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3] 지옥 - 3
신규성은 기어코 대한민국이 IMF에 무릎 꿇는 장면을 보면서 한숨을 길게 내리 쉬었다.
그 역시 경제통이었으니 몇 달 전부터 계속되어 온 위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뉴스 보기가 어려웠다.
이 모든 것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거의 매일처럼 기업들이 도산하는 장면들을 보면서 그는 최강철의 선택에 두려움을 느꼈다.
피닉스 그룹은 최강철의 지시에 따라 부채비율을 계속해서 줄여왔고 더 이상의 투자를 자제하며 몸집을 줄여왔다.
특히 외국에서 상당 부분이 투자되었으나, 외채비율이 제로였기 때문에 국가적인 위기상황에서도 어려움 없이 버텨나가고 있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최강철의 선택과 결정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얼마나 탁월하고 경이적인 것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가 마이다스 CKC를 비롯해서 15개의 투자회사 명의로 삼성전자의 주식을 쓸어 담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가 터진 후 한 달 정도 지난 뒤부터였다.
모든 주식이 그렇지만 외환위기 후 삼성전자의 주식 또한 매일 하한가에 근접할 정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3만원이 붕괴된 건 오래전 일이었다.
주식의 특성은 상승장과 하락장에서 엄청난 거래량이 터진다는 것이었지만, 외환위기를 당한 후에는 상황이 많이 달랐다.
팔겠다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였으나 사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외국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기관과 일반 투자자까지 못 팔아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으니 주식을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시합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최강철은 매수일자를 정해주며 삼성전자 주식의 30% 이상을 반드시 확보하란 지시를 내렸다.
“김 사장님, 어서 오세요.”
“또 집에 안 들어가시는 겁니까. 너무 무리하면 병나요.”
“이럴 때는 안 들어가는 게 아니라 못 들어가는 거라고 말하셔야죠. 나도 집에 가고 싶답니다.”
“허허, 그런가요. 그래도 건강은 챙기세요.”
김도환이 맞은편에 앉으며 신규성의 초췌해진 얼굴을 바라보았다.
신규성이 마이다스 CKC 미국 본사로 넘겼던 운영자산 12억 달러는, 한 달 전 다시 받았을 때 한국 돈으로 3조 6천억으로 변해 있었다.
미국으로 넘겼을 때 1조가 조금 넘었으니 무려 3배가 뻥튀기된 것이다.
달러 강세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800원에 불과했던 달러는 외환위기가 벌어진 후 무려 2,400원까지 폭등했던 것이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최강철의 지시대로 삼성전자의 주식을 30% 확보하는데 들어가는 돈은 4,000억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돈은 흘러넘칠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때부터 신규성은 본격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짠 후 투자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매물로 나온 우량기업들을 사냥했고 서울 시내에 지천으로 깔린 빌딩과 건물, 그리고 토지까지 사들였다.
주식도 마찬가지였다.
삼성전자 매수팀과 별도로 3개의 팀을 운영하며 떨어질 대로 떨어진 블루칩들을 쓸어 담고 있었다.
비서가 없는 신규성이 직접 일어나 커피를 타오는 모습을 보면서 김도환은 싱긋 웃었다.
규모로 봤을 때 마이다스 CKC의 한국지부는 제우스와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지만, 신규성은 아직도 비서를 두지 않고 있었다.
삶의 방식 차이다.
그리고 그것이 김도환은 마음에 들었다.
“상황이 어떻습니까?”
“외국인 투자자들까지 전부 한국이 망할 거로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전부 주식을 팔지 못해 안달이 나 있으니 회장님께서 지시한 물량은 확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지금 추진하고 있는 금산분리법이 통과되어야 합니다.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그자들은 녹녹하게 경영권을 내놓지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회장님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총수에게 그냥 삼성전자를 맡길 생각이었지만, 피닉스 그룹에 편입시키는 것으로 결정한 이상 무조건 놈들의 주식을 쓸어내야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새로 들어온 정부와는 이미 합의가 된 상탭니다. 비록 삼성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과거의 집권당이 반대하고 있으나, 계속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버티지 못할 겁니다. 이미 법률은 상정되어 있고 조만간 결판이 날 거예요.”
“최대한 서둘러 주십시오. 그자들의 보유 주식이 흘러나오면 일하기가 편해집니다.”
김도환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규성의 말대로 총수를 비롯해서 삼성계열사가 확보하고 있는 삼성전자의 주식은 20%가 조금 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총수 일가가 전자를 장악할 수 있는 것은, 아직 매도를 하지 않은 외국의 우호 자본이 총수 일가를 돕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이다스 CKC가 주식의 30%를 장악하고 삼성계열사의 지분이 금산분리법으로 사라지게 된다면 그들도 총수 일가에 등을 돌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두 달 이내에는 결판이 납니다. 대정당 쪽에서 이 일을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이고 우리쪽 언론사들이 벌떼처럼 가세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버티지 못할 거예요. 하지만 보험은 들어놔야 됩니다.”
