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링의 난폭자 - 9
바스케스는 펀치가 적중되자 달라붙은 최강철을 그냥 두지 않았다.
왜 그의 별명이 링의 난폭자인지 확인이라도 시켜주겠다는 듯 거칠게 최강철의 상체를 뿌리쳤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면 충분했다.
그 짧은 순간 다리의 힘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최강철은 뒤로 물러나 전열을 가다듬었다.
“강철아, 이 새끼야, 돌아, 돌라고!”
미친 사람처럼 떠드는 윤성호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최강철은 이를 악물고 바스케스의 몸통을 향해 다시 뛰어들었다.
미친 황소가 따로 없다.
자신을 향해 접근해 온 바스케스의 주먹에서 바람을 가르는 묵직함이 전 방위를 차단한 채 날아오고 있었다.
“위잉, 위잉… 윙, 윙.”
마치 끝장이라도 내려는 듯 작정하고 던지는 펀치들이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물러서지 않은 채 그의 펀치를 흘려내며 기회를 노렸다.
일방적인 펀치의 세례였으나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막았다.
이번에는 스토핑과 암 블로킹, 패링까지 썼는데 위기를 넘기기 위함이었다.
지금 윤성호의 주문대로 사이드를 돌다가는 결국 뒤로 물러나게 될 것이고, 놈의 주문에 따라주는 결과가 될 것이다.
인체는 신비로워서 정신을 차린 것 같아도 또다시 펀치를 허용하면 충격이 중첩되어 더 큰 데미지를 입는다.
그랬기에 모든 방어력을 동원해서 바스케스의 공격을 막는 데 주력했다.
분노보다는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이 우선이다.
복수는 나중에.
지금은 오직 위기를 넘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경기 초반에 당했으니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충격을 당해서 무뎌졌던 몸의 감각들이 완벽하게 제자리로 돌아오며 칼날 같은 본능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최강철은 창처럼 날아온 바스케스의 스트레이트를 머리 위로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는 복수의 시간이다.
폭풍 같은 바스케스의 연타세례가 끝나는 순간 웅크렸던 최강철의 몸이 비상하며 앞으로 튕겨 나갔다.
모든 방어기술을 총동원했으나 얼마나 맞았는지 셀 수조차 없었다.
어떤 방어도 해일 같은 공격을 전부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정타로 맞느냐 빗겨 맞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정타로 맞으면 정신이 나가지만, 빗겨 맞으면 피부가 엉망으로 변한다.
눈이 붓고 찢어지는 것은 정타로 맞아서 그런 게 아니라 빗겨 맞으며 발생하는 현상이다.
아프다, 이 새끼야.
눈이 부어올라 시야가 조금 흐려졌으나 앞으로 튕겨 나간 최강철의 몸에서 발칸포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맞은 만큼 돌려준다.
네가 어떤 놈이라도 상관없어. 나는 맞고는 못 사는 놈이다.
“다시 접근하는 최강철 선수, 악. 바스케스의 어퍼컷! 휘청입니다. 큰 주먹에 맞았습니다. 최강철 선수, 클린치를 합니다. 바스케스, 강한 힘으로 최강철 선수를 떼어내고 있습니다.”
“방심했습니다. 너무 큰 주먹에 맞았어요. 위깁니다.”
“최강철 선수, 위깁니다. 바스케스, 엄청난 화력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최강철 선수 도망가야 합니다. 피해야 합니다. 아, 또 맞았습니다. 그러나 최강철 선수 뒤로 물러나지 않습니다!”
“일단 피해야 해요. 최강철 선수 고집을 피우면 안 됩니다.”
“바스케스의 소나기 같은 공격.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계속되는 바스케스의 공격, 라이스 훅. 어퍼컷. 스트레이트. 쉴 새 없는 공격입니다. 최강철 선수, 아직 데미지에서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도 잘 피하고 있습니다. 정타는 허용하지 않고 있어요. 데미지에서는 회복된 모습입니다.”
“일단은 피해야죠. 소나기는 피해야 합니다!”
“아, 이걸 어쩌면 좋습니까. 최강철 선수, 반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다시 얻어맞는 최강철. 이번에는 라이트 훅이었습니다. 다시 공격하는 바스케스. 정말 무차별적인 공격입니다.”
“최강철 선수가 왜 빠른 발을 활용하지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답답합니다.”
“바스케스, 웃고 있습니다. 마치 경기가 끝난 것처럼 바스케스가 잔인한 미소를 짓기 시작합니다. 저 선수는 저것이 특징이죠. 경기가 우세해지면 저런 웃음을 짓습니다. 그런 후 상대를 철저하게 박살 내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래서 링의 난폭자라고 불립니다. 정말 성격이 잔인한 선수예요.”
