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47화 (247/308)

[247] 벼락 - 2

김영호와 류광일은 잠실에서 아침 8시에 만났다.

오늘은 최강철의 시합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어떻게 빠져나왔냐. 마누라가 뭐라고 안 그러디?”

“안방 침대에 계시길래 아침 산책하러 가는 것처럼 하고 도망쳐 나왔다. 알면 그냥 있겠어. 그러잖아도 심기가 불편하신데.”

“용한 놈.”

“왜?”

“난 졸라게 깨졌다. 이 마당에 어딜 가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라.”

류광일이 혓바닥을 반쯤 내밀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에도 그의 얼굴에는 도주에 성공했다는 만족감이 가득 들어 있었다.

외환위기로 대한민국 전체가 박살 났으니 대일물산만 멀쩡할 리 없다.

대일물산은 수출이 주력이었으나 생산공장들이 부도를 맞으며 초토화되는 바람에 클레임으로 발생한 손실이 벌써 3백만 달러가 넘었다.

거기다 수출의 폭도 예전 수준의 절반으로 뚝 떨어져 회사에서는 뼈를 깎는 구조조정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 상황이니 마누라가 잔소리를 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영호야, 그 소식 들었냐. 금요일에 최 차장님하고 정 과장이 해고통보를 받았단다.

“정말?”

“그래, 이러다가 금방 우리까지 넘어오겠어.”

“휴우… 어쩌겠냐. 나가라면 나가야지. 회사도 땅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잖아. 벌써 월급이 3개월이나 밀렸어. 이럴 바에는 차라리 명퇴금 받고 그만두는 것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그러지 마라. 이런 상황에서 잘리면, 우린 죽어. 무슨 수를 쓰던 붙어 있어야 해. 명퇴금 받아봤자 그거 금방이다.”

“아들놈 학원비 못 냈다며 마누라가 징징 짜길래 성질내고 나왔더니 마음이 안 좋아. 아, 씨발 쪽팔려서…….”

류광일이 담배 연기를 길게 하늘로 날리며, 한숨도 길게 내리 쉬었다.

대기업의 샐러리맨으로 풍족하게 살지는 못했지만, 아내와 자식들을 건사하면서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아왔다.

인생이 파탄 나는 건 한순간이라더니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면 억울하지 않았을 것이고, 남을 원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괴로운 건 앞으로의 상황이 더욱 암담하다는 것이었다.

나라의 경제가 박살 난 이상 대일물산은 아주 오랜 시간을 어둠의 터널 속에서 허우적댈 수밖에 없다.

“모아 놓은 돈 좀 없냐?”

“월급으로 사는 놈이 모아 놓은 돈이 어디 있어. 집 사느라고 대출받은 돈이 얼만데 저축을 해? 먹고 사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하긴, 우리 같은 놈들 사정이 뻔하지.”

“야, 이제 그런 소리 그만하자. 오늘 같은 날까지 기운 빠지는 소리 하지 말자고. 괜히 강철이 시합하는데 재수 없을 것 같다.”

“그래, 그런데 오늘도 사람들이 나올까?”

“없으면 차 안 밀리고 좋지. 아마, 많이 안 모일 거야. 먹고 사는 것도 힘든데 많이 모이겠어?”

* * *

일본 NHK의 한국특파원 마에다는 아침 7시부터 서둘러 광화문에 나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과거의 경험으로 봤을 때 새벽부터 서두르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주변에는 동경일보의 하세가와가 산케이신문의 오사무와 함께 노닥거리는 게 보였다.

평온한 모습.

한국이 겪고 있는 외환위기는 나라가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기에, 오늘 최강철의 경기가 벌어지지만 커다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설마 오늘까지 모인다면 이 나라는 미친 것이다.

먹고 살기도 힘든 판에 응원을 하러 나온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그동안 한국인들은 최강철의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축제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광신도들을 보는 것 같아 걱정도 되었다.

열정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 과했다.

단순한 복싱경기에 온 국민들이 열광하는 모습은 정상적인 모습이 절대 아니었다.

그랬기에 전 세계의 언론이 광화문에 몰려 집단응원을 하는 한국 국민의 모습을 취재하느라 열을 올렸다.

하지만 오늘 이곳에 모인 외신기자들의 표정은 아무런 기대감도 담겨있지 않았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모일 리 없으니 괜한 헛걸음을 했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동경신문의 하세가와가 슬금슬금 다가온 것은, 마에다가 커피를 다 마시고 쓰레기통에 컵을 버릴 때였다.