“무슨 말씀이시죠?”
“삼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닙니다. 그들도 지금쯤 사장님이 주식을 매집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을 겁니다. 눈치를 채면 가만있지 않겠죠. 삼성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발을 묶어 놔야 합니다.”
“계열사의 자금을 차단하란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척하면 착.
김도환이 한마디 거들자 신규성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무슨 소린지 안다.
자신에게는 무려 3조가 넘는 현금이 있었으니 삼성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은행들의 발을 묶어 놓는 건 일도 아니었다.
* * *
삼성의 경영본부장 최윤택은 회장 비서실로 들어선 후 대기실에 조용히 앉았다.
보고해야 할 사안은 더없이 급한 것이었으나 지금 회장은 제1야당의 사무총장과 만나고 있었다.
그들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금산분리법 개정안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문을 열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전 정권에서 집권당이었던 제1야당의 사무총장은 비록 정권은 빼앗겼지만, 아직도 보수의 심장을 자처하며 여전히 방귀 냄새를 풀풀 흘리고 있는 인물이었다.
총수가 지금까지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권력과 언론의 목줄을 틀어쥐는 것이었다.
삼성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자들을 집중 관리해서 우호세력을 만들었고, 삼성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결정될 수 있도록 유도했다.
지금까지는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편법증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 감고 귀 막은 정부 관계자들과 국회의원들로 인해 막대한 세금을 절약할 수 있었다.
돈이 귀신도 부릴 수 있다는 말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었다.
돈을 먹은 놈들은 그 이상을 돌려주기 위해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채 삼성의 입장에서 모든 일을 처리해 주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대한정의당이 창단된 후부터였다.
국가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기치 아래 모여든 의원으로 창당 된 대한정의당은, 이전 총선에서 92석을 확보한 후 삼성에 관한 일들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왔다.
하긴 삼성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재벌그룹에서 횡횡하고 있던 재벌가의 비리에 대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는데 얼마나 집요했던지 벌써 여러 곳에서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다.
어쩐 일인지 그자들에게는 돈이 통하지 않았다.
총수의 지시로 인해 각종 연줄을 동원해서 접근했으나 대한정의당 소속의 국회의원들은 아예 만나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제1야당의 사무총장이 회장실을 나선 것은 그로부터 10여 분이 더 지난 후였다.
경영본부장은 사무총장이 나간 후 잠시 뜸을 들이다가 회장실로 들어섰다.
그는 총수의 오른팔이었고 그룹 전반에 관한 일들을 직접 처리하는 실세였기 때문에 거의 매일 회장실을 들락거리는 사람이었다.
총수의 심기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경영본부장이 들어서자 손가락으로 소파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내며 남아 있는 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일이 잘 안되었습니까?”
“이 새끼들이 돈을 받아 처먹었으면 밥값을 제대로 해야 될 거 아냐. 이거, 아무래도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어려운 모양이군요.”
“다음 임시국회에 금산분리법이 통과될 것 같아. 제1야당에서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지만 대한정의당과 여당이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어서 어렵단다.”
“하긴, 그럴 만도 할 겁니다. 지금 집권당은 우리가 대선에서 제1야당을 밀어준 걸 있거든요.”
“그놈들한테도 줬잖아!”
“문제는 금액 차가 있다는 겁니다. 우리 쪽에서는 이전 정권이 이길 것으로 판단했는데 막판에 뒤집혔잖습니까.”
“으… 더러운 놈들. 20억을 받아먹을 때는 간조차 빼줄 것처럼 굴더니 이제 와서 그런 이유 때문에 뒤통수를 친다는 게 말이나 돼!”
“정치인들은 힘이 없을 때 와 있을 때의 처신이 달라지는 족속들입니다.”
“가소로운 놈들. 그래 대안은 생각해 봤나?”
“예, 회장님. 대한정의당이 발의안대로 완벽한 분리가 된다면 삼성생명의 지분 8.5%를 매각해야 됩니다. 우리가 제1야당에 내건 5% 소유권조차 무산된다는 조건에서 말입니다. 따라서 경영권 방어를 위해 필요한 금액은 최소 1,500억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물산을 비롯해서 계열사들에게 자금을 확보하라는 지시를 내려놨습니다.”
“충분히 가능하겠지?”
“우리 계열사를 전부 동원하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대한정의당 이 새끼들 두고 보자. 감히 삼성을 건드린단 말이지. 금산분리법이 통과되면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정말 어리석은 놈들이다.”
