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 벼락 - 4
때앵.
2라운드의 공이 울리자 최강철은 의자에서 일어난 후 거침없이 링의 중앙을 향해 달렸다.
이미 휘태커는 뒤로 물러서기 위해 꽁무니를 빼는 중이었다.
도망이나 다니는 놈이 감히 지금까지 나와 대한민국을 우롱했단 말이냐!
위잉, 위잉, 위이잉!
달리는 그대로 양훅을 갈기고, 비켜나가는 놈의 복부를 노렸다.
펀치가 빗나가는 순간 휘태커의 잽과 스트레이트가 번개처럼 다가왔으나, 최강철은 머리만 흔들어 공격을 피하며 그대로 돌진했다.
도망가면서 던진 펀치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아무리 빠르고 날카로워도 그 정도 펀치에 당할 내가 아니란 말이다.
사이드 스텝과 백스텝의 절묘한 조화.
마치 도망가는데 타고난 놈처럼 잘도 빠져나간다.
그럼에도 안 돼. 나는 오늘 약속한 것처럼 반드시 너의 아가리를 찢어 놓을 거야.
달리기를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준다.
이 좁은 사각의 링에서 얼마나 달릴 수 있는지 해 봐.
사람은 전력을 다해 100m를 뛰었을 때 자연스럽게 숨을 헐떡이게 된다.
그런 행동을 최강철과 휘태커는 벌써 4분이 넘도록 하고 있었다.
거기에 미친 듯이 펀치를 주고받았으니 휘태커의 심장은 뜨거워질 대로 뜨거워진 상태였다.
아직 체력이 고갈된 것은 아니었으나 단시간에 많은 스테미너를 썼기 때문에 그의 입은 점점 더 벌어지는 중이었다.
그건 최강철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4분이 넘도록 전력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호흡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휘태커를 추격하는데 잠시의 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강력한 단발 펀치를 날렸다.
맞아도 좋고 피해도 상관없다.
지금의 공격은 휘태커의 체력을 저하시켜 자신의 스피드와 비슷하게 만들기 위한 사전공작이었다.
결국, 휘태커의 발이 따라 잡힌 것은 2라운드 중반이 지날 때였다.
그동안 미친개처럼 뛰어다니던 휘태커가 최강철의 펀치에 복부를 적중당한 후 발이 느려졌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을 놓칠 최강철이 아니었다.
콰앙, 쾅, 콰광.
최강철의 펀치가 휘태커의 가딩을 뚫고 그대로 얼굴에 틀어박혔다.
백스텝을 밟으며 맞았고, 가딩으로 충격을 완화했지만 휘태거의 신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로프로 주르륵 밀려났다.
추격.
휘태커의 신형이 잠시 로프에 머물 때 따라 들어간 최강철의 양훅이 그의 복부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몸이 움찔하는 게 느껴졌고, 다리가 슬쩍 비틀리는 게 보였다.
충격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 짧은 순간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시작하는 10여 발의 콤비네이션이 휘태커의 전신을 유린했다.
빠져나갈 수도, 막을 수도 없는 공격이었다.
벼락이다.
기회를 잡자 최강철의 전신에서는 그동안 감춰 놓았던 푸른 벼락이 솟구쳐 나왔다.
한번 시작된 공격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파바방, 쾅, 쾅, 콰앙!
휘태커의 복부와 안면을 향해 끊임없이 펀치가 작렬했다.
꿈틀거리며 도망가려는 휘태커의 몸부림은 치명상을 입은 채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리의 모습과 비슷했다.
다리가 잡힌 이상 휘태커는 더 이상 최강철의 상대가 아니었다.
가딩을 해도 소용없다.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자, 최강철은 비틀거리는 휘태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는 결코 쉽게 시합을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약속했잖아.
함부로 주둥이를 놀려 우리 국민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든 네 놈의 죄를 철저하게 응징하겠다고.
계속되는 쇼트 콤비네이션으로 인해 휘태커의 안면이 망신창이로 변했다.
물론 그 이전에 받은 데미지가 중첩되었겠지만, 연속으로 올라가는 최강철의 어퍼컷이 그의 입술을 찢어 버려 피가 철철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그때 레프리가 경기를 중단시키기 위해 기회를 보는 게 느껴졌다.
최강철이 몸을 빼낸 것은 2라운드가 불과 20초밖에 남지 않았을 때였다.