그는 오래전부터 안면을 터서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마에다, 오늘 같은 날 왜 왔어. 그림도 안 될 것 같은데?”

“그런 자네는 왜 왔나. 새벽부터.”

“하하… 노느니 뭐해. 혹시나 일이 생기면 큰일이잖아.”

“혹시 뭐?”

“한국놈들 정신구조는 이상해서, 이럴 때 꼭 사고를 치거든.”

“그렇긴 하지. 그래도 오늘은 아닐 거야. 대한민국 전체가 박살이 났는데 응원하러 온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냥 오늘은 긴장 풀고 푹 쉬다가 가자고. 아마 데스크 쪽도 큰 기대를 하지 않을 거야.”

마에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하세가와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충분히 이해된다.

그럼에도 그는 고개를 흔들며 강하게 그의 말을 부정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이 간다는 말이 있지만, 한국은 결코 부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순식간에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짧은 시간 만에 한강의 기적이란 단어를 만들어 냈지만, 한국의 경제는 토대가 빈약해서 외환위기를 벗어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한국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을 서울에서 보내다 보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표정을 볼 때마다 꼭 자신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처럼 미안했다.

마에다는 하세가와의 이야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한국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지독한지에 대해 말하며 마음껏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주며 듣기만 했다.

어쩌겠는가. 한국과 일본의 오래 묵은 감정이 그러한 것을.

자신은 그렇지 않았지만, 한국에서 근무하는 특파원들의 절반 이상이 한국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점점 시간이 흘러 8시가 넘어서기 시작할 때부터였다.

광화문을 잇는 도로들이 파란 물결로 물들며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처음은 젊은이들로 구성된 패거리들이 주로 보였으나, 점점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광화문으로 들어왔다.

입이 떠억 벌어졌다.

규모가 다르다.

예전 바스케스와의 경기에서 무려 30만이라는 군중들이 모였을 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밀려들고 있었다.

“이런 씨발…….”

저절로 욕이 나왔다.

도대체 한국 사람들의 정신구조는 어떻게 된 것이란 말인가.

어이가 없어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침 9시가 넘자 광화문 일대가 전부 파란색 물결로 가득 찼는데 그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 * *

신규성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김도환을 맞아들였다.

일요일인데도 쉬지 못하고 사무실로 나온 것은 삼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성에 경영정보팀이 있다면 마이다스 CKC에는 제우스가 있다.

제우스의 김도환은 수시로 삼성과 정부, 언론의 움직임을 파악해서 그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만만치 않았다.

“어서 오세요.”

“뭐하고 계셨습니까.”

“사장님 기다리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곧 회장님 시합이 열리잖아요.”

“하하… 그래서 저도 서둘러 온 겁니다. 그나저나 어마어마하군요. 저번보다 더 모인 것 같은데요?”

김도환이 화면을 가득 채운 광화문 인파를 보면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대단한 인파가 끝도 없이 자리를 차지한 채 파란 깃발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송국에서는 50만 정도가 모였다고 하더군요.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대단합니다.”

“사장님은 저 사람들이 모인 이유를 뭐라고 생각합니까?”

“희망을 품고 싶어서 그런 거겠죠. 무언가에 대한 희망조차 없다면 이 절망스런 상황이 너무 힘들잖아요.”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회장님이 꼭 이겨줘야 해요. 그것도 화끈하게 이겨서 국민들을 위로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김도환이 시선을 화면에 고정한 채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 담긴 것은 동정이 아니라 뜨거운 열정이었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겨낼 것이다.

지금보다 더한 고난과 역경도 이겨왔고 반드시 잘 살겠다는 의지는 세계에서 최고였다.

김도환의 분위기를 깨면서 신규성이 불쑥 입을 연 것은, 그가 지닌 용무가 급했기 때문이었다.

“사장님, 삼성이 확보한 언론은 몇 개나 되죠?”

“주요언론 전부와 접촉한 거로 확인되었습니다. 방송쪽도 마찬가지고요.”

“김 사장님이 보시기엔 어떻게 진행될 것 같습니까?”

“그자들은 모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다음 주에 모든 언론이 준비한 기사를 터트리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어요. 정부 관계자들도 스탠바이를 끝냈기 때문에 언론이 터트리면 곧바로 반응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큰일 아닙니까. 우리나라 국민들은 외국자본이 삼성전자를 먹는 걸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국민들이 저항하면 문제가 커집니다.”

“신 사장님, 우리쪽이 확보한 주식이 얼마나 되죠?”

