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환생-237화 (237/308)

[237] 링의 난폭자 - 7

“갈까?”

“가자.”

이성일이 들어 와 고개짓을 하자 최강철이 탁자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오늘.

전 세계 복싱팬들이 오랫동안 기다리며 가슴을 설레었던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이 오른다.

최강철 일행이 호텔방에서 빠져나와 로비로 내려오자 로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영웅의 출전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허리케인의 승리를 바랐기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사람들의 환호는 호텔 밖에서도, 경기장에 도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는 곳은 숨 막힐 정도의 긴장과 흥분으로 가득 찼고 보는 사람들의 정신을 전운 속으로 몰아갔다.

이종엽과 윤근모는 자료를 책상에 올려놓은 채 중계방송의 시작을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마어마한 인파.

특설링의 규모를 늘렸기에 사방이 온통 관중들로 들어차 있었다.

이것 또한 최강철이 만들어 낸 또 다른 현상이다.

아무리 빅 이벤트라 해도 명망 있는 인사들은 메인 오픈게임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입장하지 않았는데 그 관례를 최강철이 깨뜨렸다.

이미 시저 팰리스 호텔은 관중들로 가득 들어차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모습이 전쟁터에 나온 전사들처럼 느껴졌다.

양쪽으로 나뉘어 함성을 지르는 관중들의 모습이 적장을 때려잡기 위해 일기토로 나서는 장군들을 응원하는 병사들의 모습과 흡사했다.

“정말 대단한 인파군요.”

“그러게 말일세. 내 평생 이런 인파는 처음 보는구만.”

“만석이나 늘렸다더니 굉장합니다. 끝이 안보여요.”

이종엽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 관중들의 모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수많은 복싱중계경험이 있었으나 이런 광경은 처음이다.

“여기도 여기지만 지금 한국은 난리가 아니라고 하더군. 광화문에 사람들이 20만이나 몰렸다잖아. 엄청난 건 그쪽이 더 하다고. 어제 뉴스에 전국적으로 합동 응원하는 숫자가 200만은 될 거라고 하던데 오늘 모인 숫자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모양이야.”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런 쪽에서는 부족했었는데 최강철로 인해 국가의 기운마저 변한 것 같습니다.”

“영웅이니까. 최강철이 챔피언에 등극하고 나서 5년 동안 대한민국은 많이 변했어. 사람들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배어나왔고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지. 정치와 재벌들만 변한다면 우리나라는 정말 잘 살게 될거야. 국민들이 변했으니 그들도 변해야 할 텐데 왜 아직 그 모양인지 모르겠어.”

“저도 그게 걱정입니다. 그래서 이 경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최강철이 더 버텨줘야 해요.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신감이 완벽하게 정착될 때까지 최강철이 견뎌줘야 합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전 이런 경기가 벌어질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서 미칠 지경이에요. 조금 편한 상대들과 싸우면서 안전하게 가도 될 텐데 최강철은 언제나 편한 길을 가지 않잖아요.”

“그게 최강철의 마력 아닌가. 편한 길을 걸어왔다면 그가 대한민국의 영웅이 되었겠어. 최강철의 도전의식과 불굴의 투지. 그것이 전세계 복싱팬들에게 존경심을 심어준거야.”

윤근모가 비어 있는 링을 바라보며 먼 눈길을 던졌다.

그렇다.

프로스트의 시처럼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헤쳐 나가는 최강철의 도전정신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그를 향해 환호를 보냈다.

얼마나 힘든 길이었단 말인가.

그럼에도 최강철은 불굴의 투지로 그 험한 길들을 당당히 헤치며 이 자리까지 걸어왔다.

“이번에도 이겨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길 바라야지.”

“바스케스, 그 놈의 난폭성이 걱정됩니다. 새로운 유형이잖아요.”

“최강철도 이제 31번이나 싸웠어. 그 동안 비슷한 유형의 선수들과 싸운 경험도 있었지. 하지만, 자네말대로 바스케스 이 놈은 레벨이 다른 놈이야. 그래서 걱정이 되긴 해.”

“그래도 언론에선 최강철이 전초전에서 바스케스를 박살냈다고 평가했잖아요?”

“그냥 하는 말에 불과해. 입씨름정도 가지고 언론에서 떠든 이야기일 뿐이야. 진짜는 링에 올랐을 때지. 최강철이 바스케스의 난폭한 접근전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중요해. 다른 선수처럼 기세에서 밀린다면 고전을 면치 못할 거야.”