“문제는 후계작업을 변경해야 된다는 겁니다. 삼성생명이 가지고 있는 전자주식이 날아가면, 에버랜드에 회장님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넘겨도 문제가 생깁니다. 제 생각에는 물산으로 바꾸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에서 나온 주식들 상당 부분을 물산이 확보해야 된다. 물산이 그 정도 여력이 있을까?”
“은행이 어렵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좋아, 그건 그렇게 조치하도록 해.”
경영본부장이 자신감을 보이자 총수의 얼굴에서 드디어 웃음기가 떠올랐다.
역시 자신의 오른팔이다.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었고 소리소문없이 뒤처리까지 했기 때문에, 그에게 경영본부장은 충신 중의 충신이었다.
사람은 느낌으로 안다.
자신이 주군에게 어떤 신뢰를 받고 있는지를.
남자는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친다고 했지만, 경영본부장의 행동은 과한 면이 넘쳐흘렀다.
총수 일가에 대한 그의 충성은 사회정의에 위배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 대한민국으로 봤을 때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족속이다.
그럼에도 경영본부장의 비상한 두뇌와 업무처리능력은 발군이었다.
“주식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이틀 전에 보고 드린 것처럼 이상한 징조가 곳곳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저희 본부에서 주식 흐름을 조사한 결과 15군데에서 매집하고 있다는 정황을 포착했습니다.”
“얼마나?”
“벌써 6%가 넘었습니다.”
“음…….”
삼성의 경영전략본부는 그룹 경영에 관한 전반적인 중요사안들을 처리하는 부서였고, 주식 흐름을 분석 관리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IMF 사태 이후 주가가 고꾸라지며 수많은 매물이 나왔기 때문에 비상팀이 가동되어 주식 흐름을 분석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이상한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근래 들어 확연하게 눈으로 보일 만큼 검은손이 움직인다는 게 노출되었다.
총수에게 보고했을 때는 3%에 불과했지만 불과 1주일 사이에 또다시 상당수의 주식이 놈들에게 넘어간 상태였다.
“정체는 파악했나?”
“매집세력의 반은 미국계열의 투자자들이고 나머지는 한국에서 들어온 자금입니다. 대표적인 세력은 마이다스 CKC로 2%를 넘었습니다.”
“마이다스 CKC는 국제적인 화인트쉐도우다. 기업사냥을 하러 다니는 놈들이 아니라 장기투자를 해서 이익을 창출하는 자들이야. 본부장이 너무 과민한 거 아닐까?”
회장이 빤히 쏘아보며 묻자 경영본부장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지 안다.
막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는 마이다스 CKC가 투자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삼성전자의 발전 가능성을 크게 봤다는 뜻이다.
평소라면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했다.
금산분리법 개정을 앞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와 매집하는 것과 절묘하게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세력들의 존재가 그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랬기에 그는 총수의 의중을 알면서도 표정을 풀지 않았다.
“조금 더 두고 보겠습니다. 하지만, 회장님. 그자들이 앞으로도 계속 주식을 매집한다면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한도는?”
“제 생각에는 마지노선을 15%로 보고 있습니다. 마이다스 CKC와 그 동조세력으로 보이는 자들의 매수가 15%를 넘으면 방어권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음…….”
“회장님, 계열사들은 삼성생명이 보유한 주식을 받아야 하니 여력이 부족합니다. 더군다나, 은행도 휘청이는 상황이라 더 이상의 융자는 어려운 실정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해놓으셔야 합니다.”
직접화법은 구사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못 알아들을 총수가 아니다.
총수가 지닌 현금을 투자해 달라는 뜻이었다.
은행에 쌓아놓은 현금과 스위스의 비밀계좌에 들어 있는 현금을 동원하면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할 거란 고언이었다.
그랬기에 총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경영본부장은 쳐다봤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그의 말대로 진행된다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금을 전부 내놔야 될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킨 후 여유 있게 찻잔을 들었다.
“경영본부장, 요즘 힘들지?”
“아닙니다.”
“외환위기가 다가올 걸 미리 캐치하고 준비를 잘 했기 때문에 삼성이 잘 버티고 있잖아. 이게 전부 경영전략본부 직원들이 그만큼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에게도 곧 위기가 다가오겠지. 반도체 값은 계속 떨어지는 중이고 시장은 위축될 대로 위축되어서 전 계열사의 매출이 급감하고 있는 실정이잖아. 안 그래?”
“그렇습니다.”
“자네가 봤을 때 이런 현상이 얼마나 갈 것 같은가?”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한국정부가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을 갚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제 생각에는 최소 5년을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히 짚었군. 내 생각도 그래. 그런데 말이야, 이런 상황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현금을 전부 내놓는 게 맞는 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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