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42화 (242/308)

[242] 지옥 - 2

“회장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예, 대표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일단 앉으십시다.”

정우석이 상석을 비워놓고 맞은편에 앉으며 자리를 가리키자 최강철이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대한정의당을 이끌고 있는 정우석이었으나 그는 최강철을 상대로 상석에 앉지 못했다.

그보다 훨씬 나이가 적고 일반 평당원에 불과했지만, 대한정의당의 모든 것은 최강철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정우석이 급하게 만나자고 전화가 온 것은 이틀 전이었다.

훈련에 돌입하기 전이었기에 최강철은 흔쾌히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자신 역시 그에게 할 말이 있었고 그가 만나자는 이유도 그것과 상관있을 거란 판단을 했다.

정우석의 입이 열린 것은 비서가 차를 내와 그들 앞에 놓고 나갔을 때였다.

당대표실에는 오직 그와 둘 뿐이었는데 정우석의 표정은 매우 무거웠다.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이다.

“오늘 회장님을 만나자고 한 건 대선과 관련해서 회장님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입니다. 상황이 급하다 보니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닙니다. 말씀하시죠.”

“이제 대선이 2달 앞으로 다가왔어요. 우리 당에서는 제가 후보로 나설 생각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서 모셨습니다.”

빤히 최강철을 바라보는 정우석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서렸다.

청렴한 정치인으로 소문났고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그였지만, 그의 눈에도 은은한 열망이 담겨 있었다.

최강철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너무나 잘 안다.

대한정의당의 의원들은 모두 최강철의 지원으로 당선된 사람들이었고, 모든 정치자금 또한 마이다스 CKC에서 은밀하게 나가고 있었다.

만약 최강철이 반대한다면 정우석은 절대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최강철의 입이 열린 것은, 정우석이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긴장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할 때였다.

“대표님께서 후보로 나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대한 정의당을 그동안 훌륭하게 이끌어 오셨으니 당연히 대표님이 후보가 되셔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최강철의 한마디에 정우석에 긴장되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국회의원 92석을 가지고 있는 제1야당의 후보가 되었다는 건 그가 권좌에 오를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었다.

천성적으로 욕심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으나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다는 건, 인간의 욕심한계를 초월하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지금 집권당은 외환위기에 직면하며 커다란 위기를 맞이했다. 그 때문에 최강철이 적극적으로 지원만 해준다면 이길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그의 활짝 피었던 얼굴은 이어진 최강철의 말로 인해 점점 어둡게 변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후보는 하십시오. 하지만 욕심은 버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시오?”

“이번 선거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게임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요. 남들이 벌여 놓은 시궁창에 빠져 허우적대기엔 대한정의당의 체력이 아직 튼튼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슨 말씀인지 이해할 수 없군요. 우리가 왜 선거에서 이길 수 없단 말입니까?”

“우리나라는 아직 지역감정으로 대선이 치러지기 때문입니다. 대한정의당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그것을 깨뜨리기는 쉽지 않을 거예요. 이제 당을 창당한 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이 대한정의당을 좋아하지만, 아직 충분한 신뢰를 주기에는 기간이 너무 짧습니다.”

“음…….”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지금 엄청난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시기에 우리는 다른 것에 집중해서 국민들의 신뢰를 확보해야 합니다.”

“고견을 말해주시오.”

“선거에는 지더라도, 대표님께서는 당당하게 선거에 임해 주십시오. 절대 다른 정당의 후보를 비방하거나 네거티브 전략을 쓰시면 안 됩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주십시오.”

“예를 들면?”

“이번 외환위기는 정부의 안일한 관리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재벌들의 무분별한 투자와 위기관리능력의 부재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재벌들은 능력도 없는 후계자들을 내세워 경영을 좌지우지하면서 멀쩡한 기업들을 철저히 망가뜨려 놓았습니다. 또한, 증여에 따른 막대한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각종 편법을 동원해서 그룹승계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자료들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최강철이 가방에서 서류들을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정우석이 그 서류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다가 깊은 신음을 흘려냈다.

워낙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서류들이었다.

“재벌들의 불법 승계를 알고 있었지만 정말 한심한 일이군요. 그러나 쉽지 않은 내용입니다. 그들은 정부 책임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국회의원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던 것이오.”

“그러니 해야죠. 우리 대한정의당은 이제 92명의 국회의원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이용해서 금산분리법을 강화하고 불법증여를 할 수 없도록 제도를 개정해야 됩니다. 또한, 우리당은 5년 단임제인 지금의 대통령 임기를 4년 연임제로 개헌하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정부 부처와 공기업 그리고 주요 대학들을 지방으로 이전해야 합니다…….”