“최강철 선수, 여전히 버티고 있습니다. 하지만, 펀치를 계속 허용하고 있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최강철 선수, 이 위기를 벗어나 주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이종엽은 자리에서 일어난 채 미친 사람처럼 떠들어댔다.
그는 온몸을 흔들고 있었는데, 얼굴은 시뻘겋게 변해 있었고 목소리는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은 윤근모도 마찬가지였다.
최강철의 경기를 여러 번 중계했지만 이런 위기의 순간은 처음이었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위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스케스는 피 흘리는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침 흘리는 야수로 변해 있었다.
“계속되는 바스케스의 공격, 원투 스트레이트, 라이트 복부. 안면으로 올라옵니다. 좌우 어퍼컷. 강력한 공격입니다. 그러나, 잘 피하는 최강철 선수. 아, 이때. 최강철 선수 공격을 시작합니다. 강력한 원, 투 스트레이트. 이게 웬일입니까. 방어에 치중하고 있던 최강철 선수 반격에 나섭니다. 폭풍 같은 콤비네이션. 최강철 선수의 전매특허인 펀치가 번개처럼 터집니다. 맞불을 놓고 있는 바스케스. 치고받습니다. 양 선수, 이번 라운드에서 끝장을 보려는 듯 펀치를 교환합니다. 엄청난 경기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최강철 선수, 데미지에서 완전히 회복된 모습입니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최강철 선수, 밀어붙입니다. 조금씩 바스케스가 밀립니다. 우리의 최강철 선수, 허리케인다운 모습을 되찾았습니다. 그렇죠, 최강철 선수가 그냥 이대로 물러설 리가 없죠. 안 그렇습니까!”
“라이트 훅이 들어갔어요. 날카로운 공격에 바스케스의 안면이 흔들렸습니다. 최강철 선수 이제 살아난 것 같습니다.”
바스케스의 어퍼컷에 의해 최강철이 그로기에 몰리며 공격을 당하는 순간 광화문은 비명에 사로잡혔다.
광적으로 응원하던 20만의 관중들이 순식간에 침묵에 잠겨 버렸고 여자들의 흐느낌만이 가득 찼다.
“재수 없게 왜 울고 지랄들이야!”
최강철이 계속 공격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류광일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최강철은 너희들이 든 그 푸른 깃발의 불사조처럼 절대 쓰러지지 않는 놈이야.
그러니 울지 말고 열심히 응원이나 해!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었다.
강철아, 너를 믿는다.
바스케스가 아무리 대단해도 네가 이긴다는 걸 나는 믿어. 그러니 제발 그만 맞아라.
이 새끼야. 네가 맞는 걸 보니까 내가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초조하고 살 떨리는 시간들.
최강철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동안 온몸의 세포가 송곳에 찔리는 것처럼 아팠다.
그 고통 속에서 그의 머릿속을 채운 건 오직 하나.
기적처럼 최강철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 주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벌써 2라운드는 2분 30초를 넘어가고 있었다.
라운드 초반에 당했으니 2분이 넘도록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는 중이었다.
간절하게 염원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누구보다 최강철을 사랑했고 그의 경기를 수십번 돌려 볼 정도의 광팬이었기에 이 순간이 더 무서웠다.
최강철은 웬만한 충격에는 이렇게 무기력한 경기를 할 놈이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억울했다.
왜 억울했는지 모르겠지만 최강철이 맞는 걸 보면서 너무 억울해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잔뜩 웅크리고 있던 최강철의 몸이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시작되는 반격.
아이고.
최강철의 몸에서 번개가 터지는 것 같았다.
비참함에 젖어있던 20만의 관중들이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댔지만, 김영호와 류광일은 최강철이 반격에 나서는 순간 다리에서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 자식아, 돌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인마, 네가 절대 밀리지 말라고 그랬잖아.”
“이 멍청한 놈아. 내가 밀리지 말라고 그랬지 언제 돌지 말라고 그랬어.”
“그게 그 말이다.”
얼굴에 물을 뿌리며 이성일이 소리를 지르자, 최강철이 딴청을 부렸다.
잽싸게 수건을 든 윤성호는 얼굴을 닦은 후 부지런히 바셀린을 발랐는데, 펀치에 스친 최강철에게 여기저기 상처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강철아, 두 번째 작전으로 넘어가자. 다시 걸리면 좋지 않아. 어쩔래?”
“싫습니다. 그냥 이걸로 가죠.”
“저 새끼, 우리 접근전을 미리 기다렸던 거야. 아무래도 그건 안 되겠다.”
“알고 있어요.”
“또 당하면?”
“아무래도 성일이 작전이 반만 맞는 것 같습니다. 관장님 말대로 위험해요. 놈이 작정하고 기다리는 걸 그대로 쓸 수는 없죠. 그래도 두 번째 작전은 싫습니다.”
