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45화 (245/308)

[245] 지옥 - 5

최강철의 경기가 다가오면서 대한민국은 긴장 속으로 빠져들었다.

IMF 외환위기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고통과 슬픔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국민들은 최강철의 경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희망이다.

비록 국가의 경제가 파탄에 이르러 전 세계에 씻을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당했으나, 최강철의 건재함은 국민들의 가슴속에 한 줄기 빛처럼 희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번에도 최강철의 경기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피넬 휘태커.

최강철이 떠난 웰터급을 휩쓸며 7차 방어전을 성공시킨 사나이.

세상에서 가장 빠르다는 평가를 받는 그의 스피드는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하며 도전자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

38전 38승 17KO승.

7번의 방어전에서 KO승은 단 2번밖에 없었으나, 나머지 경기들도 관중들을 감탄시킬 만큼 완벽한 승리였다.

도전자들은 압도적인 스피드를 견디지 못하고 그의 그림자만 쫓다가 무력하게 패배를 기록하며 링을 떠났다.

단순히 스피드만 뛰어난 것이 아니다.

그의 테크닉은 레너드에 버금갈 정도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아웃복싱을 하다가 기회를 잡으면 폭풍처럼 상대를 처리하는 인파이팅 능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경기가 다가오는 동안 전문가들의 평가는 수시로 바뀌었다.

슈퍼웰터급에서 경기를 치르던 최강철이 다시 체중조절을 하여 웰터급으로 내려온다는 핸디캡이 변수였고, 과연 지상 최강이라는 휘태커의 스피드를 잡을 수 있느냐는 것이 논란의 주 내용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최강철의 경기는 압도적인 평가가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상대한 선수들이 세계 최고 레벨을 자랑하는 무적의 전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 * *

경기 3일 전.

최강철은 훈련을 마치고 이성일과 함께 저녁을 먹은 후 허드슨 강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거닐었다.

종일 훈련에 지친 몸을 이완시키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일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시합을 위해서 최강철은 4개월간의 혹독한 훈련을 해왔다.

다른 어떤 경기보다 중요했다.

외환위기로 고통받는 국민들의 모습이 수시로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나올 때마다 이 경기를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다짐했다.

바보 같은 사람들.

대한민국 국민들은 왜 그리 순진하고 바보처럼 착한 것일까.

그렇게 고통받으면서도 그들은 자신의 승리를 기원하며 한마음으로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 마음을 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

자신은 그들에게 어쩌면 마지막 희망이었고, 미래를 밝혀줄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강가에 찬란하게 빛나는 조명을 보면서 걸어 나가는 동안 산책을 나온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행복한 모습.

미국 최대의 도시 뉴욕의 시민들은 풍요롭고 안락한 삶의 행복을 느끼며 이처럼 밝은 웃음을 흘려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부럽다.

대한민국의 국민들도 이들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잘못된 사회구조, 국민의 등쳐 먹는 정치인과 재벌들.

그리고 썩어빠진 공무원들과, 있는 자들의 갑질이 판치는 세상.

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을 산산이 부수고 싶다.

“야, 무슨 일 있어?”

오늘따라 자신의 옆을 따라 걷고 있는 이성일의 얼굴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놈은 산책할 때마다 실없는 농담으로 그를 웃겼는데 오늘은 아예 입을 꾹 닫은 채 침묵을 지키는 중이었다.

“말해, 답답하게 하지 말고. 무슨 일이냐?”

“휴우… 강철아, 나 큰일 났다.”

“왜?”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단다. 형도 그러더니…….”

“언제?”

“어제 최종 부도처리 됐나 봐.”

어쩐지 며칠 전부터 안절부절못한다고 했다.

의류업을 하던 형의 사업이 망한 것은 한 달 전이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성일은 씩씩한 모습을 보였다.

비록 형한테 들어간 돈이 꽤 있었으나 그 정도는 감당할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은 다르다.

전자회사에서 평생을 근무하던 아버지가 은퇴한 후 텔레비전 부품공장을 차린 것은 5년 전의 일이었다.

성실했던 아버지는 이성일이 번 돈을 밑천으로 사업을 시작했는데, 그동안 공장을 확장하며 괜찮은 수익을 올렸었다.

“한 푼도 못 건진 거냐?”