최강철의 입에서 주요정책에 관한 내용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내용에는 정치, 경제, 군사, 교육 등 사회 전반에 관한 내용이 총 망라되어 있었다.

최강철의 말이 진행될수록 정우석은 입을 떠억 벌리고 제대로 말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대통령선거를 준비하며 공약 정책들을 마련하고 있었지만, 최강철이 말한 내용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예민하고 중요한 사안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표님, 이번 대선에서 이 내용을 공약사항으로 발표하시고 밀어붙이십시오. 국민들은 우리의 공약사항들을 들으면 분명 환호를 보내줄 겁니다.”

“하지만, 엄청난 반발에 부딪힐 겁니다.”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강하고 가장 정의로운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면 언젠가는 국민들도 우리를 인정해 주지 않겠습니까?”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

대한민국이 겪었던 최초이자 최고의 비극 중 하나다.

전쟁을 제외하면 이토록 국민이 힘들어하고 고통받았던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나라가 경제적으로 망했다는 건 자주 국권을 상실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IMF(국제통화기구)는 코 묻은 돈을 빌려주며 마치 점령군처럼 당당하게 대한민국으로 들어와, 수많은 요구를 하면서 국민들의 고통을 강요했다.

기업들이 차례대로 도산했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배고픔과 절망으로 인해 한강물에 몸을 던지는 경우가 속출했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면 무엇이 지옥이란 말인가.

집마다 눈물이 가득했고 한숨 소리가 지붕을 뚫고 흐를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정부는 핑계로 일관했고 정치인들은 상대 당을 헐뜯으며 정쟁에 몰두했다.

무분별한 해외투자와 외채를 끌어당겨 마음껏 돈지랄을 하던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과정에서 회사원들은 길거리로 내몰렸다.

그럼에도 기업의 총수들은 빼돌린 돈을 지닌 채 해외로 도망치기에 바빴다.

우량했던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자본으로 넘어갔고 외화는 무려 달러 당 2,400원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도 웃는 자들이 있었다.

국가 경제가 도탄에 빠지며 대부분 국민이 피눈물을 흘렸어도 미리 현금을 확보했던 부자들은 돈을 쓸어 담기에 바빴다.

* * *

최강철은 훈련에 돌입했지만, 마음이 편치 않았다.

훈련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나오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가슴을 서늘하게 쓸어내렸기 때문이었다.

IMF에서 파견되어 나온 자들의 면상이 연일 화면을 장식하는 걸 보며 텔레비전을 부수고 싶다는 마음을 간신히 참았다.

미친 자들의 향연.

그 와중에 정권을 잡겠다며 미친 듯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자들의 면상이 나올 때마다 그리고 정부 관계자라는 자들이 국민들을 상대로 거짓말하는 장면을 볼 때마다 아구창을 박살 내고 싶다는 욕망이 불끈거리며 솟구쳤다.

외신에서는 떠오르는 아시아의 용이 한강물에 추락했다며 마음껏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참는다.

세계의 조롱 속에서 휘청거리는 대한민국이 언젠가는 분명 최고의 자리에서 그들을 내려다볼 테니 말이다.

* * *

IMF 외환위기 속에서 치러진 대통령선거는 독재와 평생을 싸워왔던 호남의 맹주이자 제2야당의 후보가 당선되었다.

최강철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 들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정의당에 표를 몰아주었던 국민이, 양 당의 지역감정 조장전략에 휘말려 들어 호남의 맹주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정우석의 선전은 대단했다.

그가 득표율 27%를 차지하며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최강철이 내놓은 공약사항들이 그만큼 국민들의 가슴을 휘저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큰형 내외가 제주도에서 올라온 건 최강철이 출국을 3일 앞두었을 때였다.

세상은 온통 IMF에 관한 뉴스로 가득 찼으나 그 속에서 유일하게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든 건 최강철에 관한 소식들이었다.

웰터급으로 다시 체급을 내려 지상 최고의 스피드를 가졌다는 휘태커를 부수기 위해 준비 중인 최강철의 소식은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쁨이자 기다림이었다.

가족들이 오신다는 소식에 숙소에서 기다릴 때, 부모님을 앞장세운 채 큰형 내외가 양손에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들어왔다.

“아버지, 여기까지 웬일이세요?”

“너희 엄마한테 물어봐라. 하도 성화를 부려서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버지가 마땅치 않다는 듯 어머니한테 시선을 주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시선을 마다한 채 반가운 얼굴로 자신만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아들, 가기 전에 맛있는 거 먹이고 싶어서 왔지. 얼굴도 보고.”

“큰형은요?”

“제주도 갔다가 따라 왔다. 나도 네 얼굴을 보고 싶었거든.”

“그런데, 강철아. 관장님하고 성일이는 어디 간겨?”

