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링의 난폭자 - 6
최강철은 호텔 창밖으로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언제까지 복싱을 할 수 있을까.
복싱은 새로 돌아 온 삶에서 유일한 기쁨이었고 삶의 원천이 되어 그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게 만들었다.
하지만, 점점 많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이제 서서히 복싱에서 물러날 때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사람들이 제 2차 세계대전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마지막 승자가 되는 순간이 바로 그 때가 되지 않을까.
아쉽지만 사람은 물러날 때를 알아야 된다고 배웠으니 후회되지 않도록 마무리를 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을 후회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3일 앞으로 다가온 바스케스와의 시합에서 이겨야 한다.
바스케스.
헌즈와 레너드와는 또 다른 유형의 강자다.
세상에는 수많은 강자들이 존재하지만 바스케스는 특별한 유형의 강자였다.
기세만으로 상대를 압박해서 시합을 승리로 이끈다는 것은 그가 지닌 선천적인 기운이 그 만큼 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기세는 자신에게 통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루시퍼에게 받은 강철같은 심장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최강철의 경기가 다가오자 초긴장 속에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총선에서 최강철이 대한정의당의 편에 선 것 때문에 반대쪽에 서며 그를 욕하고 폄하했던 사람들마저 눈이 빠지게 그의 시합을 기다렸다.
정치는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잡아먹는 괴물이었으나 그 괴물마저 최강철이 그들에게 주는 흥분과 기쁨을 거부하지 못했다.
이번 경기를 중계하는 MBC는 라스베가스로 파견된 중계팀과 별도로 최강철에 관한 특집방송을 계속 내보냈다.
축제를 위한 사전행사다.
방송사의 생명은 광고였고 최강철에 관한 특집방송은 본 게임에 비할바는 아니었지만 방송사에 커다란 이윤을 창출해주었기에 수시로 특집방송이 마련되었다.
오늘 MBC가 마련한 것은 두 선수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경기에 대한 예상을 하는 것이었다.
윤문호 교수는 아들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서 특집방송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강철은 졸업을 했음에도 수시로 전화를 해 왔고 시간이 날 때마다 찾아와 같이 식사를 했다.
오래 된 인연.
수많은 제자들과 인연이 지속되고 있었으나 최강철 만큼 끈끈한 인연을 유지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가 더욱 특별한 것은 슈퍼스타이면서도 자신을 은사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대하는 정성 때문이었다.
“아버지, 전문가들이 또 박빙의 승부가 될 거라고 예상하네요. 바스케스가 정말 대단하긴 대단한가 봐요.”
“형, 도박사들도 5:5로 점친대.”
“정말 가슴이 떨려, 절대 판정으로 가지는 않을 거라는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야.”
아들들이 텔레비전을 보면서 마구 떠들었다.
아들을 키워 본 사람은 안다.
머리가 크면 아들들은 자기방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식사시간에도 얼굴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최강철로 인해 대부분의 가정에서 아버지와 아들들의 대화가 줄기차게 오고 갔다.
지금의 윤문호 교수 집처럼.
“그래도 우리 강철이가 이길 거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듀란, 헌즈, 레너드전에서 전문가들이 언제 강철이가 유리하다고 한 적 있었니? 그래도 강철이가 이겼다. 강철이는 패배를 모르는 친구야.”
“그렇죠. 이길거에요. 당연히 이길 겁니다.”
윤문호교수의 확신에 찬 대답에 큰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처럼 최강철은 언제나 유리하지 않다는 전문가들의 평가를 완벽하게 뒤집으며 언제나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 왔다.
어느새 대학 졸업반이 된 막내아들이 나선 것은 둘째아들마저 두 사람의 의견에 당연하듯 맞장구를 칠 때였다.
“이번에 바스케스를 이기고 내년에 휘태커와 붙었으면 좋겠어요. 최강철 선수가 휘태커까지 꺾으면 전대미문의 사건이 될 거에요. 그렇지 않아요?”
공식계체량 행사가 끝나고 기자회견시간이 다가 왔을 때 최강철은 최대한 편한 복장으로 기자들 앞에 나섰다.
먼저 나와 있던 바스케스는 정장차림에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 입었음에도 전혀 단정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가 지니고 있는 난폭성이 정장차림을 뚫고 무자비하게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문을 열고 의자로 다가갈 동안 바스케스는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최강철을 노려보았다.
그동안 언론에서는 양선수 의 말을 연일 보도하며 복싱팬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치열한 신경전.
누구도 상대의 말에 그냥 있지 않았고 기세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거친 단어들을 내뱉었다.
최강철은 바스케스의 시선을 받으며 성큼성큼 다가가 손가락을 펴들고 그의 눈을 겨냥했다.
