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46화 (246/308)

[246] 벼락 - 1

김연경은 결혼한 후 꿈같이 행복한 삶을 살았다.

듬직한 남편, 그리고 사랑하는 딸.

남편은 1년에 한 번 벌어지는 최강철의 시합에 트레이너로 나서지만 한번 시합이 벌어질 때마다 정말 커다란 돈을 벌어왔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친구인 최강철은 슈퍼스타였지만 남편은 옆에서 일을 돕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 결혼하기 전에는 사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남편은 평상시에는 하는 일 없이 놀았기 때문에 그녀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복싱체육관에서 윤 관장의 일을 도와준다고 했지만, 월급을 따로 받지 않았으니 백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매번 큰소리를 쳤다.

자신은 최강철이 시합을 한 번 끝내면 커다란 돈을 번다는 것이었다.

언뜻 듣기로는 트레이너 비용으로 대전료의 3%를 받는다고 했는데, 이전 시합에서는 무려 10억에 가까운 돈이 통장으로 들어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한 후부터 더 이상 잔소리를 할 수 없었다.

어떤 남자가 그 나이에 그런 돈을 벌 수 있단 말인가.

그때부터 남편을 믿고 딸을 키우며 행복한 나날들을 보냈다.

남편은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번 돈을 형과 시아버지에게 빌려줬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고, 앞으로 남은 돈으로 주식에 투자했다는 말도 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건 정말 순식간의 일이었다.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친 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사라져 갔다.

행복은 불행으로 변했고 가정의 평화는 순식간에 깨지고 말았다.

형은 사업이 망한 후 행방불명 된 지 오래였고, 시부모님은 집까지 넘어갔기 때문에 그녀의 신혼집으로 모셔야 했다.

시아버지는 매일 술로서 시간을 보냈는데 시어머니는 미안함 때문인지 청소와 빨래를 하며 그녀의 눈치를 봤다.

그러지 말라고 사정해도 소용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불안했고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었다는 상실감에 아이의 웃음이 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밝게 웃으려 노력했다.

지금은 힘들어도 남편만 돌아온다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으로 생각하며 시부모님이 불편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저녁을 차려서 시부모님이 드시게 만들어 놓은 후에야 안방으로 들어가 딸과 마주한 후 텔레비전을 켰다.

여전히 같은 레퍼토리.

화면에선 외환위기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장면들과 암울한 경제 상황들이 펼쳐지고 있었다.

어린 딸들과 아내를 남겨 놓고 한강에서 몸을 던진 가장의 사정을 들으며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저런 선택을 했었을까.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남편인 이성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착하고 성실했다. 누구보다 효심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커서 바보처럼 번 돈을 전부 아버지와 형의 사업에 털어 넣었다.

거기다 주식까지 전부 엉망으로 변했으니 남편 역시 자살한 저 사람처럼 고통 속에 잠겨 있을 것이다.

그저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 바랐다.

아직 우리는 젊으니까 남편이 힘을 내서 다시 그녀와 함께 열심히 살아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띵동.’

갑작스럽게 초인종 소리가 들린 것은 딸이 그만 먹겠다고 분유병을 손으로 밀쳤을 때였다.

“누구세요?”

“남편분이 보내서 왔습니다. 잠시 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딸을 안고 부지런히 달려가 묻자 밖에서 정중한 대답이 들려왔다.

남편이 보내?

부쩍 의심이 들었다.

이성일은 지금 최강철의 경기 때문에 미국에 있었으니 남편이 보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이 보냈다는 말에 걸쇠를 풀지 않은 채 문을 조금 열어 사람의 모습을 확인했다.

문틈을 통해 보인 남자는 혼자였는데 멋들어진 양복을 받쳐입은 40대 후반의 신사였다.

“무슨 일이세요?”

“잠시 들어가서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까. 중요한 일이라서요. 저는 보안업체 제우스의 사장 김도환이라고 합니다.”

“아… 예.”

행색이 불량했다면 들일 생각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는 잃을 것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더군다나 남편이 보냈다고 하니 무슨 일인가 너무나 궁금했다.

문을 열고 김도환을 안으로 들이자, 저녁을 모두 드신 시아버지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고 계신 게 보였다.

“누구요?”

“예, 어르신. 이성일 씨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아, 그래요…….”

그냥 등을 돌리는 그의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평소의 시아버지였다면 낯선 남자를 향해 꼬치꼬치 물었을 텐데 이미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그의 모습은 당신의 궁금증을 내놓지 못했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차를 내놓고 앞에 앉았다.