“아뇨, 금방 들어올 거예요. 목마르시죠. 뭐 좀 마실 거 드릴까요?”

“아녀, 괜찮어.”

숙소로 들어온 부모님과 큰형 내외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귀신같이 윤성호와 이성일이 문을 열며 들어왔다.

“아이고, 아버님 어머님. 벌써 오셨네요. 그렇지 않아도 소식 듣고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그려요, 관장님도 잘 계셨죠. 우리 강철이 때문에 매번 고생하시는데 제대로 찾아뵙지 못해서 미안하구먼유.”

“별말씀을요.”

“앉으셔유. 우리가 먹을 걸 싸 왔으니까 같이 먹어요.”

다가온 윤성호의 손을 양손으로 잡은 어머니가 거실로 이끌더니 부랴부랴 형수와 함께 짐을 풀기 시작했다.

참 이것저것 많이도 나왔다.

갈비찜은 기본이었고 불고기와 잡채를 비롯해서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 줄줄이 상위에 펼쳐졌다.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가기 전에 배불리 먹고 가. 그동안 먹고 싶은 거 못 먹었을 거 아녀.”

따뜻한 시선.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시선이 너무 따스해서 심장까지 녹을 것 같았다.

그때 대화를 지켜보던 큰형이 슬쩍 나서며 입을 열었다.

“강철이는 시합 때문에 체중 조절하느라 먹지 못한다고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어. 그 덕분에 네 형수가 엄마한테 잡혀서 이거 준비하느라 어젯밤을 꼬박 샜다. 엄마는 네가 이걸 꼭 먹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단다.”

음식들은 맛있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도 좋지만, 형수의 손맛도 예전부터 알아줄 정도였기 때문에 최강철은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왁자지껄 떠들며 저녁을 먹은 게 얼마 만인가.

평소에 말이 없던 아버지까지 술을 한잔하시자 연신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이성일이 중간에서 익살을 떨었기 때문에 음식을 먹는 동안 웃음꽃이 만발했다.

부모님과 가족들은 물론이고 최강철과 일행들도 가급적이면 시합에 관한 말은 자제했다.

텔레비전에서는 거의 매일 최강철의 출국 소식을 전하며 휘태커가 얼마나 강한 선수인지 떠들어 댔다.

물론, 부모님과 가족들은 근심걱정이 컸을 테지만 한마디도 그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녁을 모두 먹고 커피를 마실 때 뉴스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길게 줄을 늘어선 채 서 있는 장면이 나타났다.

바로 금을 팔기 위해 나온 사람들의 행렬이었다.

국가에서는 외채를 갚기 위해 국민들이 가지고 있는 금을 모아야 한다고 설득했기 때문에 착한 국민들은 아기 돌반지까지 들고나오는 중이었다.

눈물이 나오는 일이다.

너무나 어수룩하고 착한 국민들은 정부에서 나라를 살리기 위해 금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장롱깊이 숨겨 두었던 유품까지 들고 나왔다.

국민들은 이렇게 조국을 사랑하는데 위정자들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단 말인가.

떠들썩했던 분위기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의 어두운 얼굴을 보면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저거 우리도 했다. 아부지가 하도 해야 한다고 하는 바람에, 집에 있는 금이란 금은 전부 담아서 갔다 냈어. 할머니가 주신 반지는 안 된다고 했더니 아부지가 눈을 부라리는 바람에 그것도 냈다. 너희 큰형도 애들 돌반지까지 갔다가 줬다더라. 강철아 너도 했냐?”

“저는 안 했어요. 시간도 없었고 금도 없거든요.”

“하긴, 있어도 미국에 있는 네 처가 다 가지고 있겠구먼.”

“예.”

어머니의 질문에 최강철은 쓴웃음을 지었다.

국민들에게 걷어 들인 금이 한 달 만에 무려 100톤이 넘는다는 말을 들었다.

정부에서는 이 금을 금괴로 만들어 수출하고, 외환을 확보할 생각이었다.

세계의 언론이 세계사에 유례없는 금 모으기 운동을 토픽으로 보도하며 뜨거운 애국심을 조명했지만 최강철은 그런 칭찬에 전혀 동요되지 않았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인가.

그가 아는 바에 따르면 정부는 국민들에게 짜낸 금을 헐값에 팔아넘겨 부랴부랴 달러를 마련했지만, 외채를 갚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최강철이 단답형으로 대답하자 슬그머니 어머니의 화제가 엉뚱한 데로 돌아갔다.

“그런데 강철아, 성일이는 애기난지 오래되었는데 넌 소식 없는겨?”

“아직요.”

“이눔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네 처는 도대체 언제 한국으로 데려올 겨. 네가 장가간 게 언젠데 아직도 애 소식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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