“어쩌려고?”
“제 스타일로 싸우겠습니다. 아무래도 저 새끼한테는 그게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윤성호의 질문에 최강철이 작정한 듯 대답했다.
그러자 이성일의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다.
“야, 압박에 당할 수도 있어. 한 번 밀리기 시작하면 수렁에 빠져든단 말이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
“이 자식이 또 말을 안 듣네. 너, 사람 자꾸 미치게 만들 거야!”
“인마, 권투가 어디 작전대로 되는 거 봤어. 이제부터는 내 스타일대로 할 테니까 넌 지켜만 봐.”
“네 맘대로 해. 이 자식아!”
‘때앵.’
의자에서 일어난 최강철의 시선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복싱경기에서 일방적인 시합이 벌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제조건이 있어야 한다.
기량에서 월등한 차이가 있다거나, 강한 주먹으로 상대를 그로기에 몰아넣거나, 상대가 전의를 상실하는 등의 전제조건 말이다.
복싱경기는 그런 것이다.
일방적인 시합으로 끌고 가기 위한 노력이 먹혀들었을 때 결국 KO란 결과가 나타난다.
최강철은 링의 중앙으로 나간 후 달려드는 바스케스의 전진을 사이드로 피하며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레프트 잽을 던졌다.
“쉬익, 쉬익.”
독사의 혓바닥처럼 넘실거리며 날아간 레프트 잽이 바스케스의 안면을 흔들어 놓고 뒤로 빠졌다.
연속되는 레프트 잽.
본능.
바스케스의 펀치가 나오기 직전에 터진 정교하고도 날카로운 레프트 잽의 위력은 적의 공격을 차단하는데 특효다.
적을 중앙에 가두고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돌며 잽을 던지던 최강철의 몸에서 폭발적으로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날아갔다.
계속되는 레프트 잽을 맞던 바스케스가 강력한 양 훅을 터트렸을 때였다.
훅은 스트레이트보다 느리다.
강력함으로 따진다면 훅의 위력이 더 뛰어났겠지만, 스피만 놓고 본다면 최단거리를 확보한 스트레이트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다.
“콰앙!”
훅을 뚫고 들어간 최강철의 오른쪽 스트레이트가 바스케스의 안면에 작렬했다.
불시에 터진 공격이었기에 그만큼 충격도 컸을 것이다.
라이트 스트레이트가 터진 순간 바스케스의 신형이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마, 번개에 얻어맞은 기분이겠지.
기습에 당한 바스케스가 엉덩방아를 찧고 캔버스에서 나뒹굴다가 일어서는 게 보였다.
머리를 흔들고 일어서는 놈의 표정에서 분노가 줄기줄기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습에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충격은 그리 크지 않아 보였다.
양훅이 나오는 순간을 이용하여 펀치의 스피드에 우선을 두어서 완전한 타이밍을 맞추지 못했다.
카운터 8에 일어난 바스케스가 시합 재개를 하는 레프리의 신호를 받자마자 미친놈처럼 덤벼들었다.
여전히 강력했고, 여전히 난폭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최강철은 전문가들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 말하는 레프트 잽을 꺼내 들어 놈의 공격을 제지했다.
그가 장착한 방어기술들은 바스케스가 쉽게 뚫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2라운드에서 데미지를 받았음에도 대부분 펀치는 전부 피했을 만큼, 최강철의 방어기술은 완벽에 가까웠다.
무차별적인 공격들을 바늘 끝처럼 미세한 차이로 피해내며, 최강철은 연속해서 잽을 바스케스의 얼굴에 터트렸다.
무서운 건 잽이 아니다.
잽은 선제공격이었고 날카로운 레프트 잽이 안면에 적중되는 순간 여지없이 날아가는 라이트 스트레이트와 양훅의 콤비네이션이었다.
최강철은 비슷한 패턴을 유지한 채 바스케스의 전신을 난타하며 링을 빙빙 돌았다.
이성일이 제시한 두 번째 전략인 아웃복싱과 첫 번째 전략인 강력한 접근전의 중간 형태.
뒤로 물러서지 않은 채 끝없이 외곽을 돌며 바스케스를 링의 중앙에 가둬놓는 전략이었다.
‘파앙, 팡, 팡… 바바팡!’
우리에 가둬 놓은 맹수를 창으로 때려잡는 것처럼 최강철의 펀치들이 바스케스의 전신에 무차별적으로 날아갔다.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건 안다.
하지만, 이것은 사전작업에 불과하다.
너의 생명을 잘근잘근 잘라내어 숨이 콱콱 막히도록 만들어 줄 테니 어디 막을 수 있으면 막아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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