잘 가라, 휘태커.
그리고 다시는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지 마. 그러다가 정말 죽어 이 새끼야!
위이잉, 콰앙!
공간을 가로지르며 날아간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반쯤 넋이 나간 휘태커의 턱을 갈기고 빠져나왔다.
주먹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
이런 주먹을 맞고 살아남은 놈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최강철은 무너지는 휘태커를 확인하며 천천히 중앙으로 물러섰다.
그런 후 두 팔을 번쩍 치켜들어 자신의 승리를 온 세상에 알렸다.
광화문을 가득 덮은 푸른 물결이 파도가 되어 일어섰다.
마치 해일이 밀려드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대단한 장관이었다.
긴장된 표정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최강철이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다가 기어코 휘태커를 쓰러트리자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었다.
옆에 누가 있든 상관없었다. 서로를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는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 가득 환한 웃음이 들어있었다.
열정과 환호.
결코, 외환위기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에다는 알 수 없는 공포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최강철의 경기도 대단했지만, 한국 국민들의 뜨거운 열기를 몸으로 직접 확인하자 어쩌면 자신의 판단이 틀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한국 국민들의 얼굴에 담겨 있는 자신감과 열정은, 국가의 슬픔 속에서 마음껏 터져 나온 것이라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을까.
광화문에 미친놈들처럼 몰려들었을 때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기쁨으로 날뛰는 모습을 보자 전율이 치밀어 올랐다.
“뭐해, 멘트해야지!”
자신보다 10살이나 많은 촬영 기자가 카메라를 내밀자, 마에다가 급히 마이크를 잡았다.
워낙 대단한 장면을 목격했기에 방송을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었던 것이다.
주변을 슬쩍 돌아보자 수많은 외신기자가 한국의 반응을 보도하기 위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특파원 마에다입니다. 최강철 선수의 승리로 인해 지금 한국은 열광에 빠져 있습니다. 광화문에 모인 50만 군중이 전부 일어서서 환호를 보내는 장면은 거대한 해일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은 외환위기로 인해 국가 경제가 힘든 상황이나, 국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최강철 선수를 응원했습니다. 한국 전국에서 300만의 거리응원단이 집단응원을 한 것으로 집계되었다고 합니다. 한국 국민들이 벌인 이 뜨거운 응원은,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것으로…….”
* * *
휘태커가 카운트 10에도 일어서지 못하는 순간, 윤성호와 이성일은 미친 듯이 달려들어 최강철을 끌어안았다.
이젠 승리를 할 때마다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버린 이성일의 목말은 여전히 가랑이를 아프게 만들었지만, 최강철은 당당하게 놈의 어깨에 올라탄 후 태극기를 흔들어댔다.
돈킹의 얼굴은 기쁨으로 입이 찢어질 것처럼 보였다.
보물도 이런 보물이 없다.
매번 압도적인 승리로 엄청난 돈을 벌게 만들어주니, 최강철은 그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마찬가지다.
관중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최강철이 일부러 태극기를 흔들어 댔어도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중들은 허리케인을 연호하며 그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을지도 모른다.
워낙 일방적인 경기였고 불과 2라운드 만에 끝났으니, 오랫동안 세계최고수준의 시합을 기대했던 관중들에게는 아쉬운 경기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관중들이 허리케인을 연호하는 것은 그가 보여준 마법 같은 인파이팅에 감동했기 때문이었다.
웰터급의 무적이라는 휘태커를 상대로 세계최강 허리케인의 위용을 다시 한번 직접 눈에 확인시켜줬으니,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최강철은 마음껏 승리를 기뻐하다가 뒤늦게 다가온 링아나운서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축하합니다. 허리케인.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한 경기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휘태커 선수를 상대로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접근전을 펼쳤습니다. 이번에는 어떤 전략이었습니까?”
“사각의 링에서 도망자는 절대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저는 오랜 시간 휘태커 선수의 스피드와 장점을 분석하고 준비했기에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콤비네이션보다 단발 공격을 주로 하셨는데요. 이것도 미리 준비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휘태커 선수를 잡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훈련을 해왔는데, 단발 공격은 그 일환이었습니다.”
“이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신이 빚은 복서라는 홀리오 챠베스 선수만 남았습니다. 허리케인, 아직도 그와 시합하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는 거죠?”