“시선 깔아 새끼야. 확 눈깔을 뽑아버린다.”
도발이다.
그리고 그 도발은 바스케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바스케스가 벌떡 일어나며 내밀어진 손가락을 향해 다가오려 했으나 이미 최강철은 손가락을 거두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너도 앉아라, 기자들 앞에서 추태부리지 말고.”
벌떡 일어섰던 바스케스가 최강철의 이어진 말에 거품을 물었다.
이 개새끼가!
도발을 먼저 해 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의자에 앉아 빙글거리며 웃고 있자 그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럼에도 이를 악물고 겨우 참으며 의자에 앉았다.
놈의 얼굴에서 자신에 대한 경멸이 담긴 미소를 발견했지만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경호원들이 다가와 놈과의 사이를 철통처럼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시작되었다.
기자들은 여전히 자극적인 질문으로 둘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서로에 대한 증오심을 열심히 부추겼다.
“두고 보시오. 허리케인, 저 놈의 면상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겠소.”
“시합을 언제 끝낼 겁니까?”
“방금 말한 것처럼 실컷 두들겨 팬 후 저 놈의 얼굴이 엉망으로 변했을 때 끝낼 생각이오. 그렇게 만들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테니 지켜보시오.”
아주 작정한 모양이다.
바스케스는 그동안 언론을 통해 쌓여 왔던 분노를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그냥 끝내지 않겠다는 그의 발언은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잔인하개 승부를 끌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최강철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바스케스가 난폭자라는 건 과장된 겁니다. 약한 선수들에게 잔인한 짓을 해 온 건 짐승이나 다름없는 짓이었습니다. 이번 시합에서 저는 그가 동네강아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드리겠습니다.”
“허리케인은 몇 라운드에 경기가 끝날 것으로 봅니까?”
“저 놈이 강아지처럼 온순하게 변할 때 끝낼 생각입니다.”
“이 개자식아!”
듣고 있던 바스케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경호원들을 밀치며 최강철에게 접근했다.
엄청난 완력.
다섯명의 경호원들이 그를 제지했지만 주춤주춤 뒤로 밀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최강철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여러분도 지금 보시는 것처럼 저 놈은 여기가 어떤 자린지도 모르는 미친개에 불과합니다. 나는 저런 자가 히어로에 포함되었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고의적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의 분노를 자극하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다.
다른 놈들은 어떻게 대응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의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맹수의 이빨에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허리케인에게 난폭자의 기세는 한낱 어린애 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이다.
“크크크....아우우....”
“뭐야, 그건?”
“너무 즐거워서. 난 이런 순간을 볼 때마다 온 몸에서 전율이 솟구쳐 올라. 너는 안 그래?”
“기자가 너무 즐기면 좋은 기사를 쓰지 못해. 그만 해라. 나도 옮을라.”
토머스가 기괴한 웃음을 마구 흘리며 즐거움을 참지 못하자 잭슨이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기자회견장을 나서는 최강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괴물이다.
지금까지 바스케스와 대결한 놈들치고 이렇게 그를 흥분시킨 선수는 처음이었다.
천하의 허리케인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것도 단순한 몇 마디로 바스케스와의 심리전에서 완벽하게 이겼으니 전초전은 허리케인의 승리다.
“토머스, 난 허리케인한테 걸란다.”
“내기가 안 되겠구만. 나도 허리케인한테 걸 거니까.”
“음....다른 놈들을 꼬셔봐야겠군.”
“가자.”
“어딜?”
“허리케인과 마지막 인터뷰를 따야지. 따라 와.”
“정말이냐?”
“그럼 내가 지금 농담하게 생겼어. 시합이 코 앞이라서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가 될 거야.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니까 술이나 사.”
“땡큐. 술이야 코가 삐뚫어 질 때까지 사 줄테니 무조건 데려가기나 해.”
잭슨이 기자들을 뚫고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토머스의 뒤를 맹렬하게 따라 움직였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남은 것은 두 선수의 전쟁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지막 인터뷰를 딸 수만 있다면 데스크의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될 것이다.
“토머스, 그런데 이번엔 왜 뉴욕이 아니지?”
“거긴 춥잖아. 최강철의 홈링이 거기라도 겨울에 굳이 뉴욕에서 시합할 이유가 없는 거 아냐?”
“그렇긴 하지. 인터뷰에서 휘태커와의 시합에 대해 물어봐도 될까?”
“그런 나중에....지금은 눈앞의 전쟁만 생각하자고.”
경기 전날이 되자 라스베가스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서막인 최강철과 바스케스의 전쟁은 시저 팰리스 호텔 특설링에서 벌어졌는데 이번엔 특설링의 규모를 확대해서 3만석을 확보한 상태였다.