딸이 불편한 듯 칭얼거렸지만, 그녀는 불안감 때문에 딸의 몸을 꼬옥 끌어안고 있었다.

“늦었으니 본론만 잠시 말씀드리고 가겠습니다. 이성일 씨가 저에게 이걸 가져다드리라고 시키셨습니다.”

“이게 뭐죠?”

“돈입니다. 제가 남편분께 빌린 돈이 있었습니다.”

김도환이 가슴에서 통장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는 액수를 확인하며 믿어지지 않은 듯 놀라는 김연경을 향해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여기 명함이 있습니다. 아직 저는 남편분께 갚아야 할 돈이 아주 많습니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면 즉시 달려올 테니 주저하지 마시고 전화해 주십시오.”

“그… 말씀이 정말인가요?”

* * *

일식집 ‘하루’에 들어선 최윤택은 천천히 걸어서 VIP실로 향했다.

총수의 판단은 예리했다.

은행의 융자가 전부 막힌다면, 삼성생명에서 내놓은 물량을 계열사가 받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매각대금의 전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 은행에서는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삼성생명에서는 전자의 매각대금을 계열사로 전환하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 말은 총수가 나서지 않는다면 삼성전자의 소유권이 마이다스 CKC로 넘어가는 걸 막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지금으로서는 총수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과연 총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만약 그가 계열사의 지분을 전부 처분하고 지닌 현금을 전부 쏟아붓는다면 삼성전자의 경영권을 방어할 수 있을 테지만, 그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삼성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언론인들을 만나느라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손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총수의 말대로 애국심에 기대어 마이다스 CKC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제가 조금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저희도 금방 왔습니다.”

VIP실로 들어서자 2명의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명은 정도일보의 편집국장 민영환이었고 또 하나는 세계경제일보의 주간을 맡고 있는 장영팔이었다.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예약을 해놓은 음식들이 들어왔기 때문에, 최윤택은 본론을 꺼내지 않고 변죽만 올리며 두 사람의 잔에 술을 쳤다.

음식이 제대로 입에 들어올 리가 없기에 세 사람은 한동안 술을 마시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정도일보의 민영환이었다.

그는 삼성의 후원을 받으며 국장 자리에까지 오른 전형적인 삼성 우호 세력 중 한 명이었다.

“본부장님, 지금 소문이 매우 안 좋습니다. 전자가 위기에 처했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저희를 보자고 한 것은 그것 때문인가요?”

“맞습니다. 저희 정보팀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마이다스 CKC가 전자를 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닉스 그룹을 먹은 그 마이다스 CKC 말입니까?”

최윤택의 대답에,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있던 장영팔이 불쑥 끼어들었다.

매우 놀란 얼굴.

그는 마이다스 CKC의 이름이 나오자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했다.

그랬기에 최윤택이 슬쩍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의문을 나타냈다.

“마이다스 CKC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아, 아닙니다…. 워낙 유명한 투자회사라서 이름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의 반응이 의심스러웠으나 최윤택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렇죠, 아주 유명한 놈들입니다. 피닉스에 이어 대한민국 경제를 떠받치고 있는 삼성전자를 노리는 악질적인 놈들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그놈들은 한국경제를 자신들 손아귀에 넣고 흔들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자칫 힘든 일이 벌어질 수도 있겠군요. 은행권에서 삼성의 손을 거부했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그럼 정말 삼성전자가 그들의 손에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삼성의 자금력은 막강합니다. 마이다스 CKC가 욕심을 부린다 해도 삼성 전체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저희 회장님께서는 그들의 공격을 보고 받은 후 코웃음을 치셨습니다.”

민영환의 질문에 최윤택이 약을 쳤다.

약세를 보이면 안 된다.

비록 이들이 그동안 삼성의 관리를 받으며 성장해 온 인물들이었지만 삼성이 어렵다는 걸 알게 되면 배신의 길로 들어설지 모른다.