“휴우, 살 떨리네요.”

“지켜보자고. 그 동안 잘 해왔으니 이번에도 대비책을 준비하지 않았겠어?”

이원중계방송.

위성생중계를 맡고 있는 MBC는 물론이고 KBS까지 아침부터 전국의 반응을 살피면서 정신없이 움직였다.

대한민국 전체가 살아서 꿈틀거렸다.

12월의 추위도 대한민국 국민들의 열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광화문에 20만의 인파가 몰렸고 잠실야구장과 주요광장에 몰린 서울인구만 30만이 넘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건 붉은 색 불사조가 새겨진 푸른 색 깃발과 손수건이었고 젊은이들의 이마에는 두건이 둘러져 있었다.

“환장하겠군, 점점 늘어나는 것 같지 않냐?”

“그런데요. 뒤쪽에서 계속 들어옵니다.”

한정유의 질문에 카메라 기사 정문기가 대답했다.

MBC 취재기자인 한정유는 이곳에 취재팀을 이끌고 아침부터 자리를 잡았는데 추운날씨로 인해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대단하다.

이전에도 광화문에 샤람들이 몰린 적이 있었으나 이번 규모는 사상최대의 인파였다.

“오늘 기온 어때. 카메라 괜찮아?”

“이제 영상으로 올라갔습니다. 옷을 든든히 입혀 놔서 괜찮아요.”

“15분 있다가 다시 송출해야 되니까 준비해. 원기자 사람들 수배 해 놨지?”

“예, 3명 준비해 놨습니다.”

후배기자인 원창호가 자신있게 대답하자 한정유의 시선이 자신들과 반대쪽에서 취재하고 있는 KBS쪽을 바라보았다.

그들도 고생이다.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영상과 인터뷰를 계속 본부로 송출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시합은 1시간이나 남았기 때문에 조금 더 고생을 해야 한다.

동병상련.

얼어 있는 입에서 허연김을 쏟아내며 떠들고 있는 여자기자의 모습이 불쌍하게 여겨졌다.

내 모습도 저 여자에게는 그렇게 비춰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정유의 시선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천천히 움직였다.

이곳에는 국내 방송사만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대한민국의 응원문화가 알려지며 전세계에서 수많은 특파원들이 취재하기 위해 광화문에 집결한 상태였다.

몰려든 인파도 장관이었지만 응원단을 취재하기 위해 새까맣게 빌딩 옥상에 매달려 있는 기자들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는 장면은 아니었다.

호텔에서 경기장까지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철호가 이끄는 경호팀이 앞뒤에서 호위를 했지만 그들의 뒤를 따르는 차량들을 막지는 못했다.

최강철이 탄 차를 따라 이십여대의 방송차량이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상단부가 오픈된 차량에서 최강철의 차량을 촬영하고 있었는데 생중계로 전세계에 화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기자들의 집요한 취재를 보면서 최강철은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라스베가스의 불빛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로마시대의 검투사는 목숨을 건 결투를 하기 위해 경기장으로 나서기 전 하늘에 있는 절대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대신 동료들의 손을 굳게 잡으며 서로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허망한 누군가에 대한 기대보다 자신과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동료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인간은 약하다.

자신의 힘으로 뚫을 수 없는 장벽에 가로막혔을 때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변하게 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죽음을 각오했을 때다.

인간의 공통점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점점 더 추악해지고 나약해 지지만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경이적인 힘을 발휘한다.

최강철이 복싱을 하면서 수많은 적들을 꺾어 온 것은 바로 이 힘이 원천이다.

복싱을 하는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던졌다.

지금까지 상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지 않은 것은 링에 서는 순간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성일아, 아직 애 소식 없냐?”

“있다.”

“있어?”

“그래, 3달 넘었단다.”

“인마, 그런데 왜 말을 안했어?”

“시합 끝나고 말할 생각이었어. 지금은 네 시합이 우선이다.”

“지랄한다, 링에 올라가는 놈한테 실업자 타령한 놈이 누군데 지금와서 엉뚱한 소리야. 아들이래?”

“안 가르쳐 준단다. 아무래도 딸인 모양이야.”

“딸이 좋아. 아들 놈은 키우는 재미가 없어.”

“아직 애도 없는 놈이 별 소릴 다하네. 넌 이 자식아 그럴때마다 재수 없어.”