무려 만석이나 늘렸기 때문에 맨 뒷좌석에서는 링에서 움직이는 선수들의 모습이 개미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번 시합의 입장권은 3달전에 완전히 매진되었다.
일반 입장권으로 팔린 건 불과 7천장이었고 나머지는 이번 시합을 후원한 세계 유수의 기업들에게 돌아갔다.
라스베가스로 수많은 인사들이 몰려든 것은 그 때문이다.
기업들은 연예계와 스포츠스타, 정치인, 관료와 경제계의 인사들에게 초청장을 뿌렸기 때문에 라스베가스는 각 분야의 명망 있는 인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마이클 델이 최강철을 찾아 온 것은 그가 직접 저녁식사에 초대했기 때문이었다.
시합 전날 누군가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관례까지 깨뜨리며 최강철이 마이클 델을 초대한 것은 시합이 끝나면 그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없을 거란 판단이었다.
호텔 식당으로 그를 찾아온 마이클 델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초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델, 어서와. 오는데 어렵지 않았어?”
“아니, 전혀. 매번 시합에 초청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그런데 시합전날 갑자기 웬일이야?”
“너한테 할 말이 있어서.”
“뭐지?”
“일단 밥부터 먹고 말하자. 먼저 말하면 체할지 모르거든.”
최강철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 온 종업원에게 음식을 주문했다.
마이클 델과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거의 10년 가까웠던 세월동안 두 사람이 쌓아 온 우정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최강철의 표정이 슬그머니 변한 것은 마이클 델의 포크가 식탁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델, 자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불렀어.”
“미안한 말?”
“난 이제 델 컴퓨터에서 손을 완전히 뗄 생각이야. 어차피 지금까지 어떤 경영권 행사도 하지 않았지만 이 기회에 자네에게 자유를 줄 생각이네.”
“주식을 처분하겠다는 뜻이군.”
“맞아. 그래서 다음주부터 매도에 들어갈 생각이라네.”
"이유는?"
"돈이 필요 해."
“허리케인, 지금 델 컴퓨터는 최고의 성장률을 거듭하고 있어. 일년 매출액이 200억 달러가 넘을 정도란 말일세. 이렇게 회사가 잘 나가는데 왜 주식을 처분하려는 거지. 난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아.”
“나한테는 몇군데 블랙홀이 있는데 돈이 만만치 않게 들어간다네.”
“좋은 일인가. 그렇다면 같이하고?”
“블랙홀이라고 그랬잖아. 블랙홀은 아주 많은 것들을 잃게 만드는 무서운 존재야. 자네가 끼어들 일이 아닐세.”
최강철이 고개를 천천히 젓자 이미 굳어져 있떤 마이클 델의 표정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
그 역시 이젠 최고경영자의 포스가 시시때때 흘러나온다.
굳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최강철의 의도가 무엇인지 즉각 알아 챌 만큼 뛰어 난 능력이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상황상으로는 바랄나위 없이 좋은 것이었음에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델 컴퓨터를 운영고 있는 CEO의 측면에서 봤을 때 거대지분을 가지고 있는 최강철의 존재는 분명 껄끄러운 것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경영에 간섭을 하지 않았음에도 지배구조의 일각이 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최강철이 주식을 매도한다면 그런 상황이 해결된다.
그럼에도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최강철과의 인연이 너무나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나에게 해줄 말이 있나?"
"앞으로 델 컴퓨터에는 커다란 위기가 서서히 다가올거야. 급변하는 시장 상황이 델 컴퓨터에게 심각한 위험요소로 작용하게 될걸세."
"으......역시 그 때문이었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델의 표정이 슬쩍 어두워졌다.
거대기업의 CEO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이미 자신의 연구소에서는 시장상황을 분석하며 빠르게 타개방안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안색이 어두워진 건 최강철이 또 다시 보여준 놀라운 식견과 판단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최강철은 그의 얼굴을 보면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돈이 필요했을 뿐이야. 마이클, 내가 봤을때 자네라면 충분히 그 위험을 제거하며 회사를 성장시킬 수 있을걸세. 나는 자네가 작은것을 버리고 큰 것을 봤으면 좋겠어. 컴퓨터생산에 안주하는 순간 델의 생명은 빠르게 단축될테니 새로운 눈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돼. 내말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어. 우리도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중이었니까. 그 충고 반드시 기억하지."
"역시 마이클이야."
"허리케인, 델 컴퓨터는 자네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막상 자네가 델에서 떠난다고 하니 너무나 서운하군. 하지만, 나는 자네를 믿는다네. 자네가 하는 일은 어느 것 하나 허술한 것이 없었지. 다만, 한 가지 약속을 해 주게.”
“뭔가?”
“나와의 인연을 잊지 말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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