“아버지 집도 날아갔단다. 이것 참 외환위기가 무섭긴 무섭네.”

“설마, 네 집도 잡힌 건 아니지?”

“집은 괜찮아. 돈이 다 날아가서 그렇지. 참나. 인생 한순간에 쪽발 찬다더니 딱 그 짝이다. 내가 산 주식은 휴짓조각으로 변했고, 투자했던 돈은 전부 날아갔으니 난 이제 거지가 되었어.”

“젊은 놈이 별소릴 다 하고 있네. 이 자식아, 돈은 또 벌면 되는 거야.”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번 시합 꼭 이겨. 난 이제 실업자 되면 진짜 죽어.”

“걱정하지 마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떵떵거리며 살게 해 줄 테니까.”

“강철아 이번 대전료에서 먼저 가불 좀 해주면 안 되겠니. 우리 딸 분유 값도 없다고 마누라가 징징댄다. 아 쪽팔려서 죽을 지경이야.”

“이 미친놈이!”

* * *

삼성그룹의 경영본부장 최윤택이 상업은행에 들이닥친 건, 직원들이 퇴근하기 위해 몰려나올 때였다.

불안이 엄습해 왔다.

몇 번이나 전화했지만, 은행장 한명호는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평소 같았다면 정말 바쁜 일로 전화를 받지 못했다 해도 즉각 다시 전화가 왔을 텐데 이번에는 아예 연락조차 없었다.

주거래 은행인 상업은행은 삼성으로 인해 탄탄한 자금력을 확보하며 성장해 왔는데, 이런 행동을 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곧장 12층 은행장실로 직행했다.

만약 자신을 피하는 것이 맞다면 굳이 연락을 해서 피할 시간을 줄 이유가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행장실로 들어서자, 행장 비서가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워낙 여러 번 그를 봤기 때문에 자신이 찾아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불청객을 맞이하는 것처럼 당황함을 숨기지 못했다.

“행장님 계십니까?”

“아, 그게…….”

“있는 거 알고 왔습니다.”

“본부장님, 먼저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최윤택이 거침없이 행장실로 들어가려 하자, 비서가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씨발. 이것들이 정말…….

비서가 사라지는 것을 보며 최윤택이 잡아먹을 듯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봤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감히 삼성의 실세이자 자금의 출납을 전담하고 있는 자신을 이렇게 홀대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잠시 기다리자 비서가 나와 행장이 기다린다며 들어가라는 말은 전했다.

찬바람이 돌 정도로 그녀를 바란 본 후 행장실로 향했다.

당황한 모습.

자신을 맞이하는 은행장 한명호의 얼굴은 마치 빚쟁이를 맞이하는 것처럼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행장님, 오랜만입니다.”

“어서 오세요. 본부장님이 여기까지 웬일입니까?”

“몰라서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자리에 앉은 최윤택이 한명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한명호도 강호에서 온갖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노련한 늑대였다.

“갑자기 찾아오셨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먼저 차를 내올 테니 천천히 마시면서 이야기하시죠.”

“차는 필요 없습니다. 지금 제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습니다.”

“허허… 그런가요. 그렇다면 이야기부터 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융자의 진행 상황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무슨 융자 말입니까?”

오리발을 내미는 한명호의 대답에 최윤택이 쓴웃음을 지었다.

불안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다.

“무슨 일이 생긴 거군요. 그렇죠?”

“일이야 언제나 생기는 거 아닙니까. 본부장님께서는 마치 우리은행에 돈이라도 맡겨 놓은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조금 듣기가 거북합니다.”

“행장님!”

“나는, 본부장님께 융자를 해 드리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혹시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다고 한 말을 오해하신 거 아닌가요?”

“이유가 뭡니까?”

최윤택이 한명호를 쏘아보며 가래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보다 머리의 회전이 빠른 그가 한명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다.

삼성의 핵심브레인이자 은행에겐 사신처럼 통하는 최윤택의 분노.

평상시라면 그의 눈빛에 꼬랑지를 말았겠지만, 한명호는 전혀 동요치 않고 그의 시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외환위기로 인해 은행의 수신고가 바닥을 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삼성의 부탁이기에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허나, 지금 우리 은행 사정이 녹록지 않습니다. 한국은행에 구조신호를 보내야 할 만큼 절박하단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거액을 어떻게 융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 이유 때문입니까?”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소.”

