸운다면 자신이 무조건 이길 것이라며 호언장담을 터트렸다.
한숨이 나왔다.
자신의 현재 체중은 72kg이었다.
웰터급에서 싸운다 해도 5kg을 빼야 하는데 만약 슈퍼라이트급으로 내려간다면 무려 9kg을 조절해야 된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그를 탓하지 못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자신도 내려가지 못하는 것처럼 챠베스도 올라오기 싫었을 테니 말이다.
답답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경기가 끝난 후 미국에서 머문 지 5개월이 다 되어 갔기 때문에 서서히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돈킹이 방어전을 치르면 어떻겠나는 제안을 해왔을 때, 두 말 없이 받아들인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별할 사유 없이 1년에 한 번 이상 경기를 치르지 않으면 타이틀이 박탈되기 때문에 돈킹이 가져온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말았다.
서지영이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 온 것은 최강철이 귀국준비를 하면서 짐을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들어온 후 무작정 목을 끌어안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철렁 떨어졌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으니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지영 씨, 왜 그래?”
“당신, 아빠 되었어요.”
“무슨 소리야?”
“나 애기 가졌대요. 벌써 4주나 되었다네요.”
“정말…… 이야?”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녀는 내심 커다란 부담과 고민에 사로잡혀 괴로워했다.
결혼한 지 4년이 되었으나 아이의 소식이 없었기 때문인데, 시어머니는 연락이 될 때마다 아기 소식을 물어 그녀의 속을 새카맣게 태웠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알기에, 최강철은 그녀를 가슴에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며칠부터 속이 안 좋다고 하더니 아기를 가져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녀를 안으면서 수고했다는 말을 했으나 가슴이 답답하고 무거워졌다.
전생에서 있었던 악연들이 머릿속에서 갑자기 떠올라 그의 심장박동을 가쁘게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피를 물려받은 존재의 탄생.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지 않았다.
기쁘면서도 그렇지 않았다.
자식이란 존재는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과 슬픔이 될 수도 있었다.
자신은 그중 어떤 존재일까…… 나는 말이다.
임신 소식에 귀국을 미루고 그녀와함께 보름이란 시간을 더 미국에서 보냈다.
신규성과 김도환이 번갈아 전화하며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국 소식을 전해왔지만,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어지러웠기에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못했다.
새로운 생명을 진정으로 축복해주지 못하는 자신의 태도가 미웠다.
자신으로 인해 잉태되었고 자신으로 인해 존재가 시작된 아이를 축복해 주지 못하는 자신이 악마로 변한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이런지 너무나 잘 안다.
혼란의 연속.
그 감정을 추스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기에 최강철은 밤이 되면 강가에 앉아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흘려냈다.
서지영은 남편의 태도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임신한 아내가 늘 상 해야 하는 어리광조차 부리지 못했다.
그러나 혼란과 긴장, 고통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처음의 당황함은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고 전생에 있었던 나쁜 기억들은 좋은 기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아이들의 고사리 같았던 손. 그리고 사랑스러웠던 눈망울.
자신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오던 아이들의 팔과 다리 그리고 천진난만하게 웃던 얼굴.
그래 그랬지.
아이들을 사랑했던 나와 아빠라 부르며 따랐던 아이들.
모든 나쁜 기억들은 아이들의 잘못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모두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그 모든 것은 내가, 제대로 그 아이들을 키우지 못했기에 발생한 일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