“이제 18%를 넘었습니다. 회장님이 지시한 30% 이상을 맞추려면 앞으로도 2개월 정도 더 필요합니다. 김 사장님, 무슨 방법이 없겠습니까?”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답답하게 자꾸 미적거리지 마시고 빨리 말해 주세요.”

“시간을 끄는 겁니다. 30%를 확보할 때까지 언론이 터트리는 걸 막아야 합니다.”

“지금 농담이 나옵니까. 이미 언론과 다 이야기가 끝났다면서요?”

“언론이 삼성의 말을 듣는 건 광고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피닉스!”

“그렇습니다. 그들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해서 기사가 나가지 못하도록 시간을 끄는 겁니다. 피닉스 계열사 20개의 광고라면 언론도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예요.”

“될까요?”

“됩니다. 지금 언론은 기업들의 광고가 줄어들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 마당에 피닉스 그룹 전체가 움직여 광고를 때리겠다는 제안을 하면 거부할 수 없어요. 그자들도 먼저 살아야 하니까요.”

“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대한정의당 쪽을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삼성과 접촉했던 기재부의 간부들과 언론쪽 인사들을 압박해서 꼼짝하지 못하도록 틀어막겠습니다.”

“그럼 그쪽은 사장님이 맡아주세요. 저는 피닉스 그룹의 사장단이 최대한 빠르게 언론과 접촉하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린 한 가지 더 준비할 게 있어요.”

“한 가지 더? 그게 뭐죠?”

“시간은 끌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터질 겁니다. 결국, 마이다스 CKC가 외국자본이라는 게 알려지는 순간 국민들의 저항을 받게 되겠죠. 그걸 해결하지 않으면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확보하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정부가 무슨 수를 쓰던 막을 테니까요. 정권은 국민들이 저항하는 순간 마이다스 CKC의 숨통을 죄어올 겁니다. 그리되면 우린 돈만 들이고 경영권을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요. 최악의 경우, 어쩌면 다시 주식을 팔아야 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정부가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한단 말입니까!”

“흥분하지 마십시오. 그게 현실이니까요. 그래서 회장님의 결단이 필요해요. 단박에 제압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 * *

휘태커와의 시합은 뉴욕의 MGM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졌다.

시저 팰리스가 관중석을 늘려 재미를 봤기 때문인지 MGM도 대폭 경기장을 늘려 입장객 수는 2만 5천에 달했다.

이번 대전료는 최강철이 3천 5백만달러, 휘태커가 2천만 달러였다.

또다시 역대 최고액을 경신했다.

언론에서는 파이트머니의 신기원을 연속으로 작성하고 있는 최강철의 인기를 조명하며 대서특필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최강철이 복싱으로 벌어들이는 돈보다 주요기업에서 벌어들이는 돈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나이키를 비롯해서 20여 기업이 최강철을 후원하고 있었는데, 매년 거기서 들어오는 돈이 5천만 달러가 넘었다.

물론 경기에서 그들의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과 경기 장면을 광고에 활용한다는 조건에서 맺은 계약들이었다.

그동안 전문가들은 팽팽한 접전이 펼쳐질 거란 예상을 했지만, 도박사들의 평가는 완전히 달랐다.

도박사들의 예상은 7:3 으로 최강철이 이길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휘태커가 세계 최고의 스피드로 마크 브릴랜드마저 꺾었다 해도, 최강철이 지금까지 상대한 선수들과 경기력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이 접전을 예상한 것은 그만큼 휘태커의 스피드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죽하면 그를 보고 사람들이 번개라는 별명을 지어줬을까.

* * *

최강철은 밴딩을 마치고 묵묵히 화면을 바라보며 진행요원의 출전요청을 기다리고 있었다.

빡빡한 정적의 시간이 라커룸을 가득 적셨다.

복싱협회의 전무를 맡고 있는 유광호가 들어 와 지금 광화문에서 50만의 인파가 몰려 응원을 벌인다는 사실을 말해준 후부터 일행들은 대화를 삼가며 경기를 기다렸다.

이 경기가 가진 의미는 지금까지와 다르다.

국민들의 희망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몸부림이 고스란히 담겨 있으니, 이번 싸움은 오직 그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윽고 진행요원이 들어와 출전해 달라는 사인이 들어오자, 최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때와 달리 직접 태극기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는 당당하게 복도를 걸어 경기장으로 들어섰다.

이긴다.

나는 반드시 이겨 나의 승리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국민들에게 환한 웃음을 되돌려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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