“물은 내가 바보군요.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삼성을 상대로 행장님이 그렇게 나올 때는 뭔가 이유가 있을 테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알아보죠. 바쁜데 괜히 찾아온 것 같군요.”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미안하다고요. 행장님, 절대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이 선택이 누구의 결정인지 모르겠으나, 당신들은 앞으로 두고두고 이 결정을 후회하게 될 테니 말입니다.”

* * *

주거래 은행인 상업은행을 비롯해서 시중의 5대 은행이 전부 융자를 거절하자, 최윤택은 몸을 와들와들 떨어댔다.

한명호에게 큰소리를 치면서 나올 수 있었던 건 나머지 은행들에서 융자를 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비록 선대의 인연 때문에 상업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삼았을 뿐이었으니 언제든지 주거래 은행을 바꿀 수 있었다.

시중을 장악하고 있는 은행들은 삼성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 그동안 수많은 러브콜을 보내며 꼬리를 흔들어 댔다.

삼성그룹에서 나오는 돈만 확보한다면 은행의 서열이 바뀔 정도였으니 그들이 안달을 부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그들이 동시에 융자를 거부하자 최윤택은 거대한 어둠이 자신의 몸을 압박하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외환위기라 해도 삼성의 신용도를 봤을 때 은행들은 달러 빚이라도 얻어서 융자를 해줘야 하는 실정이었으나,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이렇게 등을 돌렸다는 건 거대한 힘이 작동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권력의 힘이었다.

현재 권좌에 올라있는 대통령은 재벌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했기에 그가 움직였을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대통령이 재벌에 대해 거부감을 가졌다 해도 이런 비상시기에 기업의 돈줄을 죈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국내 최강이라는 경영정보팀을 총동원해서 그 이유를 파기 시작했다.

정부는 물론이고 언론과 학계, 공무원 등 그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기에 그동안 웬만한 정보들은 하루 만에 파악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번 건은 냄새만 풍겼을 뿐 쉽게 그 뿌리가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경영정보팀의 막강한 인맥은 기어코 은행의 고위층을 압박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최윤택의 얼굴이 벌겋게 변한 것은 융자거부의 배경에 마이다스 CKC가 존재하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부터였다.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자신의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자 삼성의 몰락이 눈앞에 환히 펼쳐지는 것 같았다.

보고서를 작성해서 부랴부랴 회장실로 뛰어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듣고 있는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묵직한 분위기.

침을 꿀꺽 삼키며 서두르던 발걸음을 천천히 늦췄다.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회장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회장에게는 비선라인이 존재했고, 그 비선라인이 그림자 속에서 그룹의 전반적 상황을 회장에게 보고한다는 걸 안 건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다.

“왔으면 앉지 왜 그러고 서 있어. 앉아.”

“예, 회장님.”

“모든 융자를 거부당했다면서?”

“예.”

“자네 생각에는 마이다스 CKC가 왜 그런다고 생각하나?”

예상했던 것처럼 회장은 돌아가는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최윤택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 또한 시험이다.

“전자를 먹을 생각인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이런 짓을 벌일 수 없습니다.”

“대책은?”

“지금으로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말해 봐. 괜찮아.”

“저는 차마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똑, 똑, 똑…….

최윤택의 대답에 회장의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움직였다.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는 뜻이다.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던 회장의 입이 열린 것은 최윤택이 긴장감을 참지 못하고 몸을 움찔거릴 때였다.

“전자의 경영권을 유지하려면 나와 우리 일가가 지닌 그룹계열사의 지분을 전부 처분하고, 내가 보유한 현금을 동원하면 된다. 그렇지?”

“……회장님.”

“전자를 살리고 나머지 계열사를 전부 포기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가업을 말이지. 이틀 전부터 잠도 자지 못하고 고민했네.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야.”

“회장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서 이런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봐,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언론을 전부 동원해서, 외국자본이 삼성전자를 노린다고 터트려. 그리고 정부쪽에 회사와 국민들의 이름으로 매일 탄원서를 올리도록 해. 죽을 때 죽더라고 끝까지 싸워봐야 되지 않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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