“당연히 그렇습니다. 저는 챠베스 선수가 피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와 싸울 생각입니다.”
“그런데, 챠베스 선수와 싸우기 위해서는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 챠베스 선수는 슈퍼라이트급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이런 체중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생각입니까?”
“당연히 그가 웰터급으로 올라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이기고 싶다면 말입니다. 진정으로 그가 신이 빚은 복서라는 영광스러운 타이틀을 유지 하고 싶다면, 나를 꺾어야 합니다. 나는 그보다 더 위대한 복서니까요. 나는 이미 웰터급에서 활동하다가 체급을 올려 슈퍼웰터급의 통합챔피언을 차지했고, 다시 감량을 통해 웰터급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런 저에게 슈퍼라이트급으로 내려오라는 건 싸우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말씀이지만, 홀리오 챠베스 선수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되는군요. 여기 계신 관중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 복싱팬은 허리케인과 챠베스 선수의 경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습니다. 부디 두 선수가 잘 합의해서 경기가 성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는 결과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번 허리케인의 승리를 축하하며 그럼 이상으로….”
“잠깐만요. 제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습니다.”
링아나운서가 인터뷰를 끝내려는 순간, 최강철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인터뷰가 길었기 때문에 서둘러 마치려던 링아나운서가 또 무슨 일이 생길지 잔뜩 긴장된 모습으로 최강철을 쳐다봤다.
그동안 최강철은 경기 후 인터뷰 때마다 전 세계 복싱팬들을 열광시키는 발표를 해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링아나운서의 뜨거운 시선을 비껴내고, 카메라 방향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이성일이 가지고 있던 태극기를 자신의 손에 옮겨 들었다.
그리고는 예상과 다르게 인터뷰할 때의 영어를 바꾸어 한국어로 화면에 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 국민 여러분의 뜨거운 성원으로 인해 다시 웰터급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모든 것이 국민 여러분의 사랑으로 인해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국민 여러분, 제가 들고 있는 태극기가 보이십니까. 저는 오늘 경기를 준비하며 이 태극기 앞에서 죽어도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우리 대한민국과 국민 여러분이 외환위기로 인해 고통과 슬픔 속에서 힘들어하시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다시 일어섰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비참하게 살았던 전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타고난 근성과 비상한 두뇌로 단시간 내에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우리가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거라 확신합니다. 우리는 외환위기라는 이 괴물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당당하게 일어서 맞서 싸운다면, 이 위기는 전화위복이 되어 대한민국을 더욱 건강하게 재탄생시킬 수 있을 겁니다. 잊지 말아 주십시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 그냥 쓰러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 *
최강철의 승리로 대한민국은 또다시 태풍이 몰아닥쳤다.
최강철의 승리는 단순한 복싱선수의 승리가 아니었다.
국민들의 영웅이자 외환위기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찬란하게 솟구치는 희망이었기에, 그가 마지막 순간 인터뷰에서 한 말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장에 뜨거운 열기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영웅의 한마디는 국민들의 가슴에 자신감을 채웠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한 것은 최강철의 시합이 끝난 다음 날 저녁 무렵이었다.
대통령은 정부 각료를 전부 대동하고 단상에 섰는데, 노안에 담긴 얼굴에 새로운 의지가 펄펄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대국민 담화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대통령은 물론이고 정부각료가 지금 이 순간부터 전력을 다해 일하겠다는 것이었다.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겠지만, 최강철의 인터뷰로 인해 탄력을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대통령의 발표는 국민들을 충분히 만족시킬 정도로 흡족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통령의 발표와 발맞춰 대한정의당 국회의원 전체가 모인 자리에서, 당 대표인 정우석 의원이 외환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정부와 집권당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각계각층의 호응이 연일 계속되었다.
정치계는 물론이고 경제계와 학계, 언론마저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외환위기를 벗어날 방안을 다각도로 내놓았다.
이제 절망은 없다.
최강철이 승리한 이후 나락으로 떨어진 한국경제를 되살리자는 여론이 팽팽하게 자리 잡았고, 다시 열심히 뛰자는 각오가 새롭게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이 최강철의 힘이다.
리더는 구성원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하고 이끄는 힘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최강철이 보여준 것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비록 그가 보여준 행동이 누군가에게는 비난이 되고, 질시가 되겠지만 최강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용기를 잃지 않고 현실과 싸워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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