“크크....정말이다. 너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아들놈들은 날 때부터 부모 속 썩이는 재주를 가지고 세상에 나와.”

“어이구, 지랄. 경기장 보인다. 이 자식아.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이제 긴장 좀 해. 우리 준비한 거 꼭 지켜야 해. 네 맘대로 하지 말란 말이야!”

“난 언제나 에프엠이야. 아주 착한 모범생이라고. 언제 내가 복싱하면서 내 마음대로 한 적 있어?”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네.”

“걱정하지 마. 이번에도 멋지게 해 치울 테니.”

이성일이 농담을 끊어 버리며 큰소리를 치자 최강철은 빙그레 웃으며 눈앞으로 다가온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함성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군중들의 함성소리는 전사의 피를 끓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다.

적의 심장을 칼로 뚫어내길 바라는 함성은 전사의 영혼을 뒤 흔들어 불굴의 투지와 잔인한 본성을 이끌어낸다.

쥐어진 주먹을 감싼 밴드의 압박감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이 감촉이 좋다.

상대에게도 이 감촉이 있겠지만 자신은 이 묵직한 감촉을 너무나 사랑한다.

복도를 걸어 나갈수록 관중들의 함성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아직 경기장에 들어서기 까지는 꽤 많은 거리가 남아있었지만 관중들은 그의 출전을 간절하게 기다리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슬쩍 돌아보자 뒤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경호하기 위해 밀착마크하고 있는 정철호의 경호팀은 물론이고 방송카메라와 기자들까지 거의 30여명이 넘었다.

드디어 문이 열리며 환한 불빛이 눈을 자극하며 다가왔다.

그리고 터지는 폭탄같은 함성.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던 관중들은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굉음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들어주며 거침없이 링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 이 순간.

당신들은 진정한 남자의 기세가 무엇인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저 새끼, 눈깔 봐라. 쟨 왜 눈깔이 칙칙하지?”

이성일이 이쪽을 노려보는 바스케스의 시선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눈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오금이 저려왔기 때문이었다.

독사의 눈빛을 보는 것 같다.

시선에 담겨 있는 살기와 적을 제압하는 기세는 단연코 지금까지 상대해 온 자들 중에서 압도적이었다.

충분히 열 받은 모습이었다.

기자회견장에서의 분노가 아직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놈은 자신을 향해 계속해서 시선을 던지며 분노를 숨기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기세를 제압하기 위한 수작으로 보였다.

그런 놈을 향해서 최강철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분노한 놈에게 최적의 대응은 가소롭다는 미소가 가장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

지겹도록 지루한 행사들이 지나가면서 드디어 레프리가 양선수를 링의 중앙으로 불러 모았다.

최강철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채 뚜벅뚜벅 바스케스를 향해 다가갔다.

자신을 노려보는 놈의 시선을 향해 입술 끝을 끌어올리며 마주 푸른광선을 뿜어냈다.

네 눈깔에서 나오는 살기로 나를 어쩌지는 못해.

그러니까, 바스케스 그 눈깔 치워라. 찢어 버리기 전에.

뜨거운 숨결을 뿜어내며 머리를 앞으로 내미는 바스케스의 대가리를 최강철이 글러부로 슬쩍 가로막았다.

그런 후 레프리를 바라보았다.

“심판. 이 자식 대가리 자꾸 내미는 거 안보입니까. 안 말리면 내가 이 자식 대가리를 꺾어 버릴 거요!”

최강철이 으르렁대자 놀란 레프리가 주의사항을 설명하다가 급히 두 선수를 떼어 놓았다.

득의의 웃음이 그의 얼굴에 떠 올랐다.

코너로 돌아가는 바스케스의 얼굴에 담긴 건 분노보다 황당함이 훨씬 더 컸기 때문이었다.

“강철아, 느낌 어때?”

“괜찮습니다.”

“처음이 중요하다. 알지?”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먼저 한 방 날렸습니다.”

“언제?”

“저 자식이 자꾸 대가리를 들이 밀어서 레프리한테 대가리를 뽑아 놓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저 자식, 황당한 모양이더군요.”

“이 자식아. 그건 나도 황당하다.”

“관장님이 그랬잖아요. 처음부터 기를 펴지 못하게 죽여 버리라고.”

“그래, 잘 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너 같이 미친놈한테.”

“빨랑 끝내고 관장님 집으로 갑시다. 오늘은 기어코 형수님이 잘 하는 김치찌개를 얻어먹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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