이런 세계에서 의리와 감정에 호소하는 것은 철부지 어린애가 칭얼거리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우리 삼성은 놈들의 공격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제가 두 분을 뵙자고 한 건 그자들의 행태가 너무나 악의적이기 때문입니다. 피닉스 그룹에 이어 삼성전자를 노린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더군다나 삼성전자는 국내 최대의 기업이고 대한민국의 자랑입니다. 그런 기업을 외국자금이 날로 먹으려 들다니 정말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우린 그자들 때문에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금을 쏟아부어야 할 판입니다. 외환위기로 경제가 휘청이는 마당에 적극적인 투자를 하지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돈을 써야 된단 말입니다.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자들의 음모를 반드시 분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마이다스 CKC란 외국자본이 삼성전자를 노린다는 걸 모든 국민들이 알게 해 주십시오. 국민의 대표기업인 삼성전자를 국민들이 지킬 수 있도록 언론에서 도와주셔야 합니다. 국민들의 힘으로 경영권이 방어된다면 우리는 경영권 방어에 들어갈 돈을 국민들에게 쓸 수 있습니다. 외환위기로 인해 청년실업이 미친 듯 솟구쳤고, 가장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이 상황에서 삼성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절대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죠. 저희가 움직이겠습니다. 은행권의 작태와 정부의 무능함을 질타하고 마이다스 CKC의 음모를 전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터트리겠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절대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놈들이 노린다 해도 삼성전자가 넘어갈 리 없겠지만, 그런 사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불쾌하고 화가 나는군요.”

“고맙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아시겠지만 지금은 최강철의 시합이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이라 국민들의 정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려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시합이 끝난 후부터 터트려주세요.”

“저희만 움직이는 건 아니겠죠?”

“삼성에 우호적인 언론들이 전부 들고일어날 겁니다. 공영방송들도 이 문제를 그냥 간과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민영환이 묻자 최윤택이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이기도 했지만 조금 과장된 부분도 있다.

민영환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혼자 독박을 쓰기 싫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최윤택은 그를 바라보며 웃음을 흘려냈다.

이 자들은 지금부터 삼성을 위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할 것이다.

삼성의 저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 삼성전자가 넘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할 것이다.

총수의 판단대로 언론이 나서기 시작한다면 국민의 여론이 그들의 편을 들게 될 것이고, 그리되는 순간 은행의 융자규제는 자연스럽게 풀리게 된다.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나서 은행을 압박해 줄 것이기 때문인데 그리되면 상황은 금방 풀릴 수 있을 것이다.

* * *

시합 당일.

최강철은 아침 일찍 찾아온 이성일의 방문을 받은 후 잽싸게 이불을 뒤집어썼다.

놈의 얼굴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일어나 이 새끼야.”

“싫다.”

“정말 안 일어날 거야. 안 일어나면 깔아뭉갠다.”

“오늘 시합 날이야. 내가 조금이라도 다치면 넌 역적이 돼. 그러니까 까불지 말고 거기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해.”

이불을 뒤집어쓴 채 대답하는 최강철의 태도에, 가까이 다가서던 이성일이 불에 덴 사람처럼 뒤로 물러났다.

당연한 말이다.

모든 국민들이 눈 빠지게 기다리는 시합이 오늘 벌어지는데 자신으로 인해 최강철의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긴다면 칼을 물고 죽어야 한다.

그랬기에 그는 뒤로 물러난 후 한숨을 길게 흘려냈다.

“네 짓이지?”

“뭐가?”

“제우스 사장을 보낸 게 너잖아!”

“눈치챘냐?”

“하아, 이 자식 봐. 무슨 대답이 그렇게 뻔뻔해.”

“네가 분윳값이 없다고 했잖아. 가불해 달라고 해서 그렇게 한 거다.”

“이 새끼야. 넌 농담도 구분 못 하냐. 내가 설마 딸내미 분윳값도 없었겠어?”

이성일의 목소리가 다시 올라갔다.

그때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던 최강철이 천천히 이불을 벗겨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알아, 설마 연경 씨가 애를 굶기기야 하겠어. 얼마나 부지런한 여잔데.”

“그런데 왜 그런 짓을 해!”

“내 마음이 편하고 싶어서 그랬다. 시합 앞두고 친구 놈이 징징대는데 어떻게 마음 놓고 싸워. 그래서 그런 거니까 고마워하지 마.”

“어이구, 말하는 싸가지 하고… 이 자식아 이왕이면 의리 때문에 그랬다고 해라. 그래야 내가 감동 받을 거 아냐!”

“넌 절대 감동 받을 놈이 아닌데 내가 뭐 하러 그런 소릴 해.”

“귀신같은 놈.”

“크크크… 그런데 왜 관장님은 안 왔어. 이 양반 아직도 잠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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